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

해당 용어의 사용에 대해서는 을사조약 #s-3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이 문서는 이 토론 에서 문서의 제목을 '을사조약'으로 하는 것(으)로 합의되었습니다.
추가 토론 없이 수정·이동할 경우 편집권 남용/문서 훼손으로 간주되어 차단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을사조약/을사늑약/제2차한일협약(한국)
第二次日韓協約(일본)

한일합병과정
1904년 2월 23일한일의정서상호방위조약을 통한 대한제국의 군사적으로 보호
1904년 8월 22일제1차 한일협약고문을 두어 내정에 간섭
1905년 11월 17일을사조약통감부 설치, 외교권 박탈
1907년 7월 24일정미 7조약통감의 행정권 감독, 군대 해산
1909년 7월 12일기유각서사법권과 교도행정권 일본에 위탁
1910년 8월 29일경술국치한국병합

1 개요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외교권 양도 조약. 이 조약에 의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하였다.

외무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서명하였으며,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및 통감부 설치 등이 주요 내용이다.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암살 목표로 지정된 것은 초대 통감이라는 상징성에 그 이유가 있다.

그리고 이 협정을 기점으로 대한제국은 독립국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주권들을 줄줄이 상실하게 된다. 사실 그 동안 대한제국이 열강들 사이(청나라, 일본, 러시아) 줄타기하면서 독립을 유지했고 그 결과 두번 전쟁을 치뤄야 했던 일본이 승리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것이 외교권박탈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다른 열강들이 개입하면 식민지로 삼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조약은 처음에 제목이 없었다. 제목도 없다가 나중에 붙여진 셈. 이는 밑에 있는 원본 사진 참조. 정식명칭은 제2차 한일협약이다. 제1차 한일협약은 흔히 말하는 한일 협정서다. 1904년 8월에 체결된 협약이고 같은해 2월에 체결된 한일의정서와는 다른 조약이므로 헷갈리면 안된다.

흔히 을사조약이라고 하며, 을사보호조약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실록에는 한일 협상 조약이라고 기술되어있다.# 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한일협상조약이 북한어로 되어있다.#

1965년 한일국교를 정상화하는 한일기본조약(한일협상)의 제2조를 통해 무효임을 상호 확인하였다.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already void and null'(이미 무효하며 효력이 없음)가 영어본이므로 기초가 되는 문서인데 문제는 일본측의 요구 already null and void를 한국에서는 null and void를 주장했다. 또한 한국 내부에서 대부분 불법이라고 하지만 해외로 나가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또한 해외의 학자들은 '조약 자체의 부당성. 즉 국력의 차이로 인한 강제적인 체결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이후에 해당 지배국의 법이 실효성을 띄웠느냐가(서구 열강국들의 아메리카,아프리카 등의 식민지 지배 및 법 발효등과 국제적인 지위) 중요하다고 본다'

한일의정서나 '정미7조약'(제3차 한일협약, 정미칠적 참조)도 마찬가지. 근본적으로 비준 절차와 황제의 전권대행이 없는 국제법 위반 협약이었기에 조약이라 부를 수도 없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고종은 이 조약의 무효화를 주장하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으나, 국제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2 내용

파일:Attachment/을사조약/을사조약.jpg
조약 체결 당시 작성된 대한제국측 문서와 일본측 문서 원본
日本國政府及韓國政府난兩帝國을結合하한利害共通의主義를鞏固케함을欲하야韓國의富强之實을認할時에至할가지此目的으로써左開條款을約定함
일본 정부 및 한국 정부는 두 제국을 결합하는 이해 공통 주의를 공고히 하는 것을 간절히 원하며 한국의 부강해진 결과가 인정되는 때까지 이 목적을 위해 다음 조약을 약정함
전문에는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의 공통의 이해를 위해 한국이 부강해질 때까지’라는 형식상의 명목과 조건이 붙어 있다. 명분상으로는 한국측 문서이기에 한국 정부가 맨 앞에 와야하지만 일본 정부가 앞에 쓰여있다.

* 1. 일본국 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가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인과 이익을 보호한다.
* 1.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고 한국 정부는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조약을 절대로 맺을 수 없다.
* 1.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제의 궐하에 1명의 통감을 두어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고 한국 황제를 친히 만날 권리를 갖고, 일본국 정부는 한국의 각 개항장과 필요한 지역에 이사관을 둘 권리를 갖고,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 종래 재한국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협약의 실행에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맡는다.
* 1. 일본국과 한국 사이의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그 효력이 계속된다.
* 1.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
참고로 첫번째 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라는 문구는 이완용이 집어넣어야 한다고 해서 넣었고 5번째 항목 역시도 나중에 첨가되었다.

3 을사조약이란 이름에 대해서

을사조약 명칭 논란이 본격적으로 표출된 것은 지난 2005년 경부터로, 을사조약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찍어진 조약이라는 이유로 을사늑약(억지로 맺은 조약), 혹은 정식 명칭인 제 2차 한일협약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한다.#

3.1 을사조약을 주장하는 측

을사조약이라는 표기 존치를 주장하는 측은 제국주의 시대의 수많은 불평등조약이나 날치기 조약이 말해주듯 조약이라는 단어가 공정이나 절차적 정당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제2차 한일협약이란 공식명칭에 비해, 을사조약이라는 표현은 일본 우호적인 표현도 아닌, 오히려 비판적인 의미도 있다는 것이다.

3.2 을사늑약을 주장하는 측

을사늑약으로의 표기로 변경을 주장하는 측은 조약이란 쌍방이 합의하는 것인데 을사조약은 옥새도 찍히지 않았고 한쪽 측의 일방적인 강요에 의한 불평등조약이기 때문에 늑약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3.3 제2차 한일협약을 주장하는 측

제2차 한일협약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논문 등에서는 제2차 한일협약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기 때문에 제2차 한일협약이라고 쓰는게 맞다고 주장한다.#

3.4 결론

"을사조약"만이 공식명칭이며, "제2차 한일협약"은 학술적 명칭, "을사늑약"은 비공식명칭이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왜냐하면 을사조약이라는 명칭은 특정 국가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 그저 국가간의 계약을 의미하는 단순한 가치중립적인 용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조약’이란 용어 자체가 애초부터 가치중립적인 용어에 불과하기 때문에 굳이 바꿔야 할 타당한 이유가 없다고 보고 있으며, 오히려 ‘을사늑약’이란 명칭은 학술적으로 쓰기에는 부적합한 가치판단의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에 거의 쓰이지 않고 있다. 단 학교나 일상생활에서 조금씩 사용이 늘어가는 추세이긴 하다.

국회 교과위 감사에서 이 문제가 지적된 바가 있는데, 이에 대해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을사조약의 표기를 원칙으로 하되, 을사늑약의 표기 역시 허락하는 것으로 입장을 결론지었다.#

4 식민지의 프롤로그

이번 일을 계기로 대한제국은 조선통감부의 통감정치 휘하에 들어가게 되어서 앞으로는 통감부의 감독과 감시를 받아가며 정치를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초대 조선통감은 당연히 이 사건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 후에 그는 일본 추밀원 의장으로 추대받아 통감에서 물러나 추밀원 의장이 되었다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에 의해 중국 하얼빈역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그리고 결국 1년 후 경술국치로 이어지면서 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개편강화되어 1945년 광복 때까지 40년동안 통치하게 된다.

5 '을씨년스럽다'

이에 찬동한 다섯 매국노, 즉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을 가리켜 을사오적이라고 부른다. 이 조약이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가는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을씨년'이 '을사년'에서 온 말. 하지만 시기적으로만 연관성이 있을 뿐 정확한 출처인지는 분명치 않으며 일종의 도시전설이다. 참고로 소설가 이해조가 한자의 사용 없이 "을사년시럽다"라고 1908년에 쓴게 최초의 기록이다.'을사년시럽다'의 출처 여담으로 이해조도 1920년대에 변절한다.

