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대군

齊安大君

1 조선의 왕자

1466년 2월 13일 ~ 1525년 12월 14일

조선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차남으로 이름은 현(琄). 예종이 17살에, 안순왕후가 22살에 본 아들이다.

예종이 12살에 본 형 인성대군은 3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다. 그러므로 본래대로라면 예종이 사망했을 때 왕위에 올라야 할 몸이었다. 뭐 그렇게 따지면 의경세자의 장남 월산대군이 원래는 예종 대신 왕이 돼야 했다[1]

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리다(4살)는 이유로 할머니 되는 세조정희왕후덕종의 차남 자을산군을 지목하여 왕위에 올리게 되며 제안대군은 완전히 물 먹게 된다(...)[2] 성종이 나름대로 괜찮은 임금이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지만, 그것과 상관 없이 성종 5년(1474년) 증조부 세종대왕의 적7남인 종조부 평원대군[3] 임(琳)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한때 왕위 제1계승자였던 원자였지만 대군의 봉사손으로 추락한 것이다. 이러한 조처는 성종 초기 수렴청정을 하던 정희왕후가 본인의 뜻과는 상관 없이 역모에 휘말려 죽음에 이르기 쉬운 왕실 종친을 보호하기 위한 심모원려(深謀遠慮)의 결과라는 설도 있다. 여튼 단종 시즌 2가 되는 일은 면했다.

하긴 그럴 만도 한 게 제안대군은 멍청하기로 유명해서 당대에 여러가지 일화를 남겼다. 심지어 남녀 간의 일을 알지 못해서 자손을 낳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남아있다.

명종 때의 <패관잡기>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성종께서 예종의 후사가 없음을 마음 아프게 여겨 일찍이 "제안에게 남녀관계를 알게 해주는 자에게는 상을 주겠다" 하시니, 한 궁녀가 나섰다. 궁녀는 밤에 그 집에 가서 제안이 잠든 사이에 그의 음경을 더듬어 보았더니 제대로 일어서고 빳빳했다.몸을 굴리어 서로 맞추어 보았더니, 제안이 깜짝 놀라 큰 소리를 지르면서 물을 가져오라 하여 자꾸 그것을 씻으면서 "더럽다, 더럽다"고 부르짖었다. 근데 이거 현대의 진보적인 나라 기준으로 하면 강간인데 어쨌거나 동정은 졸업했구나

이 일화를 두고 패관잡기의 저자인 어숙권은 제안대군을 "원래 남녀관계의 일이란 인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거늘[4] 이것을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했으니 제안은 정말 고자 바보가 맞다"고 평하기도 했다. 여기서 어숙권의 말은 '성관계라는 것을 어떻게 하는지조차도 몰랐다'는 의미다. 오줌 누는 하녀의 생식기를 두고 "메추리 둥지"(...)라 했다는 이야기도. 그냥 EDPS인 것 같은데요

그런데 남녀 관계의 일을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남녀 관계 스캔들을 좀 거하게 터뜨려서, 흔하디 흔한 이나 기생도 아니고 정실부인 문제로 10대 시절부터 큰 일 하나 터뜨렸다. 즉 14세에 간질 있는 자기 아내가 싫다고 엄마(안순왕후)한테 졸라 이혼한 후, 멀쩡히 재혼까지 했는데 3년 후 재혼처와 이혼하고 전처와 재결합(...)

둘째 부인[5]과 이혼하는 과정이 가관이었다. 아무런 명분 없이 다짜고짜 이혼할 수는 없는데, 이혼한 전처와 가까워지면서 이혼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제안대군은 여종 금음물, 내은금 등을 시켜서 독수공방하는 아내를 유혹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내가 여종들을 꾸짖고 내칠 뿐 소득이 없자, 아예 아내가 잠을 잘 때 몰래 여종들을 동침하게 해서 아내를 레즈비언이라고 모함했다. 하지만 아내가 완강히 자신이 모함을 당했음을 주장하자 여종들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었고, 여종들이 제안대군의 명을 받아서 자작극을 벌였음이 드러났다(...) 여종들은 곤장을 맞고 유배되었고 주인 잘못 둬서 이게 웬 팔자에도 없는 고생이람 아내와 이혼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제안대군은 어머니인 안순왕후를 찾아가서 징징대며 이혼을 시켜달라고 애걸복걸했고, 안순왕후는 성종을 찾아가서 "둘째 며느리가 버르장머리가 없으니 이혼을 시켜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죄도 없는데 어찌 이혼을 시키냐고 난색을 표하던 성종도 마지못해서 이혼을 허락했고, 소박맞은 아내는 얼마 안 가서 죽고 말았다.[6] 아내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 여담으로 이 제안대군의 둘째 부인 박씨는 바로 중종반정을 주도한 박원종의 누이이자, 월산대군부인 박씨의 여동생이다

