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윌버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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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구인가?

윌리엄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1759년 8월 24일 ~ 1833년 7월 29일

영국의 정치인.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이끈 지도자이다. 미국링컨이 있다면 영국엔 윌버포스가 있다고 할 정도로, 영국 정치인들이 닮고 싶어하는 롤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귀족의 특권을 포기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보여준 인물.


2 생애

할아버지인 윌리엄 윌버포스(1690년 - 1776년)는 발트 교역에서 부자가 되었고, 아버지는 로버트 윌버포스(1728년 - 1768년)이다.

윌버포스는 만 18세인 1776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는 학생들의 모임에 몰두하고 공부에 열중하지는 않았다. 친구 중에서, 특히 윌리엄 피트를 사귀었고, 둘의 우정은 평생 계속 되었다. 만 22세인 1781년에 학사 학위를, 만 29세인 1788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성공회 교회사에서는 윌리엄 윌버포스를 로버트 레이크스(주일학교 창설자), 존 벤 신부(Rev.John Venn) 등과 더불어 18세기 성공회 복음주의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성공회 신자였기 때문에 그의 노예제도 반대운동을 기독교적 정치운동의 모델로 볼 수 있다.

18세기 당시 영국은 경제의 주된 원동력이었던 노예제 폐지 문제로 국회가 매일 대립각을 세우며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읠버포스는 1784년 하원의원에 당선된 뒤 1787년부터 노예제 폐지운동에 평생을 몸바쳤다. 다행인 것은 친구이자 든든한 후원자인 친구 윌리엄 피트가 총리여서 반대파들의 공격을 방어해 주었다는 점이다.

1807년 드디어 영국 내에서의 노예무역금지법안이 통과되었다. 1814년엔 노예제 자체를 폐지시키기 위해 온갖 운동을 조직, 법안을 만들었고 1833년 7월 29일 생을 마감하기 2주 전인 12일 노예제도가 폐지되는 것을 목격하고 노예제 폐지로 시작한 19세기가 완전한 식민지화로 끝나는 것은 목격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참고로 윌버포스가 주장한 노예제 폐지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에는 도덕- 윤리적인 요소도 있었지만, 보다 현실적인 국익 문제도 걸려 있었다. 윌버포스는 노예무역 금지법안에 대해 "필요에 따라선 영국이 다른 국가의 선박도 수색해서라도 노예 무역을 근절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를 적용할 경우 노예 무역의 단속을 한다는 빌미로 영국 해군이 마음대로 타국 선박들을 수색, 억류할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논리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는 영국의 국제적인 영향력을 크게 강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라고 서술되어 있지만, 근거가 부족하다. 생각해보라. 당장 노예무역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막대한 상황에서[1] 자국의 법을 억지로 타국 상선에까지 적용시켜 국제적 분쟁을 일으킬수도 있는 노예무역금지법을 통과시킨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적 이익이 될 수 없다. 당시 영국은 최강의 해군을 갖춘 나라였지만, 타국의 상선을 마음대로 수색할정도는 아니었고[2][3], 군함으로 상선을 마음대로 수색하면 영향력이 확대되는게 아니라 전쟁난다. 물론 세상 모든 일들이 그렇듯이 노예무역 폐지도 순수하게 선한 의도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며[4], 이해타산적인 부분이 개입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타국 상선 수색과 억류로 영향력을 강화시킨다는 것 때문에 노예무역이 폐지되었다는건 설득력이 많이부족하다.

자식 중 새뮤얼 윌버포스가 있다.(윌리엄 윌버포스의 셋째 아들) 새뮤얼은 영국 성공회 주교로 활동하였는데 과학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일화가 있다. 진화론에 대한 논쟁에서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그 원숭이는 당신 할머니와 할아버지 중 어느 쪽 조상입니까?"라고 말했다가 토머스 헉슬리에게 "나는 진리를 왜곡하려 드는 당신 같은 사람보다는 차라리 원숭이의 자손이 되겠습니다."라고 반격을 당한 사람이 바로 그이다. 진화론이 이후 백인 우월주의와 제국주의, 인종차별의 정당화에 철저하게 악용되었다는 점을 보면, 참 묘한 인연이다. 이 때문에 새뮤얼 윌버포스를 변호하는 쪽에서는 새뮤얼이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인종차별에 민감했고, 진화론이 인종차별에 악용될 것이라고 생각해 반감을 가졌다고 보기도 한다. 문제는, 이 주장을 창조설 유포자들이 악용할 때가 있다는 것(...).


3 한계?

노예제도의 폐지라는 업적을 남긴데 반해 신분제에 대해선 그다지 좋지 않은 면을 보인 적도 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정치 및 사회 제도에 대해 그의 정치적인 동지이기도 한 에드먼드 버크의 영향을 받아서 보수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생애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인해 불평등한 인간의 신분제에 대한 도전과 인권에 대한 주장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윌리엄 윌버포스는 이런 움직임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토머스 페인이 저술한 '인권'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이는 당시 영국의 시민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즉, 윌리엄 윌버포스는 비록 기독교적 윤리관을 충실히 따랐지만, 당시의 구시대적인 신분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4 대중매체 속 윌버포스


귀족에 남 부러울 것 없이 살 수 있던 그가 발벗고 나서서 노예제를 폐지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통해 그의 인생을 볼 수 있다. 2008년 개봉작이며, 윌버포스 역을 판타스틱 4의 주연 이안 그루퍼드가 맡았고 그의 절친이자 영국 수상인 윌리엄 피트 역엔 훗날 셜록(드라마)로 전 세계적 인기를 끌게 되는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맡아서 열연을 펼쳤다.
  1. 당시 영국은 전세계 노예무역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있었다.
  2. 사실 그정도 국력을 행사한 나라는 고대의 로마제국밖에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3. 상식적으로, 자국의 상선이 공해상에서 타국 군함에게 타국의 법으로 강제수색을 당하는데 가만히 참고 있는 나라는 없으며, 만약 국제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나라는 3류국가 이하의 반 식민지 수준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그런 나라들은 식민지나 노예무역은 커녕 일반적인 국제무역조차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4. 일례로, 이 시기 미국에서 남부는 노예제를 남북전쟁 이후까지 실질적으로 유지하는데 비해 북부에서는 진작 노예제가 폐지된 것은 북부 사람들이 더 선하고 기독교적이어서가 아니라, 공업이 발달한 북부 특성상 한곳에서 오래 일하며 숙식까지 제공해주어야하는 흑인노예보다는 임금이 싼데다가 해고가 쉬운일반 노동자나 이민자를 쓰는게 더 효율적이어서라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