6 파장

제일 먼저 유림들이 격노하여 격렬하게 맞섰다. 제일 먼저 특진관 이근명이 을사오적의 처벌을 주장했고 비서감 경 이우면, 박기양, 사직서 제조 박봉주, 중추원 의장 민종묵, 전 비서원 승 윤두병, 의정부 참찬 이상설, 이유승, 박종빈, 이종태, 정홍석, 정명섭, 신성균, 강원형 등이 뒤를 이었다. 그외에도 숱한 뜻있는 조신과 유생들이 뒤를 이었으나 그 수가 너무 많은 관계로 자세한 정황은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의 고종실록 1905년 11월 17일부터를 참고하라.

최익현은 즉각 상소를 올려 을사조약을 규탄하고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모조리 죽일 것을 청했으며 아직 외국 공사들이 귀국하지 않았고 고종이 조약에 인준한 바 없으니 원천 무효임을 강조하며 을사조약을 백지화할 것을 주장했다.

그 외에 조신과 유생들이 만국공법을 거론하며 5적을 맹렬히 탄핵했고 조약의 무효성을 강변했다. 안병찬의 경우에는 즉각 오적의 머리를 모두 베어 저잣거리에 매달 것을 청했으며 전세계에 을사조약의 부당성과 허위성을 알리는 성명을 발표할 것을 청했다. 이에 고종은 "그대의 말이 공분에서 나온 것임을 안다, 그 충정을 이해한다."만 할 뿐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이어 주영 서리공사 이한응과 민영환이 자결하였고 갑신정변으로 처형된 홍영식의 형인 홍만식도 독약을 먹고 목숨을 끊어 항거했다. 대신 조병세는 상소를 올리며 조약을 규탄하자 일본 헌병들에게 연행되어 강제로 집으로 끌려가게 되자 역시 아편을 먹어 목숨을 끊었다.

이어 학부지사 이상철, 평양진위대 상등병 김봉학, 경영관 송병선이 잇달아 자결했고 나철, 오기호 등이 암살단을 결성하여 처단에 나섰다. 기산도라는 자는 이근택의 집에 잠입하여 그를 난자했으나 이근택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나철이 지휘하는 암살단의 권중현 저격이 있었으나 실패했다.

전 참판 민종식이 일으킨 의병은 홍주성을 점령하고 열흘이나 버티면서 격렬히 저항했고 그외에 전국에서 을사의병이 일어나서 항거했다.

조약에 분개하여 장지연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오늘 목놓아 통곡하노라)라는 글을 발표하였고 장지연은 그 후 대명률에 따라 태형을 선고 받았다. 그런데 나중에 변절하여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주필로서 친일 성향의 글들을 게재한다. 일부는 변절한 이유가 국가가 망해가는데 탄식을 하여도 그런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들은 없고 오히려 처벌만 하니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랬다고는 한다.

제2기 의병인 을사의병이 일어났다. 이후 몇 년간은 사실상 전쟁터라고 봐도 무방하다. 고종은 해산 촉구를 명하면서도 몰래 양반 의병장들에게 밀지와 군자금을 보냈으며 거병하지 않은 유생들에게도 거병을 촉구하며 사실상 일본에 맞섰다. 게릴라전 위주의 의병들이 군수를 터는건 식은 죽 먹기였다. 이후 정미7조약(1907년)에 의한 고종 퇴위 및 군대 해산과 "남한대토벌"이라는 무참한 학살을 거친 뒤, 조선은 일본에 강제로 합병당한다.

여담으로 을사조약을 저지하지 못했을 때 이미 나라가 망했다고 판단했는지 오히려 경술국치의 파장은 을사조약 때만 못했다고 한다. 나라가 망했다고? 무슨 소리야? 이미 5년 전에 없어졌는데

조약이 무효임을 주장하기 위해서 고종은 헤이그 국제 회의장에 3명의 특사(헤이그 특사)를 파견하였으나 일제의 방해공작과 열강의 무관심[1]에 막혀 무위로 돌아갔고, 이것을 빌미로 해서 일제는 이완용을 앞세워 고종을 협박하여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켜 천천히 대한제국을 멸망의 길로 몰아갔다.

이런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이미 비실비실하던 대한제국에 결정타를 날린 사건은 바로 이 조약의 체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외교권 상실이란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따져볼 때, 이 조약이 체결된 그 순간 사실상 대한제국은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니, 이미 1904년 한일의정서를 체결한 당시에 망한거고 러일전쟁포츠머스 조약 이후 을사조약은 확인사살이나 다름 없었다고도 본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을 보호국에 놔두려고 했다[2]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건 사실과 거리가 있으니 문서 참조. 여하간 1905년 12월 ~ 1910년 8월까지의 기간을 일제 통치기간에 합쳐 일제통치 40년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1906년, 영국 런던트리뷴의 더글러스 스토리 기자에게 국새가 찍힌 을사조약 무효 문서라는게 보내져 보도되고, 이것이 대한매일신문에 인용되어 다시 보도되었다. 고종이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는 당시 대한매일신문에 게제되었던 내용과 그 현대어 번역이다.
파일:Attachment/ulsa-treaty-annulment-gojong.png

一. 一千九百五年 十一月 十七日 日使 與 朴齊純 締約 五條는 皇帝게셔 初無認許又不親押

二. 皇帝게셔는 此 條約을 日本이 擅自領布하믈及對
三. 皇帝게셔는 獨立帝權을 一毫도 他國에 讓與하미 無
四. 日本之 勒約於 外交權도 無據온 況 内治上에 一件事라도 何可認准
五. 皇帝게셔는 統監에 來駐하믈 無許하고 皇室權을 一毫도 外人에 擅行을 許하미 無
六. 皇帝게셔는 世界各國이 韓國外交을 同爲保護하믈 願하며 限은 五年 確定

光武 十年 一月 二十九日
(大韓國璽)

韓皇陛下끠압셔 再昨年 新條約에 反對的으로 倫敦트리분新聞社 特派員 뚜글내쓰 스토리 씨의게 委托하신 親書를 該新聞에 印刻揭載함이 如右함.

다음은 현대어 번역.

1.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사신과 박제순이 체결한 조약 5개조는 황제께서 인정하고 윤허하신 바 없으며 또한 친히 국새를 찍지도 않으셨다.

2. 황제께서는 이 조약을 일본이 멋대로 공포하는 것을 반대하신다.
3. 황제께서는 독립적인 군주권을 조금도 다른 나라에 양여하시지 않는다.
4. 일본의 외교권에 대한 억지 조약도 근거가 없는데, 내정상에 단 한 건이라도 어찌 (이러한 조약을) 인준하겠는가.
5. 황제께서는 통감이 (한국에) 와서 주재함을 허가하지 않으시고 황실의 권한을 조금도 외국인이 멋대로 행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
6. 황제께서는 세계 각국이 한국의 외교를 이전과 같이 보호해줄 것을 원하며, 그 기한은 5년으로 정하기를 바란다.

광무10년(1906년) 1월 29일
(대한국새)

한국 황제 폐하께서 재작년의 신조약에 반대한다는 내용을 런던트리뷴 신문사의 특파원 더글러스 스토리 씨에게 위탁하신 친서를 우리 신문이 인쇄해 게재함이 오른쪽과[3] 같음.

이것이 진실인지 위조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물론, 이미 일본의 영향 아래 있던 한국 정부에서는 즉각 이에 반박하는 내용을 관보에 게재하였다.