성종은 제안대군에게 셋째 부인을 들여주려 했으나, 제안대군이 전처 김씨와 재결합을 허락해주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겠다고 시위를 하자 결국 혀를 차면서 3년만에 전처와 재결합을 허락했다. 이때 '나 허락 안해주면 평생 혼자 산다'고 협박하자, 성종이 "네가 네 처를 미워해서 내치지 않았느냐? 왜 미친년 널 뛰듯 하냐?'라고 반문하는데, '난 그런 거 모르겠고. 허락 안 해주면 평생 혼자 살 테다'라고 막가파식으로 응수하여 결국 허락을 받아낸다. 실록을 읽는 후대 사람도 웃기는데, 당대에는 어떠했겠나? 싶은 대목이다. 이 모든 게 10대 중반에 일어난 일이니, 어찌 보면 숙종보다 더 대단한 남자다. 순정파 제징징[7] 여담으로 이때 사촌형 성종에게 상소할 때는 언문(한글)으로 올린 탓에 승정원에서 다시 한문으로 번역하여야 했다. 일반 사대부 정도의 교양도 없었다는 얘기다.[8]

이 때문에 죽고 난 뒤 받은 시호는 영효(靈孝)인데, '영(靈)'은 시법해에 의하면 '어지럽지만 해를 끼치지 않은 것을 "영"이라 한다(靈亂而不損曰靈)'는 말이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한나라 영제를 생각하면 되는데 전임 군주 환제와 함께 '환령(桓靈)'이라는 단어가 암군의 대명사로 쓰이는 단어다. 한마디로 멍청했다는 것. '효(孝)'는 청상과부 엄마 안순왕후에게는 더없이 효자라서 그렇다.

이런 행동을 두고 멍청이인 척 하여 목숨을 보존하려 한 계책이었다는 설도 많이 있다. 제안대군은 혈통만 보자면 광해군영창대군이나, 효종 때 이석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종의 정통성에 큰 위협이 되는 인물이라 까딱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이 모든 사건들은 적절한 바보짓으로 의심을 피하고 혹시나 있을지 모를 역모에 엮이는 일을 피하기 위한 연극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평소에는 멍청해 보였지만 유교 예법을 따라야 할 때는 그 복잡한 예법에 어긋나지 않았다고.[9][10] 때문에 제안대군이 진짜 바보인지 연극이였는지는 수백년간 논쟁거리로, 당장 중종실록의 제안대군 졸기에서 사관도 당시 이런 소문을 실어가며 연극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었고, 100여년 뒤 유몽인어우야담에서 "제안대군은 역모에 휘말리는 걸 두려워해 바보짓을 하고 자손도 두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원인이야 어찌 됐든 제안대군은 전임자(?) 양녕대군과 달리 재혼 스캔들을 제외하면 딱히 망나니 짓은 하지 않았고, 조선 최악의 피바람이 불었던 연산군, 중종 때에도 '멍청해서(?) 왕위를 위협하지 않는 왕실 어른'으로 잘 대접받으며 중종 때, 60세까지 장수했다. 거기에 불화의 씨가 될 자손을 낳지 않았기에 후손이 없어 후대까지 역모에 휩싸이지도 않았다. 다만 친자손은 없었지만 봉사손을 둬서 전주 이씨에 제안대군파가 되었다. 이 모든 게 연기였다면 월산대군보다도 무서운 자기 관리. 어떤 의미에서는 조선판 이 사람일지도 모른다.

참고로 연산군을 홀린 여자로 이름이 높은 장녹수는 그의 노비이다. 그의 가노와 결혼해서 그 집 종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제안대군이 직접 넘겨주었다고. 연산군이 여자를 하사하기도 하였지만 대군저에 있는 미모의 노비들을 자꾸 데려가는 바람에 조카(종질)인 연산군에게 삐졌다는 기록도 있다.

