帝國大學/帝国大学.
Imperial University.
제국대학령 제 1조제국대학은 국가의 수요에 응한 학술 기예를 가르치고 또한 그 학문의 깊은 경지를 연구하는 데 목적한다.
구 제국대학 | |||||||||||||||
일본소재 | 도쿄제국대학 | 교토제국대학 | 도호쿠제국대학 | 규슈제국대학 | 홋카이도제국대학 | 오사카제국대학 | 나고야제국대학 | ||||||||
식민지 소재 | 경성제국대학 | 대북제국대학 |
1 개요
일제가 1886년부터 1939년에 걸쳐 일본 본토 (7개)와 당시 식민지 지역인 조선의 경성부(서울특별시)과 중화민국의 타이베이 (각 1개)에 건립한 국립대학.
당시에도 일본의 전국구 엘리트만이 갈 수 있는 킹왕짱 대학들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
2 역사
제국대학의 모체는 1877년 세워진 도쿄대학으로, 1886년 반포된 제국대학령에 따라 도쿄대학을 제국대학으로 개칭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제국대학의 수가 늘어나면서 구 제국대학은 도쿄제국대학이 되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기 전까지 세운 제국대학은 다음과 같다.
2.1 7+2
2.1.1 7
간단히 원래 이름에서 제국만 빼면 현재 이름이다.
- 도쿄(東京)제국대학 : 1886년 도쿄대학을 제국대학령에 따라 제국대학으로 개칭, 약칭 도다이(東大). 현 도쿄대학.
- 교토(京都)제국대학 : 1897년 설립, 교토제국대학의 설립으로 제국대학은 도쿄제국대학으로 개칭, 약칭 교다이(京大). 현 교토대학.
- 도호쿠(東北)제국대학 : 1907년 설립, 센다이 소재, 약칭 호쿠다이(北大). 현 도호쿠대학이며 현재 약칭은 도호쿠다이(東北大).
- 규슈(九州)제국대학 : 1911년 설립, 후쿠오카 소재, 약칭 규다이(九大). 현 규슈대학.
- 홋카이도(北海道)제국대학 : 1918년 설립, 삿포로 소재, 약칭 가이다이(海大). 홋카이도대학. 현재는 도호쿠대학이 아닌 이쪽이 호쿠다이(北大)라고 불린다.
- 오사카(大阪)제국대학 : 1931년 설립, 약칭 한다이(阪大). 현 오사카대학.
- 나고야(名古屋)제국대학 : 1939년 설립, 약칭 메이다이(名大). 현 나고야대학.
2.1.2 2
- 게이죠(京城, 경성)제국대학 : 1924년 설립, 1946년 해체. 약칭 죠다이(城大). [1] 보통 서울대학교의 전신으로 여겨지고 있으나[2], 공식적으로는 연속성이 부정되고 있다. 경성제국대학 항목 참조.
- 다이호쿠(臺北, 타이베이)제국대학 : 1928년 설립, 1945년 개칭. - 현 국립대만대학.
이들 제국대학은 일본의 패전 이후 1947년 제국대학령의 폐지로 제국대학이라는 이름이 빠져 현재의 대학명이 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의 경우 1946년 미군정의 국립종합대학안으로 해체, 다른 8개 전문학교와 합쳐져 서울대학교로 재구성되었으며, 타이호쿠제국대학은 1945년 국립대만대학으로 개칭하였다.
3 평가
현재 일본의 국립대학은 90여개에 달하지만 그 중에서도 최정상급 학교라 할 수 있다. 제국대학이 아닌 국립대 중에서 히토츠바시 대학은 도쿄대를 제외하면 교토대와 맞먹는 최정상급이다. 물론 규모가 일반 대학의 1/4 수준에 불과하다는 약점은 있다. 히토츠바시대학의 경우, 구제 시절에도 제국대학과 맞먹는 명문 상과대학이었다. 도쿄공업대도 공학부는 도쿄대 다음인 최정상급 대학이다. 오차노미즈여대(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의 후신)의 경우 자연과학계열은 홋카이도대 자연과학대 수준은 된다.
