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의륭

유송의 역대 황제
2대 소황제 유의부3대 태조 문황제 유의륭비정통 원흉소 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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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중종(中宗) → 태조(太祖)
시호문황제(文皇帝)
연호원가(元嘉, 424년 ~ 453년)
유(劉)
의륭(義隆)
생몰기간407년 ~ 453년 3월 16일
재위기간424년 9월 17일 ~ 453년 3월 16일

1 소개

유의륭(劉義隆, 407년 ~ 453년, 재위 424~453)

육조시대 유송의 세번째 황제. 사실상 2년 밖에 재위하지 못한 아버지 무제 유유와 막장으로 살다가 폐위되고 비명횡사한 흑역사 큰형 소제 유의부를 제외하곤 초대 황제나 다름 없으므로 태조라는 묘호를 받았다. 시호는 문제(文帝). 개막장과 인간말종들이 철철 넘치는 유송 왕조에서 그나마 정치를 한 황제로 연호를 딴 '원가(元嘉)의 치(治)'의 명군으로서 송의 전반기 29년(29년 4개월)을 다스렸다. 그의 치세는 유송이 존속했던 59년의 반에 거의 육박한다.

2 즉위전

의희 3년(407년) 경구에서 유유와 호도안 사이에서 삼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거아로 4살 때 자의참군 유수의 보좌를 받아 경구에 주둔했고 팽성공과 의도왕이 되었는데 진서장군, 형주자사도 겸했다. 유의륭은 키가 7척 5촌이었고 어려서 총명하여 경서와 사서를 즐겨 읽었고 예서에 능했다. 유유는 즉위 초에 그에게 죄수를 심문하도록 했는데 그의 판단이 이치에 맞아서 유유는 기뻐했다. 의희 7년(411년), 겨우 4세였던 유의륭을 데리고 유유는 전방으로 가서 사기를 고양시키기도 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큰형 유의부가 황음무도하여 폐위되었다가 결국엔 살해되고 무제의 둘째 아들 노릉왕 유의진도 여기 휘말려 살해되었다. 원래 유의부를 폐위시킨 서선지 등은 유의진을 황제로 세우려고 했으나, 서희지가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불만을 품어 적합하지 않다는 핑계로 그냥 죽이자고 했고 결국 유의진도 죽였다.[1]

3 치세

서선지와 부량은 유의륭을 강릉에서 맞아들여 제위에 모시게 했고 사마 왕화가 수도로 갈 것을 강하게 주장하자 유의륭은 수도로 갔다. 유의륭은 부량을 불러 형님들이 살해당한 전말을 듣고 오열하자 좌우 신하들도 모두 슬픔에 젖었고 군사들은 감히 광경을 지켜 보지 못하고 부량은 식은 땀이 나서 한 마디도 말을 못했다. 8월에 유의륭은 건강 중당에서 즉위하여 이듬해 정월부터는 친히 정사를 다스렸다.

원가 3년(426년) 정월에 유의륭은 서선지, 부량, 사회가 형님들을 죽인 죄행을 공개하고 그들을 주살하라고 명을 내렸다. 정북장군, 남연주자사 단도제를 파견하여 사회를 토벌하게 했는데 결국 서선지는 자살하고 부량은 피살되었으며 사회는 변명을 했으나, 결국 연두에서 사로잡혀 피살되었다. 토사구팽? 유의륭은 유유의 중앙집권 정책을 계승하여 호족들을 압제하고 호적을 정리했으며 부세를 경감하고 몸소 적전을 경작했다. 또 농업 생산을 격려했으며 유가 학술을 제장하고 현학, 사학, 문학을 제창하여 경제와 문화가 모두 발달하니 이를 '원가지치'라 불렀다. 유의륭은 원가 6년(429년), 대중정 배송지를 시켜 정사 삼국지의 주석을 달게 했다. 정사 삼국지는 워낙 간략하여 읽기에 답답했는데 배송지는 당대 남아 있던 여러 사서들을 인용해 원전을 본디 분량의 2배 분량으로 늘려 서술할 수 있게 했고 올바른 평가와 역사관으로 명작을 탄생시켰다.

