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토

1 설명

일본어 잇키우치(いっきうち, 一騎討ち)의 한자 표기만(一騎討)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것. 말을 탄 무사가 일대일로 싸우는 것을 말한다. 一騎打ち라고 쓰기도 한다. 우리말로 뜻을 직역하자면 "말 한 필의 대결" 정도이며, 중국이나 대만에서는 단도(單挑)라고 한다.[1] 일본 고유어(うち)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 쓰인 討(とう, 토)자를 음독한 엉터리 말이기 때문에 쓰지 말자는 의견도 일부 있지만 워낙 유명해진 말이라서 되돌리는 것도 사실상 어려워졌다. 반대로 いっきとう라고 읽으면 되지

대장전(大將戰), 수장전(首將戰)이라는 말로 대신하기도 한다. 우리말에는 '단기접전(單騎接戰)' 이라는 말이 있었으나 워낙 일기토가 일반화되어서.. 그런데 토(討:치다, 싸우다)는 우리말에서 토벌(討伐)외에는 물리적 의미로는 거의 쓰이지 않고, "연구하다" 또는 "말다툼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토론(討論)이나 토의(討議), 검토(檢討)가 대표적 예. 비록 외래어지만 번역할 때 투(鬪)를 써서 결투라거나 일기투라 쓰는 것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고대 전쟁에서 자군의 사기를 높이거나 불필요한 병력손실을 막기 위해, 혹은 명예를 위해 전장에서 장수끼리 캐삭빵 1:1 기마전으로 맞붙는 것. 요즘은 그냥 전쟁물에서 1:1로 맞짱뜨면 일기토라고 하는 듯.

일기토라는 말이 한국에서 널리게 쓰이게 된 건 코에이 삼국지 3 한글판이 발매된 이후로 추측된다.[2] 일기토는 한국에서는 잘 쓰지않던 외래어임에도 한글화 작업을 할 때 한자를 한국식으로 음독한 '일기토'라고 그대로 번역했다.[3] 이후 다음 시리즈에서도 계속 일기토라고 번역된다. 다만, 삼국지 DS 2에서는 '일대일 승부'라고 번역되었다. 워낙 유명해진 말이라 현대에 유행한 외래어인데도 주몽, 군도: 민란의 시대 등 옛 시대를 배경으로한 사극에서 쓰여지는 황당한 경우도 생겨났다. 아예 일대일 결투의 우리말을 일기토라 아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를 통해 많이 알려져 있으며, '용장 간의 1:1'이란 멋진 컨셉 때문에 인기도 대단하다. 일기토 없는 삼국지는 그야말로 팥소 없는 찐빵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현시창. 연의에 등장하는 일기토는 99%가 허구이다. 정사에서 일기토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싸움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다. 관우, 손책, 태사자, 방덕 등의 기록이 전부.

사실 기껏 수명~십수명 정도가 싸우는 조폭간 드잡이질 수준이 아니라면 수천 이상의 부대를 책임지는 상장이 1:1 맞짱을 뜨는, 그것도 두 부대의 대장의 의견이 일치하기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게오르기 주코프가 결투를 벌이는 걸 상상할 수 있는가? 일단 한쪽이 우세할 경우 우세한 쪽에서 일기토를 받아줄 리가 만무하며 두 세력의 수준이 동일해도 일단 그 군세를 움직인 만큼 성과는 분명히 있어야 한다. 수천은 고사하고 수백명만 움직여도 엄청난 자원이 든다. 그렇게 비용을 들여 놓고 싸움 한번 하지 않은 채 돌아와선 "우리 장수가 상대 장수랑 맞짱 떠서 져 가지고 돌아왔습니다."라고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전쟁은 기본적으로 빼앗고 빼앗기는 것으로 무조건 승자는 얻고 패자는 잃는다. 패배해서 진 쪽은 상대에게 무조건 순응해야 하며 특히 영토와 사람을 두고 싸우게 되는 정복전쟁은 그것이 매우 심하다. 방어측 군세의 장수가 일기토에서 졌다고 군세에 포함된 군인들이 자신의 땅, 가족, 국가에 대한 권리를 침략자에게 고스란히 주는 것에 대해 순응할 리가 없다.

