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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의 애국 지사.(1882년 3월 4일~1950년)[2]
조선 후기의 과천군 하서면의 농촌[3]에서 출생했다. 농민 신분이라 학식은 높지 못했지만, 애국심과 의기는 무척 투철했다고 한다. 을사조약에 분노한 그는 최초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결심했다. 그때가 23살이었다.[4]
1905년, 11월 17일. 평소 뜻을 함께했던 동료 이만여, 남통봉, 김장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때 이토 히로부미는 경부선 기차를 타고 안양 근처를 지나갈 예정이었다.[5] 그래서 원태우 지사는 철로에 커다란 돌을 놓고, 기차를 전복시킬 계획을 세웠다. 기차가 전복해도, 이토 히로부미가 살아 있다면 어떻게든 죽일 수 있을 거란 계획이었지만 거사 직전, 동료였던 이만여가 겁을 먹고 철로에 있던 돌을 치워버렸다.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달려오자, 원태우 지사는 서리재고개[6]에서 있는 힘껏 돌을 던졌다. 돌을 던졌다고 해서 그냥 가벼운 돌팔매 테러 정도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원태우 지사가 던진 돌은 정확히 이토 히로부미가 앉아 있던 자리의 창을 깨고 들어갔다. 유리창이 박살이 나면서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에 유리파편이 8군데나 박혔다. 자칫 했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중상이었다고 한다.
이 의거는 일본 신문에도 신속히 보도되는 등 열도를 흔들어 놓았고, 원태우 지사는 일본 군경에게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했다. 그때 고문의 후유증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불구의 몸이 되었으며,[7] 여름에도 긴팔과 긴바지를 입어야 할 정도로 흉터가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독립(해방)이 될 때까지 일제의 집중 감시를 받아야만 했다.
학자이자 애국지사였던 송상도는 이 의거에 대해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의해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꼬투리는 이미 원태우로부터 있었다" 라고 평하기도 했다.
원태우 지사는 1950년, 69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타계했다. 그나마 조국의 독립을 보고 세상을 떠났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까. 어쩌면 전쟁을 보지 못 한 것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기일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정확한 기일이 나오면 추가 바람.
생전에 돌절구와 맷돌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한다. 지사가 만들었던 돌절구 하나는 지금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애국장이 추서되었고, 현재 안양시에는 의거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이 명판은 그야말로 문제 투성이다. 우선 본문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농민신분이었는데도 갓쓰고 두루마기 걸친 전형적인 조선시대 선비 모양으로 도장찍기해서 특징이 하나도 없는 것도 그렇고, 저 명판이 안양역에서도 사람들이 접근은 커녕 확인도 하기 어려운 위치에 박혀 있다는 것도 문제다. 제대로 읽으려면 계단의 중간에 서서 읽어야할 판. 거기에다가 23살에 의거를 한 모습으로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명판의 모습은 4-50대의 중년의 모습이다. 그야말로 탁상행정의 본보기.
- ↑ 안타깝게도 몇 월 며칠에 돌아가셨는지는 불명이다. 한국전쟁 전에 돌아가셨는지 아니면 그 후에 돌아가셨는지...
전자이길 빌자 - ↑ 현재의 안양시 안양동
- ↑ 안중근 의사보다 4년 더 빨랐다.
- ↑ 당시 수원에서 사냥을 한 후 서울로 올라오는데, 경부선이 안양을 지났다.
- ↑ 현재 안양시 석수동 고가도로 있는 방면. 석수체육공원 인근
- ↑ 본 위키의 고문 항목을 참조해보면 왜 그렇게 됐는 지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뿐만 아니라 해방 후 군사정권 하에서도 이런 희생자가 많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