사립대의 경우에도 제국대학과는 별도로 와세다, 게이오의 경우 사립대최고의 대학이란 인식이 커서 도쿄나 교토, 오사카, 나고야 같은 최정상 제국대를 제외하면 비교가 애매하다. 한국의 대학입시기준표는 국립대, 사립대 전부 뭉쳐서 표기되지만, 일본은 배치기준표가 국립대, 사립대 별도로 되어 있다. 이유는 센터시험이다. 국립대는 센터시험을 반영하지만 사립대는 센터시험을 반영하지 않는 학교도 있기 때문. 혹여 반영해도 본고사 위주이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의 단순비교는 애매하다는게 결론이다. 그리고 사립대는 일반적으로 수험 과목수가 국립대보다 적다. 물론 어느대학 어디학부이냐에 따라 다르다. 명문사립대라고 반드시 본고사 과목수가 많은것도 아니고... 그리고 또하나 염두해야 할것은 일본은 국토가 좌우로 긴편인지라 지방거점 명문 대학을 가는 편이지, 한 단계 높은 대학을 갈려고 먼곳에서 동경까지 오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실제로 가장 데이터의 신빙성이 높은 일본입시학원인 카와이쥬쿠의 배치기준표를 보면 이과기준으로 동경대 쿄토대 동경공업대 오사카대 나고야대 이하 대학은 학부에따라 점수가 엎치락 뒤치락이라 입시데이터 기준으로는 어느대학이 더 좋은지 잘 모른다. 그냥 오챠노미즈여대, 토호쿠대, 츠쿠바대, 큐슈대, 고베대, 홋카이도대는 비슷하다고 보는게 낫다. 큐슈에사는 사람이 아주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한 토호쿠대 갈 실력이면 토호쿠대 가지 않는다. 그냥 큐슈대 가지(...)
그리고 도쿄대와 교토대는 확실히 소케이가 넘볼 수 없게 일본 전체 1, 2위를 수십년간 변함없이 랭크되어있다고 보면 된다. 다만 도쿄에서 취직하게 된다면 도쿄,교토대를 제외한 구제국대는 게이오와세다에 그리 앞서지는 않는다고. 2008년 노벨상 수상자 중에서 나고야대 출신이 있는걸 한국의 기자가 '지방 명문'이라 칭하면서 어익후 지잡에서 용났네란 뉘앙스로 기사를 작성했는데 이건 기자의 무식함을 자랑한 케이스. 한국의 이름있는 대학들은 포항공대, 카이스트를 제외하면 대부분 수도권 집중이지만 일본은 지역별로 넓게 분포되어있는 구도이다. 서울대에도 없는 노벨상 수상자가 있다는 시점에서 '지방 명문' 운운하는건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그리고 2014년에 또다시 반복되었다.#
대체적으로 이과는 전부 괜찮다. 다만 게이오 의대는 보통 편차치가 제국대학 의대와 비슷한 편. 와세다는 물론 의대 그런 거 없다. 하지만 이는 게이오 의대가 도쿄에서 쌓아온 의대 인맥으로 인한 것이다. 사실 어마어마한 등록금[3] 의 압박 때문에 게이오 차고 근처 국립의대 가는 게 흔하다. 문과 일부는 와세다 정치경제학부나 게이오 법학부에 약간 밀리기도 한다고 한다. 물론 나고야나 홋카이도 같은 도쿄 밖 제국대학 이야기고, 토다이 쿄다이는 계열을 불문, 와세다고 게이오고 다 씹어버린다(...) 특히 이공계쪽 국립대와 사립대간 차이는 넘사벽이라서 일본 고등학생 이공계 선호도 순위에서 제국대학과 도쿄공업대나 츠쿠바대(구 도쿄고등사범학교) 같은 주요 국립대가 상위권에 포진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한국에서 카이스트가 정부지원금 마구 퍼서 받는것처럼 일본 국립대 공대가 일본 정부 지원을 엄청 받는다. 토호쿠 공대 재료공학 연구기술력은 미국 MIT나 칼텍 못지않은 세계 톱수준이며, 노벨상 수상자까지 배출해냈다. 일본의 국공립대학은 국공립거점연구기관이기도 하기때문에, 정부주도의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그렇기때문에 사립대는 연구원수로 보아도 뒤쳐질 수 밖에 없다.
4 상호간의 관계
구 제국대학 재학생들은 자기네 학교 아니면 다 깔보지만 위에 나온 7+2에 속하면 한 수 높게 봐주는 경향이 있다. 물론 서로 간에는 친한 척 하지만 라이벌 관계. 특히 쿄다이(교토대학)와 토다이(도쿄대학) 간의 라이벌 관계는 꽤 유명하다.
