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后 于氏
(?~234)
1 개요
고구려 고국천왕과 산상왕의 왕후. 박명수 유행어가 아니다!
한국사에 보기 드문 형사취수제를 통해 왕후의 자리를 유지하고 권력을 유지한것으로 유명한 여성.
2 생애
고국천왕 2년 2월에 고국천왕의 비였다 왕후가 되었다. 제내부(提那部) 우소(于素)의 딸이라고 한다. 다만 '우'가 성씨였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이후 고국천왕 12년 9월에 왕후의 친척인 어비류와 좌가려가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왕이 제지하려 하자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왕후가 선대 신대왕의 왕후를 말하는지 우씨를 말하는지는 모호하지만 후자일 경우 상당한 권력의 상실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 사실을 반증하듯 귀족출신들이 권력에서 배제되고 안류와 을파소 등의 재야출신의 왕의 심복들이 권력을 잡고, 백성들에 대한 선정을 베풀었다.
2.1 발기, 연우와의 만남
그러다 197년 5월 고국천왕이 사망하자 우씨는 왕의 사망을 숨기고 왕의 동생인 발기를 찾아가 후사를 논하려 하였다. 그러나 자신을 후계자로 낙관하고 있었던 것인지 발기는 야밤에 찾아온 형수를 외면했고, 우씨는 대신 다른 동생인 연우를 찾아갔다. 발기와는 달리 연우가 예를 갖추고 우씨를 맞이하자, 연우의 행동이 마음에 들었는지 우씨는 발기를 모함하고 연우에게 자신의 호위를 부탁한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와중에 우씨를 대접하던 연우가 고기를 썰다 칼에 베이자 우씨가 치마끈을 풀어 상처를 감싸주었고,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왕궁에 돌아왔다"고 언급해, 두 사람 사이에 정치적 타협 외에 은밀한 거래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게 무슨 근친물 상업지 설정도 아니고…
그럴 만한 이유 및 상황이 충분히 잘 들어맞는 것이,
우선 첫째로
"발기에겐 고국천왕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버젓히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1])이러니 당연히 발기 입장에선 차기 왕에 대한 언급 자체가 자기 목숨을 거는 행위나 다름 없는 상황이다. 당연히 상식적으로 왕의 후계자에 대한 말을 왜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을 것이다. 왕조 시절엔 왕에 대해 함부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자기 목숨 뿐 아니라, 자기 집안 전체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다. 조선시대 수많은 역모 사건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가. 왕이 가장 두려워 하는게 쿠데타고, 후계자 문제도 매우 민감했었다. 우씨는 거절당할 것을 알고도 일단 찾아간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차기 왕으로 가장 유력한 것이 고국천왕의 첫째 동생인 고발기였기에 명분 쌓기 용으로 찾아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난 분명히 찾아갔었어. 거절한 건 당신이야! 이런 식으로...)
둘째로
발기에겐 아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아, 기혼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연우는 후에 우씨를 왕후로 맞이하고, 그 외에 다른 여자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후사가 없어서 한참 뒤에 여자를. 그것도 우씨 눈치를 보면서 겨우 들인다. 여기서 태어난 아들이 동천왕.) 자기 자신이 왕비로 계속 있기 위해선 발기보다 연우를 택하는 편이 더 나았다. 덕분에 고국천왕의 왕비로 들어와서 대략 50여년 간이나 고구려 왕실 내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사망한다. 동천왕도 우씨의 눈치를 상당히 살펴야 했을 정도. 동천왕의 매우 착한 성격은, 실제 착한 성격이 기본으로 깔려 있더라도, 우씨의 눈치를 보느냐고 조심스레 행동한 측면도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고구려판 측천무후
"가장 중요한 건 연우에겐 고국천왕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렸다는 것." 그것도 어느정도 얘기를 진행하면서 이 사람이 차기 왕으로 삼아야겠다... 라고 판단된 시점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집에 찾아가자마자 바로 알렸다는 것."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왕후가 말하기를 “대왕이 돌아가셨으나 아들이 없으므로, 발기가 연장자로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겠으나, 첩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고 하면서 난폭하고 거만하며 무례하여 당신을 보러 온 것입니다.” 라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이미 연우와 어느정도 정치적으로 합의된 상태라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후에 발기가 난을 일으켰을 때, 백성들이 호응해주지 않았다는 기록을 보아 이 문제도 충분히 계산되었으리라 판단할 수 있다.
하여간 덕분에 발기가 유력했던 고구려의 왕위는 연우에게 돌아가게 되고 그가 바로 고구려의 10대 왕 산상왕이다. 분노한 발기는 요동태수 공손탁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모의하고, 고구려를 공격한다. 그것을 왕의 막내동생 계수가 진압한다. 이후 계수는 형인 발기의 잘못을 꾸짖었고 결국 왕실과 나라에 큰 위기를 몰고왔다는 죄책감에 발기는 자결하고 만다.