파일:Attachment/ulsa-treaty-gwanbo.png

受勅及受牒

景孝殿祀丞 朴用國 一月 七日
官立漢城日語學校副教官 朴宗薰 一月 十五日

廣告
英國人의 發刊하는 漢文 大韓每日申報 及 英文 코리아데일늬뉴스가 本月 十六日 發刊한 紙上에 大韓國皇帝게옵셔 光武九年 十一月 十七日에 締結한 韓日協約을 初無認許하고 又不親押하셨다는 六個條目을 列擧 揭載하고 昨年 一月에 倫敦新聞 記者 뚜글내스 스토리 氏에게 附與하신 親書라 稱하고 附記하엿스니 我 大皇帝陛下게옵셔는 如斯 宸翰을 非但 初無 書給이옵시고 該 協約 締結 以後로 兩國関係의 情形을 洞察하옵셔 交誼가 益益親密하옵시거늘 何許 不逞之輩의 肆然誣罔이 莫此爲甚하니 此는 兩國親誼를 阻礙코자하야 捏造虛僞한 文字이기로 玆特廣告事

光武 十一年 一月 十九日
議政府

다음은 현대어 번역.

칙허 및 칙서를 받아 게재함

경효전사승 박용국 1월 7일
관립한성일어학교부교관 박종훈 1월 15일

광고
영국인이 발간하는 한문 대한매일신보 및 영자지 코리아데일리뉴스가 이번 달 16일 발간한 지면에 대한국 황제께서 광무 9년(1905년) 11월 17일에 체결한 한일협약을 처음부터 인허하지 않으시고 국새를 친히 찍지도 않으셨다는 조목 여섯 개를 열거 게재하고 작년 1월에 런던타임즈 기자 더글러스 스토리 씨에게 부여하신 친서라 일컬었다. 하지만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는 이러한 친서를 처음부터 써준 바도 없으실 뿐 아니라 해당 협약이 체결된 이후 (일본과 한국) 양국 관계의 사정을 통찰하오셔 깊은 관계가 나날이 친밀함을 알고 계시거늘 어찌 불령한 모리배의 이런 방자한 무망이 이렇게 심각함을 허락하겠는가. 이는 양국의 친밀한 관계를 방해하고 모함하고자 날조한 허위 문서임을 여기에 특별히 광고한다.

광무 11년(1907년) 1월 19일
의정부

일부에선 경술국치보다 이 조약의 체결을 더욱 치욕적이고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는 것만도 이런데 그 당시 국민들이 여겼을 분노와 비애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면에서는 을사조약으로 인해 애국계몽운동이 폭발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독립협회 시절부터 애국계몽운동이 진행되었지만, 앞서 위에 나온 을사조약 전문 중에 한국이 부강해질 때까지라는 구절 때문에 당시 민족주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부강만 하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의식이 생긴 것이다. 대표적으로 대한 자강회의 활동을 들 수 있고, 그 밖에도 오산학교나 대성학교 등 민족주의 계통의 학교 설립, 신소설 · 신체시 · 신극 등 근대 예술의 등장, 박은식의 유교구신론 같은 민족주의계 종교운동 등이 전부 다 을사조약 이후에 생겼다. 물론 일본이 한국이 부강해지는 걸 놔둘 리가 없었을 뿐더러, 부강해진다 하더라도 외교권을 돌려줄 이유가 없다는 게 슬픈 일이지만. 인도(정확히는 옛 무굴 제국) 사람들은 참전하면 독립시켜준다는 말에 1차 대전에 뛰어들었다가 2차 대전이 끝나고서도 독립하지 못할 뻔 했다.

또한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라는 말은 후에 경술국치때 조선 황가를 귀족으로 대우할 것을 황족과 동등한 대우로 해준다고 바꾼 것에 불과하다. 왕공족 문서 참조. 하지만 이 조항은 나중에 고종의 장례와 함께 3.1 운동과, 순종의 장례와 함께 6.10 만세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어찌되었던 황족과 동등한 대우니까 총독부의 입장에서 이왕가인 고종과 순종의 국장을 안 치뤄줄 수 없기 때문.

원래는 전문도 없이 4개의 조항이었으나, 이완용의 협상으로 인해 앞서 말한 전문과 5번째 조항이 생긴 것이다. 원래 나온 것은 조약의 명칭 자체가 없었다! 나중에 전후 사정을 서양 열강에 보낼 때 제목이 생겨났던 것. 법을 공부해 보신 분은 알겠지만 외국과 조약을 맺을 때 조약의 명칭이 없으면 단순히 각서로 취급될 뿐이다. 후에 이완용이 '시국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종묘사직을 지키고자...'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물론 이 단서가 그냥 말뿐이라는건 근현대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도 알 것이다.

7 이완용의 변명

1905년 12월 16일, 사실상 온 조선의 공적이 돼버린 을사5적이 고종황제를 찾아가 변명한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이완용의 주장이다.(출처는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삼가 생각건대, 신들이 성조(聖朝)에 죄를 짓고 공손히 천토(天討)를 기다린 날도 여러 날이 되었는데 황상(皇上)께서 특별히 더 관대하게 우선 폐하의 위엄을 늦춘 것은 참으로 하해(河海)와 같은 도량으로 너그럽게 포용한 바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신들이 버젓이 묘당(廟堂)에 있는 것은 염치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국(時局)을 보건대 또한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신들이 요즘 상소들을 보았는데 거기에서 탄핵(彈劾)하고 논열(論列)한 것들은 신들이 스스로 폄하(貶下)한 것과 크게 다르니 어찌된 일입니까? 그들은 국가가 이미 망하고 종사(宗社)가 존재하지 않으며 인민(人民)들은 노예로 되고 강토는 영지(領地)로 되었다고 인정하는데 이렇듯 이치에 어긋나는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저 무리들이 과연 새 조약의 주지(主旨)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이것이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 흐리멍덩하게 하는 말이니 상대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지만, 국가가 이미 망하고 종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하고 있으니 철저하게 힘껏 해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 조약의 주지로 말하면, 독립(獨立)이라는 칭호가 바뀌지 않았고 제국(帝國)이라는 명칭도 그대로이며 종사는 안전하고 황실(皇室)은 존엄한데, 다만 외교에 대한 한 가지 문제만 잠깐 이웃 나라에 맡겼으니 우리나라가 부강해지면 도로 찾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오늘 처음으로 이루어진 조약이 아닙니다. 그 원인은 지난해에 이루어진 의정서(議定書)와 협정서(協定書)에 있고 이번 것은 다만 성취된 결과일 뿐입니다. 가령 국내에 진실로 저 무리들처럼 충성스럽고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다면 마땅히 그 때에 쟁집(爭執)했어야 했고 쟁집해도 안 되면 들고 일어났어야 했으며, 들고 일어나도 안 되면 죽어버렸어야 했을 것인데 일찍이 이런 의거(義擧)를 한 자를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중대한 문제가 이미 결판난 오늘날에 와서 어떻게 갑자기 후회하면서 스스로 새 조약을 파기하고 옛날의 권리를 만회하겠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일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은 오히려 말할 것도 없고 나중에는 국교 문제에서 감정을 야기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조약 체결의 전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일본 대사(日本大使)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서울에 올 때에 아이들과 어리석은 사람들까지도 모두 중대한 문제가 반드시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과연 11월 15일 두 번째로 폐하를 만나본 뒤에 심상치 않은 문제를 제출하니, 폐하께서는 즉시 윤허하지 않으시고 의정부(議政府)에 맡기셨습니다. 이튿날 16일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민영기(閔泳綺),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하영(李夏榮) 및 신 이지용, 권중현, 이완용, 이근택은 대사가 급박하게 청한 것으로 인하여 이 우관(寓館)에 가서 모였고, 경리원 경(經理院卿) 심상훈(沈相薰)도 그 자리에 있었으며, 박제순은 주둔한 공사(公使)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의 급박한 요청에 의하여 혼자서 이 주관(駐館)에 갔습니다. 그런데 모두 어제 제출한 문제를 가지고 문답을 반복하였으나 신들은 끝내 허락할 수 없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밤이 되어 파하고 돌아와 폐하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뵙고 응답하였는데 문답한 내용을 자세히 아뢰었고 이어 아뢰기를, ‘내일 또 일본 대사관에 가서 모여야 하는데 만약 그들의 요구가 오늘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라면 신들도 응당 오늘 대답한 것과 같이 물리쳐 버리겠습니다.’라고 하고는 물러나왔습니다.

