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나라의 인물
韋沖
생몰년도 미상
분주자사를 지내다가 581년에 산기상시에 임명되었으며, 당시 계호인 흉노 사람들을 징발해 장성을 수축했다가 분주에 사는 호족 1천여 명이 반발해 도망가자 수문제가 계책에 대해 물었다. 위충은 이들을 설득하기로 하고 한 달이 지나자 도착해 장성의 부역장으로 돌아갔다.
598년에 요서총관[1]을 지내고 있다가 영양왕이 말갈족의 무리 만여 명을 인솔해 요서를 공격하자 이들을 공격해 격퇴했으며, 이를 안 수문제가 분노해 군사 30만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게 했다.
1.1 미디어 믹스
연개소문(드라마) 6화에서 고구려가 공격하자 강이식과 일기토로 대등하게 겨루어 제법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무예에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2] 하지만, 한왕 양량이 노익장끼리의 일기토를 노인네들끼리의 장난이라며 조롱하면서 군대를 끌고 나가서 강이식을 죽이려고 하지만, 위충이 양량이 이끈 군대를 막아서 강이식이 도망치게 할 수 있게끔 해줬다. 이후 요택에서 고구려군과의 싸움에서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직접 선봉을 맡아서 지휘한다. 아군의 수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동요하지 않고, 공격을 명령하며 고구려군을 밀어붙이는 저력을 발휘하며 노익장의 포스를 보여줬지만, 고구려군이 석포를 퍼붓자 바위에 맞아 강물에 빠져서 사망한다.[3]
여담이기는 하지만, 강이식과의 호각을 이룬 일기토 때문에, 시청자들이 강이식과의 라이벌 플래그를 성립될것이라는 기대를 받았지만, 7화 요택 전투에서 전사 해버리는 바람에 라이벌 플래그 성립이 무산되었다.
2 서진과 전조의 인물
韋忠
생몰년도 미상
자는 자절(子節).
평양 사람으로 젊어서 강개하고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갈 여지없이 뜻을 가지고 있으며, 학문을 좋아하면서 뛰어났고 성격은 겉과 속이 한결같았다. 문을 닫고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으며, 길흉을 알고 선물을 받지 않았다.
12세 때 아버지가 죽자 상을 치뤘는데, 슬퍼해서 초췌하고 지팡이를 이용해야 겨우 설 정도였다. 사공 배수가 빈소를 찾아오면서 위충이 성장하면 반드시 좋은 그릇이 될 것이라 했으며, 배수가 아들 배외를 시켜 위충이 상을 지내는 암자에 묘소를 조성하게 했다.
배외가 위충을 사모해 원조했지만 위충은 면회를 사절했으며, 위충의 집은 가난하고 변변찮은 반찬으로 지냈다. 사람들은 위충을 걱정했어도 위충은 복상의 방식을 고치지 않았으며, 배외가 복야가 되자 위충에 대한 이야기를 사공 장화에게 알려주자 장화가 위충을 벽소했다.
그러나 위충은 병을 이유로 거절했고 평양태수 진초가 사정해 위충을 공조로 임명했으며, 산강이 군을 공격해 진초의 아이가 나갔다가 도적에게 찔려 세 곳을 다쳤다. 위충은 진초를 참게 하면서 자신이 진초의 아이를 구출하러 갔는데, 위충은 화살 다섯 발을 맞았고 도적은 위충을 의사라면서 죽이지 않았다.
위충은 진지로 돌아갔다가 훗날 유총을 섬겼으며, 진서대장군, 평강교위를 지내고 강이 배반하자 이를 공격했다. 화살을 소지하고 싸우다가 죽었다.
3 후한 말의 인물
魏种
생몰년도 미상
조조가 위충을 효렴으로 천거했는데, 장막 등에 의해 연주를 빼앗기자 조조는 위충만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위충이 달아났다는 말을 듣고 조조는 위충이 남쪽으로 월로 달아나지 않고 북쪽으로 달아났을 것이니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면서 크게 화를 냈으며, 조조는 사견을 함락하고 위충을 사로잡자 "오로지 너의 재능을 아낄 뿐이다!"라고 말하고 다시 그를 기용해 하내태수로 삼아 하북(河北)의 일을 맡겼다.
위충의 일화는 조조의 인용술을 보여준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대범하게 용서하는 것으로 보여도 결국 총알받이로 남겼을 뿐이라는 의견도 있다. 하내군 자체가 행정구역상 사예주에 속했지만 지리적으로는 하북으로 원소의 근거지인 업과 맞닿아 있는 국경 지역이며, 이 때 원소는 역경에서 농성하던 공손찬을 치고 있었다.
조조는 공손찬과 연합해 원소의 배후를 치기 위해 황하를 건너 북상해 하내의 군벌 장양의 잔당들을 병합해 수고를 죽이고 위충을 사로잡았으나, 이 시점에서 이미 공손찬이 멸망하면서 원소가 조조의 배후 공략 의도를 눈치채자 조조는 퇴각하면서 위충을 남긴 상황이다. 위충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 수 없지만, 원소 입장에서 자기 근거지 옆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위협을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이로부터 1년 뒤에 관도대전이 발발했고 관도대전 당시 우금이 황하를 건너 도하해서 하내군 강변지역의 원소군 진영을 급습한 것으로 볼 수 있듯, 하내군은 이미 원소가 점거하고 있었던 것이 기정사실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