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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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rican War of Independence
American Revolutionary War[1]

미국 독립 전쟁
American Revolutionary War
날짜1775년 4월 19일 ~ 1783년 9월 3일
장소북아메리카 동부, 플로리다주,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
발레아레스 제도, 지브롤터, 유럽 해안가
인도아대륙의 식민지들, 인도양, 대서양
결과미국 독립군의 승리
아메리카&유럽 교전국
13개식민지
미국
버몬트 공화국
프랑스 왕국
스페인 제국
네덜란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발데크
브라운슈바이크
이로퀴이 연맹
하노버 선제후령
미국내 왕당파
영국령 북아메리카
브라운슈바이크
안스바흐바이로이트
헤센 카셀 공작령
헤센 나사우 공작령
아대륙 교전국
마이소르 왕국
마리타 왕국
포르투갈
지휘관
조지 워싱턴
헨리 녹스
리처드 몽고메리
베네딕트 아놀드
호레이쇼 게이츠
존 폴 존스
프리드리히 슈토이벤
질제르 라파예트
장 드 비뫼르
토머스 게이지
윌리엄 하우
리처드 하우
존 버고인
허레이쇼 넬슨
찰스 콘월리스
헨리 클린턴
병력
농민군 2만 명
워싱턴군1만1,000명
정규군 4만 2,000명
독일 용병 2만 명
피해규모
2만 5,000명 전사
1만 7,000명 병사
총 5만 명
1,240명 전사
1만 8,500명 병사
4만 2,000명 탈영
1만 3,000명 포로
상선 1,500척 나포
독일인 1,200명 전사
독일인 6,354명 병사
영국군 1만 9,470명 사망
독일인 7,554명 사망
총 2만 7,024명 사망

1 개요

오늘은 어떤 중대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조지 3세의 글 중(1776년 7월 4일).[2]

1775년부터 1783년까지 진행된 대영제국13개 식민지(Thirteen Colonies)[3] 사이의 전쟁.

2 발단

근본적인 원인은 식민지와 본국간의 갈등이었다. 본래 본국과 북미 식민지의 사이는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었다. 북미 식민지는 영국이 국가적 차원에서 식민지 개척을 했던 19세기와는 양상이 달랐다.[4] 물론 16세기의 로어노크 식민지 이주시도나 17세기의 제임스타운(Jamestown) 개척이 있긴 했지만 사실상 성공한 식민 이주는 메이플라워호로 이주한 청교도들 이후였다. 본국은 북미 식민지에 총독을 임명하기는 했으나 대체로 총독들은 본국 출신보다는 북미 식민지 태생의 이민 2세대나 3세대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각 식민지들은 영국과 국왕에 충성한다는 조건 하에서 자체적으로 의회와 주정부를 구성하여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다. 영국도 이렇게 식민지를 유지하는 것이 편했다.

그러나 영국의 중상주의 정책을 보조하기위해 제정된 항해법이 점차 확대되는 식민지의 경제에 족쇄로 작용하자 미국의 식자층과 상인층을 바탕으로 반영감정과 혁명의 씨앗이 파종되었고, 1761년에는 이러한 경제권 제약에 대한 소송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물론 아직까지 이러한 움직임은 대중의 이해나 지지를 얻지 못했지만, 이렇게 파종된 씨앗은 이후 큰 나비효과를 불러온다.

2.1 미국 혁명의 시작

그러다가 '프랑스-인디언 전쟁'(프랜치-인디언 전쟁, French and Indian War)[5]이 일어나자 북미 식민지와 영국 본국은 프랑스에 맞서 일치단결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본국과 식민지가 단결하여 전쟁이 승리로 끝나고 양측의 관계는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프랑스-인디언 전쟁은 7년 전쟁에 포함되는 전역 중의 하나였고, 비록 영국이 승리했을지언정 7년 내내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느라 재정이 버거운 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이 전쟁에만 든 전비가 무려 6500만 파운드에 달했다고 하는데, 오늘날 화폐가치로 환산한다면 수백억에서 수천억 파운드까지 갈수 있는 어마어마한 비용이다...[6]

이러한 전쟁이 또 반복되었다가는 영국의 재정상황이 버티지 못하기에, 맨 먼저 1763년 미국 식민지인들이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으로의 확장을 금지시키는 포고문이 발표되어, 식민지 대중들에게 반영감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또한, 재정적자를 충당하기 위해 영국의회는 1764년 설탕조례(Molasses Act)를 제정했고 이듬해인 1765년에는 인지조례(Stamp Act)가지 통과시켰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것은 인지조례였는데 식민지에 유통되는 모든 종이에 3페니의 인지를 붙여야 한다라는 게 법안의 핵심이었다.[7]

식민지인들은 지난 전쟁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공헌했는데 돌아오는 보답이 이주제한과 세금이냐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런 반발의 배경에는 기존 세금이 간접세였던 것과 달리 인지조례가 제정되어 시행되는 인지세는 직접적으로 부과되는 것이라 대중들이 보다 직접 느낄 수 있는 세금이었다. 여기에 앞서 제정된 서부로의 확장 금지 포고로 인해 돈을 더 벌어들일 수 있는 수단까지 막혀버렸으니, 두가지의 시너지는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반대로 영국은 식민지인들은 전쟁에서 거의 한게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공을 영국군에게 돌렸다. 때문에 인지세는 "한 게 없으면 세금이나 내"라는 의도였다. 한참 뒤 인도(옛 무굴 제국)에서도 벌어진 사태. 이런 데도 영국이 신사의 나라냐?