이튿날 17일 오전에 신 등 8인(人)이 함께 일본 대사관에 모였는데, 과연 이 안건을 가지고 쟁론한 것이 복잡하였습니다. 권중현은 ‘이 문제는 비록 대사가 폐하께 아뢰었고 공사가 외부(外部)에다 통지하였지만 우리들은 아직 외부에서 의정부에 제의한 것을 접수하지 못하였으니 지금 당장 의결(議決)할 수 없으며 또 중추원(中樞院)의 새 규정이 이미 반포된 만큼 반드시 여론을 널리 수렴해야만 비로소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공사는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귀국(貴國)은 전제 정치(專制政治)인데 어찌하여 입헌 정치(立憲政治)의 규례를 모방하여 대중의 의견을 수렴합니까? 나는 대황제(大皇帝)의 왕권이 무한하여 응당 한 마디 말로써 직접 결정하는 것이지 허다한 모면하려는 법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에게 전통(電通)을 하여 곧바로 폐하를 만나볼 것을 청하였으니, 여러 대신(大臣)은 함께 대궐로 나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여러모로 극력 반대하였으나 끝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먼저 의정부 내의 직소(直所)에 와서 기다렸으며, 일본 공사는 관원을 데리고 뒤따라와서 휴게소에서 기다렸습니다. 조금 있다가 신들이 입대(入對)하여 폐하께 각기 경위를 진달하였던 것입니다. 이때에 폐하께서는 몹시 괴로워하시며 이후의 조처에 대해 여러 번 신중히 하문(下問)하셨으나, 신들은 다만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는 말로써 대답하였을 뿐입니다. 그러자 폐하께서 하교(下敎)하시기를, ‘그렇지만 감정을 가지게 할 수는 없으니 우선 늦추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이에 이완용이 아뢰기를, ‘이 일은 나라의 체통과 관련되는데 폐하의 조정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누가 감히 허락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겠습니까? 다만 군신(君臣)의 관계는 부자(父子)의 관계와 같으니 품고 있는 생각이 있으면 숨김없이 다 진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대사가 찾아온 것은 전적으로 이 때문이며 공사가 와서 기다리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안건의 발락(發落)하는 것이 눈앞에 닥쳤는데도 군신 간에 서로 묻고 대답하는데 다만 안 된다는 한 마디 말로 다 밀어치우니, 사체(事體)를 가지고 논한다면 합당하지 않음이 없겠지만 이 또한 형식상 처리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여덟 사람이 아래에서 막아내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일본 대사가 폐하를 나아가 뵐 것을 굳이 청하는데 만약 폐하의 마음이 오직 한 가지로 흔들리지 않는다면 국사(國事)를 위하여 진실로 천만 다행일 것이지만, 만일 너그러운 도량으로 할 수 없이 허락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부분에 대하여 미리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때 폐하께서 하교하신 것은 없었으며 여러 대신도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습니다. 이완용이 또 아뢰기를, ‘신이 미리 대책을 강구하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만일 할 수 없이 허용하게 된다면 이 약관(約款) 가운데도 첨삭(添削)하거나 개정(改正)할 만한 매우 중대한 사항이 있으니, 가장 제때에 잘 헤아려야 할 것이며 결코 그 자리에서 구차스럽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이토오 히로부미 대사도 말하기를, 이번 약관에 대해서 만일 문구를 첨삭하거나 고치려고 하면 응당 협상하는 길이 있을 것이지만, 완전히 거절하려고 하면 이웃 나라간의 좋은 관계를 아마 보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 보면, 그 약관의 문구를 변통하는 것은 바랄 수도 있을 듯하니 학부 대신의 말이 매우 타당하다.’ 하셨습니다. 권중현이 아뢰기를, ‘지금 이 학부 대신이 말한 것은 꼭 허락해 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한 번 질문할 말을 만들어서 여지를 준비하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이런 것은 모두 의사(議事)의 규례이니 구애될 것이 없다.’ 하셨습니다. 이때 여러 대신이 아뢴 것이 모두 권중현이 아뢴 것과 비슷하였습니다.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렇다면 이 조약 초고(草稿)는 어디 있으며 그 가운데서 어느 것을 고치겠는가?’ 하셨습니다. 이하영이 품속에서 일본 대사가 준 조약문을 찾아내어 연석(筵席)에서 봉진(奉進)하였습니다. 이완용이 나아와 아뢰기를,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이 조약 제3조 통감(統監)의 아래에 외교라는 두 글자를 명백히 말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훗날 끝없는 우환거리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또 외교권을 도로 찾는 것은 우리나라에 실지 힘의 유무(有無)와 조만(早晩)에 달렸다고 하였는데 지금 그 기간을 억지로 정할 수 없지만 모호하게 하고 지나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렇다. 짐(朕)도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첫머리의 글 가운데서 「전연 자행(全然自行)」이라는 구절은 지워버려야 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권중현이 아뢰기를, ‘신이 외부에서 얻어 본 일본 황제의 친서 부본에는 우리 황실의 안녕과 존엄에 조금도 손상을 주지 말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번 약관은 나라의 체통에 크게 관련되지만 일찍이 여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부득이해서 첨삭하거나 고치게 된다면 이것도 응당 따로 한 조목을 만들어야 하리라고 봅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건 과연 옳다. 농상공부 대신의 말이 참으로 좋다.’ 하셨습니다. 이에 여러 대신 가운데는 폐하의 하교가 지당하다고 하는 사람 이완용의 주장을 찬성하는 사람, 권중현의 주장을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모두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연석에서 아뢰는 것이 거의 끝날 무렵에는 우리 여덟 사람이 똑같이 아뢰기를, ‘이상 아뢴 것은 실로 미리 대책을 강구하는 준비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신들이 물러나가 일본 대사를 만나서, 안 된다는 한 마디 말로 물리쳐야겠습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렇기는 하지만 조금 전에 이미 짐의 뜻을 말하였으니 잘 조처하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한규설과 박제순이 아뢰기를, ‘신들은 한 사람은 수석 대신이고 한 사람은 주임 대신으로서 폐하의 하교를 받들어 따르는 데 불과합니다.’ 하였습니다.

