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버트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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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영국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으로 에드워드 7세를 비롯한 빅토리아의 자녀들의 부친이다. 본명은 프란츠 알브레히트 아우구스트 칼 에마누엘(Franz Albrecht August Karl Emanuel)로 미들 네임인 '알브레히트'를 영국식으로 변형한 '앨버트'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있다.

2 생애

2.1 가계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공작인 에른스트와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앞에 '작센'이 똑같이 붙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앨버트 공의 친가와 외가는 둘 다 작센의 지배 가문인 베틴 왕조의 분가로, 그 중에서도 장자인 에른스트 계열이었다.

차자 집안인 알브레히트 계열이 작센 왕국을 건국하고 잘 나가는 동안, 에른스트 계열은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을 버리고 마르틴 루터개신교를 지원했다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에게 밉보여 방계인 알브레히트 계열에 작센 선제후 지위를 찬탈당했고 이래서 줄을 잘 서야 된다는 옛말이 틀린 게 아니다(...) 분할상속을 택하여 수시로 영지가 분리되고 통합되곤 했기 때문에 하나의 강력한 가문으로 성장하지 못 하고 중소영지를 통치하는 중소가문의 집합으로 영락한 상태였다.[1] 앨버트 공의 부모가 결혼할 당시의 에른스트 계열은 크게 네 가문으로 분리되어있었고, 그 중에서도 외가인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가가 남자 후손이 없어 단절이 예정된 상태에서[2] 베틴가문 에른스트 계열의 영지 재조정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후계자와 작센 알텐부르크 딸을 정략결혼시킨 것. 이 과정에서 친가인 작센-코부르크-잘펠트는 영지 중 비교적 작은 영지인 잘펠트를 다른 친척에게 넘기고 대신 처가로부터 고타를 물려받아 영지를 재조정하여 작센-코부르크-고타로 통치령명이 변경된다.[3]

비록 작은 가문이나 베틴가문은 작센-폴란드 왕실의 통치가문이고 에른스트 계열은 그 친척으로 원래 신교도 제후중 최초의 제후로 신교도 가문에서 존경받는 집안의 뿌리가 깊은 가문이었기 때문에 통치령에 비해 큰 나라 군주와 통혼이 가능했다. 선대 조상대부터 신교도 제후인 네덜란드 오라녜, 호엔촐레른 , 헤센, 하노버.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과 통혼했고, 가까운 시기엔 빌헬름 1세의 황후도 베틴가문 에른스트 계열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 출신. 게다가 앨버트 공의 아버지 대에서 삼촌과 고모들이 러시아, 포르투갈, 영국 왕가와 혼사를 맺는 등 운이 트이면서 앨버트 공의 운명도 달라지게 된다. 앨버트 공이 결국 대영제국 여왕의 부군으로 간택된 배경도 그의 삼촌이자 벨기에의 왕이 되는 레오폴 1세조지 4세의 후계자였던 샬럿 공주의 부군이었고 동시에 고모 빅토리아가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인 켄트 공작부인이었기 때문.

2.2 유년기

어린 시절은 매우 불행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영지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문내의 결정에 따라 정략결혼해야 했던 두 부모의 관계는 앨버트 공이 태어날 때부터 이미 각자 애인을 두고 있을 정도로 매우 나빴고, 결국 이것이 화근이 되어 이혼까지 한 데다[4] 사실상 쫓겨난 어머니가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파리에서 일찍 객사하기까지 했기 때문.

