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dth=50 고구려의 역대 국왕 | ||||
25대 평원왕 고양성 | ← | 26대 영양왕 고대원 | → | 27대 영류왕 고건무 |
시호 | 영양왕(嬰陽王) / 평양왕(平陽王) | |
성 | 고(高) | |
휘 | 대원(大元)/ 원(元) | |
생몰년도 | 음력 | ? ~ 618년 9월 |
재위기간 | 음력 | 590년 10월 ~ 618년 9월 (27년 11개월) |
목차
1 개요
수나라의 침략을 막아낸 명군.
먼저 수나라를 선제공격한 패기의 왕.
고구려(이하 고려) 26대 왕.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려저있지 않고 618년 사망했다.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유명하며, 실제로 그의 재위기간은 여수전쟁 기간과 일치한다. 이로 인해 조선시대에는 을지문덕과 함께 제사밥까지 먹게 된다.
통전의 기록에 따르면 수나라 때 고구려의 영토가 동서 육천리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영양왕 시대 고구려의 북방 영향력을 겨냥한 기록인듯 해서 의미심장하다.[1]
2 생애
2.1 태자 시절
평원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565년(평원왕 7년)에 태자로 봉해졌고 590년 10월 평원왕이 사망하자 즉위했다. 무려 25년을 동궁으로 지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풍채가 준수하고 쾌활하였으며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런 표현이 대개 강호동처럼 생겼으면 용맹하게 생겼다 유재석처럼 생겼으면 영민하다는 식의 수사에 불과하지만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안정'이라는 부분은 수나라와의 전쟁을 상기한다.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못해 안달이 났던 이세민도 백성을 사랑한 군주라고 평가한걸 보면 헛소리만은 아닌 것 같다. 590년 10월에 평원왕이 승하하자 즉위한다.
2.2 수나라와의 전쟁
수나라가 589년 진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수나라의 전신인 북제와 북주를 부려먹던 돌궐까지 복속시켰다. 동아시아에 수나라의 패권이 구축되어 가는듯 보였다. 남은 것은 요동의 고려 뿐이였다. 평원왕은 사신을 보내기도 하고 간첩을 파견하기도 하며 수나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수나라가 대륙을 통일하자 평원왕이 쇼크사했다는 식으로 적혀있긴 하다만... 결론적으로 수는 고구려를 가만 냅둘 생각이 없었고 온 국력을 소진하며 고구려를 침공한다. 598 ~ 668년, 장장 70년 간 고구려와 중국통일 왕조 간의 소모전 시작
2.2.1 1차 전쟁
1차 전쟁은 598년 영양왕이 요서의 영주를 공격하면서 시작된다. 선빵이다! 이셍퀴들아!! 영양왕은 직접 말갈 1만을 이끌고 영주를 공격했으나 요서 총관 위충에게 격퇴당했다. 수 문제는 이에 분노하여 30만 대군을 고구려에 보내지만 ... 어찌저찌해서 승리하지 못했다. 중국측 기록에 의하면 장마등 자연재해가 원인이였다고 한다. 뒷날의 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도 태풍 때문에 말아먹었고 심지어는 살수대첩까지 버젓히 기록되어 있는걸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이상한 상황은 아니고 거짓이라고 할 근거도 미약하다. 한편, 조선상고사에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책을 언급하며 강이식이 격퇴했다고 한다.
2.2.2 2차 전쟁 : 살수대첩
수양제는 돌궐 계민가한의 막부에 행차하였을 때 돌궐에 간 고구려 사신과 마주첬다. 수양제는 고구려 사신에게 고구려 왕더러 입조하라 명했으나 고구려 왕은 입조하지 않았다. 결국 수양제는 고구려를 침공한다. 수나라는 113만 대군을 모아 고구려에 보냈으나 요동성 하나 함락하지 못했고 평양성에서는 고건무에게 격퇴당하고 살수에서 을지문덕에게 격퇴당한다.
2.2.3 3차 전쟁 : 양현감의 난
수나라는 또다시 처들어왔으나 역시 요동성 하나 함락하지 못하고 있다가 본국에서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키자 퇴각한다.
2.2.4 4차 전쟁 :수나라의 멸망
수나라가 망한 해에 영양왕도 사망했다.
2.3 신라, 백제 공격
수나라와 연결하려는 백제를 공격하고, 고승을 보내 신라 북한산성을 공격했으나 진평왕이 직접 격퇴했다.
2.4 신집 편찬
1차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600년에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명해 신집 5권을 편찬하도록 했다. 국초[2]부터 전해지는 유기 100권을 압축했다. 설화,전설등 잡다한 요소들을 제거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만을 선발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5권이라고 해서 적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글자 크기나 1권의 페이지수등에 따라 분량에 차이가 난다. 제지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에 목간에 기록하던 것을 종이에 옮길 경우 부피와 분량이 대폭 압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2.5 왜와의 외교
일본에 담징(曇徵)과 법정(法定) 등을 보내 종이, 먹을 전파하고 호류지(法隆寺)의 벽화를 그리게 하는 등 문물 교류에도 이바지했다.