교토대는 도쿄대를
- 전통이 없는 잡놈들이 (교다이의 역사는 143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권력에 빌붙어서 (졸업자 중 대다수가 법조계, 정계, 관계로 진출.)
- 공부도 못한다 (노벨상 수상자 수는 7:5로 쿄토대가 밀린다. 하지만 도쿄대는 2명이 문학상(68년, 94년)이며 한명은 평화상(74년)이다. 교토대는 전부 과학부문. 하지만 도쿄대는 문과쪽을 미는 경향이라 법조,정,관계로 진출한다. 보통 정부의 고위 엘리트 관료하면 딱 '도쿄대 출신' 이라는 이미지. 반면 교토대는 이과가 강한 점도 있다. 어느정도 비슷한 예로 문과만 있는 단과대인 국립 히토츠바시 대학과 이과만 있는 단과대인 국립 도쿄 공업대학이 있다.
...등의 이유로 깔본다고 한다. 그밖에도 자유롭게 사고하고 토론하는 것을 중시하는 학풍을 자랑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도쿄대를 "암기 위주에 교양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녀석들"이라고 까기도 한다. 암기에만 몰두하고 사고력이 부족하다는 측면에 대해서는 도쿄대 불문과 출신의 다치바나 다카시도 그의 저서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에서 인정한 바 있다.
도쿄대는 교토대를 빨갱이에다가 전통 좋아하고 자빠지는 비현실적인 놈들... 정도로 생각해 준다(...)
일본 내부의 학회, 학술회 등은 대략 이들 구 제국대 출신들이 휘어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자기네끼리도 파벌이 복잡해서 암투와 냉전을 벌이지만, 문제는 사립대 출신들은 아예 낄 틈도 안 준다는 점. 그래서인지 역설적으로 사립대 출신 학자들 중 출중한 사람들은 해외로 진출해서 성공하는 경우가 많이 보이는데 반해서, 구 제국대 출신들은 일본 내에서만 지지고 볶는 경향이 있다.
웃기는 점은 국제학회 등에서 보면 일본사립대 학자들은 왕따시키면서도 서울대 출신이나 국립 대만대 출신은 같은 제국대학 출신이라고 은근히 봐주는 경향이 있다. 시골 사촌 동생 취급같은 것.
또한 7개의 제국대학이 모여 매년 전국7대학체육대회(全国七大学体育大会)라는 체육대회를 하는데 2015년 기준 54회를 맞이했다. 43종목의 경기를 치뤄 점수를 합산, 순위가 매겨지며 매년 돌아가면서 대회를 주관하게 된다. 가장 최근 우승 대학은 도호쿠대학.
5 조선인 관련
교토대 관련 특이한 것 중 하나는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에서 유학생들이 많이 건너갔고 심지어 교수까지 한 케이스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경성제국대학과 다이호쿠제국대학를 제외하면 모든 제국대학은 고등학교(구제) 졸업장이 없으면 입학을 허가해주지 않았다. 지금의 상식과 달리 이 당시의 고등학교(구제)는 당연히 일본인이 다니는 인문계 고등학교[4]로, 구 프로이센의 김나지움에 가까운 엘리트 양성 기관이었던 것[5]. 반면 한반도에 존재하던 다수의 학교들은 '실업학교'나 '고등보통학교'[6], 혹은 중학교(구제)[7]이기에 문제가 되었다. 예컨대 마산여고는 마산여자상업학교, 광주일고는 광주고등보통학교, 경복고등학교는 경성제2고등보통학교(경성제2고보, 경복중학교를 거쳐 경복 중,고로 분리되었다.). 당시 조선반도에는 고등학교가 없어서 민족차별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사는 곳에 고등학교가 없는 것은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그것 자체를 민족차별이라 할 수는 없다. 다만 경성제국대학에는 예과가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중학교(조선인은 고등보통학교)졸업자들도 입학할 수 있었다. 자세한 것은 예과생 항목 참조.