이때까지도 아내에 대한 화가 풀어지지 않았던 앨버트 공의 부친 에른스트 공작은 두 아들이 죽어가는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것을 금지했고, 앨버트 공은 부모의 이혼 이후 영영 어머니를 보지 못 했다. 큰 충격을 받은 앨버트 공은 자신은 가정을 꾸리면 좋은 남편, 성실한 아버지가 되겠노라 다짐하게 되었다고.[5]

1836년 형 에른스트 2세와 함께 고모인 켄트 공작부인을 만나러 간다는 핑계로 영국을 방문하여 사촌이자 당시 켄트 공녀였던 빅토리아와 첫 선을 보게 된다. 처음 빅토리아가 마음에 들어했던 사람은 유쾌하고 명랑한 성격의 에른스트였지만 미남미녀를 대놓고(…)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빅토리아는 얼마 못 가 자신의 일기장에 "푸른 눈에 아름다운 코, 하얀 치아" 등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았을 정도로 대단한 미남이었던[6] 앨버트 공에게 반해버렸다. 성완얼 게다가 함께 지내면서 앨버트 공이 겸손하고 뛰어난 인품까지 갖춘 인물임을 알게 되자 여왕은 즉위 3년 뒤 직접 청혼했다.[7] 다만 낭만적이고 감성적이었던 빅토리아는 앨버트가 청혼을 받아주자 너무나 기쁜 나머지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천사 같은 앨버트에게 사랑받는 느낌은 인간의 언어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다."라고 일기에 적었을 정도였지만, 트와일라잇 시리즈이사벨라 스완이 떠오른다 막상 앨버트는 "빅토리아는 나에게 너무 잘해주고 친절해요. 그녀가 나에게 보여주는 사랑을 생각하면 난감할 때가 있어요."라고 형에게 편지를 썼다(…). 심지어 여왕의 시녀조차 결혼 첫날밤을 보낸 직후의 부부에 대해 여왕은 앨버트에게 깊이 빠져 있지만 앨버트는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았다고 증언해버리는 안습한 사태가…

2.3 결혼

부부생활은 주로 앨버트 쪽이 인내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처가살이하는 데릴사위라는 입장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앨버트의 성격이 진중했던 반면, 빅토리아 여왕은 매우 화를 잘 내고 고집불통에 불 같은 성격이었기 때문. 부부싸움은 주로 사소한 사건에도 자주 성을 내곤 했던 빅토리아의 신경질로 시작되곤 했는데, 이때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시시비비를 논리적으로 가리면서 빅토리아를 가르치려 들거나 아예 입을 꾹 닫아버리고 그러려니 하는 앨버트의 무심한 태도에 점점 스팀이 오르기 시작한 여왕이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앨버트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짜증을 쏟아붓고, 나중에는 그러다 참지 못 한 앨버트가 꽥 소리를 지르거나 뛰쳐나가버리는 패턴의 반복이었다고. 그때나 지금이나 게다가 여왕의 주치의들조차 빅토리아도 할아버지 조지 3세처럼 하노버 왕조의 광기를 물려받아 정신이상자가 되는 게 아닌가 걱정했을 정도로 한 번 화가 났을 때 빅토리아가 부리는 성질은 일반인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앨버트쯤 되는 보살급 멘탈이나 그 성격 감당하고 산다는 게 당대에도 이미 중론(…).

그러나 이런 더러운 성미와는 별개로 빅토리아는 일단 흥분이 가라앉으면 앨버트의 말이 대부분 맞고 자기가 너무 지나치게 화를 냈다는 걸 인정했고, 먼저 다가가 용서를 빌고 화해를 청하는 쪽도 주로 빅토리아였다고 한다. 하루는 대판 싸운 앨버트가 자기 방에 틀어박혀 문을 잠가버리자 빅토리아가 문을 열 것을 명령하며 "영국의 여왕이에요."라고 했을 때는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다시 노크하며 "당신의 아내 빅토리아예요."라고 말하자 기쁘게 문을 열었다는 일화는 유명한 에피소드.

