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4세

역대 영국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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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4세
(George IV)
윌리엄 4세
(William IV)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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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4세
(Wilhelm IV)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
(Ernst August I)

William Henry. 영국-하노버 동군연합의 마지막 왕이다.

1 개요

1765년 8월 21일 조지 3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830년 6월 26일 즉위했으며[1]1837년 6월 20일 사망했다(만 71세 10개월, 재위 6년 359일).

영국 해군(Royal Navy)에서 복무한 탓에 항해왕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13세에 입대했으니 소년병이었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에 장교가 아닌 수병으로 복무했으니 더더욱 소년인 셈. 스페인과의 전쟁에도 참가해 군기를 빼앗아 아버지 조지 3세에게 바쳤는데 어째 후대의 윤색 느낌이 난다. 훗날 제독 지위를 받긴 했지만 명예직이었다.

2 생애

2.1 왕위 계승 전

유럽의 복잡한 정치판에 확실하게 동맹을 맺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왕가간의 혼인이었다. 그래서 제정된 법률이 '1772년 왕실혼례법(Royal Marriage Act of 1772)'. 요지는 왕의 허락이나 추밀원의 동의 없는 결혼은 무효이며, 혹 그 결혼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에게는 왕위 계승권이 없다는 것이다.[2] 이 결정에 반발해 윌리엄 4세를 비롯한 조지 3세의 몇몇 아들들은 허락받고 결혼하느니 차라리 사랑하는 사람이랑 살겠다고 동거에 들어간다.

이 법이 제정될 때엔 조지 3세의 후계가 확실하게 정해져있었던 데다 자식이 많았던 왕실에서는 그냥 제멋대로 살게 내버려두었다. 그래서 같이 동거에 들어간 사람이 연극배우 '도로시 블랜드(Dorothea Bland)', 혹은 '조던 부인(Mrs. Jordan)(1761-1816)'이었다.[3] 그렇게 말 그대로 알콩달콩 20년을 잘 살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위로 젊은 형들이 둘이나 있어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있었고, 그래서 위엄 있는 왕족 행세보다는 졸부 귀족급 정도의 그냥 부유한 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 4세야 원래 왕자이니 씀씀이가 좋고, 덩달아 이 조던 부인의 씀씀이가 너무나도 헤펐는지 거기에 질린 내가 쓸 것도 모자라 윌리엄 4세가 1811년 이별을 고한다.[4]

거기까지라면 윌리엄 4세나 그 서자들이나 그냥 영국의 한 귀족 가문으로 그냥 평범하게 남았을 텐데, 갑자기 영국 왕위 승계가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첫째 형인 조지 4세의 결혼은 고명딸 '샬럿 공주(Princess Charlotte Augusta of Wales 1796-1817)'가 태어나고 아그작이 나서 그 이후로는 대놓고 정부를 들여놓고 살았다. 그의 후계자였던 샬럿 공주는 당시 살아있었던 할아버지 조지 3세, 아버지 조지 4세를 이어 계승 순위 2위로 영국 국왕 승계 법률상 훗날 여왕의 즉위가 확실했었다. 유아사망률이 높았던 18세기, 샬럿 공주가 건강히 잘 자랐고 또 영특했던 것으로 알려져 영국 왕실과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1816년 샬럿 공주는 훗날 벨기에의 왕위에 오르는 레오폴드 1세와 결혼했는데,[5] 결혼 첫 해에 임신을 했다가 유산, 그 다음 해에 다시 임신을 했고[6] 만삭은 채웠지만 난산 끝에 사내아이는 사산, 하루를 못 넘기고 임신중독으로 사망한다.[7]

아직 할아버지 조지 3세, 아버지 조지 4세가 모두 살아있었고 앞서 설명했듯 아버지의 정식 결혼이 파탄났던 관계로 더 이상 후계자를 기대할 수 없게 되자 불똥은 나머지 조지 3세의 왕위 계승권에 가깝고 아직 정식 결혼을 하지 않은 아들들에게 튀게 되었다. 말 그대로 1817년판 정자왕 선발대회.

  • 1817년 영국 왕실배 정자왕 선발대회
    • 현 정자왕 조지 3세
왕자 공주 포함 총 15명
  • 정자왕 후보 1번 조지 4세
왕위 잠정 계승인. 고명딸이자 후계자인 샬럿 공주 사망, 정부인과의 불화로 다시 후계자 생산은 기대가 불가능. 불화로 인해 여러 명의 정부를 두고 여러 명의 사생아를 두었으나 첫째 아들로 왕위 계승이 확실해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서자는 없음.
  • 정자왕 후보 2번 탈락 프레드릭 왕자
사촌[8]불화로 별거. 이후 자손 없이 사망. 딱히 정부를 두었다는 기록은 없음. 계승 2위였으나 왕위 계승 위기 당시 나이가 너무 많았고 재혼도 하지 않아 승계 순위에서 제외.
  • 정자왕 후보 3번 윌리엄 4세
당시 실질적인 계승 순위 2위
  • 정자왕 후보 4번 켄트 공작 에드워드 왕자 (1767-1820)
당시 실질적 계승 순위 3위 대회를 위해 독일 출신 빅토리아 공녀(1786-1861)와 결혼. 빅토리아 공녀는 두 번째 결혼이었고 에드워드 왕자는 50살이 넘었었다. 뻔히 보이는 정략결혼이었는데 외동딸이 태어나고 1년이 지나지 못해 폐렴으로 사망. 사후 후계는 이 고명딸이 계승.
  • 이하 생략