위 사례들도 전부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일기토이다. 방덕은 난전중에 곽원을 베었고, 관우는 적진 한가운데에 있는 안량을 습격했다.[4] 다만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의례적으로 귀족의 자제나 지휘관을 대신한 전사들이 일기토를 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흔치 않은 일이지만 지휘관이 직접 나선 사례도 있다. 일본서기에 나타난 백합야 전투에서 백제의 태자 여창(위덕왕)은 고구려의 용사와 일기토를 벌였고, 서양에서도 마르켈루스와 갈리아 전사간의 일기토, 야르무크 전투 6일 째 서전에서 동로마 제국의 장군 게오르기우스와 이슬람 용사간의 일기토가 기록에 남아 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직접 페르시아의 장군 라자테스와 일기토를 벌이기도 했다.

삼국지연의에서 일기토 장면이 적극적으로 활용된 건 송나라 이후 삼국지가 백성 사이에서 인기를 얻어 자주 공연되면서부터이다. 송대에는 재담가 또는 변설가라고 할 수 있는 '설화인'들이 이야기를 통해서 먹고 살았는데 이때 인기를 끈 주제가 바로 군담이었다. 송대까지는 주로 만담이나 판소리처럼 소수가 간단하게 짤막한 대목을 이야기하거나 노래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이 독자성을 위해서는 독창적인 묘사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재담의 과정에서 일단 부분적으로 그때그때 많이 추가된다[5]. 그리고 원대에는 연극에 해당하는 연극이 발달하는데, 이때가 바로 재담이 희곡을 거쳐서 소설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연극이 되었으니 전쟁 장면이 나올 때마다 대규모의 엑스트라를 동원하는 데 더 무리가 생겼고, 그 장면들을 죄다 전부터 기존의 재담가들이 써먹어 왔던 일기토로 대신한 것. 그리고 설화인들과 연극의 단계에서 완성된 것이 대본이라고 할 수 있는 진상삼국지평화(=삼국지평화)이고, 이 진상삼국지평화를 보다 소설 체계로 다듬은 것이 나관중의 삼국지통속연의.

대규모 부대의 전투를 개인과 개인의 대결의 형식으로 치환하는 것은 전쟁을 주제로 하는 역사소설에서 주로 보인다. 임진왜란을 주제로 하는 군담소설 임진록에서도 대부분의 전투를 일기토 형식으로 해결한다. 애초에 삼국지연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품이긴 하다.

이러한 영향은 현대의 서브컬쳐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우주를 다룬 기사활극에 가까운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에서 파일럿들간의 대결은 이러한 일기토의 연장선상에 가깝다. 은하영웅전설에서도 전함간 일기토를 신청하는 귀족이 나온다.다 깨져놓고 뭔 헛소리냐고 비웃음당하고 씹혔지만

이문열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 삼국지연의 초반에 일대일 승부가 자주 나오는 것은 난세라서 병사의 수와 훈련도가 낮아서 병법이나 진법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고, 서서가 팔문금쇄진을 깨는 장면에서 이때부터 병사들의 훈련도가 높아져서 진법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설명을 써놨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애당초 군대를 운용하려면 "삼군을 운용하는데 하루 천금이 소모된다" 라고 할 정도로 많은 자금이 들어갔으며, 난세에 정착민뿐만 아니라 유랑민을 군으로 흡수하려면 그에 맞는 병량 확보도 중요한 일이었기에 이렇게 어렵게 모은 병력을 장수 한명에게 흩어질 정도로 부실한 무장과 훈련을 시켜 내보내진 않았다. 그리고 중국은 500년간의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전술, 전략에 대한 완성도가 이미 끝난 상황이었다. 상주 교체시기 목야대전의 경우 실질적인 유물이나 전황을 기록한 서술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춘추시절에는 귀족계층의 전차전 위주로 전쟁이 진행되었으므로 사실상 전차-전차간의 일기토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국시대 이후 총력전 위주의 대규모 보병전투가 진행됨에 따라 일기토는 의미가 없어졌다.