식민지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식민지 자치및 식민지인의 권리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결국 인지세에 반대하면서 식민지인들이 내놓은 말이 그 유명한 "대표없는 곳엔 세금도 없다!"[8]였다.현재는 수도 워싱턴이 그렇다. 국회가 있는 땅에 상원의원 선출권이 없다. 당시 식민지인들이 영국 의회에 대표를 보낼 수가 없었던 이유는 영국과 북미 식민지에서 동시선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현대에도 선거 한번 하는데 며칠씩이나 걸리는 나라가 한둘이 아닌데, 대서양을 넘나드는 투표? 게다가 영국 역사를 살펴봐도 영국은 식민지에서는 총선을 치루지 않았다. 만약 식민지도 영국 의회에 의원을 보낼 수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9][10]

연일 격렬한 항의와 시위가 벌어졌고 북미 식민지의 거상들은 자신들과 거래하는 영국 상인들에게 인지세 폐지 안 해주면 너희들과 장사 안 할 거임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북미와의 교역으로 이득을 많이 보고있던 영국 상인들도 의회에 인지조례를 폐지해달라고 사정했고 결국 인지조례는 곧 철폐됐지만 불만이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이 사건은 영국 의회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식민지인들의 조직적 반발로 의회의 결정이 되돌려지자 영국 의회에서는 "이놈들 봐라?"라는 생각괘씸죄이 만연하기 시작했다. 이러자 영국 의회는 식민지에 권위를 세우기 위해똥개훈련 갖가지 세금을 물리는 법안을 잇달아 만들기 시작했다. 1770년에 이런 경향이 매우 강했는데 이를 "타운젠드 법안들"이라 한다. 타운센드 법안들이 통과되자 식민지에서는 다시금 강력한 반발이 일어났고 결국 다시 법안은 폐기 되었지만 기묘하게도 홍차에 붙인 세금만은 폐지되지 않았다. 영길리 : 헤헷 홍차는 소금이나 과 동급의 물자니 무조건 사겠지? 13개 식민지: 아니요. 홍차 비싸면 커피 마실건데요.

물론 이런 갈등을 사람들이 넋놓고 바라보지는 않았다. 어쨌든 북미 식민지를 유지하는게 영국으로서도 이득이었기 때문에[11] 수상을 지낸 바 있던 영국의 윌리엄 피트는 영국에 체류중이던 식민지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던 벤자민 프랭클린과 접촉하면서 어떻게든 타협점을 모색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당시 수상이던 프레데릭 노스는 조지 3세의 동의를 얻어 식민지에 강경책을 펴려 했다.

거기다 계속 서부로 진출하려는 식민지인들과 이로 인해 벌어지는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충돌로 인한 비용 지출을 막기 위해 영국이 이를 저지함에 따라 갈등이 격화되는 와중 보스턴 학살 사건(Boston Massacre)으로 인해 이 때까지만 해도 소수 세력이었던 독립파들이 세력을 키우게 되었고[12]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어차피 더럽고 치사해서 안 마실 차, 바다에 뿌려서 무료나눔 했습니다.을 일으키게 된다. 이 사건으로 제대로 열받은 영국은 군대를 파병했고 보스턴이 있는 매사추세츠 주 자치령 폐기선언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취했다.

그리하여 미국에서는 2번에 걸친 대륙회의가 소집되었다. 대륙회의는 어떻게든 영국과의 충돌을 피하자는 입장으로 모인 자리였지만 영국의 입장은 단호했고 결국 독립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미국은 전혀 전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거친 자연환경과 원주민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군대를 제대로 키울 여력도 되지 않았던 데다가 식민지인들 중 독립에 반대하거나 전쟁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거기다 상대는 대영제국. 물론 19세기의 막강한 위세가 18세기에도 그러했던 것은 아니고 다른 유럽 열강의 막대한 견제를 받았으나, 이미 세계에서 전쟁을 치르던 영국군과 식민지인들의 경력 차이는 비길 것이 아니었다.

물론 영국 본국과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각지에서 민병대가 조직되기는 했으나 민병대는 본질적으로 내 고향만 지킨다라는 주의가 강했다. 게다가 이들을 규합해서 이끌만한 세력 주체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3 계란으로 바위치기

3.1 보스턴 공방전

독립전쟁의 시작은 보스턴이 있는 매사추세츠주에서 시작되었다. 보스턴 사람들은 영국의 매사추세츠주 자치령 폐기에 격분했고 영국군에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퍼지면서 각지에서 민병대가 우후죽순으로 결성되기 시작했다. 영국은 토마스 게이지가 이끄는 4개 연대가 보스턴 시내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보스턴 밖까지 통솔권이 미치지 못했다.