다만 몇 가지 바늘구멍 통과하는 듯한 예가 있었다. 대부분 조선 학생들은 전문학교를 졸업한 다음 제국대학으로 진학하는 과정을 밟았다. 사실 윤동주 시인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다음 제국대학으로 진학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동갑내기 사촌이었던 송몽규가 교토 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여 친척들의 비교대상이 되어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일본 본토에 있는 제국대학 중에 조선인 학생들이 많은 학교는 규슈제국대학이었다. 이런 코스를 밟은 여학생도 있었다. 자유 선진당 대표위원을 역임한 이회창씨의 막내이모인 김삼순 여사가 그러하였다. 김삼순 여사는 전문학교(하지만 고등사범학교는 그 중에서도 우월한 지위였다) 과정인 도쿄고등여자사범학교(현 오차노미즈여자대학)를 졸업한 다음 홋카이도제국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하였다.
고등학교를 통해서 제국대학으로 진학하였던 조선 청년들도 적지않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청춘예찬이라는 수필로 유명한 이양하(1905~1963)와 그의 동년배인 권중휘(1905~2003)를 들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교토의 제3고등학교에 진학한 다음 도쿄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대개 마츠야마(松山)고등학교(시코쿠 지방 에히메현 마츠야마시에 있는 구제 고등학교로 현 에히메대학)를 거쳐 교토제국대학에 입학하는 코스를 많이 밟았다고 한다. 마츠야마고는 조선 사람에게 입학 허가를 후하게 내주었던 일본의 고등학교였다. 그 밖에 조선 학생 중 일본의 고등학교를 거쳐서 제국대학으로 입학한 예가 많이 있었다. 이들에게 일본어는 크나큰 장벽이었고 식민지 출신은 거의 넘사벽에 가까운 장애물이었다. 이들은 제국대학에 진학한다는 불굴의 투지를 발휘해 나름의 성취를 이루어낸 ㅎㄷㄷ한 사람들이었다. 일본 사람 조차도 머리 아프게 공부를 해도 들어갈까 말까한 학교를 입학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었다.
교토대학에서는 조선인에게 박사학위를 내준 유일한 일본의 대학이 되었다. 이학부 화학과 이태규 박사와 공학부 화학공학과 리승기 박사가 그 분들이다. 이 두 사람 역시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단 두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은 각각 교토대학 조교수를 지냈으며, 리승기 박사는 독립운동에 연관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태규 박사는 이 경력 때문에 훗날 해방 이후 국대안 파동 당시 좌익계열 학생들에게 친일부역자로 낙인찍혀 숱한 테러를 받는 지경에 이른다. 리승기는 이후 월북, 자신이 1939년 만든 비날론을 공업화했다.
6 식민지의 제국대학
일본은 1924년 식민지인 조선에 경성제국대학을, 1928년에는 대만에 다이호쿠제국대학(대북제국대학)을 설립했다.
식민지의 제국대학 설립은 조선에서 벌어진 3.1 운동의 영향을 받아 식민지가 급속도로 반일본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비교적 온건했던 1920년대의 시대상황과 날로 증가하고 있던 식민지의 대학 진학 수요를 반영한 것이다. 식민지의 유산 계급이 반체제 지식인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포섭의 과정이 필요했고, 더불어서 식민지에 이주한 일본인들의 고등교육기관 진학을 보장하기 위한 대학도 필요했다. 마침 일본 본토에서도 1918년 대학령의 반포로 제국대학 이외의 사립대학의 설립이 자유로워졌고, 1920년 사이토 총독의 총독부령으로 조선인의 유학제한도 완화되었다. 동시에 식민지 지역에 대한 일본의 우월성 과시와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학문적 연구는 부차적인 목적에 해당한다.