코에이넥슨이 2016년 공동 제작한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우리나라식 표기였던 단기접전이라고 표기했다. 일기토라는 단어를 한국에 퍼트린 주범이 코에이[6]인만큼 개선의 의지를 보인 셈이다.

2 정사 삼국지에 기록된 일기토

사실 이 목록 중에서도 일부를 제외하면 서로 상대했다기보다는 난전 중에 한 쪽이 상대방을 직접 죽인 것이 대부분이며, 난전 중이 아닌 서로 일대일로 싸운 경우에는 굵은 글씨로 표시.

오서 태사자전곡아196년손책 vs. 태사자유요군을 정탐하던 손책을 태사자가 공격한다. 손책이 태사자의 말을 찌르고 손창을 빼앗았으며 태사자도 손책의 투구를 빼앗았다. 양쪽의 군대가 난입해 승부는 내지 못했다.
촉서 관우전백마200년관우 vs. 안량원소군이 백마를 침공했을 때 관우가 많은 군사 사이에 있는 안량을 찌르고 그 목을 베어 돌아왔다. 관우를 당해낼 장수가 없었으므로 원소군은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위서 방덕전평양202년방덕 vs. 곽원분수를 건너는 원상군을 마등군이 급습한다. 방덕은 난전중에 직접 곽원의 목을 베었다. 방덕은 적장의 신원을 모르고 죽였으나 동맹인 조조군에 있던 종요(곽원의 삼촌)가 알아보았다고 한다.
오서 여몽전강하208년여몽 vs. 진취여몽은 선봉대를 통솔해 직접 진취의 목을 베었으며, 장수와 병사들은 승기를 타고 진격해 황조의 성을 공격했다.

아래는 주석으로 인용한 부분. 흔히 위략 등의 기록에 신빙성을 제기하지만 적어도 이것들은 배송지가 감수한 부분이고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채 실었기 때문에 신빙성에 있어서는 큰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영웅기 등 정사 삼국지보다 먼저 작성된 것도 있다.

영웅기장안192년여포 vs. 곽사여포군과 대치한 곽사가 1:1 대결을 제안했고 여포는 이를 수락했다. 곽사는 여포의 창을 맞고 부하들에게 구출되었다.
영웅기하비196년학맹 vs. 조성여포에게 반란을 일으킨 학맹에게 그의 부장 조성이 반기를 들어 서로 싸웠다. 학맹은 조성을 찔렀고 조성은 학맹의 한쪽 어깨를 찍었다. 결국엔 반란을 진압하러 온 고순이 학맹을 참수.
위략서량196년쯤마초 vs. 염행염행은 일찌기 마초를 찔렀는데, 모가 부러지자, 부러진 모로 마초의 목을 쳐서 거의 죽게 만들었다.

정사를 보면 '누가 누구를 죽였다' '목을 베었다' 등의 기술이 여러 차례 나온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일기토라고는 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정군산에서의 하후연과 황충의 기록을 살펴보면

忠推鋒必進,勸率士卒,金鼓振天,歡聲動谷,一戰斬淵,淵軍大敗
황충이 앞장서서 나아가 사졸들을 독려했다. 징과 북소리가 하늘을 가득 채우고 환호성이 계곡을 흔들었다. 한 번의 싸움으로 하후연을 참하니 하후연의 군대는 대패했다.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참(斬)이라고 하는 글자는 말 그대로 '무기를 가지고 손수 적을 벤다'의 의미도 있지만 전투의 결과로 전사, 사로잡은 적의 처형, 형벌의 집행 등의 의미도 포함된다. 연진에서 문추가 전사했을 때의 기록도

遂縱兵擊, 大破之, 斬醜
(조조가) 병사를 풀어 (원소군을) 대파하고 문추를 참했다.

라고 되어 있지만 누구도 조조가 문추를 직접 베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관우전을 살펴보면 안량과의 싸움에 대한 자세한 서술이 나온다.

策馬刺良於萬衆之中, 斬其首還
(관우가)말에 채찍질을 해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목을 베어 돌아왔다.

에서 策馬, 刺 등 특정한 행위에 대해 묘사했다. 태사자의 경우도

慈便前斗,正與策對
태사자가 앞으로 나아가 정면으로 손책과 대적했다.