빅토리아 여왕은 근세 여성 군주의 한계상 군주임에도 여느 여염집 아낙처럼 부군에게 순종하고 권력을 공유해야 게 싫다는 이유로 엘리자베스 1세처럼 독신으로 살고 싶다고 처녀 시절 누차 언급했을 정도로 기가 세고 독립적인 여성이었지만,[8] 앨버트와의 결혼 기간이 길어지면서 남편을 점차 신뢰하게 되었고 종국에는 완전히 앨버트에게 의존적으로 변해버렸다. 심지어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앨버트가 하지 말라고 하면 리본 하나라도 절대 함부로 매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썼을 정도. 다만 앨버트에게 의존하는 것과는 별개로 순종적인 것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고, 한 번 화내기 시작하면 앨버트도 열심히 달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그나마 신하들이나 자식들이 여왕을 달래는 건 전혀 안 먹혔지만 앨버트가 달래는 건 먹혔다고.

2.4 여왕의 부군

200년만의 '여왕의 부군'[9]으로서 여러 선례를 스스로 만들어야 했으므로 고생이 심했다. 앨버트 이전에 앤 여왕의 부군이자 덴마크의 왕자였던 컴벌랜드 공작 조지가 있기는 했지만 앨버트와 달리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앤 여왕에게 살아있는 후계자를 만들어주는 데도 실패하면서 공기급의 존재감을 과시했던 데다[10] 아내가 여왕이 된 지 6년만에 사망한고로 별다른 선례가 없었기 때문.

또한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결혼 초기에는 경계의 대상이 되어 꽤 고독했다고 한다. 삼촌 레오폴 1세가 영국 왕위 계승자였던 샬럿 공주와 결혼하여 벼락출세를 노린다는 험담을 들은 것처럼 그도 여왕의 재산을 탐하고 여왕을 조종해 영국을 지배하면서 모국 독일의 이익에 충실하려 한다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여왕과의 약혼 발표가 나자마자 영국 대중들 사이에서는 "새신랑은 의심의 여지 없이 뚱뚱한 영국 여왕의 두툼한 돈지갑을 노리고 왔노라"라고 앨버트를 조롱하는 발라드가 대유행을 했을 정도. 법적 지위를 부여받는 것에서도 앨버트는 푸대접을 받았는데, 결혼 후 17년 뒤인 1857년에야 간신히 '여왕의 배우자(The Prince Consort)' 칭호를 받았고 그 전에는 원래의 호칭인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Duke of Saxony'에 직계 왕족과 결혼하면 무조건 붙는 HRH(His Royal Highness)이 추가로 붙은 것 외에는 어떤 영국의 작위나 공적 지위도 없었다.[11] 게다가 의회와의 줄다리기 끝에 어렵게 남편에게 'The Prince Consort' 호칭을 부여하는 데 성공한 여왕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앨버트에게 해군 제독 지위도 주고 싶어했지만 이 지위는 기어이 못 받았다.[12] 현재 영국의 국서인 필립 마운트배튼 경은 해사 출신이라서인지 해군 최고사령관직과 육해공군 원수직을 겸하고 있다.

이에 더해 앨버트의 성격이나 성향도 영국인들과는 별로 맞지 않았다. 농담을 즐기고 재치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영국인들에게 앨버트는 지나치게 진지하고 유머 감각도 없고 우울하기까지 한 사람이었고, 한 마디로 영국인이 생각하는 재미 없는 독일인의 전형 그 자체 사교생활을 즐기지 않아 영국 귀족들과 사귀는 것이 매우 느렸던 데다,[13] 밤늦게까지 호화로운 파티를 열고 춤추며 노는 영국 상류층들의 관습[14]은 아예 이해를 못 하다 못해 경멸해서, 성실하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을 강조했다.

또한 복도 청소를 하는 하녀 옆을 지나갈 때조차 귀부인에게 하는 것처럼 모자를 벗고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나는 신경쓰지 마세요."라며 정중하게 행동했고, 당시 상류층 남성이라면 흔히 두었던 애인 하나 제대로 만들지 않았던 데다, 임신해서 몹시 살찌고 예민해져있는 아내 빅토리아 여왕을 보고[15] "미래의 어머니가 될 임산부는 너무나도 아름답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내 아내"라고 부르며 옆에서 아주 충실하게 수발을 들어주는 등(…) 19세기 영국인의 기준에 지나칠 정도로 도덕적이고 모범적이었던 앨버트의 행실과 마인드는 존경스러운 수준을 넘어서 왠지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오버액션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덕망 있는 성품과 고결한 행실로 가족들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존경을 받았지만, 친구가 별로 없었던 영국 귀족층들 사이에서는 배척을 받았고 안 그래도 외국인 왕족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일반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신문지상에서는 차가운 샌님, 사이비 현학자라며 심심할 때마다 까이곤 했다. 앨버트의 도덕률에 깊이 공감했던 데다 열렬한 남편의 지지자였던 빅토리아는 앨버트가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영국 신민들에게 평가절하당하는 것에 대해 몹시 분개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2.5 가정 생활과 자녀