성종은 원자였던 대군을 밀어내고 국왕에 오른 처지라, 늘상 마음의 빚을 안고 있었다. 숙모 안순왕후, 사촌누이 현숙공주(대군의 누나), 사촌동생인 대군의 일이라고 하면 일단 한 수 접어주는 경향이 실록에 자주 비친다. 난봉꾼으로 유명했던 현숙공주의 남편 풍천위(豊川尉) 임광재(任光載)[11]는 공주의 등쌀에 귀양을 가게 되고, 결국 유배지에서 병사하는 사건이 대표적이다.

연산군과 장녹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이라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연기했는데, 작가의 시각에 따라서 다르게 묘사된다.

신영균이 연산군으로 나온 신상옥 감독의 영화 <연산군(1961)>에서는 고 허장강이 역을 맡아서 억울하게 왕 자리를 뺏겨서 세월아 네월아 눈물 짓고 사는 허탈한 모습으로 잠깐 나온다.

#6 제안의 후원정자
김씨부인이 온다. 거문고를 앞에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제안.
김씨 : 간밤에... 누군가 장녹수의 시신을 거둬 갔다고 합니다.
제안 : ...
김씨 : 장녹수를 가엾이하는 사람이 또 있었던 모양입니다.
제안 : (본다)
김씨 : (한숨쉬며) 아무도 시신을 거두지 않으면 내손으로 묻어줄까 했습니다.
제안 : ...그래요?
김씨 : 장녹수를 투기하고 미워한 것이 후회가 됩니다.
제안 : (웃으며) 후회하실 것 없습니다. 부인께서 나같은 사람을 끔직히 생각하는 탓으로 녹수를 투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웃는 제안.
김씨 : 나를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대감.
제안 : 용서라니요? 부인이 뭘 잘못했습니까.
김씨 : 대감. 전처럼 시비들을 다시 들이세요. 그들과 가무를 나누시는 모습을 뵙고 싶습니다.
제안 : (웃으며) 녹수만한 아이가 있겠습니까.
김씨 : ...
제안 : 농으로 한 말입니다. 잊어버리세요.
김씨 : 대감. 한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녹수의 어디가 그렇게 좋으셨습니까.
제안 : ...
김씨 : 네 미모였습니까? 재주였습니까.
제안 : (웃으며) 녹수의 욕망입니다.
김씨 : ...
제안 : 끊임없이 탐하는 욕심이지요. 이룰 수 없는 일을 단념하지 않고 탐하는 욕심 말입니다. 나는 그것이 없어요. 그러니 산사람이 아니지요.
김씨 : ...
제안 : (생각에 잠겨)녹수와 함께 있으면 나도 모르게 힘이 느껴졌어요.
쓸쓸하게 웃는다.
김씨 : ...
가만히 한숨 내쉬는 김씨. 더욱 쓸쓸한 제안의 웃음.

드라마 장녹수에서는 MBC 주말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변태' 미술 교사로 개그 캐릭터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백윤식이 열연하면서 장녹수의 캐릭터들이 역대 연산군의 극화 중 최고라는 평판에 일조했다. 극중 제안대군은 권력에 뜻을 버리고 풍류에 맞춰 사는 은일지사의 모습을 보여주며, 장녹수의 연모와 유혹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연산군의 폭정을 간하기도 하였다. 연산군은 어렸을 때부터 제안대군을 따랐으나 제안대군이 하도 잔소리를 하자 나중에는 장녹수에게 "네가 아들을 낳으면 그 선물로 제안대군을 죽여주겠다" 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다행히도(?) 장녹수는 딸을 낳아 제안대군은 목숨을 건졌다(...) 나중에는 유자광이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겠다고 하자 화를 내며 쫓아낸다. 참고로 둘째 부인의 레즈비언 사건은 제안대군의 자작극이 아니라 진짜로 둘째 부인이 여종과 관계를 가진걸로 묘사되었다.

왕과 비에서는 박찬환이 제안대군으로 나와 연산군의 외로움을 달래면서 친하게 지내면서도, 자신의 일생을 망친 인수대비를 저주하면서 연산군을 복수의 도구로 이용하는 야누스 같은 인물로 나온다.[12] 욕망의 불꽃에서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딱 맞는 편. 왕과 나에서는 차분하고 단아한 순정파로서 누구와도 잘 지내는 호인으로 묘사되지만, 장녹수를 소개해주는 바람에 결과적으론 악역으로 꼽히기도 한다.