이렇게 국력이 부강해지고 문화 산업도 장려했지만 북위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크게 소모되어 점점 국력이 약해졌다. 이전에 북위가 유유가 사망하고 유의부가 뻘짓을 하는 틈을 타서 낙양, 허창, 활대, 호뢰관, 금용성을 점령하자 유의륭은 북벌을 꿈꿨다. 하지만 내란과 국력의 한계로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가 원가 7년(430년) 3월, 우장군 도언지를 파견하여 북위를 공격하게 했다. 도언지는 확오, 활대, 호뢰관, 금용성 등의 요충지를 차례로 수복했지만 8월에 북위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대패를 당하여 배를 태우고 수레와 물자를 모두 버리고 도망쳐야 했다. 도언지는 사실 능력이 아니라 유의륭의 심복이라서 북벌군을 이끌었는데 담이 작아서 멀리서 들려오는 북위군의 함성과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 소리를 듣자 후퇴해 버렸다. 원가 13년(436년), 유의륭이 병들어 자리에 눕자 유유의 네번째 아들이자 그의 아우였던 팽성왕 유의강에게 정사를 맡겼다.[2] 그런데 유의강의 부하들이 병든 유의륭을 죽이고 유의강을 옹립하려다가 발각되자 역적들은 토벌하고 아우 유의강은 옹립된 죄밖에 없었으므로 유배를 보냈다.

그런데 원가 22년(445년), 또 유의강의 부하들이 유배된 유의강을 황제로 옹립하려다가 발각되었는데 이번에도 부하들만 죽이고 유의강은 아예 서민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원가 27년(450년) 3월, 북위가 현호를 공격해오자 북위를 막는 사이에 혹시 유의강을 옹립하려는 세력이 나타나면 어쩔가 노심초사하던 유의륭은 결국 유의강을 죽였다.(...) 일단 북위는 42일이나 공격하다가 함락시키고 못하고 돌아가자 6월에 유의륭은 다시 북벌을 감행했다. 그러나 군수 물자가 부족하여 왕공, 비빈, 조정과 지방 관리, 부호, 승려들에게 황금과 비단, 잡물을 헌납하게 하고 자금을 빌렸다. 또 병력을 채우기 위해 여러 주에서 장정들을 징발했으며 7월, 북위를 쳐서 확오, 낙안을 점령하고 활대를 포위했다. 그러나 9월에 북위는 대군을 이끌고 활대를 구원했으며 10월에 다시 송나라는 대패를 당하고 오히려 북위군은 다섯 갈래로 대규모적인 반격을 개시했다. 일단 송군의 거점인 팽성, 우이는 피하고 장강 북쪽의 과보를 공격하자 건강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북위군은 송나라 깊숙이 들어와서 양식과 말먹이를 가지고 오지 못해서 약탈에 의존해야 했는데 회수를 건너자 백성들이 도망치는 바람에 약탈할게 없어서 결국 낙타와 명마를 송나라에 선사하면서 화친을 하자고 했고 송나라도 산해진미를 주며 화답했다. 결국 이듬해 정월 북위군은 물러나면서 농지에 불을 지르고 백성들을 끌어갔는데 이 전쟁에서 두 나라는 모두 막대한 손실을 봤다. 북위는 6주를 공격할 때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데 장정들은 허리를 잘랐고 어린아이들은 긴창에 꿰어 휘두르면서 장난을 쳤다. 북위의 군사들과 말도 과반수가 살상되었고 이렇게 원가지치는 점차 쇠락해져 갔다.

원가 30년(453년) 정월, 유의륭은 장남이었던 태자 유소를 폐하고 둘째아들 시흥왕 유준의 과실이 많아서 유준을 죽일 생각을 했다.[3] 하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들에게 알려지게 됐고 이에 분노한 유소와 시흥왕 유준 형제는 원가 29년(452년) 7월, 무당 엄도육 등과 함께 으로 유의륭의 모습을 조각하여 함장전 앞에 묻고 저주했다.

그러나 발각되어 땅에 묻었던 옥인형과 저주 편지들이 발견되자 유의륭은 대단히 노했다. 이듬해 정월, 도망친 엄도육이 유준의 집에 숨어있다는걸 알고 내놓으라고 했으나 거절당하자 그들을 처리할 결정을 세웠는데 오랫동안 미루며 매일밤 상서복야 서담지(徐湛之)[4]와 의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반숙비가 알리는 바람에 이것을 알게 되었고 2월에 유소는 조서를 위조하여 천 여명을 이끌고 황궁에 쳐들어갔다. 그날 밤도 유의륭은 서담지와 날이 밝을 때까지 폐립에 관한 일을 의논하느라 잠자리에 들지 않았는데 유소의 심복 장초지가 칼을 들고 오는 것을 보고 책상을 들고 막았다. 그러나 칼에 맞아 다섯 손가락이 모두 절단되었고 서담지와 함께 살해되었으며 이듬해 3월에 장녕릉에 안장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패륜아 유소가 3개월 정도 태초(太初)라는 연호를 쓰며 황제 노릇을 했다. 그러나 그는 재위기간이 짧았고 무엇보다 아버지를 시해했기에 정통성이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유의륭의 삼남 유준에게 죽었으므로 시호와 묘호가 없다. 참고로 그 혼란 속에 유준의 어머니 반숙비는 유소의 군사들에게 죽었다.