이렇듯 안팎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보니 결혼초의 앨버트는 자연스럽게 가정내의 문제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과 집사인 존 콘로이의 폐쇄적인 양육하에서 자라난 빅토리아 여왕은 어머니를 몹시 싫어했고 가정교사 레젠 여남작에게 의존했는데, 이 때문에 켄트 공작부인은 심지어 딸의 정적들을 지원했을 정도로 여왕을 괴롭혔고, 레젠 여남작은 여주인 빅토리아의 사랑이 앨버트에게 넘어갈 것을 염려해 두 부부를 이간질하는 등 빅토리아의 가정 역시 앨버트의 가정처럼 평범한 가정은 아니었다. 막장 드라마 사위이지만 동시에 친정 조카라는 이점을 살려 켄트 공작부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앨버트는 공작부인과 여왕을 어느 정도까지는 화해시키는 데 성공했고 레젠 여남작을 독일로 쫓아내 문제를 해결했는데, 이 시점 이후로 앨버트는 가정내의 문제 해결사, 중재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여왕과의 금슬은 매우 좋아서 9남매를 낳았다. 빅토리아/가족관계 참고. 이 중 특히 앨버트가 사랑한 자녀는 첫째이자 장녀로 후에 독일황후가 되는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통칭 비키)로, 빅토리아 여왕이 내심 질투를 할 정도로 귀여워했다고 한다. 비키는 6세에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소화하고 14살에는 정치, 외교, 사회 다방면에서 막힘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추었을 정도로 여왕의 자녀들 중에는 가장 탁월한 영재였는데 엄친딸 이게 또 지적 욕구가 대단했던 앨버트의 구미에 딱 맞았돈 것.

맏이의 성취에 감격한 앨버트와 빅토리아는 자식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둘째이자 왕세자인 버티에게는 측근 스톡마 남작마저 기겁할 정도로 빡센 교육 커리큘럼에 더해 왕세자 전용 군사교육까지 시켰는데, 당연히 버티는 이를 따라가지 못 했고 점점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여왕은 게으르고 공부를 멀리하며 맨날 애인이 바뀔 정도로 사생활도 문란하고 부모 말도 징그럽게 안 듣는(…) 장남을 매우 못마땅히 여겨 들들 볶았는데, 그런 빅토리아와 버티 사이를 더 나빠지지 않도록 중재했던 것도 앨버트였다. 그러나 앨버트 역시 외가인 하노버 왕조의 왕자들을 닮아 자신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아들을 이해하지는 못 했고, 버티 또한 냉정하고 도덕적인 아버지의 설교에 그다지 귀를 기울이는 성품은 아니었다고. 후일 에드워드 7세가 되는 버티는 실제로 특출난 면이 없는 평범한 재능의 평범한 왕이었다는 평을 듣지만 빅토리아 여왕이 평한 것처럼 최악의 성품과 지능을 가진 둔재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외교 정책에 있어서는 부모보다 낫다는 평가도 있다.