라고 분명하게 표시함과 더불어

策刺慈馬,而攬得慈項上手戟,慈亦得策兜鍪
손책이 태사자의 말을 찌르고 목덜미를 끌어당겨 수극을 빼앗았다. 태사자도 손책의 투구를 빼앗았다.

라고 자세한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방덕전은

更親斬郭援首級
(방덕이) 곽원을 직접 참했다.

라는 대목에서 '親'이라는 문자를 사용해서 직접 베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行嘗刺超,矛折,因以折矛撾超項,幾殺之
행(염행)이 초(마초)를 찔렀는데, 모가 부러지자, 부러진 모로 마초의 목을 쳐서 거의 죽게 만들었다.

여기서도 확실하게 마초가 얻어터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가 위략이라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만 적어도 배송지가 주석에서 인용했으니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고 마초가 약했다는 것은 아니며, 정사에도 그가 용맹스러웠다는 서술이 있다. 다만 염행보다 약했을 뿐. 무엇보다, 이 때의 마초는 너무 젊었다.

3 한국사에 남아있는 일기토

겨울 10월 경인 초하루 기유 백제의 왕자 여창이 나라 안의 모든 군대를 내어 고려국을 향했는데,백합의 들판에 보루를 쌓고 군사들 속에서 함께 먹고 잤다. 이날 저녁 바라보니 커다란 들은 비옥하고 평원은 끝없이 넓은데,사람의 자취는 드물고 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후 갑자기 북치고 피리부는 소리가 들리니 여창이 크게 놀라 북을 쳐 대응하였다. 밤새 굳게 지키다가 새벽이 되어 일어나 텅 비었던 들판을 보니 군대가 푸른 산처럼 덮여 있었고 깃발이 가득하였다. 때마침 날이 밝자 목에 경개를 입은 자 1기,징을 꼽은 자 2기, 표범 꼬리를 끼운 자 2기 모두 합해 5기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와서 묻기를“어린아이들이‘우리 들판에 손님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맞이하는 예를 행하지 않는가. 우리와 더불어 예로써 문답할 만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 관위를 미리 알고자 한다”고 하였다. 여창이“성은 (고려 왕실과) 동성이고 관위는 간솔이며 나이는 29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백제편에서 반문하니 또한 앞의 법식대로 대답하였다. 드디어 표를 세우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 때 백제는 고려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머리를 창끝에 찔러 들고 돌아와 군사들에게 보이니,고려군 장수들의 분노가 더욱 심하였다. 이 때 백제군이 환호하는 소리에 천지가 찢어질 듯하였다. 다시 그 부장이 북을 치며 달려 나아가 고려왕을 동성산 위에까지 쫓아가 물리쳤다.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보면 고대 한국에서는 전쟁이 무척 잦았으나, 일기토에 대한 묘사는 거의 전무하다. 그런데 일본서기 19권 흠명기 14년(553년)에 드물게도 한반도에서 고구려군과 백제군의 일기토 기록이 하나 남아있는데, 바로 백합야 전투에서 펼쳐진 일기토이다. 상대방이었던 고구려군 장수의 이름은 남아있지 않지만 여기서 백제군 장수인 부여창은 태자 시절의 위덕왕이다. 부친인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뒤 그 죄책감으로 승려가 되려고도 했고 40여년간 재위했음에도 별다른 업적이 없는 위덕왕이지만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태자 시절엔 전쟁의 선봉을 도맡아 설 정도로 용맹했으나 부친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고 정신적으로 상당히 망가졌을 거라는 추측을 해 볼 수도 있다.일본서기를 얼마나 믿어야 할 지 모르겠지만

태조가 조금 후에 이르러 호발도는 두꺼운 갑옷을 세 겹이나 입고 붉은 털옷을 껴입었으며, 흑색 암말을 타고 진을 가로막아 기다리면서 속으로 태조를 깔보아 그 군사는 남겨두고 칼을 빼어 앞장서서 달려나오니, 태조도 또한 단기로 칼을 빼어 딸려나가서 칼을 휘둘러 서로 쳤으나, 두 칼이 모두 번뜩이면서 지나쳐 능히 맞히지 못했다. 호발도가 미처 말을 타기 전에 태조가 급히 말을 돌려 활을 당겨 그의 등을 쏘았으나, 갑옷이 두꺼워 화살이 깊이 들어가지 않는지라, 곧 또 그의 말을 쏘아 꿰뚫으니,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호발도가 땅에 떨어졌다. 태조가 또 그를 쏘려고 하니, 그 휘하의 군사들이 많이 몰려와서 그를 구원하고, 우리 군사들도 또한 이르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383년 8월에 이성계가 호발도와 싸워서 이겼다는 묘사가 나온다.