4 평가

유의륭은 총명하고 어질고 너그러웠으며 검소했다. 또 정사에 부지런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문학과 유학을 매우 존중했다. 그러나 결점들이 있었는데 일단 제갈량도 아니고 그는 남의 일까지 모두 대신했다. 유의륭은 북벌시 장수들에게 계율을 지시했고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자신의 지시가 없으면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게 원격 조종을 했다. 즉, 자신은 수도에 가만히 앉아서 아주 멀리 있는 장수들을 명령한 것인데 정작 위기가 닥치자 유의륭의 명령을 기다리는 사이 공격도, 퇴각도 하지 못해 대패하고 말았다. 또 인재를 보는 능력이 뒤떨어져 자신이 총애한다는 이유로 심복 도언지를 북벌 수장으로 삼고 북위의 반간계에 넘어가 명장 단도제를 죽여버렸다. 그러고는 훗날 후회한다.

단도제는 지용을 겸비하고 이미 예전부터 공이 높아 위망이 높았으며 그의 부하들도 백전노장으로 유능했다.[5] 그러나 도언지는 운빨로 성과를 약간 거뒀지만 원래 담이 작고 무능해서 북위군은 천리 밖에 있는데 바람 소리를 듣고 북위군이 온다고 간담이 서늘해져 주변 권고도 듣지 않고 배를 불태우고 무기와 수레, 물자를 버리고 퇴각했다.

마지막으로 결단력이 부족해 태자였던 유소와 시흥왕 유준이 과실이 많고 성품이 좋지 못해 그들을 추궁하고 책망을 자주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두 아들은 옥으로 유의륭의 형상을 만들어 황궁 뜰에 묻고 저주했는데 이게 발각되었다. 유소는 폐위하고 유준은 죽이려고 계획은 대충 세웠으나, 실행하지 않고 매일 밤 서담지와 의논만 했다.

결국 이걸 알게 된 유소와 유준은 조서를 위조하여 군대를 동원해 황궁을 습격하고 유소의 심복 장초지는 유의륭을 죽여서 결국 중국 황제 역사상 최초로 황제 아버지를 태자 아들이 죽여버리는 패륜이 발생하게 되었다. 물론 군주인 아버지를 아들이 죽이는 일은 이미 춘추전국시대 때는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진시황 이후 황제가 생긴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1. 유의진은 아버지 유유가 북벌하던 시절에 같이 종군했다가 아버지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철수할 때 북벌군 총사령관을 맡은 적이 있었다. 물론 당시 12세였던 나이는 둘째치더라도 이렇게 어린 애한테 제대로 된 지휘력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문제는 이 놈이 약탈을 마구하고 가렴주구에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등 막장이었다. 그래서 정말 황제로 세우지 않은 것은 진짜 잘한 것이다.
  2. 유의륭은 이 동생의 말을 듣고 명장 단도제를 죽이는 병크를 저지른다.
  3. 원래 이들은 모두 이복형제들로 유소는 원씨(원제규), 유준은 반숙비의 소생이었다. 또 삼남 유준(劉駿)은 노혜남의 소생이었는데 그래서인지 가족간의 정이 없었고 평소에도 과실이 많아서 추궁과 책망을 자주 당했다. 사실 시흥왕 유준은 그의 이복동생이자 유의륭의 넷째 딸이었던 해염공주(장미인 소생)와 사통한 적이 있었다. 해염공주는 조천에게 시집갔는데 이 불륜이 조천에게 알려지자 조천은 해염공주를 욕하며 때렸다. 이에 유의륭은 조칙을 내려 두 사람이 이혼하도록 하고 공주를 낳은 장미인을 공주 교육을 제대로 안 시켰다는 이유로 죽였다.
  4. 유유의 사위로 유유의 장녀 회계공주의 남편이었다. 회계공주와 유의륭은 이복 남매지간이었으나, 어쨌든 서담지는 유의륭의 처남이었던 셈이다.
  5. 단도제는 병법 36계의 창안자라는 설도 있는데 확실한 것은 아니다. 36가지 계략을 다 창안했다기보다는 이전부터 전해지는 여러 계략이나 책략들을 36계로 정리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 어쨌든 최후를 맞으면서 "너희들의 만리장성을 스스로 무너뜨리는구나!(壞汝萬里長城:괴여만리장성)"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부하로 설융과 고진지라는 맹장이 있었는데 용맹이 관우, 장비에 비견되었었지만 이들도 단도제의 죄에 연좌되어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