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안진화상

完顔陳和尙
(1192 ~ 1232)

나라 말기의 명장. 본명은 이(彝)이며, 는 양좌(良佐). 자보다는 아명이었던 진화상이 더욱 알려져 있다.

풍주 출신으로 위구르, 나이만, 강, 한인 등 몽골의 지배를 피해 금으로 도망친 망명자들을 모아 충효군을 편성하였으며 1215년에 중도를 침공한 몽골군에 의해 포로가 되지만 몽골의 장군에게 그 능력을 인정받아 측근으로 임명되어 북방에서 수년간 머물렀다고 한다.

몽골군이 풍주로 가까이 갔을 때 몽골인 감독관을 살해하고 탈출하여 어머니를 대동하고 금의 수도인 개봉으로 도주하였으며 사촌형을 따라 종군하였으며 1225년에 사촌형이 병중일 때 군중의 재판을 행하다가 그의 부하를 죽음에 이르게 하자 사사로운 분노로 불법을 행하여 월권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옥에 갇히게 되었다.

1226년에 애종에 의해 방면되어 군부에 복귀하고 1228년에 몽골군이 침입하자 선봉에 서서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치라군이 이끄는 8000명의 군사를 대창원에서 격파하였는데 이는 몽골의 침공이 시작한지 20년 동안 없었던 대승리다.[1] 그리고 1230년 도화곡 전투에서는 수부타이와 싸워 승리했다고 알려져있으나, 도화곡전투에 참전한 몽골의 장수가 수부타이라는 기록은 없고, 일본과 남송측의 기록도 모호하게 수부타이로 추정하는 듯한 내용 뿐이라 논란이 있다. 수부타이 항목 참고

이 덕분에 정원대장군 평량부판관에 임명되어 멸망 직전의 금나라의 영웅으로 떠올랐으며 하남, 섬서 등을 전전하며 연전연승을 하였고 1231년에는 도회곡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어모중랑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1230년에 시작된 오고타이 칸이 직접 침공에 나서자 금나라의 영토가 황하 남안까지 몰리게 되고 1231년에 개봉의 서남부의 삼봉산에서 금나라 군사 15만을 이끌지만 오고타이의 동생인 툴루이가 지휘하는 별동대의 공격으로 대패하여 균주성으로 도망친다.

균주성이 몽고군의 공격으로 함락되자 도망칠 수 없음을 알고 몽골군에게 자진해서 출두하여 처형되었다고 하는데 나라가 편찬한 금의 역사서인 《금사》에 따르면 그는 사형받을 때도 당당한 태도를 보여 몽골군의 감탄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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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 4 일러스트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1,[2] 시나리오 3에 등장하다. 코에이가 대놓고 인정한 것인지. 전투력이 95이고 지모가 83이다. 전투특기는 기동, 연사, 복병을 가지고있다. 그야말로 의 희망이다. 특히 시나리오3의 금나라는 안습의 면모를 벗었다.
  1. 말도 안된다고 생각할 건 없다. 용맹한 장수가 적은 수의 군대로 닥돌해 압도다수의 적을 충공깽으로 만든사례는 무지하게 많다. 고려에서는 13명만으로 몽고군을 패닉으로 만든 돌격왕도 있었고 조선신립이 유명한 이유도 이런 종류의 전과가 있어서였다.
  2. 다만 미등장에 재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