우리들 8인(人)이 일제히 물러나 나오는데 한규설과 박제순은 폐하의 명을 받들고 도로 들어가서 비밀리에 봉칙(奉勅)하고 잠시 후에 다시 나와 모두 휴게소에 모이니, 일본 공사가 어전(御前)에서 회의한 것이 어떻게 결정되었는가를 물었습니다. 한규설이 대답하기를, ‘우리 황상 폐하(皇上陛下)께서는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뜻으로 하교하셨으나, 우리들 8인은 모두 반대하는 뜻으로 복주(覆奏)하였습니다.’ 하니, 공사가 말하기를, ‘귀국(貴國)은 전제국(專制國)이니 황상 폐하의 대권(大權)으로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하교가 있었다면 나는 이 조약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으로 알지만 여러 대신은 정부(政府)의 책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여 한결같이 군명(君命)을 어기는 것을 주로 삼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이러한 대신들은 결코 묘당(廟堂)에 두어서는 안 되며 참정대신(參政大臣)과 외부 대신(外部大臣)은 더욱 체차(遞差)해야 하겠습니다.’[4] 하였습니다. 한규설이 몸을 일으키면서 말하기를, ‘공사가 이미 이렇게 말한 이상 나는 태연스럽게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하니, 여러 대신이 만류하면서 해명하기를, ‘공사의 한 마디 말을 가지고 참정대신이 자리를 피한다면 그것은 사체(事體)에 있어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규설이 다시 제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조금 뒤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대사가 군사령관(軍司令官) 하세가와〔長谷川〕와 함께 급히 도착하였고, 헌병 사령관(憲兵司令官)과 군사령부 부관(軍司令部副官)이 뒤따라 왔습니다. 일본 공사가 대사에게 전후 사연을 자세히 이야기하니 대사가 궁내부 대신(宮內部大臣) 이재극(李載克)에게 폐하의 접견을 주청(奏請)한다는 것을 전해 주도록 여러 번이나 계속 요구하였습니다. 이재극이 돌아와서 ‘짐(朕)이 이미 각 대신에게 협상하여 잘 처리할 것을 허락하였고, 또 짐이 지금 목구멍에 탈이 생겨 접견할 수 없으니 모쪼록 잘 협상하라.’는 성지(聖旨)를 전하였습니다. 이재극이 또 참정대신 이하 각 대신에게 성지를 널리 퍼뜨렸습니다. 대사가 곧 참정대신에게 토의를 시작하자고 요청하니, 한규설이 여러 대신에게 각기 자기의 의견을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대사가 먼저 참정대신을 향하여 말하기를, ‘각 대신들은 어전 회의의 경과만 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가 한 번 듣고자 합니다. 참정대신은 무엇이라고 아뢰었습니까.’ 하였습니다. 한규설이 말하기를, ‘나는 다만 반대한다고만 상주(上奏)하였습니다.’ 하니, 대사가 묻기를, ‘무엇 때문에 반대한다고 말하였는지 설명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한규설이 말하기를, ‘설명할 만한 것이 없지만 반대일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외부 대신에게 어떻게 했는가를 물으니 박제순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바로 교섭(交涉)이니 찬성과 반대가 없을 수 없습니다. 내가 현재 외부 대신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외교권(外交權)이 넘어가는 것을 어찌 감히 찬성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이미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명령이 있었으니 어찌 칙령(勅令)이 아니겠습니까? 외부 대신은 찬성하는 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탁지대신) 민영기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반대입니다.’ 하였습니다. 대사가 묻기를, ‘절대 반대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탁지부 대신은 반대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법부대신) 이하영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금의 세계 대세와 동양의 형편 그리고 대사가 이번에 온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외교를 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귀국이 이처럼 요구하는 것이니, 이는 바로 우리나라가 받아들여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미 지난해에 이루어진 의정서(議定書)와 협정서(協定書)가 있는데 이제 또 하필 외교권을 넘기라고 합니까? 우리나라의 체통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이니 승낙할 수 없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그렇지만 이미 대세와 형편을 안다고 하니,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5]

다음으로 (학부대신) 이완용에게 물으니 속으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하교에 대하여 이미 참정대신의 통고가 있었으니 이 안건의 요지가 이미 판결된 셈이다.’[6]라고 하고서 대답하기를, ‘나는 조금 전 연석(筵席)에서 여차여차하게 아뢴 바가 있을 뿐이고 끝내 찬성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고칠 만한 곳은 고치면 그만이니 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연석에서 면대하였을 때에 대체로 학부 대신(이완용)과 같은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딴 의견은 바로 황실(皇室)의 존엄과 안녕에 대한 문구였습니다. 그러나 찬성과 반대 사이에서 충신과 역적이 즉시 판별되기 때문에 참정대신이 의견을 수렴하는 마당에서는 반대한다는 한 마디로 잘라 말하였던 것입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황실의 존엄과 안녕 등에 대한 문구는 실로 더 보태야 할 문구이니 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군부대신) 심근택(이근택)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도 연석에서 학부 대신과 같은 뜻이었으나 의견을 수렴하는 마당에서는 충신과 역적이 갈라지기 때문에 농상공부 대신과 같은 뜻으로 말하였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내부대신) 이지용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 또한 연석에서 학부 대신과 같은 뜻이었습니다. 또 내가 일찍이 작년 봄에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 공사(公使)와 의정서를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의 약관 중 독립을 공고히 하고 황실을 편안히 하며 강토를 보전한다는 등의 명백한 문구가 있으니, 애당초 이 사안에 대하여 가부를 물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7]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곧 이재극에게 다음과 같이 전달해 달라고 요구하며 말하기를, ‘이미 삼가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칙령을 받들었기 때문에 각 대신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그들의 논의가 같지는 않지만 그 실제를 따져보면 반대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 반대한다고 확실히 말한 사람은 오직 참정대신과 탁지부 대신 뿐입니다. 주무대신(主務大臣)에게 성지를 내리시어 속히 조인(調印)하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이때 한규설이 의자에 앉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모양을 지으니 대사가 제지하면서 말하기를, ‘어찌 울려고 합니까?’ 하였습니다. 한참 있다가 이재극이 돌아와서 폐하의 칙령을 전하여 말하기를, ‘「협상 문제에 관계된다면 지리하고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하셨습니다.’ 하고, 이어 또 이하영에게 칙령을 전하여 말하기를, ‘「약관 중에 첨삭할 곳은 법부 대신이 반드시 일본 대사, 공사와 교섭해서 바르게 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하였습니다.

각 대신 중 오직 한규설과 박제순이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지용, 권중현, 이완용, 심근택 및 민영기, 이하영은 모두 자구(字句)를 첨삭하는 마당에서 변론하는 것이 있었으나 이때 한규설은 몸을 피하기 위하여 머리에 갓도 쓰지 않고 지밀(至密)한 곳으로 뛰어들었다가 외국인에게 발각되어 곧 되돌아 들어왔습니다. 마침 그 때 양편에 분분하던 의견이 조금 진정되어 대사가 직접 붓을 들고 신들이 말하는 대로 조약 초고를 개정하고 곧 폐하께 바쳐서 보고하도록 하여 모두 통촉을 받았습니다. 또 우리나라가 부강해진 다음에는 이 조약이 당연히 무효로 되어야 하니 이러한 뜻의 문구를 따로 첨부하지 않을 수 없다는 문제에 대하여 다시 폐하의 칙령을 전하니 대사가 또 직접 붓을 들어 더 적어 넣어서 다시 폐하께서 보도록 하였으며, 결국 조인하는 데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의 사실은 단지 이것 뿐입니다. 그런즉 신들이 정부의 벼슬을 지내면서 나라의 체통이 손상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죽음으로 극력 간쟁하지 않았으니 신하의 본분에 비추어볼 때 어찌 감히 스스로 변명할 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탄핵하는 사람들이 이 조약의 이면을 따지지 않고 그날 밤의 사정도 모르면서 대뜸 신 등 5인(人)을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요, ‘나라를 그르친 역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 이 조약에 대한 죄를 정부에다 돌린다면 8인에게 모두 책임이 있는 것이지[8] 어찌 꼭 5인만이 전적으로 그 죄를 져야 한단 말입니까? 한규설로 말하면 수석 대신이었습니다. 만일 거센 물살을 견디는 지주(砥柱)와 같은 위의와 명망, 하늘을 덮을 만한 수단이 있었다면 비록 자기 혼자서라도 앞장서 밤새도록 굳게 틀어쥐고 갖은 희롱을 막는 등 술수가 없는 것을 근심할 것이 없겠지만, 연석에서 면대할 때에는 전적으로 상(上)의 재가(裁可)만 청했고 외국의 대사와 문답하는 자리에서는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말이 성지였다는 것을 성대하게 말함으로써 전제(專制)하는 데 구실이 되게 하였습니다. 여러 대신의 숱한 말들이 무력한 지경에 똑같이 귀결되게 하고 빈 말로 반대한다고 하면서도 울고 싶고 도망치고 싶다고 하며 거짓으로 명예를 꾀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 대의(大議)가 이미 결정됨에 미쳐서 조약 초고를 찢어 버리거나 인신(印信)을 물리칠 수 없었으니 신 등 5인과는 애당초 같다 다르다 말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또 외국 대사가 일을 끝내고 돌아간 후 정부에 물러가 앉아서는 정해진 규례도 준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상소하여 신들에게 죄를 떠넘김으로써 허실(虛實)이 뒤섞이게 하였습니다. 그의 본심을 따져보면 다만 죄를 면하기 위해 스스로 도모한 것에 불과합니다. 시험 삼아 한규설의 잘못을 논해 보면 응당 우리들 5인의 아래에 놓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밖에 반대한다고 말한 대신들로 말하면, 처음에는 비록 반대한다고 말하였지만 끝내는 개정하는 일에 진력(盡力)하였으니, 또한 신 등 5인과 고심한 것이 동일하며 별로 경중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걸핏하면 5인을 들어 실제가 없는 죄명을 신들로 하여금 천지(天地)간에 몸 둘 곳이 없게 하는 것입니까? 신 등 5인은 스스로 목숨을 돌볼 겨를이 없이 하였건만 당당한 제국의 허다한 백성들 속에 깨닫고 분석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이 마치 한 마리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모든 개가 따라 짖듯이 소란을 피워 안정되는 날이 없으니 이 어찌 한심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탄핵하는 글로 말하면 반드시 증거를 확실하게 쥐고서야 바야흐로 등철(登徹)할 수 있는데 저 무리들에게 과연 잡은 증거가 있습니까? 사실을 날조하여 남에게 죽을죄를 씌운 자에게는 의당 반좌율(反坐律)이 있는 것이 실로 조종(祖宗)의 옛 법입니다.