4 서양

4.1 고대

이런 장수끼리의 일대일 대결은 전쟁의 한 양식으로서 정복전쟁이 시작된 청동기시대부터 동서양 막론하고 벌어진듯 하다. BC 12세기 청동기시대에 일어났다고 추정되는 트로이 전쟁을 다룬 일리아스오디세이에서는 전쟁에 말이 도입되기 전이라서 일기토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대일 대결이 자주 나타난다. 하지만 이건 진짜 트로이 전쟁 시기의 묘사라기 보다는, 호메로스가 살았던 서사시 시대의 묘사에 가깝다는 것이 중평이다. 이 시기의 전투는 모두 귀족에 가까운 호족들간의 소규모 접전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병력간의 대결보다는 개인적 결투의 형태에 더 가까웠다고 보고 있다. 이 시기 소국의 양상은 일리아드에서 오디세우스의 나라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게다가 트로이 전쟁 자체가 의심받고있는 상황이니...

일리아스를 보면 그리스 측의 제일 맹장인 아킬레우스는 총사령관 아가멤논에 삐져서 출전을 거부하고, 트로이 측의 헥토르는 그리스측 무장이 나오자마자 족족 일기토로 죽인다. 이들이 벌이는 일기토는 말은 이용하지 않고 처음에 창과 방패로 싸우다가 나중에 칼을 쓰는 형식이다.

그리스 측 장수들은 헥토르의 무용을 두려워해서 제비뽑기를 하여 상대하게 된다. 그러다가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와 일기토 끝에 죽자 아킬레우스는 드디어 출전하고 헥토르를 일기토에서 죽인다. 헥토르는 서양의 화웅?

나중에 국가체제가 발전하면서 대규모 회전이 일상화되었지만 그래도 종종 장수들간의 일대일 대결이 벌어지긴 했다. 로마의 마르켈루스도 켈트족과의 싸움에서 부족장 비르도마루스와 일대일로 싸워 승리한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서기관이었던 에우메네스는 문관이었지만, 이후 후계자 전쟁에서 군을 지휘하면서 적장과 일대일로 싸우기도 했다.(게다가 이겼다)

4.2 중세

일기토가 사라지고 한동안 카이사르나 한니발식 전술에 의한 진형으로 승부가 결판나던 전쟁도 중세에 접어들어 기사 계급이 발생하자 다시 일대일 대결이 나타났다. 하지만 기사들의 시합인 토너먼트(Tournament)를 보면 기사들간의 일대일 대결 자체는 실전에서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토너먼트는 일대일 대결인 주스트와 양측이 모두 붙는 일종의 회전이라고 할 수 있는 밀리(melee)전으로 이루어졌는데, 중세 중기까지는 밀리와 주스트의 구분도 흐릿했으나 일종의 전쟁 시뮬레이션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스트보다는 밀리가 훨씬 중요했다. 역시 일대일 대결로 전쟁의 승패가 결정나는 것은 매우 드물었다는 간접적인 증거다. 월터 스콧의 역사소설 아이반호를 보면 그 형식이 잘 묘사가 되어 있다. 원탁의 기사에 나오는 여러 장면 장수간 대결들도 모두 이런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이는 후대로 가면서 주스트라는 일종의 운동경기의 형태로 남았고, 오늘날에도 다시 복원되어 일종의 익스트림 스포츠가 된다.

1242년에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튜튼기사단의 대장과 얼어붙은 라도가 호수에서 1:1 대결을 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전투는 벌어졌으나 전술적인 승리였고 전투 당시에 일기토가 있었는지에 대한 여부는 알 수 없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가 승리하게 되면서 가톨릭의 동진은 저지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스탈린 시절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당시가 독소전쟁 시기라 러시아인들은 독일인을 이긴 적이 있으니 이번에도 이길 것이라는 일종의 프로파간다로 제작된 것.