2.6 정치 관여

본인이 꽤 똑똑했고 의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여왕에게 조언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밖에 정치에 관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여왕임에도 여성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보수적인 여성관을 가지고 있던 빅토리아 여왕은 그의 조언에 잘 따르는 편이었다. 공식적인 직함은 없었지만 단순히 여왕에게 조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죽기 전까지 공식 문서는 앨버트가 먼저 읽어서 답변을 써놓은 걸 고대로 신하들한테 주진 못 하고 빅토리아가 열심히 베껴써서 문서를 처리했다고 한다. 학식과 지성을 갖춘 데다 자유주의 성향이었는데 신하들은 독일 남자가 여왕을 조종한다고 신나게 깠다고.

업적으로는 수정궁으로 유명한 1851년 영국 만국박람회를 주도하였으며 이 박람회가 성공적으로 치러지자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의 성공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2.7 사망

1861년 장티푸스로 사망[16]. 일설에 따르면 말썽꾼 아들 에드워드 7세를 타이르러 가는 길에 비를 맞아 병이 악화되었다고 한다. 빅토리아 여왕은 죽을 때까지 상복을 입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에드워드 7세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3 기타

일본 판타지 소설 이상적인 기둥서방 생활의 주인공인 야마이 젠지로가 이 사람을 모티브로 했다는 주장이 있다. 근데 실제로 둘을 비교하면 비슷한 부분이 겹치는 경우가 많다. 정부(축첩)을 들이지 않고 일편단심 여왕만 바라본다거나[17] 나름대로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직접 정사에 나서지 않고 아내에게 조언하는 역할만 한다거나 등등..... 실제로 작가가 앨버트 공을 염두해 두고 주인공 캐릭터를 구상했는지는 지금도 논쟁 중이다.
  1. 작센-코부르크-고타는 에른스트 계열의 막내뻘이다.
  2. 독일 왕가는 남계상속만 인정한다
  3. 유럽 통치 가문들은 베틴이니 비텔스바흐니 호엔촐레른이니 하며 본성이 있지만 영지명을 성으로 사용한다.
  4. 19세기까지 유럽 상류사회에서 이혼은 어디까지나 자녀가 없고 정치적, 경제적 이유가 확실한 경우 합의하에 이혼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불임 외의 개인적인 사정이나 외도를 이유로 이혼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앨버트 공의 부모의 이혼은 전 유럽 상류층의 흥밋거리로 전락한 것은 물론, 두 사람 사이에서 난 자녀들의 평판에까지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커다란 스캔들이었다.
  5. 앨버트 공의 형 에른스트 2세는 이와는 정반대로 여자와 결혼에 대한 불신에 사로잡혀 방탕하게 생활하다 성병에 걸려 후사를 얻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위는 남동생 앨버트 공을 거쳐 앨버트와 빅토리아의 차남인 에든버러 공작 앨프리드 왕자가 이어받게 된다.
  6. 너무 잘생겨서 공작의 아들이 아니라 이혼당한 공작부인이 잘 생긴 유대인 정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라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였다. 물론 이는 악의적인 헛소문에 불과했다. 코부르크 가문에는 레오폴 1세를 비롯해 외모가 출중하다고 평가되는 인물들이 제법 있는 편이었다.
  7. 빅토리아 여왕은 이때의 청혼에 대해 일기에 자세히 적어놓았다. "앨버트는 내가 기다리고 있는 접견실로 들어왔다. 그에게 접견실로 부른 이유를 알 거라고 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에 그도 동의한다면 무척 기쁠 것이라고 말했다. …(중략)… 우리는 서로 포옹했다. 그는 무척 다정하고 친절했다. …(중략)… 나는 내가 그에게는 너무 부족한 사람이고 나와 결혼하면 많은 희생이 따를 거라고 말했다. 앨버트는 결코 희생이 아니며 나와 함께 일생을 보내는 것에 동의하는 것 이상으로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8. 빅토리아 여왕이 앨버트와의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앨버트의 매력에 굴복한 탓도 있었지만 당시 수상이었던 멜번과 지나치게 친밀한 모습을 보이면서 그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괴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의회에서 '멜번 부인'이라는 조롱을 당할 정도로 여왕으로서의 체통에 큰 타격을 입고 있었던 점도 컸다. 적당한 왕족과 결혼하여 성실한 결혼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것 외에는 그런 스캔들을 잠재울 뾰족한 수가 없었던 것.