조던 부인과 이별 후 혼자 지내다[9] 점점 부담이 되어가는 위자료에, 그렇다고 국회에서 받는 품위유지비만으로는 더 이상 씀씀이 감당이 불가능했던지 국회에서 빚을 퉁치는 조건으로 추밀원이 추천한 아델라이드 왕비(Queen consort Adelaide of Saxe-Meiningen 1830-1837)[10]와 1818년 결혼한다. 27살이나 차이가 나는 26살 신부에게 미안했는지 53세의 새신랑은 이후 외도를 하지도 않았고 씀씀이도 줄여 이후 만년적자를 면하게 된다.

아델라이드 왕비는 검소한 생활로 국민들에게 사랑받았지만 자식복이 없어 몇 번을 유산하고는 더 이상 임신을 하지 못 했지만, 윌리엄 4세가 즉위하고 아이를 가질 연령이 지나도 임신 소문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내외로 보기에 행복한 결혼을 한 것으로 보인다.[11]

다른 형제들과 다르게 아버지로서는 상당히 살가웠는지 본인의 아버지 조지 3세가 붕어하고 형이 조지 4세로 즉위하게 되면서 윌리엄 4세는 잠정 왕세자로 이후 왕위 즉위가 확실해보이자 이전 조던 부인과의 사이의 서자들의 안위를 걱정한다. 그래서 그 서자들을 위해 새로 귀족 가문을 하나 만들어주었는데 그게 '피츠클래런스(FitzClarence) 백작 가문'이다.[12] 거기에 아이가 없었던 아델라이드 왕비는 어머니가 없던 윌리엄 4세의 어린 서자들을 잘 돌보아주기도 했고.

결혼하기 전까지 확실하게 즐겼고, 군인으로 미국 독립 전쟁에도 복무했고, 결혼 후에는 부인에게 충실했으며 결혼 전 동거녀와의 사생아들도 확실하게 챙긴 걸 보면 15명이나 되는 형제들 중 과연 백미라고 해도 되겠다. 그게 아니었다면 영국 총리를 지내는 데이비드 캐머런이 윌리엄 4세의 후손을 자처할까?

정말 크루세이더 킹즈 2가 따로 없다

2.2 즉위 후

형이던 조지 4세가 별다른 후사 없이 1830년에 사망하자 영국 왕 중에는 최고령 64세의 나이로 즉위한다. 자신의 나이도, 왕비의 나이도 더 이상 아이를 기대할 수 없게 되자 후사를 걱정하던 윌리엄 4세는 이후 왕위를 물려받을 조카 빅토리아 공주에게 관심을 쏟고자 했다. 그런데 그 중간에 끼어들어 방해를 놓는 게 제수이자 빅토리아 공주의 모친인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 공녀와 그녀의 내연남 존 콘로이(1786-1854). 이 둘은 작당을 하고 이후 여왕 즉위가 확실한 빅토리아 공주를 자기네들 입맛에 맞게 조종하려 했다.[13] 가정교사를 소개해줘도 필요 없다고 하고, 파티에 초청을 해도 바쁘다는 핑계로 윌리엄 4세를 멀리했다. 그 관계가 파국에 이른 것은 1836년 윌리엄 4세의 생일 저녁 만찬에서의 일이었다. 윌리엄 4세는 빅토리아 모녀와 귀빈들이 모여있는 저녁 담화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하느님이 짐을 최소한 9개월은 더 살게 해줄 거라 믿소... 내 그렇게 되면 잠정 왕위 계승자이며 또한 지금 내 근처에 앉아 평상시에는 곁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저기 앉아있는 젊은 아가씨에게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짓이나 하는 저 악마 같은 조언자와 상황도 제대로 제어 못 할 내 무능한 제수씨가 내 조카의 왕위를 가지고 노는 일 없이 넘겨주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오!' 이거슨 아마도 정력왕의 패왕색?

'I trust to God that my life may be spared for nine months longer ... I should then have the satisfaction of leaving the exercise of the Royal authority to the personal authority of that young lady, heiress presumptive to the Crown, and not in the hands of a person now near me, who is surrounded by evil advisers and is herself incompetent to act with propriety in the situation in which she would be placed.'

기록에 의하면 당시 빅토리아 여왕은 충격에 눈물만 흘렸고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 공녀는 표정 관리가 안 돼서 울그락붉그락했다고. 초호화 고급엿 이 장면은 2009년 에밀리 블런트가 여주인공을 한 영화 '영 빅토리아(The Young Victoria)'[14]에 잘 나와있다.