4.3 근현대

파비아 전투 이후 총의 시대가 열리면서 군대 규모는 이전보다 훨씬 커졌고, 지휘관들은 개인적인 무용보다는 화력의 집중도와 병력의 이동속도를 계산하는 수학적 연산 능력을 더 필요로 하게 되었다. 따라서 일기토는 의미가 없어졌고 역사에서도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현대에도 조지 S. 패튼처럼 적장과의 일기토를 꿈꾸는 기인이 있긴 했다

5 인물

관우
로버트 1세
손책
태사자
이성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6 창작물에서

삼국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 같은 영상물에서는 빠지지 않는 필수요소. 앞서 기술된 바와 같이 일군을 통솔하는 막중한 책임을 진 지휘관끼리 직접 대결을 벌인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은 여전하다. 하라는 지휘는 안하고 일기토만 벌이는 광경은 예삿일이고, 아예 말을 탄 채로 멈춰선 상태에서 서로 마주보고 칼을 주고 받거나, 적장이 타고 있는 말은 절대 공격하지 않는 신사적인(...) 룰도 존재하는 듯. 물론 어디까지나 창작물일 뿐이니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특히 드라마 삼국의 일기토 장면이 과장을 넘어 무협지 수준을 자랑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말을 탄 상태에서 뛰어올라 360도 회전(!)을 하면서 공격을 피하거나 아예 달리는 중인 말의 안장 위에 서서 공격을 하는 등 진지한 대결 장면에서 웃음을 유발할 만한 요소가 들어있다.

6.1 삼국지 시리즈, 진삼국무쌍 시리즈

일기토라는 단어의 원조답게 매번 빠지지않고 일기토가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각 시리즈의 시리즈 목록 항목 참조.

6.2 대항해시대 시리즈

대항해시대 시리즈에도 일기토가 있다.

대항해시대 2는 아군 기함을 상대편 기함에 바짝 갖다 붙인 뒤 전투 메뉴에서 돌격을 선택하면 "적 제독에 일기토를 신청하겠습니까?"라는 메시지가 뜨는데, 이때 "Yes"를 선택하면 일기토가 진행된다.[7] 일기토는 배와 배 사이에 널빤지를 걸고 그 위에서 제독끼리 결투를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일단 일기토가 개시되면 컴퓨터에 의해 랜덤으로 진행되는 삼국지 시리즈의 일기토와 달리, 여기에서는 플레이어가 일일이 공격 기술(찌르기, 베기, 강타)과 방어 기술(걷어내기, 맞받기, 피하기)을 선택하여 조종해야 한다. 별급 특수 아이템(성기사의 검, 성기사의 갑옷 등)을 갖추지 않고 일기토를 할 경우, 차라리 포격전으로 적 기함을 때려 부수는 것이 더 쉽게 느껴질만큼 이기기가 상당히 까다롭다.[8]10턴간 승부를 내지 못했을 경우 무승부가 되지만, 이후 다시 일기토를 재개할 경우엔 둘 다 10턴종료후 체력이 유지된채로 싸우게 된다.

대항해시대 3에서는 육상전에서 패할 위기에 처한 적이 걸어오거나 프로포즈할 때 훼방꾼이 자신이 먼저 여급에게 고백했다고 난입할 때, 기타 이벤트[9]에 엮였을 때 하게 된다. 상-중-하단공격과 그 필살기 등의 공격기와 여기에 대응하여 웅크리기-피하기-뛰기의 회피기를 조합해 가면서 싸우게 된다.