무릇 위 항목의 일들은 폐하께서 환히 알기 때문에 곡진하게 관대히 용서하고 차마 신들에게 죄를 더 주지 않았으며, 파면시켜 줄 것을 아뢸 때에는 사임하지 말라고 권했고, 스스로 인책할 때에는 인책하지 말라고 칙유하셨습니다. 이는 진실로 신들의 몸이 진토가 되어도 기어이 보답하여야 할 기회이건만 저 무리들은 폐하께서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고 날로 더욱 떠들어대면서 치안(治安)에 해를 주고, 정령(政令)이 지체된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으니 이것은 진실로 무슨 심보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나라의 체통을 깊이 진념하시고 속히 법사(法司)의 신하에게 엄한 명을 내리시어 이런 혼란스런 무리들이 무리지어 일어나 구함(構陷)하는 경우를 만나게 되면 모두 죄의 경중을 나누어 형률을 적용하여 징계함으로써 신들이 실제로 범한 것이 없음을 밝혀 주신다면 이것이 어찌 신 등 5인에게만 다행한 것이겠습니까?”

이 말을 좀 쉽게 풀어보자면 을사조약을 체결했지만 제국과 황실의 존엄도 건재(?)하고 종사도 안전한데 오로지 외교만 일본에 잠시 맡긴 것이고 언제든 나라가 부강해오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인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어차피 을사조약 이거 미뤄봤자 어차피 체결될 것이었고 과거 의정서, 협정서 체결할땐 조용하다 왜 이제와서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건지 참 어이가 없네요."라는 이야기 되겠다.

7.1 오병서의 반박

이에 격분한 전 주사 오병서는 1906년 1월 5일에 소를 올려 을사오적의 주장을 반박했다.(출처는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아! 금년 10월 새 조약이 체결된 이후로 위로는 임금이 계신 서울부터 아래로는 궁벽한 산골에 이르기까지 높은 관리와 일반 관리들, 선비들과 하인들, 아이들과 여인들까지 모두 정신없이 뛰어나와 통곡하면서 ‘종묘와 사직이 망하였다, 강토(疆土)가 남에게 넘어갔다, 백성들이 포로로 되었다.’ 하면서 안절부절 못하고 진정할 줄을 모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박제순(朴齊純), 이지용(李址鎔), 이근택(李根澤), 이완용(李完用), 권중현(權重顯) 오적(五賊)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며 성토하는 상소를 연명(聯名)으로 계속 올리고, 충성스럽고 절의가 있는 많은 선비들은 자살까지 함으로써 노복이 될 수 없다는 뜻을 보였으니 저 무리들은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함은 변론할 필요도 없이 알 수 있습니다.

아! 선왕들께서 세우신 법은 지엄한 것으로서 폐하께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한 달이 지나도록 아직 오적이 사시(肆市)에 처해졌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도리어 주제넘게 높은 관직에 처하기도 하고 태연히 지위와 녹봉을 그대로 누리기도 한다하니, 사람들은 모두 의혹을 가지고 그 까닭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폐하께서 참으로 저 무리들이 처단할 죄가 없다고 여겨서가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실로 처단할 만한 죄는 있는데 저들이 외세를 끼고 있어서 어쩔 수가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까? 저들에게 처단해야 할 죄가 있음을 명백히 알고는 있지만 과연 끼고 있는 세력을 꺼려서라면 여기에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저들이 비록 함부로 날뛰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한국의 신하입니다. 폐하께서 처단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만일 처단하려고 한다면 단지 한번 명령하기에 달린 것인데 무엇을 꺼려서 집행하지 않으십니까? 이 때문에 저 무리들이 스스로를 해명하는 상소를 올리기까지 하였지만 저들의 역적 행동은 더욱 더 드러났습니다.

신들이 이른바 저들의 변명이라는 것을 가지고 변론해 보겠습니다.

저들이 말하기를, ‘독립이라는 칭호는 고치지 않고 제국이라는 명칭을 예전대로 두어서 종묘사직이 안녕하고 황실이 존엄하며, 단지 외교에 대한 문제만 잠시 이웃 나라에 맡겼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이것은 오늘 처음으로 체결된 조약이 아니라 지난해의 의정서(議定書)와 협정서(協定書)에 의하여 최종 채결된 것이다.’라고 하며, 또 말하기를, ‘만일 저들처럼 충성스럽고 절의를 지킬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그때에 목숨을 내걸고 반대해 나설 것이지 대사(大事)가 이미 결판난 오늘에 와서야 갑자기 후회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여기서 구절구절 모순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저들의 속내가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이미 종묘사직이 안녕하고 황실이 존엄하다고 하였으니, 저들이 이른바 대사가 이미 결판났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까? 작년의 의정서와 협정서 등은 다른 사람이 작성한 것입니까? 이지용이 이 두 문서를 작성하였으니 이지용에게 이 두 조약에 대한 과오가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작년의 이지용은 역적이 되는데 금년의 이지용이라고 면할 수 있겠습니까? 성토한 사람들을 가리켜 충성스럽고 절의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고 있으니, 저들의 흉악한 역적 같은 심보를 오히려 장려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저 무리들이 여러 차례 외국 대사들을 만나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고 운운한 것으로 본다면 저 무리들도 이 문제가 나라의 존망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과연 저들의 말대로 독립이란 칭호를 고치지 않고 제국이란 명칭을 예전대로 둔다면 무엇 때문에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는 말을 하였겠습니까? 그들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결단하지 않고 정부에 맡겼다.’고 합니다. 일본대사가 폐하를 알현하기를 청하였지만 폐하께서는 단연코 허락하지 않았고 심지어 ‘사직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殉社稷〕’라는 세 글자까지 말씀하셨는데 저 무리들이 정부에 맡겼다고 운운하니, 도대체 무슨 일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저들이 말하기를, ‘신 등 여덟 사람이 아래에서 막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나, 폐하께서 너그럽고 큰 도량으로 허용하게 되실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심산입니까? 저 무리들이 무슨 권한을 가졌기에 막아내기가 용이하다고 하면서 폐하가 부득이 허용하게 될 것이라 사전에 짐작한단 말입니까? 암암리에 함정을 파놓고 사전에 강구하여 약관(約款)을 수정한다고 핑계 댄 것은 교묘하게 문제를 만들어 놓은 데 지나지 않으니, 폐하께서 하교하여 대답하지 않을 수 없게 함으로써 뒷날에 핑계 거리로 삼으려 한 것이 어찌 아니겠습니까? 아! 저들이 마음을 먹고 계책을 꾸민 것은 더없이 흉악하고 참혹합니다. 말단에 마침내 ‘이상 아뢴 말씀은 사실 준비를 강구하여 준비한 것에 불과하니, 물러나 일본 대사를 만나면 불가하다고 하고서 물리치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아! 저들이 과연 물리치려고 하였다면 어째서 물리칠 대책은 강구하지 않고 굳이 그 수정할 것에 대해 강구한단 말입니까? 과연 무슨 심산이겠습니까? 이것으로 보건대 그들이 호응한 정상이 명백하여 덮어 버릴 수 없습니다.