왜 이렇게까지 켄트 공작부인에게 사자후를 날렸냐면, 영국에서는 18세부터 성년으로 봤고 왕위의 경우 18세 이전에 즉위하면 6년간의 섭정을 거치는 법률이 정해져있었기 때문. 그래서 나이가 많은 윌리엄 4세가 혹 빅토리아 여왕 성년 전에 붕어하면 그 6년의 기간 동안 섭정이 될 야심을 품고 켄트 공작부인과 그 내연남은 함께 어릴 적부터 빅토리아 여왕을 열심히 조이고 갈궈댔다. 그런 막후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는 윌리엄 4세로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자후대로 빅토리아 여왕이 18세로 성인이 된 지 26일 후에 사망하여 켄트 공작부인과 그 내연남은 섭정이 되지 못 했다. 죽으면서도 확실하게 빅엿!

3 여담

아내와 완전히 틀어져버려 형 조지 4세가 아내를 대관식에 참석 못 하게 한 것처럼 그도 대관식 관련해 기행을 남겼다. 그냥 하기 싫다고... 그러자 당황한 대신들이 규모를 축소해 검소하게 치르자고 하자 겨우 응했다고 한다. 가끔 격정적인 면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보통 때는 선량한 품성이라 친근한 (나쁘게 말하면 얕보이는) 왕이었다. 6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젊은 시절에 런던여자 후리러 자주 돌아다닌 기억이 있어 런던 시내를 그냥 돌아다니며 시민들과 인사하고 그랬다. 그러다가 자기와 아는 사람을 만나면 거리낌 없이 마차에 태우곤 해 호위를 맡은 주변 사람들이 골머리를 썩게 했다.

산업혁명 당시에 심각했던 아동노동을 금지시키고 노예제를 폐지하고 선거법을 개정하여 투표권을 넓혀 영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왕이기도 하지만 영국 왕 가운데 마지막으로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총리를 임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조지 3세의 아들들을 귀찮게 만들었던 '1772년 왕실혼례법(Royal Marriage Act of 1772)'은 빅토리아 여왕의 자식복, 그리고 여왕 부부의 야심과 국회의 지지로 '유럽의 할머니'라는 별명을 가져다 준다. 법률을 이용한 본격 유럽 왕실판 짝 법대로 안 하면 국물도 없어!
  1. 즉위 당시 65세..
  2. 2015년 3월 26일에 돼서야 폐지되었다. 과연 기행의 나라
  3. 아일랜드 출신이라 물건너와서 '조던'이라 불렸고, '부인'은 처음 무대에 오를 때 벌써 임신(...)중이라 변명이 필요해서…
  4.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였던 조던 부인은 연극무대에 더 이상 오르지 않는 조건으로 딸만의 양육권과 1년에 £4000 파운드(2015/12 기준 한화 약 3~4억)의 위자료를 받았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랐는지 다시 무대에 오르락내리락하다 딸들의 양육권도 빼앗기고 결국 쓸쓸하게 영국도 아일랜드도 아닌 타지인 프랑스에서 1816년 사망.
  5. 야망이 넘치다 못해 온 몸에 도배를 한 것으로 유명했던 레오폴드 1세 때문에 여론은 이 결혼을 비관적으로 봤지만 남겨진 기록으로 보아 행복했던 결혼으로 보인다.
  6. 이 임신은 당시 영국 증시를 들썩이게 할 만큼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
  7. 이게 평생 한이 됐는지 생전에 레오폴드 1세는 영국 왕실에 집요하게 관여했고, 그 결과가 빅토리아 여왕과 부군 앨버트 공의 결혼 중매다.
  8.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첫번째 부인인 브라운슈바이크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딸로 둘 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친조카와 외조카다. 그러나 결혼 후 서로 바람을 피다가 엘리자베트는 궁정 악사와의 사이에서 임신을 하게 되어 자기 외삼촌이 빡쳐서 감금된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의 기분이 풀어지면서 처우는 상당히 개선되었다고.
  9. 뭐, 이때도 데리고 다니던 여인들이 있어서 지금도 윌리엄 4세의 후손임을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10. 호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의 주도 아델라이드가 이 왕비의 이름에서 따왔다.
  11. 다만 여러 번의 유산으로 심기가 불편했던 윌리엄 4세는 사석에서 '망할 것들'이라며 쌍욕을 했다고.
  12. '클래런스의 아들들'이란 뜻으로 윌리엄 4세 즉위 전 작위이던 클래런스 공작(Duke of Clarence)에서 따왔다고 한다.
  13. 그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이 상당히 어려서부터 조숙해지고 성격 또한 욱하는 쇠고집이 된 건 덤.
  14. 2010년 오스카 영국 시대극 영화가 항상 받아가는 의상상 수상.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기 바로 전부터 신혼초까지를 다룬 영화. 호화스런 의상과 배경이 아름다운 영화이다. 고증은 상당히 잘 되어있는데 일부 세부묘사와 엔딩이 실제와 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