대항해시대 4에서는 2와 비슷하게 갑판전 도중 넘어가나 조작은 불가능하다. 일반적으로 해병대기실을 함내에 설치해 두었으면 돌격대장으로 넣어둔 항해사가 적 제독과 일기토를 벌인다. 해병대기실이 없어 돌격대장이 존재하지 않거나 돌격대장을 배치하지 않았을때, 이미 존재하던 돌격대장이 일기토에서 패하거나 해서 빈사상태일때는 갑판요원이 다음으로 우선권을 가지며, 갑판요원도 없다면 제독(=주인공)이 직접 일기토를 하게 된다. 파워업키트판의 경우 1:1 전투가 연속해서 벌어지는 갑판전의 경우 아군이 승리했을때 랜덤하게 승리한 항해사중 1명이 일반 해적으로 위장한 적 제독과 일기토를 할 수도 있는데 이 갑판전이라는게 아군의 선원수, 선박능력, 기세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일기토쪽으로 잉여가 적 제독과 붙게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6.3 Warhammer 40,000

챌린지(Challenge)라고 부른다. 근접전투 중인 각 진영에 최소 하나의 캐릭터가 각각 있으면 신청할수 있다. 이때 신청은 "커미사르야, 덤벼라~"가 아닌, "나 어스파이어링 챔피언에게 덤빌 놈은 없는가" 같은 형식이기 때문에, 상대방은 아무 캐릭터나 챌린지에 응할수 있다. 만약 거부할 경우, 챌린지를 신청한 플레이어가 거부한 플레이어의 캐릭터 하나를 지정해서 근접전에 관련된 불이익을 주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약하면서도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10] 하지만 근접전 불이익에 "특수규칙도 적용불가"라는 규정은 없어서 그냥 거부하고 일반 모델로 버티는 경우도 많다. 로드 커미사르께서 먼저 꽁무니를 빼셨으면서도 우리가 도망치려하면 E를 놔주시는 위엄

6판에서는 상대 유닛이 챌린지중인 캐릭터 밖에 없으면 다른 모델들은 응원밖에 못하는 처지였지만, 이 룰이 상당히 욕을 많이 먹어서 결국 7판에서는 챌린지중인 캐릭터 밖에 안 남았으면 다른 모델들도 그 캐릭터를 공격할수 있게 룰이 바뀌었다. 역으로 오버킬이라는 개념도 생겨서 챌린지 상대가 죽으면 나머지 운드(세이브 판정을 아직 하지않은 운드)는 그 상대의 소속 유닛에게 배분된다.

  1. 단적으로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삼국지 13 번체판 특기에서 일기토와 관련된 특기가 바로 이 단도로 표기된다.
  2. 그 전에 발행된 게임잡지에서 일기토라는 말이 쓰인 흔적으로 보아 삼국지 일본어판을 즐기던 유저들로부터 이미 퍼졌을 가능성도 있다.
  3. 정발 이전에 만들어진 유저한글화 버전에서는 '기마일전'이라고 번역되었다. 또한, 2 한글판에서는 '일대일 대결'이라고 번역되었다.
  4. 습격이라고는 해도 대치상황에서 적진을 향해 곧바로 나아가 안량을 벤 것이다. 관우가 안량을 벤 것도, 그리고 살아 돌아온 것도 엄청난 일.
  5. 소식이 삼국지에 대해서 평하면서 조조가 이겼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화를 내고 유비가 이겼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좋아하더라 라는 식으로 표현한 것이 이런 설화인들과 관객에 대한 것이다.
  6. 정확히는 한글화의 문제지만..
  7. 단 적 기함의 인원수가 아군 기함의 인원수를 능가하면 상대방 선원이 일기토를 막는다. 만일 상대가 하이레딘, 아이딘 형제라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웃긴건 이쪽 신청을 막아놓고 저쪽에서 일기토 거는 일도 비일비재;;;
  8. 대항해시대2에서 오토 스피노라로 플레이를 시작할 경우 숏 소드와 하드 레더를 갖추고서 마슈 로이와 대결할 때 그 어려움을 실감할 수 있다.
  9. 아부심벨 대신전, 잉카제국 발견 시 잉카 황제에게 육분의를 안 넘겨 줄 때, 메리다에서 도냐 마리나를 구하려고 개입했을 때 지중해의 유혹어를 얻을 때 등등.
  10. 일부 스페셜 캐릭터나 진영 스페셜 룰 등으로 무조건 챌린지를 걸거나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챌린지에 특화된 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챌린지에서 승리하면 추가 승점을 얻는 등 유리한 측면이 있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