결국 토마스 게이지는 보스턴을 위협하는 민병대부터 제압하기로 결심하고 1775년 4월 18일, 700명의 병력을 파견해 콩코드에 있는 민병대의 무기창고를 제압하고 민병대를 무장해제 시키도록 지시했다. 독립파에 속했던 폴 리비어는 영국군의 움직임을 알고서는 말을 타고 한 손에는 등불을 든채로 렉싱턴으로 가서 영국군이 쳐들어온다고 알려주었다.[13] 이에 렉싱턴의 민병대 77명이 소집되어 영국군을 기다렸다.

4월 19일 아침, 영국군이 렉싱턴의 초지에 이르러 민병대와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사실상 렉싱턴에서의 교전이 독립전쟁의 시작으로 간주된다.(렉싱턴-콩코드 전투) 영국군은 렉싱턴을 지나 콩코드 근처 노스브릿지에서 민병대와 전투를 벌였지만 민병대에게 밀려 보스턴으로 퇴각할수밖에 없었다. 퇴각하는 영국군을 각지에서 몰려들어온 민병대들이 공격했고 영국군은 궤멸직전에 보스턴 시내에서 지원군을 보내 겨우 보스턴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민병대들은 이제 보스턴 시내를 탈환하려는 구상을 하기에 이르렀다.(보스턴 포위전) 대륙의회도 결국 싸움을 피할수 없음을 깨닫고 조지 워싱턴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보스턴을 포위하고 있는 민병대들을 규합하게 했다. 영국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윌리엄 하우가 이끄는 4500명의 원군을 파병했다.

1775년 7월, 조지 워싱턴이 보스턴에 도착했다. 보스턴을 포위하고 있는 민병대들은 총만 들었을뿐인 오합지졸들이었고 워싱턴은 이런 오합지졸들을 이끌고 최강 전력인 영국군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었다.[14] 비록 우발적으로 동원된 민병대의 특성 상 무기, 탄약, 식량 등의 보급 문제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대포의 부족, 또한 치열한 시가전에서 발생할 여러 불확실성 때문에 조지 워싱턴은 보스턴 진격을 포기했지만, 민병대가 규율이나 전투 경험이 부족하긴 하지만 애국심으로 강화된 숫적우세가 영국군의 숙련과 규율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을 렉싱턴-콩코드 전투에서 증명했기 때문에 영국군 역시 보스턴에서 치고 나올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결국 지루한 장기 대치 끝에, 영국군에 대한 도발로 일어난 벙커힐 전투(영국군이 승리하긴 했지만 피해가 더 커서 숫적열세를 더 악화시킴) 후 영국은 보스턴 포기를 저울질하기 시작했고, 학수 고대하던 대포를 확보한 대륙군이 다시 한번 도체스터 고지에서 대포를 이용하여 도발하자 영국은 마침내 보스턴을 포기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양측 사령관의 암묵적인 신사 협정(말이 산사 협정이지, 실제로는 해상 철수 중에 공격하면 보스턴에 불을 질러버리겠다는 협박)에 따라 영국군이 함대를 이용해 해상으로 철수한 후 대륙군이 진입하여 보스턴을 해방시켰다.

대대적으로 전력을 보강한 영국군이 다시 침공해오면서 전쟁이 재개된 뉴욕 전역에서 초장에는 대륙군은 계속 개박살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기 보다는, 우물쭈물 하다가 뉴욕시에서 영국군 포위망에 갇혀서 아작날 뻔 했던게 더 큰 문제였다. 처참한 패배를 한번이라도 당하면, 국력이 미약한 미국으로서는 독립 운동을 더이상 지속할 여력이 없기 때문.) 그리하여 사령관 조지 워싱턴은 물자 보급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영국의 약점을 이용, 전투를 피하고 계속 시간을 끄는 소모전으로 나가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1777년 벌어진 사라토가 전투에서 승리하게 된다. 이 전투는 일반적으로 미국의 첫 승리로 평가된다. 트랜턴과 그 직후 일어난 프린스턴 전투에서 한 번 이기긴 했는데 그건 영국군 소속 독일 헤센 용병들이 크리스마스라고 방심했다가 당했던 거고….

4 바위가 깨지다

한편 이 시기 벤자민 프랭클린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유럽으로 건너가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전쟁이 발생하고 미국에서 구원요청이 들어오자 원군을 약속하고 실제로 엄청난 원군을 보냈다. 그 결과 프랑스[15], 네덜란드, 에스파냐 등이 지원하게 되어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었고 전쟁의 양상도 미국에게 좀더 유리해졌지만 좀처럼 결착이 나지 못한다. 이유는 양측 모두 내분이 장난 아니었기 때문.

미국 측에서는 점차 돈이 부족해지자 군인들에게 줄 월급을 제대로 지불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탈영병들이 속출하게 된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반란을 일으키려 하기도 했다. 베네딕트 아놀드 같은 경우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거기다 장기화되는 전쟁으로 점차 반전여론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영국 또한 전쟁의 장기화로 늘어가는 빚과 미국의 근성, 군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점차 미국 독립 의견이 늘게 된다. 그럼에도 조지 3세와 영국 정부는 포기하지 않고 대병력을 보내 전쟁을 계속하려 했다.항복을 받아내려 했으나….

