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산대군

月山大君
1454~1488

1 소개

이름은 정(婷)으로 호인 풍월정(風月亭)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 최고의 자기관리왕

2 생애

1454년 수양대군의 장남 도원군과 한확의 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도원군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자신도 세손이 되는 줄 알았으나... 세살때 아버지가 죽는다. 장자 계승의 원칙에 따라 세자가 죽으면 세자의 아들이 대통을 잇는 게 순리이지만 세조는 자신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을 세자로 책봉해 버리면서 월산대군은 완전히 물먹게 된다.[1]

그렇게 시간은 흘러 1468년 해양대군이 예종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예종이 불과 재위 1년 2개월만에 사망하면서 월산대군에게도 희망이 생긴다. 당시 예종의 아들(제안대군)은 불과 4세였기에 세조의 장손인 월산대군이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나이도 시의적절하게 15세라 내심 기대를 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 수빈 한씨가 당시 최강의 권신인 한명회의 딸과 자신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을 결혼시킨 일이 빌미였다. 이 일을 한명회와 수빈의 왕위를 염두에 둔 사전 모의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미 왕위가 자신의 시동생인 예종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예종이 요절만 안한다면야 자동적으로 예종의 아들에게 왕위가 돌아갈 건데 역모를 꾸밀 각오가 아니고서야 왕위를 노리고 한명회와 결탁해서 사돈관계를 맺었다는 설명은 비합리적이다.

각설하고 예종이 죽은 당일날 신숙주, 한명회 등은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와 논의하여 한명회의 사위라서 그나마 정치적 보호자가 더 많은 동생 자을산군을 차기 왕으로 결정한다.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왕위에 오르고 나서 2년 뒤 그는 기존의 월산군에서 월산대군으로 승진진봉되었다. 왕위를 빼앗긴 것에 대한 위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도 있는데 어차피 월산대군의 아버지인 의경세자가 성종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덕종으로 추숭되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동생이 왕위에 오른 후 월산대군은 정말 철저한 자기관리로 자신의 안전을 지킨다. 사실 성종보다 계승 서열이 높았기에 (성종의 친형) 까딱하면 역모의 추대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또한 이러한 자기관리는 자신 뿐만 아니라 가노(家奴)들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어서 다른 시대에 흔히 발생한 왕족 집안의 사람이 배경을 믿고 행패를 부리는 사건도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 흔한 술실수 한번 않고 망원정(望遠亭)에서 시와 글에 묻혀 지내다시피 살면서 보내게 된다. 성종은 그러한 형을 가슴 아프게 여겨 그를 자주 만남으로서 위로해 주었다. 월산대군은 1488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아무래도 평생 강박에 가까운 자기관리로 인한 스트레스가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월산대군은 당대의 문장가로 유명해서 중국에서도 월산대군의 시가 알려져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월산대군이 살던 집은 이후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자 선조가 임시 궁궐로도 사용하는데 지금의 덕수궁이다.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가 연산군과 간통을 하였고 그 결과로 임신을 하게 되자 박씨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자결하였고 이에 분을 품은 박원종이 중종반정을 일으켰다는 야사가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연산군 항목 참조. 어쨌든 오래 살면 연산군을 봐야했다..

3 후손들

월산대군은 정실 부인과의 사이에서는 자식을 두지 못하고 서자 덕풍군(德豊君) 이이(李恞)를 두었는데 덕풍군의 장남 파림군 이주는 요절하고 그의 차남 계림군 이유[2]과 삼남 전성도정[3] 모두 을사사화 때 연루되어 사사 당하였다. 그러나 계림군과 전성도정의 자식들은 화를 피해 대를 계속 이어 나갔고 현재 전주 이씨 계성군파로 이어지고 있다. 계림군의 후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 여사와 DJ정권 시절 노동부장관을 지낸 이기호 장관이 있다.[4]
  1. 사실 해양대군도 8살이라서 거의 그게 그거였지만. 솔직히 말해서 세자가 죽거나 폐해졌을때 세자의 아들을 대신 잇게 한다는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양녕대군 때도 그랬고 먼치킨 세종대왕이 있으니까 의경세자 때도 그랬고 소현세자 때도 그랬다. 좀 다른 사례지만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 되었을 때도 대비의 의견에도 불구 연산군의 세자는 (어쩌면 당연히) 계승하지 못했다. 예외가 있다면 생부인 사도세자가 죽었음에도 왕위에 오른 정조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이 있다. 헌종 말고는 왕위계승자가 아무도 없긴 했지만.
  2. 성종의 서자 계성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3.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4. 이희호 여사와 3촌 관계로 알려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