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식

강이식 영정

姜以式

(550 ~ ?)
고구려장수.

1 개요

한국의 일부 사서에 등장하는 영양왕 재위시절의 장수. 진주 강씨의 시조로 알려져있다.

야사에 따르면 강철상 시랑의 아들 강이식장군은 나이 15세 때는 구십척짜리 철퇴를 마상에서 구사하고 진법을 이루었다고 한다. 서기 573년(평원왕 15년) 나이 24세 때에 동명대회에서 장원했다고 한다. 따라서 강이식장군은 서기 550년에 태어났다고 추리된다. 그 후 강이식장군은 부친의 뜻을 받아 서부 총관부에서 벼슬하며 돌궐과 계단(거란), 또 말갈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갔었다고 한다.

그 뒤 동명대회에서 장원한 후 아직 보직을 받지 않은 을지문덕 장군이 서기 592년(고구려 영양왕 3년) 8월 하순 요동성 서부 총관부의 총관 강이식 장군을 찾아와 총관부에서 같이 일하게 되었고, 수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공(功)으로 강이식 장군은 병마 도원수, 을지문덕 장군은 서부 총관으로 각각 승진되었다라고 한다.

이후 고수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수문제가 조공을 바치고 신하국가가 되라는 국서를 날리자 "이런 싸가지없는 새퀴들에게는 칼로 대화하는 것 말곤 답이 없다"라 주장하였다고 한다.

어쨌든 문제의 국서에 열이 뻗힌 고구려가 선빵을 날릴 때 5만 병력을 거느리고 출정하여 요서 지역과 영주를 털었고, 나중에는 6만 병력을 거느리고 임유관도 털었다고 한다.

2 논란

삼국사기를 비롯한 '정사' 라 할 수 있는 사료에는 강이식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으며, 신채호의 저서인 조선상고사에 올라와 있는 기록마저도 현재는 남아있지 않는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에 올라와 있는 기록을 참고했다고 하여 실제 전과에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 외에는 강이식의 후손으로 알려진 진주 강씨 족보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짤막한 기록이 전부일 따름이다.

중국 측에서 하도 심하게 털려 기록에서 삭제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더한 패배였던 살수대첩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점을 설명할 수 없는 편.[1] 강이식 묘가 있다고 하여 강이식이 실존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단군이나 기자 등도 무덤이 존재하긴 한다.

가끔가다 진주 강씨의 시조가 강이식이란 이유로 "내 조상 누구냐?"라는 드립을 치는 사람이 있는데, 조선 후기 족보 위조를 생각하면..[2]

3 그 외에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수양제가 고구려 원정을 할때 을지문덕이나 고건무[3] 다음으로 조심해야 할 맹장이라며 부하들에게 신신당부를 하였으나 당연히 죄다 털려버렸다(...). 사실은 제일 조심해야 할 맹장이었다.

여기서 강이식의 명대사는 "어허! 이거 어린아이들을 계속 혼을 내주자니, 참으로 귀찮구나!! 오냐, 날 원망하지 마라!"[4] 더 나와보라고 하셨는데 사실은 고령때문에 체력이 달리셔서 아랫 것들(온사문, 아소친)이 마무리를 했다고 하더라.

연기자는 김시원으로, 태조 왕건에서 능창(=수달) 배역을 열연하신 것으로 유명한 배우이다.

작중 초반 6화에서 영주총관 겸 영주 성주 위충[5]과 일기토를 벌여 서로 호각을 이루며, 서로의 무예를 칭찬하지만, 한왕 양량이 그걸보고 노인네들끼리의 장난이라면서 조롱하며 군대를 끌고 나가 방해를 하지만, 위충이 양량이 이끈 군대를 막아서 강이식이 도망치게 할 수 있게끔 해주며, 서로 라이벌 플래그를 성립하나 했더니, 위충이 바로 다음 화에서 요택에서의 전투에서 지휘를 하던 도중에 전사해 버리는 바람에 라이벌 플래그 성립이 무산되어 버렸다.[6]

고구려-수 전쟁 때 고구려군이 수시로 써먹은 게 거짓항복을 통한 화전양면 전술이었는데 드라마에서는 거짓 항복도 고구려의 수치라며 외교관을 통과시켜 주지 않으려는 꼴통으로 묘사해놨다. 영류왕 시기에는 너무 늙어서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군부의 원로로 젊은 장수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으며, 주인공 연개소문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대당평화정책을 펼치던 영류왕의 계속되는 굴욕 외교에 계속하여 불만을 드러내었고, 급기야 영류왕이 전승기념물인 경관을 허물려고 하자 고령의 나이임에도 단식 투쟁을 하다 기력이 다해 죽었다. 강이식의 죽음으로 군부는 영류왕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고[7], 결국 이는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이어진다.

여담으로 고려키가 작은 노인의 조상이다.

  1. 삼국사기의 고구려와 수, 당 사이의 전쟁 기록을 수서 및 자치통감과 비교해보면 대부분 이쪽에서 가져왔다는 걸 거의 확신할 수 있다. 이 말은 그 처참한 패배가 패한 당사자들의 기록에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것. 더한 패배도 올라와 있는데 덜한 패배가 지워진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다.
  2. 학교 국사시간에서 배웠던 공명첩 등만 생각해도 뻔하다.
  3. 영류왕의 본명이다.
  4. 참고로 드라마에서 강이식의 나이는 80이 넘었음. 이때 수나라 선봉 맥철장의 부관인 맹차의 이마를 베고 전사웅이라는 장수는 강이식의 창에 배가 뚫려버렸다. 결국 맥철장이 나가려고 하자 수양제는 '저것이 어디 늙은 귀신이지 사람이란 말이냐'며 가지 말라고 하였으나 부장들보다 더 짧은 시간 안에 일기토 끝에 맥철장은 목이 베인다. 연대장 둘을 줄줄이 보내고 사단장도 따라가버리는 클라스 자기 편 연대장의 화이바를 찾아준 참모총장
  5. 작중 영주총관이라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요서총관이었다.
  6. 비록 빠르게 죽어버렸지만, 연개소문 내에서 고경과 함께 긍정적으로 묘사된 몇 안 되는 수나라 인물이다. 현명하지만 음흉한 양소나 우직하지만 기회주의적인 우문술은 드라마에서 다소 긍정적이라고 묘사됐다고 보기에는 애매하고...
  7. 양만춘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 물론 양만춘은 영류왕의 부장 출신이었기 때문에 영류왕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친 것이지 그 역시 영류왕의 정책에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