그런데 사라토가 전투의 결과는 한편으로는 미국에게 더 위험한 상황을 초래했다. 영국이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로 결정하면서 또한 전쟁의 목적을 '반란을 진압하는 것' 에서 '어쩔 수 없이 미국의 독립을 인정해야 한다면, 거기서 최대한의 이득을 얻어내는 것' 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목적이 전자에 머물러 있을 때는, 조지 워싱턴이 그렇게 했듯이, 대륙군의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넓은 북미 아메리카 대륙 여기 저기로 도망다니다가 영국군이 방심했을 때 기습하거나 혹은 유리한 조건에서만 싸우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영국의 목적이 후자로 바뀌고 남부 파견 영국군이 몇 번의 대승을 통해 남부 식민지 지역을 손쉽게 점령해 버리자, 이대로 전쟁이 끝나게 되면 신생 독립국 미국은 13개 주에서 세력이 더 줄어들게 될 뿐 아니라 북쪽(훗날 캐나다가 되는)과 남쪽(이번에 점령한 조지아, 캐롤라이나와 버지니아 일부)에 강력한 영국의 식민지와 맞닿게 되고, 또한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로 뻗어나갈 기회도 불확실해 진다. (거기다 영국군이 점령하고 있는 뉴욕시도 문제. 영토 한 복판에 영국군 점령지를 허용하거나, 그게 싫으면 협상을 통해서 다른 영토나 이익를 내주고 뉴욕시를 찾아와야 한다.) 한마디로, 강대국이 될 수 있는 기반 자체을 상실하면서 영국의 위협에 맞서 계속해서 프랑스에게 의존해야 하는 프랑스 꼬봉 국가로 전락할 상황이 된 것.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것은, 또 한번의 결정적인 승리를 통해서 데꿀멍한 영국으로부터 13개 주 온전한 독립과 여러 기타 권리를 공식적으로 승인받는 것 밖에 없는데... 문제는 뉴욕을 점령하고 있는 영국군 주력 병력은 쉽게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규모가 아니고, 남부 파견 영국군을 각개격파하자니 남부 여러 지역으로 재빠르게 대병력을 수송할 수 있도록 제해권이 받쳐줘야 하는데, 상대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상대로도 전 지구적인 재해권을 잃지 않고 있는 영국이었다. (실제 북미 대륙에 파견된 프랑스 함대는 아직 변변한 전공 하나 올리지 못하고 있었고,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영국 본토 침공과 지브롤터 포위를 시도했으나 그것 역시 영국 함대에게 막혔다.)

그런데 여러 사건과 우연이 겹쳐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으니...


요크타운의 항복. 1797년 존 트럼블 그림.

1781년,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해상 수송에 앞서 재해권 확보를 위해 서인도 제도에서 프랑스 함대가 북상했으며, 프랑스 함대의 정확한 규모, 목적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출항 첩보를 입수한 영국도 견제를 위해 함대를 선제적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프랑스는 대담하게도 드 그라스 제독이 서인도 제도의 전 함대 전력을 다 이끌고 온 반면, 영국은 '미치지 않고서야 프랑스가 서인도 제도를 무방비로 비워놓고 전 함대를 이끌고 오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하고 적당한 전력의 함대만 파견했는데, 그 결과 영국 함대는 체사피크 만에서 압도적인 전력의 열세에서 프랑스 함대와 조우해야 했다. 또한, 그럼에도 (결과론적 관점에서 봤을 때) 영국 입장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싸움이었으나, 영국 함대 사령관 그레이브스 제독에게는 그런 열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한 차례의 체사피크 만 해전(9월 5일)을 치루고는 영국 함대는 후퇴해 버린다.[16]

그렇게 체사피크 만 재해권이 일시적으로 프랑스 함대에게 넘어간 사이, 영국군 사령관 콘월리스가 이끌게 된 요크타운 요새에서 주둔하던 남부 파견 영국군 전체가 그 2배가 넘는 대규모의 미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좀더 부연하면, 요크타운 포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9월 20일부터고, 9월 첫째주에는 아직 미국-프랑스 연합군은 필라델피아 근처에 머물러 있었고 해상 수송도 시작하기 전이었다. 게다가 8월 30일까지는 미국-프랑스 연합군은 뉴욕과 아주 가까운 스태튼아일랜드 서쪽에 있었고, 그리고 여기까지는 미국-프랑스 연합군이 뉴욕시를 공격할 때 취해야 하는 공격로와 동일하기 때문에 영국군은 죽었다 깨어나도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즉 9월 5일 체사피크 만 해전이 일어났을 때 요크타운의 포위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또한 영국 함대가 출항할 때는 요크타운이 포위될 거라는 것을 예상하기도 힘들었다. 체사피크 만 해전의 패배는 결과론적으로 요크타운의 포위를 막지 못한 것이지, 요크타운의 포위를 보고 영국이 구원함대를 내보냈는데 체사피크 만 해전에서 패배한게 결코 아니다.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대대적인 상륙 이전에 요크타운 요새 주변 지역에는 라파예트 휘하의 병력에 프랑스 함대에서 상륙시킨 해병을 합쳐 고작 3,000명 밖에 없었는데 그 병력으로 9,000명에 달하는 영국군을 포위한다는건 어불성설.) 뒤늦게서야 프랑스 함대 규모와 대규모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공격 목표가 요크타운 요새임을 알게 된 영국은 구원을 위해 대대적으로 병력과 함대를 준비했지만, 10월 5일까지 도착하겠다던 구원군이 도착할 기미가 없자 희망을 잃은 콘월리스는 10월 19일에 마침내 GG를 쳐 버린다. 1781년, 영국군 사령관 콘월리스가 이끄는 북미의 영국군 주력부대가 요크타운 요새에 고립, 포위되었다. 요새에 대한 포위를 풀고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최강이라는 대영제국 해군이 나섰으나 프랑스 해군에게 체사피크 만 해전에서 참패, 봉쇄망을 뚫지 못했다. 결국 콘월리스는 포위망을 뚫을 가망이 없어보이자 GG쳐 버린다. 이 사건 이후 영국에선 전쟁 지지자들이 크게 줄게 되었고 결국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 영국 의회는 영국군에 귀환을 명하게 된다.