3 삼국사기 기록
一年冬十月 영양왕이 즉위하다
一年 수 문제가 고구려 영양왕에게 벼슬을 주다
二年春一月 수에 사신을 보내다
二年春三月 수가 왕을 책봉하다
二年夏五月 수에 사신을 보내 감사하다
三年春一月 수에 조공하다
八年夏五月 수에 조공하다
九年春二月 수가 30만 대군으로 침입해오다
九年夏六月 수 문제가 영양왕의 관작을 빼앗다
九年夏六月 수의 군대가 고구려 침략에 실패하다
九年秋九月 수의 군대가 철수하다
九年秋九月 백제 변경을 침략하다
十一年春一月 수에 조공하다
十一年春一月 이문진이 신집 5권을 편찬하다
十四年秋八月 신라 북한산성 공격에 실패하다
十八年 고구려 사신과 수 양제가 돌궐 극한 처소에서 마주치다
十八年夏五月 백제 송산성과 석두성을 공격하다
十九年春二月 신라 북쪽 변경을 습격하다
十九年夏四月 신라 우명산성을 빼앗다
二十二年春二月 수 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하다
二十二年夏四月 수의 병력이 탁군으로 집결하다
二十三年春一月 수 양제가 고구려 총공격을 명하다
二十三年春二月 수의 군대가 고구려 요동성을 포위하다
二十三年夏五月 수가 요동성 공격에 실패하다
二十三年夏六月 수황제가 장수들을 질책하다
二十三年夏六月 수의 장군 내호아의 수군이 평양성 공격에 실패하다
二十三年夏六月 수의 군대가 압록강 서쪽에 집결하다
二十三年夏六月 을지문덕이 수의 진영에 거짓 항복하다
二十三年夏六月 수의 군대가 을지문덕의 유도작전에 말려들다
二十三年秋七月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수의 군대에 대첩을 거두다
二十四年春一月 수 양제가 다시 공격할 준비를 하다
二十四年春一月 수 양제가 고구려 정벌을 다시 논의하다
二十四年夏四月 수가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다
二十四年夏四月 수의 군대가 철수하다
二十五年春二月 수 양제가 또 고구려 정벌을 명하다
二十五年秋七月 항복을 청하다
二十五年秋八月 수의 군대가 철수하다
二十五年冬十月 수가 다시 침략해오지 못하다
二十九年秋九月 영양왕이 죽다
4 기타
여담으로 김유신의 전생이었다는 점쟁이 추남의 설화가 영양왕 때의 것. 추남에 따르면 음양에 역행한(즉 여성상위를 한) 왕비탓에 국경의 강이 거꾸로 흘렀다고 주장했다나.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불멸의 이순신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나온 이효정씨가 연기했다. 환생하셨다.
5 평가
수나라 황제는 백성들을 씹었기에 패배했고 영양왕은 보듬었기에 승리했다는 뉘앙스의 기록(이세민의 발언)이 있다.
6 관련 인물
아버지는 평원왕이고 어머니는 친모와 계모 둘이 있었다. 이복동생으로 고건무(영류왕)가 있었고 동생으로 고대양, 여동생으로 평강공주,매제로 온달이 있었다. 온달, 을지문덕, 강이식, 이문진, 혜자, 가서일, 담징,추남등 당대의 쟁쟁한 인물들이 영양왕대에 활동한걸 보면 사람보는 눈이 좀 있었던것 같다. 온달은 전대부터 이름을 날린 사람이긴 하지만 을지문덕과 강이식이 어디인가?
- ↑ 5세기 때를 고구려 국세의 전성기로 보는 것에는 큰 이견이 없지만 이와 별개로 전성기보다 영토가 넓었다고 볼만한 건덕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 최전성기로 간주되는 5세기에도 말갈의 전신인 물길이 이따금씩 문제를 일으켜 부여 땅을 잠식하곤 했다. 이후 고구려는 거란과 말갈을 꾸준히 공략해가며 말기에는 당나라로 이주한 일부 번장을 제외하고는 말갈 세력은 고구려 편이었다. 심지어 흑룡강 일대의 흑수말갈까지도 고구려에 붙었다는 기록이 등장하며 내몽골 일대에서도 고구려 세력이 당나라에 맞서는 모습이 보인다. 양면전선을 상정할 수 있었던 5세기나, 발해 초기보다도 안정된 상황이다. 또한 고구려는 북위가 쇠퇴할 당시 요서 일대를 공략하고 말기에는 중국과의 국경이 요하 서쪽, 영주에 이르는데 5세기 고구려의 영역 확장이 서쪽과 남쪽에 치우치고 북위의 요서 지배력이 수, 당의 그것보다 강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동서로 더 넓어졌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6천리 기록이 말이 안 되지는 않는다.
- ↑ 소수림왕 대에 편찬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