  9. 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하지 않았고, 메리 1세의 남편 펠리페 2세은 영국 여왕의 부군이라기보다는 에스파냐의 왕이었으며, 메리 2세의 남편 윌리엄 3세는 자신도 영국 왕위 계승자였기 때문에 공동즉위했다.
  10. 명색이 여왕의 정식 남편이라는 신분이었음에도 사망했을 때 장례식조차 개인장으로 치러버렸다. 안습.
  11. 왕이 아니면서 여왕의 부군이 된 또다른 케이스인 앤 여왕의 부군 조지와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 필립 공은 각각 컴벌랜드 공작, 에든버러 공작이라는 영국 작위를 받았다. 다만 'The Prince Consort'라는 호칭은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여왕의 배우자'라는 단순한 호칭에 불과하지만 역대 영국 여왕의 부군들 중 이 호칭을 부여받은 인물은 오직 앨버트 1명밖에 없었을 정도로 귀한 호칭이다. 현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인 필립 공조차 'The Prince Philip'일 뿐 'The Prince Consort' 칭호는 아직까지도 받지 못 했다.
  12. 후계자가 아닌 남성 왕족들은 군인으로 빠지는 게 일반적이었던 사대상으로는 드물게도 앨버트 공은 군대 경력이 없었다. 세계 최강의 해군이라는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 해군과 신하들 입장에서는 아무리 여왕의 남편이라 해도 외국 출신 미필(…)에게 명예직일망정 제독 지위를 안겨준다는 것은 몹시 타협하기 힘든 일이었던 것도 사실.
  13. 결혼 후 1년이 지난 시점에조차 본가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친구라고는 코부르크에서부터 함께 온 시종과 애완견밖에 없다고 적었다.
  14. 빅토리아 시대 사교계의 여왕으로 꼽혔던 베드포드 공작부인(버트런드 러셀의 큰할머니)은 새벽 4시까지 즐거운 나이트 라이프를 실컷 즐기고 다음 날 낮 11시에 일어나는 생활방식을 고수했다. 영국 요리의 전 세계적인 악명에도 불구하고 영국식 아침식사와 함께 쿠키, 케이크가 곁들여지는 애프터눈 티는 양도 많고 맛도 좋은 것으로 유명한데, 애프터눈 티를 즐기는 문화가 그렇게 발전한 배경에는 애프터눈 티가 간식이라기보다는 이렇게 늦게 일어나는 귀부인들의 아점용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15. 원래 키가 작고 뚱뚱했던 빅토리아는 임신을 하면 "술통 같이 부풀어오르고 있다"고 표현될 정도로 더더욱 살이 쪘고, 성격 또한 원래의 급함에 더해 몹시 까칠해지곤 했다. 특히 앨버트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매우 화를 냈다고. 자리를 옮기고 싶을 때마다 앨버트로 하여금 자신을 안아서 옮겨달라고 요구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 안 그래도 빅토리아가 정신줄을 놓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빅토리아의 주치의들은, 여왕의 성격이 임신할 때마다 위험 수준으로 괴팍해지자 어느 정도 왕실 자녀들이 태어난 뒤에는 더 이상 아이를 가지지 말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들을 몹시 좋아했던 앨버트와 아이들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는 앨버트의 말이라면 일단 따랐던 빅토리아는 그 권고를 무시했다.
  16. 주치의는 장티푸스라고 진단했으나 위암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많다.
  17. 비록 그 이전보다는 여성의 권리가 나아졌다고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이 다스리던 시절에도 남성 귀족들은 정부를 만들고 호화롭게 지내는 게 전혀 도덕적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반대로 귀족 부인이 애인을 만들면 욕을 엄청 먹는 사회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예카테리나 2세도 남편의 정부 때문에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반대로 루이 16세는 정부를 만들지 않았는데 오히려 이 때문에 마리 앙투와네트가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투기가 심하다고 비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