참고로 앞에서 '여러 사건과 우연이 겹쳐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으니' 라고 표현한 것처럼 다음과 같은 얘깃거리들이 있다.

  • 원래 남부 파견 영국군은 남부 지역 여러 곳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는데, 만약 그 상태에서 미국-프랑스 연합군이 한 곳을 포위 공격했다면 영국군은 고작 2,000-3,000명 수준의 병력만 잃게 되므로 별 타격이 없다. 그런데 식민지 민병대 게릴라의 공세를 견디지 못한 콘월리스가 상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병력을 이동시켰고, 상관인 클린턴은 콘월리스의 독단 행동을 묵인했고, 그 결과 남부 파견 영국군 전체가 그것도 대규모 상륙 작전이 용이한 해안에 인접한 요크타운 요새 한 곳으로 집중되었고 또한 9,000명이란 병력의 손실은 영국이 무시하고 전쟁을 계속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게 되었다.
  • 콘월리스가 독단으로 병력을 이동시킨 상황에서 이미 영국의 '남부 전략' 은 수정이 불가피했다. [17] 그 얘기인 즉, 굳이 콘월리스가 남부 파견 영국군 전체를 데리고 요크타운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재해권을 확보할 강력한 영국 함대도 있었으니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프랑스 함대가 북상하기 전에 콘월리스의 병력을 안전한 뉴욕시로 철수시킬 수 있었고, 그럴 경우 미국-프랑스 연합군은 닭쫓던 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체사피크 만 전투와 요크타운 포위 사이에는 20여일이라는 기간이 존재한다. 그 기간 사이에 영국군이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섰어도 최악의 참패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구원군이 도착한 건 콘월리스가 항복한지 단 5일 후였다.
  • 조지 워싱턴은 가능성이 희박한 뉴욕시 공격에 집착했다. 당시 뉴욕시는 주둔 중인 영국군만 11,000~14,000 명이고 수년 이상 요새화된 도시였기 때문에, 공성전을 하려면 미국-프랑스 연합군은 최소 40,000 명을 동원해야 했다. 그러나 프-미 연합군이 그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으면 진작에 영국군 쳐바르고 전쟁 끝냈다. 한마디로 뉴욕 공격은 미친 짓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조지 워싱턴 장군에게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공격 목표를 정할 최종 결정권을 주라고 로상보 장군에게 지시했으나, 로상보는 조지 워싱턴의 뉴욕시 공격 제안을 끈질기게 반대했다. 마침내 조지 워싱턴은 '프랑스 함대가 재해권을 확보하는게 중요하니까 함대 사령관인 드 그라스 제독이 상황에 따라 어디로 함대를 몰고 오느냐에 따라서 결정하자' 고 한발 물러섰는데, 이번에도 로상보는 몰래 드 그라스에게 체사피크 만으로 함대를 이끌고 오라고 전문을 보냈다. 로상보 장군의 오지랖이 그렇게 넓지 않았다면 역사는 바뀌었다.

  • 앞에서 설명했듯이 체사피크 만 해전의 승리는 본진을 비우고 전 함대를 이끌고 나온 드 그라스 제독의 대담함 덕분이지, 북미 전역의 영국 함대가 약했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체사피크 만 해전의 영웅인 드 그라스는 얼마 후 영국 함대에 패해 본인까지 포로로 잡히게 되는데, 만약 이런 프랑스 함대의 패전이 단 몇개월 전에만 일어났다면 역시 요크타운 전투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요크타운 전투 이후로도 당시 시대적 한계와 정치적 문제로 인해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독립전쟁은 2년 더 이어졌으며 요크타운 전투 이후 종전까지의 2년동안 발생한 사상자 수가 전쟁 개시 이후 요크타운 전투 이전까지의 6년 가까운 기간동안의 사상자들의 수보다 더 많았다.

5 결과

1783년 파리 조약으로 미국은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1787년 필라델피아 대표 회의에서 미국 헌법이 규정되었다. 한편 미국은 '영국 국왕을 대체할 통치자'를 요구했고, 그 결과 투표로 인한 선출로 그 사람이 뽑혔다. 이것이 인류사 최초의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었다.

한편 파리 조약에서 미국의 영토는 미시시피 강 동쪽까지로 인정되었다(기존의 공식적 영역은 에팔레치아 산맥까지였다. 물론 그 서쪽에도 이미 미국인들이 진출해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곳에 살던 원주민들이 순순히 떠날리 없었고, 이는 결국 노스웨스트 인디언 전쟁(Northwest Indian War, 1785 ~ 1795)을 유발하게 된다.