그래서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통치전략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한 1919년 바로 조선의 내지화를 위해 일본과 조선의 학제 차별을 폐지하기로 결정하였고, 1920년 12월 임시교육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1922년 2월 제2차 조선교육령을 반포하였다. 이 제2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1923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개교, 25년 본과 개교가 명문화되었다. 당시 1920년대 조선 내에서 일고 있었던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막기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는 것이 과거의 통설이며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 이렇게 서술되어 있지만, 이는 부분적으로만 옳은 서술이다. 당장 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가 출범한 1922년 11월은 제 2차 조선교육령 반포 이후에 해당한다. 민립대학을 설립하려는 것을 방해하려고 조선교육령이 나온 것이 아니라, 조선교육령에 반발해 민립대학 추진이 본격화된 것이다. 일부 논자는 이를 1920년 6월 설립된 조선교육회의 민립대학 설립 결의의 후신으로 간주하여 시간적 인과관계를 뒤집으려 하지만, 이미 무단통치기에도 민립대학 설립에 대한 요구는 꾸준히 나왔다는 점은 간과하고 있다. 일제가 조선인의 민립대학의 설립을 방해한 것은 맞지만,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자극을 받아 즉흥적으로 제국대학의 설립을 결의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식민지 통치전략의 한 단계였던 것이다. 여하튼 개교 시기가 조금 늦춰진 1924년 경성제국대학이 개교하고, 이어 대만에도 영향을 끼쳐 1928년 다이호쿠제국대학이 개교하게 된다. 원래 대만에서는 제국대학을 개교하지 않고 고등학교만을 세울 작정이었지만, 대만 총독과 대만 민정장관이 도쿄까지 올라와서 시위까지 한 끝에 결국 제국대학이 개교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는데, 예과생 항목의 구제 고등학교 부분 참고.
그런데 서울대에서는 자신들의 전신 중 하나가 경성제국대학임을 힘껏 부정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대한 국민 여론도 나쁜데다 명색이 국가 최고의 국립대학인 서울대학교가 남의 나라(그것도 국민 감정이 영 좋지 않은 나라)의 대학인 제국대학의 후신임을 인정한다는 것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대표적인 예가 1946년 경성제국대학을 국립서울대학교로 개편하면서 일문학과를 폐지한 일이며 90년대 중반까지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최근 인문대학에서 아시아언어문명학부를 개설하고 이 학부에서 담당하는 것 중 하나로 일본학이 있다. 중어중문학과는 원래 있었으니까 중어중문 이외의 여러 아시아권을 묶어 놓은 거라고 보면 될 듯 하다. 최근 서울대는 한반도에 최초로 설립된 근대 법학 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를 서울대학교의 전신으로 인정하여, 개학(開學)년도를 1895년으로, 개교(開校)년도를 1946년으로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4년에 세워진 경성제국대학에 관해서는, 지금도 서울대학교라는 대학 전체의 차원에서는 어물쩡 넘어가고 있다. 오로지 일제 패망 후 1946년 폐교된 경성대학(경성제대가 잠시 경성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바뀜) 등 10개 학교의 시설을 바탕으로 신규 설립되었다는 점만 쓸 뿐.
그러나 일부 단과대는 역사가 100년이 넘는다고 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경성제국대학의 역사를 건너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는 각 단과대에서 인정하고 있는 전신격의 학교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로, 서울대학교 자체가 미군정의 국대안으로 경성제국대학을 포함한 서울의 여러 전문학교를 합쳐놓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은 구 한국 법관양성소의 후신인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가 통합되어 출범하였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 과정에서 마찰이 있었는데, 학교 기물 일부와 시설이 박살나는 사고를 겪었다. 국대안 파동 당시의 좌우익, 전문학교-학부 간 충돌은 단순한 마찰 수준이 아닌, 테러 수준이었다. 증언을 들어보면 시설은 꽤나 좋았던듯하다.