성상께서 ‘감정을 가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한 하교를 끌어대고, 또 ‘어구(語句)를 변통하는 것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라고 한 하교를 끌어대며, 또 ‘잘 처리하라.’고 한 하교까지 끌어대어, 이것을 가지고 허락하려는 것이 성상의 뜻이었다고 하면서 저 무리들이 조약을 제멋대로 체결한 죄를 모면하려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감정을 가지지 않게 하면서 자기의 이익을 성취하는 것이 외교를 하는 법으로 볼 때 본래 당연한 것인데 어떻게 감히 이것을 가지고 저 무리들이 제멋대로 허락한 구실로 삼는단 말입니까?

‘어구를 변통하는 것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고 한 성상의 하교는 저 무리들이 아뢴 내용으로 인해 범상히 대답한 것에 불과한데, 어떻게 감히 이것을 가지고 어구를 수정하는 빌미로 삼는단 말입니까? ‘잘 처리하라.’는 말은 나라의 체면을 보존하면서 관계가 벌어지지 않게 하라는 의미인데, 어떻게 감히 온 나라를 남에게 넘겨주면서 잘 처리하는 것이라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저 무리들이 물러나겠다고 고하는 마당에 성상의 하교를 받들어 따를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는 것은 성상께서는 허락하고자 하셨는데 저 무리들이 반대하였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려는 것이니, 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성상의 하교는 단지 잘 처리하라는 것뿐이었는데 저 무리들이 ‘감히 따를 수 없습니다.’고 하였으니, 저들의 심중은 온 나라를 넘겨주는 것을 잘 처리하는 것으로 여겼단 말입니까?

저들이 명령을 받은 뒤에 들어가 비밀리에 칙지를 받든 것이 있었는데, 이미 비밀이라고 한 이상 재적(在敵)이하의 말은 드러내어서는 안 됩니다. 저들에게 만일 조금이라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더없이 중한 비밀스러운 칙지를 어찌 감히 소장에 대서특필하여 남들이 보고 듣도록 전파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 죄는 진실로 이루 다 주벌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더구나 한규설(韓圭卨)이 외국 대사를 만나 대답하면서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고 하교하였다고 운운한 말로 살펴보면, 이른바 비밀리에 받든 칙지란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協商妥辦〕’는 네 글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뜻은 일의 원칙에 맞게 협상해서 결과가 좋게 잘 처리하라는 것인데, 저 무리들이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말꼬리를 잡아 성상께 과오를 돌린단 말입니까?

《춘추(春秋)》의 ‘군친(君親)에게 반역하면 주살한다.’는 것과 한(漢)나라의 법의 ‘불경(不敬)한 자에 대해서는 참형을 처한다.’고 한 것이 바로 저 무리에게 딱 맞는 법률입니다.

저들은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 하는 사이에 충신과 역적이 갈라진다고 하면서도, 외국 대사가 찬성하는 편이라고 한 데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변론하지 않아 스스로 찬성한 것으로 인정함으로써 결국 조인(調印)까지 하고 말았으니, 저 무리들은 스스로 역적이 된 것이며 저들이 비록 주둥이가 석 자라도 해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자복한 결안(結案)이 아니겠습니까? 저들이, ‘탄핵하는 사람들은 걸핏하면 신 등 다섯 사람을 매국 역적 내지는 망국 역적이라고 하는데, 만일 정부에 죄를 돌린다면 여덟 사람에게 모두 그 책임이 있는 것인데 하필 다섯 사람만 전적으로 죄를 져야 하겠는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덟 사람이 다같이 매국 역적, 망국 역적이 된다면 나라를 팔아먹고 나라를 망친 저 무리들의 죄가 가벼워질 수 있단 말입니까? 남을 끌어들여 같이 역적의 죄를 쓰려는 데서 더욱 더 그들의 말이 궁하고 그 심정이 딱함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말하기를, ‘실상이 없는 죄를 뒤집어씌운다.’고 합니다. 아! 죄가 은폐되어 밝히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이 의심스럽다고 지목하는 것은 실상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저들의 손으로 조약의 문구를 수정하였고 저들의 손으로 인장을 찍어주었으며 저들의 입으로 스스로 그 죄를 열거하여 놓고도 이를 실상이 없는 것이라 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리고 탄핵을 받은 사람이 도리어 탄핵한 사람에게 죄를 주도록 청하는 일이 종전에도 더러 있었습니까? 염치에 대해서는 저 무리들에게 추궁할 가치도 없지만, 극도로 염치가 없어서 결국 역적이 되고야 말았으니, 이것도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 저 무리들은 이미 온 나라가 자기들을 원수로 여긴다는 것을 알고 많은 외국 군사들을 달고 의기양양하여 길에서 부르고 화답하면서 사람들이 우리를 감히 어쩌지 못한다고 여기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정말 제 나라를 배반하기를 꾀하고 암암리에 다른 나라 사람을 따르는 대역모반(大逆謀反)이라는 것입니다.

신 등은 뜨거운 피가 가슴에 끓어 넘쳐 지위를 벗어난 망령된 말로 숭엄하신 성상을 번거롭게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시원스레 결단을 내리시고 미천한 신의 말을 받아들여 속히 오적을 참수함으로써 천하에 사죄하신다면 기강이 서고 군주의 위엄이 떨쳐져 이미 실추된 국권이 다시 회복되게 될 것입니다.”

8 을사오적만 있던게 아니라...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을 펴냈다.)의 윤덕한[9]은 사실 "을사늑약"의 최고 책임자는 고종이라고 주장했다. 그 주장에 따르면, 당시 신문들은 유림들의 상소만 믿고 을사오적에게만 책임을 물었다는 것이다. 고종은 "을사늑약"을 체결했어야 하나, 이걸 내각에게 책임을 넘겼으며 "협의하여 처리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대한국 국제에서는 '제9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각 국가에 사신을 파송 주찰(駐紮)케 하옵시고 선전 ·강화 및 제반약조를 체결하옵시느니 공법에 이른바 자견사신(自遣使臣)이니라.'라고 나와 있다. 한마디로 원래 을사조약을 체결할 권리는 신하가 아니라 고종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유림들로써는, 감히 임금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었고 사실 궁궐 내부의 일들을 몰랐기에 그들은 그저 '고종이 반대했는데, 신하들이 감히 체결'한 걸로만 알고있었다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때문에 그 유명한 "을사육적" 드립이 나왔다. 그러나 고종이 끝끝내 을사조약을 반대했을 뿐더러 비준을 하지 않았던 사실을 생각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을사조약에 찍힌 도장이 고종의 옥새가 찍은 도장이 아닌 박제순의 도장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위에서 보듯 을사오적 외에 반대한 3명 중 한규설만 제외하고는 모두(이하영, 민영기)가 변절했으며, 조약 체결 후 궁내대신으로 고종을 협박한 이재극이라는 인물도 있었다.