6 프랑스의 지원 : 영국에 대한 열등감이 원인이였는가?

벤자민 프랭클린이 프랑스에 구원 요청으로 파견되어, 그가 프랑스에게 준 것은 영국에 대한 프랑스의 열등감을 자극한 것 뿐이었다. 그럼에도 벤자민 프랭클린의 전략은 기가 막히게 성공적이어서, 루이 16세로부터 영국을 북미에서 몰아내겠다는 확답을 받아냈다.

프랑스 정부인사들은 영국에 대한 열세 의식에서 무리하게 전쟁을 추구했고, 루이 16세는 이때 막 왕위에 오른 22세 청년이라 무리하게 전쟁을 수행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루이 16세에게 외교부 장관을 비롯한 정부 관료들이 올린 보고서는 이러했다.

'프랑스 서인도제도의 섬들이 위험하다. 이유는'
1. 식민주를 돕지 않아 영국이 무력 진압에 성공할 경우 :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메꾸기 위해 영국은 프랑스를 공격한다.
2. 식민주가 자력으로 독립에 성공한다면 : 영국은 상처입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프랑스를 공격한다.
3. 영국이 식민주에게 양보해 평화적으로 독립할 경우 : 영국은 새로운 영토 확보를 위해 프랑스를 공격한다.
4. 식민주가 영국에 양보해 항복할 경우 : 식민주는 프랑스를 원망하며 영국에 협력할 것이고, 영국은 프랑스를 공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식민주를 도와 영국을 공격한다.

이리하여 영국 정규군에게 곧 제압당할 수준이었던 "식민지 반란"이 프랑스의 자금과 군사적 지원으로 성공. 북미 13개 식민주에서 영국군을 몰아내고 미국이 탄생했다. 이 때 프랑스는 얼마나 두고두고 즐거워했는지 후일 미국에 독립 100주년 기념선물로 자유의 여신상을 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미국 지원은 한두가지를 제외하고는 신의 한 수였다는 주장도 강하다. 실제로 미국 독립 전쟁 기간에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가 영국 본토 침공과 지브롤터 포위를 시도했으나 영국 함대에게 막혔을 정도로 영국은 여전히 압도적인 파워를 자랑했다. 미국-프랑스-스페인이 편 먹고 영국하고 싸웠는데 겨우 겨우 이긴거다. (그것도 콘월리스와 클린턴의 삽질 덕분에.) 그럼 프랑스-스페인이 편 먹고 영국(+미국 식민지)하고 싸우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더구나 북미만 놓고 본다해도, 이미 프랑스 식민지였던 캐나다 지역이 프렌치-인디언 전쟁의 결과로 영국에게 빼았긴 역사가 있고, 또한 당시 북미 대륙 식민지보다 훨씬 더 가치 있었던 게 설탕이라는 교역품을 생산하는 서인도 제도 식민지라는 점을 감안할 때, 만약 '어떤 이유로든' 영국-프랑스 전쟁이 발발하게 될 경우 당연히 영국은 한편으로는 유럽에서 프랑스와 대치하고 있는 동안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의 서인도제도+미국+캐나다 식민지 지역의 세력과 자원을 이용해서 프랑스의 서인도 제도 식민지를 공격할 것이란 점은 너무나 자명하다. 더구나 전쟁 발발시 전지구적인 재해권을 이용해서 전세계의 적국 식민지에 점령, 항구봉쇄, 식민지 약탈, 상선 나포 등으로 전쟁 피해를 확대해 나가는 것은 영국의 주특기였다.