JTBC의 사극 인수대비에서도 어리숙하고 바보스러운 인물로 나온 것 같았으나, 마지막회에서 나와 연산군과 같이 술을 마시던 도중에 연산군이 인수대비의 사망 소식을 듣고 달려가고, 연산군이 앉던 자리를 보며 "대비마마, 그 자리는 본래 저의 자리였습니다"라고 중얼거리는데, 그걸 봐서는 바보스런 모습은 연기였다는 설을 따른 모양이다.

2 고려의 왕족

이름은 숙(淑).

신양백(新陽伯)[13]의 아들로 제안후에 봉해졌다. 1267년 김양백의 반란과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아 투옥도 겪었다.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지만.

그 뒤 제안대군에 봉해졌으며 충선왕원나라에서 원격 통치(...)에 들어가자 그가 왕의 업무를 분담했다.

1과는 한자가 똑같다.

  1. 아닌 게 아니라, 유교적 명분을 중시한 것과 상관 없이 적장남이라는 완벽한 정통성 때문에, 월산대군을 비롯한 조선의 적장자 가문들은 가시방석 위에서 살았다. 양녕대군처럼 적장남이 왕이 될 재목이 아니었다면 경우가 달랐지만 월산대군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원래 왕이 되었어야 했다' 라는 지위 때문에 후대의 왕들은 큰집의 적장손들에 대해 엄청난 견제를 가했다. 월산대군의 두 아들 계림군과 전성도주가 연산군사화에 휘말려 사사되기도 했고, 제안대군은 뒤에 보듯 예종가가 아닌 방계(세종대왕의 7남)로 입적되고도 어리석은 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견제를 심하게 받았다. 영창대군선조의 유일한 적자(사실상 적장자)라는 이유로 광해군과 대북의 손에 비명횡사했으며, 후대의 소현세자의 가계도 귀양을 가거나 난에 휘말려 사사되는 등 왕이 되지 못한 적장손 가문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못했다. 월산대군 본인은 그나마 철저한 자기관리로 거느리는 노비들조차 절대 사고치지 못하게 하면서 조용히 지낸 탓에 별다른 위협 없이 살 수 있었다.
  2. 사실 자을산군이 차기 왕으로 지목된 것은, 당대 최고의 권신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이었다. 조선 개국 이래 3번이나 정변이 있은 뒤였고, 어린 단종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일이 있은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왕실과 중신들이 정권의 안정성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명회가 부귀영화를 탐내기는 하지만 역모를 꾸밀 야심까지는 없다는 것도 주효했다.
  3. 요절로 후사가 없었다.
  4. 현대어로 번역하자면, '남자랑 여자 사이는 서로 마음만으로 사랑을 하는 게 아닌데...' 정도의 뜻이다.
  5. 박중선의 딸로 박원종의 누나이자, 월산대군의 정실 승평부부인의 여동생이다.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에게는 이모가 된다
  6. 당시에는 여자의 경우 재혼도 못했다. 특히 양반가문의 경우에는 더더욱 평생 불명예로 가는것이다.
  7. 단, 바로 재결합한 건 아니고, 재혼처가 죽은 뒤에야 재결합이 허가되었다고 한다.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한 건 성종 10년(1479년), 재혼처와 이혼한 건 성종 13년(1482년), 다시 재결합한 건 성종 16년(1485년).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8. 다만 조선시대 종친들이 공부를 소홀히 한 건 흔한 일이었다. 어차피 공부해봤자 벼슬길에 나설 수도 없고, 똑똑하다고 소문이라도 났다가는 자칫하면 엄한 역모 사건에 자신도 모르게 휘말릴 수도 있으니... 왕족은 공부 따윈 안 한다네
  9. 현대 유교 예법은 정말 많이 간소화된 것으로 유교가 국교였던 조선 시대에는 생활의 거의 모든 부분에 유교가 스며들어 있었다. 하물며 조선 시대의 왕족은 어떤 의미로 보면 유교의 성직자 계급이라고 보아도 될 만한 계급이었다. 당연히 유교 예법을 뼛속까지 익혀야 했다.
  10. 하지만 서번트 증후군의 영향이라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11. 임사홍의 첫째 아들이다.
  12. 대군께서는 왕손이시니 종묘사직을 생각하라며 연산군을 부추키지 말라는 신수근의 말에, 냉혹한 말투로 이렇게 대답한다. "그러자면 먼저, 대궐 안팎에서 인수대비의 그림자를 말끔이 씻어내야 할 것이야!"
  13. 현종의 4남 평양공의 7대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