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역대 국왕 | ||||||
루이 5세 | ← | 위그 카페 | → | 로베르 2세 |
이름 | 위그 카페 (Hugh Capet) |
생몰년도 | 941년 ~ 996년 10월 24일 (55세) |
재위기간 | 987년 7월 3일 ~ 996년 10월 24일 |
출생지 | 프랑스 파리 |
사망지 | 프랑스 파리 |
서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마지막 왕 루이 5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프랑스 공작이자 파리 백작이었던 위그 카페가 서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사실 루이 5세의 숙부이자 하 로렌로타링기아 공작이었던 샤를과 루이 5세의 이복아우인 아르눌프 드 랭스가 있었으나, 아달베롱과 제르베르 등 성직자와 귀족들은 강력한 귀족이자 군사력을 가진 카페 왕조의 위그 카페를 프랑스의 왕으로 추대했다. 이 때부터를 카페 왕조라고 하며, 프랑크 왕국의 분리가 완성되어 프랑스 왕국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사실 위그 카페 본인은 모계 쪽으로 카롤링거 왕조 혈족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서프랑크 왕국의 왕이었던 로베르 1세로 로베르 1세는 네우스트리아, 앙주 백작 강철공 로베르 4세의 아들로서 원래 왕족이 아니었다. 다만 그의 아내이자 위그 카페의 할머니가 샤를마뉴 대제의 고손자 베르망두아 백작 에르베르 1세의 딸 베아트리체였다. 로베르 1세는 원래 파리 백작이었는데 샤를 3세를 폐위하고 국왕으로 즉위한 후 923년 수아송 전투에서 전사했다. 로베르 1세의 아들 위그는 파리 백작을 세습했으며 독일 왕 하인리히 1세의 딸인 헤드비게와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사람이 바로 위그 카페였다. 그러나 위그 카페 시절에 프랑스 왕은 권위가 아주 약했다. 일단 영토가 사실상 파리와 오를레앙 부근에 국한되었다. 위그 카페 자신도 노르망디, 부르고뉴, 아키텐, 플랑드르의 제후들에게 시달림을 당했다.
심지어 왕조의 세습성도 불확실한 것이었는데 위그 카페가 즉위할 당시 대주교 아달베론(Adalbéron)은 "왕위는 세습이 아니라 기품과 지혜가 있는 자가 올라야 한다."고 주교와 제후들이 모인 회의에서 발언하면서 위그 카페의 왕위 선출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즉, 당초 서 아달베론과 프랑크의 귀족들은 프랑스 왕의 지위를 비슷한 시기 독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마찬가지로 세습제가 아니라 선거왕에 가까운 위치로 만들려고 했던 듯하다.
실제로 왕권이 약하다 보니, 오베르뉴 백작과 말다툼을 벌이다 제대로 뒷목 잡을 뻔 한 일화도 있었다. 참다 못한 위그 카페가 '누가 네놈을 백작으로 만들어 줬더냐?!' 라고 호통을 쳤더니, 백작 왈, '그럼 널 왕위에 앉힌 건 누군데?!'. 이 일화는 영화 300: 제국의 부활 에서 아르테미시아가 크세르크세스와의 말다툼 중에 사용하는 대사로 등장하지만, 당시 상황이 전혀 달랐다는 게 문제(이쪽은 왕권이 바닥을 치는데, 저쪽은 왕이 아니라 왕중왕.).
하지만 물론 위그 카페는 자자손손 왕위를 이어갈 욕심이 있어서 꽁수를 준비했다. 자신의 아들 로베르(로베르 2세)를 바르셀로나를 침입한 무어인(이슬람 교도) 토벌을 명분으로 '공동왕'으로 올려서 자신이 죽어도 선출이 새롭게 이루어지지 않고 아들이 자연스럽게 공동왕으로서 왕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위그 카페는 996년 10월 파리에서 죽었고 이미 공동 왕이었던 아들 현명왕[1] 로베르 2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이 공동왕 제도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는데 로베르 2세 이후에는 동아시아식으로 치면 사망 직전의 왕이 양위를 하여 상왕이 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동안 혈통 단절이 일어났다면 다시 선출제로 돌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여러 왕조가 짧게 교차한 동프랑크왕국-신성로마제국과는 달리 왕조가 단절되지 않고 안정적으로 이어지면서 자손인 사자왕 루이 8세 시대(1223~1226)에는 카페 왕조의 세습은 당연시되고 공동왕 제도도 없어진다. 단명한데다가 후임자가 성왕 루이 9세라서 명목상의 보험인 공동왕 제도도 필요 없었던 것이다.
자손이 매우 번성하였기 때문에 많은 유럽 왕가들이 그의 후손이다. 당장 프랑스만 봐도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는 모두 그의 자손이자 카페 왕조의 방계 왕조이다.- ↑ 또는 경건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