게다가 프랑스의 미국 지원 역시 그렇게 맹목적이거나 무리하지 않았다. 영국-식민지 갈등 초기부터 프랑스는 이것이 영국-프랑스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다소 맞추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비밀 요원을 보내 정보를 수집했으며, 렉싱턴-콩코드 전투를 보고 미국이 독립할 저력이 있다고 판단하고 미국 지원을 결정하면서도 영국을 상대할 있는 해군 육성 계획이 마무리 되기 전까지는 (언제든지 발 빼고 나몰라라 해도 그만인) 중립을 표방하면서 철저히 비밀리에만 지원했다. 트렌튼, 사라토가 전투 등을 보고 본격적인 참전을 했으나, 그럼에도 부족한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지브롤터 때문에 이를 갈고 있던 스페인을 끌어들이는 것도 잊지 않았고 (스페인은 미국의 동맹이 아니라 프랑스의 동맹 자격으로 참전), 전쟁 후반에야 북미에 파견한 육군 병력조차 영국이 파견한 병력의 절반에도 못미쳤고 큰 피해도 입지 않았으며, 전쟁의 결과를 비롯 모든 것이 프랑스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난 게 없다. 어이없게도 루이 16세의 나이까지 언급하면서 무리했다고 하는데, 조지 3세의 의중이 내각의 인선과 전쟁 수행에 크게 작용했던 영국과 달리 프랑스의 전쟁 수행에 대한 처음부터 끝까지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이는 프랑스 외무장관 샤를 베르젠이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프랑스의 열세 의식을 이용했다고 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능수능란한 베르젠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건 미국 대표단이었다. 미국 대표단은 베르젠에게 수많은 요청, 제안, 반협박(안도와주면 우리는 다시 영국 식민지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다능!) 등을 시도했으나, 베르젠이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서 미국 대표단에 제공한 통상 조약, 동맹, 원조, 차관을 제외하고 더 얻어낸 것은 사실상 거의 없다. 심지어 베르젠은 북미로 병력과 함대를 파견하려고 계획 중에 있고 심지어 실제로 그 함대가 대서양으로 출항하고 있을 때에도, 제발 병력과 함대를 더 북미에 파견해 달라는 미국 대표단의 요청에 어떠한 힌트나 암시 조차도 주지 않았을 정도로 동맹국 미국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정보를 통제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프랑스의 열세 의식을 이용해서 뭘 한게 아니라, 벤자민 프랭클린은 베르젠에 대해서 뭘 할 수 있는게 없었기 때문에 본인의 인기를 이용해서 프랑스에 친미 여론을 확산시키려고 노력한 게 전부인데, 그 덕분에 벤자민 프랭클린은 몇몇 동료들과 의원들한테 '프랑스 정부를 압박해서 더 얻어낼 생각은 안하고 그저 신선놀음이나 하고 있다.' 고 까였다. 하지만 벤자민 프랭클린을 깠던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인 존 애덤스가 미국 대표단 후임으로 왔어도 베르젠에게서 딱히 더 얻어낸게 없다는 건 함정. 심지어 고집불통의 존 애덤스에게 짜증이 난 베르젠은 비밀리에 미국 의회에 압력을 넣어 존 애덤스를 다른 자리로 옮겨가게 만들 정도였는데, 이제 막 국제 외교란 걸 해본 미국이 유럽 열강들 사이에서 산전 수전 다 겪은 프랑스를 가지고 놀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단 프랑스가 예상 못한 '한두개' 는, (1) 전쟁이 지나치게 장기화되었다는 것과 (2) 장기화된 전쟁을 감당하기에는 미국 의회의 권한이 주정부들의 노력을 이끌어내고 하나로 결집시키기에 너무 미약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미국에 돈이 없었던게 아니다. 대륙군이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적지 않은 필라델피아 시민들은 여전히 호화스러움과 사치를 누리고 있었고, 그것을 의회 방문 길에 목격한 조지 워싱턴은 불편한 감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결과 미국은 더욱 더 프랑스의 원조와 차관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국력이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프랑스에게는 큰 짐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프랑스에게 짐이 되었다 한들, 프랑스의 왕정이 무너진 유일한 이유라 할 수 없고 왕정이 무너진 것 역시 프랑스의 국력에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미쳤다라고 볼 수도 없다. 반대로, 미국 독립 인정 이후에도 1812년 영-미 전쟁이 벌어질 정도로 영국과 미국의 관계는 금방 봉합되지 않았는데, 이것만 봐도 미국 독립 전쟁을 통해서 프랑스가 추구하려고 했던 목적은 100% 이상 달성되었다는 것은 명확하다.)

따지고 보면 영국 정부는 미국 식민지인들은 겁쟁이들이며 따라서 미국 식민지 정도는 약간의 군대로도 몇개월이면 진압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강경책을 밀고 나갔는데, 그게 얼마나 형편없는 전망이었는지는 렉싱턴-콩코드 전투, 벙커힐 전투에서 줄줄이 뽀록이 났고 결국 전쟁의 결과로 북미 13개 주 식민지라는 광대한 영토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배상 차원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에게도 일부 식민지를 넘겼다.

하지만 즐거움도 완전 잠시. 프랑스는 미국 원정으로 인해 엄청난 부채를 뒤집어 쓰게 되었으며, 더불어 원정 직후를 기점으로 불어닥친 폭설과 기근으로 국가적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것으로 모자라 미국에 원정갔던 프랑스의 장교와 병사들이 자유와 박애 정신을 배워 와서 루이 16세의 뒤늦은 진화 노력도 잠시,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을 일으켜 버렸다. 원정 갔던 군인들의 사상수입은 특이한게 아니여서,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던 러시아 제국 장교들 중 일부도 귀국 후 어설프게 혁명을 시도했다가 진압당했다.

사실 프랑스의 주요 수입은 서인도제도 섬들의 특산물을 가공해서 내다 파는 것에 있었지 퀘벡 등 북미 식민지가 주력은 아니어서, 이게 결정적인 참전 계기가 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문제는 그 수익을 써먹을 정도로 루이 16세가 오래 살지는 못했다는 것)

어찌되었건 미국 독립은 전 세계에 자유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내셔널리즘[18]을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스페인포르투갈의 타격과 함께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열풍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시몬 볼리바르가 그란 콜롬비아 공화국을 건립한 모습은 조지 워싱턴을 똑 닮았다. 하지만 그란 콜롬비아 공화국은 끝내 분열되면서 두 아메리카의 진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7 기타

1775-1784년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기에 절대 사진의 시대와는 무관해보이지만 놀랍게도 100세 넘게 장수한 노병들의 사진들이 남아있다. 사진이 남아있는 노병으로는 총 3명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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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유명한 인물은 레뮤얼 쿡이며 브랜디와인 전투요크타운 전투에 참전한 경험이 있다. 각각의 발발년도가 무려 1777년과 1781년이다. ㅎㄷㄷ 생몰년일은 1759년 9월 10일 - 1866년 5월 20일인데 어느정도냐면 나폴레옹보다 10년 먼저 태어났고 정조보다 7년 늦게 태어난거다. 미국의 탄생을 위해 싸웠고 미국의 통합을 직접 눈으로 본 셈이다.