또한 조약이 체결되던 손탁호텔 밖에선 이토 히로부미가 불러온 일본군이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 결과 조약에 참여한 8명의 대신들은, 겨우 찬성한 것 처럼 5대 3으로 조약체결에 찬성했다는 것이다. 박제순의 경우엔 조약에 반대했으나 협박에 못 이겨 "마음대로 하라"라고 하여 찬성했다고.

참고로 저 때 반대한 참정대신[10] 한규설은 궁에서 결사반대했다가 일본군에게 감금되었다. 이후 감금된 것이 풀리자마자 즉각 탁지부대신(민영기), 법부대신(이하영)을 제외하고 전원을 해임시켰지만 자신이 오히려 해임당했다.

9 여담

조약체결 1년전인 1904년에 공교롭게도 체결장소였던 덕수궁에 화재가 발생하기도 하였는데 이유는 궁궐 안에 있는 온돌장비를 교체하려다가 목조로 된 궁 안에 그대로 불이 붙어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한다.

영화 《한반도》에서 이것을 가지고 이런 플롯을 짰다.

을사조약을 비롯한 여러 불평등조약에 찍힌 것은 황제의 국새다. 고로 조약에 의거, 한국의 여러 권리는 일본에 있으며, 영화에서는 경의선 철도 부설권이라든가... 그러므로 국새가 조작되었다는걸 밝히면 조약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

물론 이게 패전 이후로 이어진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판타지다. 을사조약은 국제법 위반의 소지가 큰데다가 박정희 때 일본과 맺은 한일기본조약 중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일본과 맺은 조약은 무효다'가 있기 때문에 어차피 성립되지 않는다. 정확히는 '이 조약이 맺어지기 전에 맺은 조약은 이미 무효다'인데... 원래 한국측에서는 기존 조약 및 협정을 '원천 무효'라고 주장했고, 일본측에서는 '이제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논란이 있었으나 차관이 급했던 한국이 양보함으로서 결국 한국어본과 일본어본에는 각각 '이미 무효', '이제 무효(もはや無効)'라고 표현하고 영어본에서 'already void and null(이미 무효하며 효력이 없음)'이라고 표기하기로 합의하게 되었다. 조약 당사자의 서명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무효 요건이 된다는 주장도 있다. 애초에 대한제국의 비준절차는 황제의 부서였다. 비준절차도 거치지 못한 조약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므로 무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날 11월 17일을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독립투사들의 추모절(오늘날의 순국선열의 날)로 지정하며 을사조약 강제 체결에 대한 역사적인 치욕을 새기기 위해 지정하게 되었다.

2015년, 도츠카 에타로 전 류코쿠대 법과대학원 교수가 을사조약의 원본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지금도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며, 당시 일본 법학계에서 조약에 관하여 비준필요설을 따르고 있었던 만큼 '법적 부재의 사실'에 의하여 조약이 무효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10 관련 어록

"아! 원통하구나. 아! 분하다. 우리 이천만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과 기자 이래 4천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히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구나! 동포여! 동포여!"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
(전략) 이 민영환은 한번 죽어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이천만 동포에게 사죄하려 한다. 나는 죽지만 죽지 않고 구천에서도 기필코 여러분을 도울 것이니 바라건대 우리 동포들은 더욱더 분발하여 힘쓰고 뜻을 굳게 갖고 학문에 진력하며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해 우리의 자주 독립을 회복한다면 나는 지하에서나마 기뻐할 것이다.
충정공 민영환의 유언
"신은 어제 정부가 조약을 체결한 일에 대해 너무나 놀랍고 의심스러워 줄곧 근심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이 과연 얼마나 중대한 관계를 가지는 문제입니까? 조정에 물어서 협의하여 타당하게 처리하여야 할 것이었으나 바로 한밤중 대궐에서 그 누가 알까 두려워하면서 부랴부랴 회의를 열어 이렇듯 일을 크게 그르쳤습니다. 이것은 지금 모든 사람들의 울분을 터뜨렸을 뿐 아니라 실로 천하의 영원한 죄인으로 되었으며 또 국법으로 볼 때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황상(皇上)께서는 빨리 처분을 내려 그날 회의한 모든 대신(大臣)들을 모두 법에 따라 처벌하심으로써 온 나라의 한결같은 울분을 풀어 주소서."
궁내부 특진관 이근명
"천하라는 것은 천하 사람들의 천하이지 한 개인이나 한 집안의 사적인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라에 중대한 일이 생기면 존엄한 임금도 위에서 독단(獨斷)하지 못하고 반드시 시임 및 원임 대신(大臣), 2품 이상의 관원들, 지방에 있는 유현(儒賢)들과 의논한 다음에 결안(決案)하는 것이 바로 조종조(祖宗朝)의 변함없는 법이었습니다. 이번 일본 공사가 청한 5가지 조목은 관계되는 것이 어떠하며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한두 신하들이 폐하의 뜻을 받들지도 않고, 옛 법을 따르지도 않고 어찌 제 마음대로 옳거니 그르거니 하면서 나라를 남에게 넘겨준단 말입니까?"
원임 의정 조병세
이것은 일조일석(一朝一夕)의 일이 아니라 저들이 오랜 세월을 경영해서 이룩한 것이니, 그 형세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이 마관조약(馬關條約; 시모노세키 조약) 및 일본과 러시아 간의 선전 포고서를 낸 이래로 대체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주 및 영토를 보전한다고 말한 것이 몇 차례이며, 우리나라의 이익을 약탈하고도 걸핏하면 한국과 일본 양국이 서로의 우의를 더욱 친밀하게 한다고 말한 것이 또한 몇 차례입니까? 그 사기와 모욕을 헤아릴 수 없음이 이와 같은데 지금 저들이 이른바 황실을 보전한다고 하는 것을 폐하께서는 과연 깊이 믿으십니까?
최익현. 그리고 그의 말은 이루어지고야 말았다.
슬프다. 이 종사는 장차 무너질 것이요. 온 겨레가 남의 종이 되겠구나. 구차히 산다 한들 욕됨이 더할 뿐. 어찌 죽는 것보다 나으리오?
주영 서리공사 이한응

11 같이 보기

  1. 자기네끼리 땅따먹기하던 걸 정리하려고 헤이그 회의를 열었고, 이걸로 해결 안 되니까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것이다.
  2.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실질적으로 온건파였고, 어차피 먹을 거지만 국제 정세도 있고 해서 지금은 보호국으로 냅두자, 이런 식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견해를 설명했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하면서 일본 급진파의 주도대로 조선합병이 빨리 이루어졌다고 적혀 있었으나 최근 개정판에서는 일본 우익의 주장이라는 견해를 반영해서인지 완전히 수정되었다.
  3. 세로쓰기임에 유의하자.
  4. 이는 8인이 모두 반대를 하여도 잘라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5. 이 발언 응답으로 이하영은 간신히 을사'육적'의 신세를 모면하나 이후의 행보는... 알다마다다.
  6. (...) 고종의 말도 문제가 있지만 이렇게 알아서 잘 팔아먹는다.
  7. 오적+이하영의 발언들 가운데 가장 뻔뻔한 대답이다(...)
  8. (...) 이렇게 은근슬쩍 넘어간다. 하긴 5적에 민영기나, 이하영, 이재극이 끼지 않고, 박제순처럼 민영기와는 반대로 조약 내용엔 참여하지 않은 자도 있으니 자기들 딴엔 억울 할 수도 있겠다. 특히 이완용 정도라면 억울(?!)할 만도 할 것이고... 이 글의 후반부는 한규설을 위선떤다고(!!) 까고 있다.
  9. 김완섭에게 사랑받는 학자. 해당 문서 참조. 참고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에도 참여.
  10. 내각 회의를 주도하는 2번째 책임자. 좌의정이나 부총리급이다. 그러나 실상은 의정대신(영의정)을 대신한 국무총리 대행급인데, 의정대신이 조병세를 마지막으로 공석이었기 때문이다. 1907년 6월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