2.2 산상왕 즉위 이후
그 뒤 왕위를 차지한 산상왕은 우씨덕에 왕위를 얻은지라 다시 장가들지 않고 그대로 우씨를 왕후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전 남편도 왕, 지금 남편도 왕, 인생의 승리자! 그러나 우씨는 산상왕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지 못했고 그를 고민하던 왕은 산천에 기도를 하다 꿈에 작은 왕후를 통해 아들을 얻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우씨의 눈치를 보느라 다른 왕후 들일 엄두도 못냈던 왕은 신하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을파소는 기다렸다는 듯이 왕에게 하늘의 뜻을 기다리라고 조언한다.
몇년 후 나라의 제사에 쓸 돼지가 도망쳐서 어느 마을에 이르렀는데 마을에 어느 예쁜 여자의 도움으로 잡게 되고 그 사실을 왕에게 알리자 왕은 그 마을에 방문해 여자와 관계를 가지고 아들을 낳으면 버리지 않기로 약조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우씨는 질투해서 병사를 보내 죽이려고 하였으나 여자의 기지로 뜻을 이루지 못 하고 되려[2] 그 사실을 병사들이 왕에게 알려서 정식으로 작은 왕후로 맞이하는 결과를 보게 된다. 빡치겠다.
그리고 나서 작은 왕후가 된 여성은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11대 국왕 동천왕이다. 하지만 왕후는 그런 작은 왕후와 왕태자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시녀를 보내 일부러 국을 쏟게 하거나 아끼는 말의 갈기를 자르는 등 괴롭혔고 왕태자로 즉위도 태어난지 4년 후에서야 가능했다. 하지만 효심이 깊고 온화했던 동천왕은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산상왕 28년에는 왕손 연불, 12대 국왕 중천왕도 태어났다. 아들도 못 낳아보고 할머니 됐다. 근데 동천왕이 아들을 본 나이가 겨우 16살... 이후 산상왕이 죽고 동천왕이 즉위하자 왕태후로 봉해진다. 정말 효자다. 친엄마도 아니고 못된 계모를...
3 죽음, 평가, 그 외
그리고 동천왕 8년에 사망한다. 사망하기 전에 유언하기를 자기가 한 짓이 면목이 없어 전남편인 고국천왕릉에 묻힐 수 없고 산상왕의 무덤에 장사지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무당이 와서 말하길 고국천왕이 자기 마누라가 동생이랑 같이 합장되는걸 보고 빡쳐서 가서 싸웠고, 세상 사람들 보기 부끄러우니 자기 무덤을 가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다고 사람들이 네토라레 당한걸 모르나? 그래서 무덤에 소나무를 일곱겹으로 심어서 무덤을 가렸다고 한다.[3] 죽은 다음에도 전남편 뒷목잡게 하는 포스!
인륜을 어긴 악녀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4] 능동적으로 행동하여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여걸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리고 고구려 시대에 이름을 남긴 몇 안되는 여성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관련 창작에 대해서는 좀 아쉬운게 당시 고국천왕의 다섯 형제와 다들 연관이 있고, 권력을 쥐는 과정과 몰락의 과정도 재밌고, 을파소 등의 네임드 인물도 많이 나오고, 시대적으로 보면 중국에서는 삼국지 시대의 가장 중심에 살았던 인물이라 드라마나 소설로 쓸 여지가 많아 보이는데도 관련 미디어 작품이 거의 없어 의아한 인물이다.- ↑ 삼국사기 권16, 고구려본기4 산상왕조 " 고국천왕이 돌아가셨을 때, 왕후 우씨(于氏)는 임금의 죽음을 비밀로 하여 밝히지 않고...(이하 생략)
- ↑ 이때 임산부라 그 사실을 병사들에게 알렸다는 얘기도 있다.
그 시대의 조씨 승상이었다면 씹고 죽였을거 같은데 - ↑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8년조 가을 9월, 태후 우씨가 돌아가셨다. 태후는 임종에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내가 행실이 바르지 않았으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國壤, 고국천왕)을 보겠는가? 만약 여러 신하들이 차마 내 시신을 도랑이나 구덩이에 버리지 못하겠거든, 나를 산상왕릉 곁에 묻어 달라.” 마침내 태후의 유언대로 장사를 지냈다. 무당(巫者)이 말하였다. “국양왕이 나에게 내려와서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는, 분함을 참을 수 없어서 마침내 우씨와 싸웠다. 내가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낯이 아무리 두껍다 해도 차마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없도다. 네가 조정에 알려 나의 무덤을 물건으로 가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국양왕의 능 앞에 일곱 겹으로 소나무를 심었다.
- ↑ 특히 유교가 중심인 조선시대에서는 거의 동물과 같은 취급을 할 정도. 정절이라는 관점을 논외로 하더라도 정상적인 계승권자라고 할 수 있는 고발기를 타당한 이유도 없이 자기 임의대로 배제하여 발기의 난이 일어나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팜 파탈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