8 당시를 다루는 작품

  1. 미국 내에서는 이렇게 불리는게 일반적.
  2. 전보도 없던 시절이니 당연하겠지만, 미국에서 독립 선언문이 발표된 당일에 영국까지 소식이 전해졌을 리가 없다.
  3. 당시의 명칭.
  4. 이후 영국이 개발한 오스트레일리아나 캐나다, 뉴질랜드와 동급의 대우를 받았다. 솔직히 이 정도면 자국 직할속령이라고 봐야지 단순한 수탈 목적의 식민지라고 보기엔 과분한 대우다.당장 영국이 오스트레일리아나 캐나다에 해준 거랑 아프리카나 아랍 인도 쪽에 한 짓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5.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쟁의 발발 원인은 한 식민지 출신 영국 장교가 우발적으로 프랑스 외교관을 살해한데서 시작되었다. 일각에서는 이 정체불명의 식민지 출신 영국 장교의 정체가 조지 워싱턴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만약 조지 워싱턴이 전쟁의 발발 원흉(?)이었다면 결국 그의 우발적 살인이 미국 독립이라는 나비효과를 일으킨 셈? 한편으로 북미 원주민이나 인도 사람과 무관한 전쟁이었다는 것.자기네는 쏙 빠지고 엉뚱한 사람들 끼워넣기
  6. 2013년 9월 1파운드는 1700 원 내외이니 가장 적은 숫자인 100억 파운드라고 하더라도 17조 2,482억 원, 5000억 파운드라면 862조 4,100억 원.
  7. 심지어는 트럼프 카드에도 인지를 붙여야 했다고 한다. 흠좀무. 오늘날에도 스페이드 에이스만 유난히 도안을 크고 화려하고 복잡하게 그리는데, 이때 붙인 인지의 흔적이다.
  8.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라임 굿
  9. 다만 이랬다간 조만간 식민지와 본국의 관계가 역전될 우려가 있다. 특히 미국의 엄청난 인구 증가율을 본다면 오히려 영국이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둘 다 사이좋게 인도의 식민지가 되었겠지
  10. 동시선거가 당시 기술로 불가능한 건 맞지만 그게 미국 독립 전쟁이 날 수 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요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런 동시선거가 아니더라도 식민지인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국회에 일종의 로비 채널인 북미 식민지 대표단 같은 옵저버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외무 장관을 임명할 때 북미 식민지 여론을 고려하거나 혹은 아예 북미 식민지 장관을 신설, 명망있는 북미 식민지인을 초빙해 임명하여 북미 식민지의 이해관계를 정부 내각에 반영할 수 있는 채널만 만들어줬어도 당장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영국은 아래에 나오듯이 거꾸로, '괘씸죄' 를 적용하기 시작했고 외무 장관과 주요 내각에 북미 식민지에 강경 입장인 인물들을 임명했다.
  11. 당시 북미 식민지의 GDP는 대영제국 전체 GDP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를 자랑했다. 이걸 유지하지 않는게 더 이상한 일이다.
  12. 사실 보스턴 학살 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이었지만 독립파들은 이 사건을 아주 잘 활용했다. 언플의 힘
  13. 정확히는 여기여기 참고. 폴 리비어가 한 말이 "The British are coming!" 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는 "The Regulars are coming out." 이라고 한다.
  14. 심지어 장교급이라고 있는 인물들도 보고서를 어찌 써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결국 워싱턴이 일일히 다 가르쳐줘야 했다고...
  15. 사실 여기는 1777년부터 비공식적으로 미국을 지원해주고 있었다.
  16. 체사피크 만 해전에 실제 투입된 24:19 라는 전력 차이를 고려할 때 영국 함대가 전열이 붕괴되면서 쫓겨간 것이 아니라 전투 후 상태가 안좋은 전함 한척을 자침시킨 것 정도가지고는 참패라고 부를 수는 없다. 게다가 체사피크 만 해전 직후 영국 함대가 바로 쫓기듯이 후퇴한 것도 아니고 일주일 후에 후퇴한 것이다. 물론 이는 Barras 의 합류로 36:18 의 압도적인 전력 우세 속에서도 프랑스 함대가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7. 남부 전략은 병력을 분산해서 남부 식민지 지역을 폭넓게 점령하겠다는 것인데, 그와 반대로 병력을 한 곳으로 모으면 요크타운 거점을 제외하고는 남부 식민지 지역은 도로 식민지 민병대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18. 굳이 민족주의가 아닌 '내셔널리즘(nationalis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영국과 미국 사이 '민족의 차이'가 있지 않았기 때문. 반면 특정 공동체를 대표하는 별개의 'nation'을 건국해야 한다는 내셔널리즘에는 부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