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송의 역대 황제 | |||||
3대 태조 문황제 유의륭 | ← | 비정통 원흉소 유소 | → | 4대 세조 효무제 유준 |
묘호 | 없음 |
시호 | 없음 |
연호 | 태초(太初, 453년) |
호칭 | 원흉(元兇) |
성 | 유(劉) |
휘 | 소(劭) |
자 | 휴원(休远) |
생몰기간 | 424년 ~ 453년 5월 27일 |
재위기간 | 453년 2월 ~ 453년 5월 27일 |
劉劭
(424 ~ 453)
유송의 3대 황제 문제 유의륭과 문원황후(文元皇后) 원씨(袁氏)[1]의 장남이다. 자는 휴원(休远)으로 원가 3년(429년) 5월, 태자로 봉해졌다. 초기에는 평판이 좋았으나, 점점 평판이 낮아지고 과실이 많아서 유의륭은 원가 30년(453년) 정월, 태자 유소를 폐하고 둘째아들 시흥왕 유준(劉濬)을 죽일려고 했다. 하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들에게 알려지게 됐고 이에 분노한 유소와 유준은 무당 엄도육 등과 함께 옥으로 유의륭의 모습을 조각하여 함장전 앞에 묻고 저주했다. 그러나 발각되어 땅에 묻었던 옥인형과 저주 편지들이 발견되자 유의륭은 대단히 노했다. 이듬해 정월, 도망친 엄도육이 유준의 집에 숨어있다는걸 알고 유의륭이 내놓으라고 했으나, 거절당하자 그들을 처리할 결정을 세웠는데 오랫동안 미루며 매일밤 상서복야 서담지와 의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반숙비[2]가 알리는 바람에 이것을 알게 되었고 2월 유소는 조서를 위조하여 천 여명을 이끌고 황궁에 쳐들어갔다.
그날 밤도 유의륭은 서담지와 날이 밝을 때까지 폐립에 관한 일을 의논하느라 잠자리에 들지 않았는데 유소의 심복 장초지가 칼을 들고 오는 것을 보고 책상을 들고 막았으나, 결국 유의륭은 칼에 맞아 다섯 손가락이 모두 절단된 뒤 살해되었다.이것이 무엇이냐?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유소야?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아바마마 이것은 중국사 최초로 황제 아버지를 태자 아들이 시해한 패륜이다. 유소는 스스로 황제에 즉위해 태초(太初)라는 연호를 쓰며 3개월 동안 황제 노릇을 했다. 그는 보병교위 심경지에게 밀명을 내려 무릉왕 유준(劉駿)을 살해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심경지는 유준과 함께 유소를 공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기에 이복동생이자 유의륭의 6남 경릉왕 유탄, 유유의 여섯번째 아들로 유준의 숙부인 형주자사 남군왕 유의선, 옹주자사 장질, 사주자사 노상 등도 함께 유소 토벌에 나섰다. 결국 유소는 4월 신정에서 유준에게 격파되었으며 5월 건강에 입성한 유준에 의해 본인과 시흥왕 유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시체는 거리에 내걸렸다.
동시에 그의 처이자 잠시동안 황후였던 은씨(殷氏)[3], 왕씨(王氏)[4]는 물론 아들 태자 유위지(劉偉之), 유적지(劉迪之), 유빈지(劉彬之), 이름 불명의 아들, 딸까지 처자가 모두 죽음을 당했다. 황제에 즉위한 효무제 유준은 이들을 채찍으로 때리고 독주를 부어 독살했다.
평가
중국사의 아서스 메네실
유소는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아인데다가 재위기간이 짧아 황제의 시호, 묘호 그런 거 없다. 거기다 태자였지만 태자 시호 역시 받지 못했다. 그래서 정사 <송서>와 <남사>에서는 본기 대신 열전에 들어갔는데 그것도 원흉(元兇) 소(劭)로 기록되어 역사적 심판을 받았다.
애초에 황제가 될려고 아버지를 시해한 것도 아니고 폐태자가 될 위기에 앙심을 품고 저주하다가 걸려서 결국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어 어쩌다가 황제가 된 경우이다. 이처럼 황제가 되면 뭘 어떻게 할지 마스터플랜도 전혀 없었고 아버지를 시해하고 즉위해 정통성도 전혀 없었고 기반도 다져지지 않고 안정이 안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동생을 제거하려다가 역관광을 탄 케이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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