서울대학교의 공식 입장이 어떻든간에 서울대의 전신 중 하나가 경성제대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간에서도 서울대의 전신이 경성제대라는 인식은 확고하며, 경성제대 출신 학생들도 서울대를 모교로 생각하고 있다. 나고야대학의 교수를 지낸 한 일본인 졸업생은 수업 중에 국비유학을 온 서울대 졸업생에게 자기가 자네들의 선배라는 드립을 쳤다고 한다. 예전에만 해도 국제학회 등에서 한일 학자들이 모이면 토다이, 쿄다이 출신의 나이 많은 할아버지급 일본 교수들은 소케이는 무시해도 서울대는 조다이 드립과 함께 은근히 제국대학급으로 쳐주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런 과거 드립을 치면 서울대쪽에서는 부정도 긍정도 못하고 아 예;;; 허허(...) 하고 급어색(...) 학계의 주력이 된 한국, 일본의 젊은 교수들은 애시당초 그딴거에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에 완전히 죽은 떡밥에 가깝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현재도 서울대학교 내의 각종 도서관에서 경성제대 졸업생들이 기증한 책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특히 일본어로 누렇게 뜬 책들은 거의 100%다. 서울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는 구텐베르크 성경 초판본 역시 제국대학 시절의 장서가 그대로 이관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현 국립대만대학은 자신들의 전신이 다이호쿠제국대학임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의 식민지 지배기간이 훨씬 더 길었고,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어 상대적으로 부드러워진 식민 정책의 경험이 있는 탓에 식민 지배에 대해 전면 부정만 하지는 않게 된 대만의 일본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7 그 밖에
일본 제국 시절 일본인들은 만주국의 최고학부인 건국대학을 제국대학과 (어디까지나)비슷한 수준으로 보았다고 한다. 대략 네임밸류는 제국대학에 비할바는 못 되지만 관료 임용 보장이라는 떡밥 때문에 상당히 선호되어 일본과 그 식민지 지역(조선, 대만)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진학을 희망할 정도였다. 사실, 건국대학을 네임밸류 문제로 보기도 뭐 한 것이, 건국대학이 설립된 1930년대 말의 동아시아 지역의 엄혹한 경제 상황을 보면 건국대학의 인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군수전시총동원 체제로 개박살난 민생 상황에서 네임밸류를 얻고자 하는 것은 당시 용어로 유한계급이 아닌 이상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실제로 당시 대학 학비는 월간 수입이 40원 이상인 가정(신입 은행원 월급이 25~30원하던 시절)에서나 어느 정도 부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상황에서 학비도 입학만하면 무료에 졸업하면 취직이 보장된 대학이니 인기가 상당했던 것이다.
다만 건국대학이 괴뢰 국가 만주국의 최고학부다보니(...) 일본 제국 본토에선 킹왕짱 도쿄제국대학이나 교토제국대학 앞에서는 그저 적장자 앞의 서출처럼 깨갱해야했다. 입학도 본토의 제국대학과 달리 중등학교 졸업 후 바로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나마 식민지에 있었던 경성제국대학이나 타이호쿠제국대학 앞에서는 위세를 부렸으나...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 정착한 건국대학 출신들은 자기들보다 아래라고 여겼던 경성제국대학 출신 파벌에 밀려 지내야 했다. 만주 건국대학 출신인 강영훈은 당시 경성제국대학 예과와 건국대학에 동시에 합격했으나 만주 건대에 진학했다고 증언한 바가 있다. 그렇다고 아주 밀린건 아니지만 일본제국 시절 위상을 생각해보면 그저 안습...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은 일본 제국대학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당연히!
- ↑ 교토제국대학의 약칭으로 경대(京大)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 약칭이 성대(城大)가 되었다. 해방되자마자 경성대학, 약칭 경대(京大)로 이름이 바뀌었다. 물론 성대라는 약칭과 한동안 혼용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경성대학의 명칭 변경을 다룬 논문도 있다.
- ↑ 가령, 경성제대 졸업자는 서울대학교 동창회의 회원자격이 있다.
- ↑ 전에는 '이는 의대는 어차피 비싸기 때문 (...)'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2015년 기준으로 국립대 의학부의 등록금(일본에서는 수업료)는 1년에 585,800엔[1]이며 이는 국가에서 정해준거라 국공립대는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 게이오기주쿠 의학부의 등록금은 1년에 3,000,000엔[2]으로 국공립의 5배가 넘는다. 게다가 기타 비용에 해당하는 재적기본료+시설설비비+실험실습비의 합이 590,000엔으로 국공립 등록금을 넘는다.
- ↑ 이것은 현재의 대학교양과정과 같은 개념으로서 당시 고등학교졸업자는 대학에서 예과가 면제되고 바로 본과로 진입했다. 당시 일부 사립대학에서는 예과를 별도로 운영을 하면서 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은 학생들을 받아서 가르쳐 본과로 진입시키곤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조선인 유학생들은 제국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립대학을 다녔다. 당시의 중학교는 6년제로서 현재의 중고등학교와 같은 레벨의 학교임에 주의해야한다.
- ↑ 이 고등학교의 전설적인 엘리트주의에 관하여 일본에 많은 문학, 예술작품이 있다. 당시 도쿄 소재 제1고등학교는 도쿄대학 자체보다 더 유명했다고 한다
- ↑ 고등보통학교가 구제중학교(6년제)로 인정된 것은 1930년대 후반부터
- ↑ 일본인이 다니던 중등학교이다. 6년제이기 때문에 현재의 중고등학교에 모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