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3세

역대 영국 국왕
하노버 왕조하노버 왕조하노버 왕조
조지 2세
(George II)
조지 3세
(George III)
조지 4세
(George IV)

위 표는 간단히 축약한 것이고 상세한 표는 이 문서의 '칭호들' 단락에 실었다.

George William Frederick Hanover. 영국과 하노버의 군주. 하노버 왕조에서 처음으로 영국 태생인 왕이다.

생몰: 1738년 06월 04일 ~ 1820년 01월 29일(만 81세 8개월)
재위: 1760년 10월 25일 ~ 1820년 01월 29일(만 59년 3개월)

1 개요

1738년 6월 4일 조지 2세의 장남인 웨일스 공 프레데릭의 아들로 태어났다. 별명은 농부왕이다.

'재위기간이 장장 59년 3개월엘리자베스 2세, 빅토리아 여왕에 이어 세 번째이다. 즉, 영국의 남성 군주 가운데 가장 장수한 인물이다. 긴 재위기간만큼 다사다난한 일이 많았는데 그의 시절에 7년 전쟁, 미국 독립전쟁, 나폴레옹 전쟁을 모두 겪었다.

2 생애

어머니 오거스타가 런던에서 산책 중에 낳았는데 예정일보다 3개월 빠른 조산이었다. 어릴 적엔 아버지 프레데릭이 정치적인 이유로 할아버지 조지 2세가 싫어했기 때문에 할아버지를 싫어했으며 자폐증을 보이기도 했다. 11세가 될 때까지 읽거나 쓰지 못 했다. 13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3 왕위에 오른 뒤

23세인 1761년에 왕위에 오른다. 조지 1세, 조지 2세, 아버지 웨일스 공 프레데릭과 달리 독일 억양이 없는 영어를 구사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영국 내정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개입이 항상 긍정적인 영향을 나타낸 건 아니었다.

7년전쟁 막바지에 윌리엄 피트(大피트)를 해임하는 병크질을 저지르다 전쟁을 망칠 뻔 했다. 대 피트는 유럽 지상전에서는 국왕의 고향이자 동군연합 하노버선제후령 보호는 잘 싸우는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2세에 맡기고 영국은 식민지 전쟁에서 인도와 아메리카에서 프랑스만 쳐바르면 된다고 주장하는 터라 이미 할아버지 조지 2세한테 천하의 개쌍놈 취급을 받았는데[1] 이번엔 한술 더떠 왕조의 뿌리인 하노버는 버리자[2]는 전략이라서 조지 3세는 그만 분노 게이지가 터져 버리며 덜컥 해임시켜 버린다.

그 여파로 영국의 내각이 교체되자 프로이센에 재정 지원을 끊고 영국이 직접 유럽 지상전에 직접 개입을 하는데 그 결과 그동안 유럽전에서 잘 싸워왔던 프로이센은 자금난으로 15만 병력에서 6만 병력으로 줄어들고[3], 그 여파로 유럽전에서 한발 뺐던 프랑스가 하노버로 쳐들어 가는 병크 결과 생겨 났으며 유일한 동맹국 프로이센은 러시아 엘리자베타가 죽기 전 거의 패망직전 까지 몰렸다. 이당시 프리드리히 2세는 적국 프랑스를 격파해서 좀 지능이 떨어지는 조지 3세에 비하면 영국에서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까였다.. 이미 몇 년 간 식민지에선 압승을 거두고 유럽전역도 러시아 여황제가 죽으며 쉽게 마무리가 되었기 때문에 병크질에도 불구하고 승전은 할 수 있었다.

한편 영국의 뒷통수에 원한을 품은 프리드리히 2세는 미국 독립전쟁때 무장중립동맹을 참여 독일인 교관을 보내고 용병들을 보내버렸다고.. 무장중립동맹은 미국의 동맹국인 프랑스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이 '통상의 자유' 드립을 치며 아메리카에 군수품을 계속 지원해서 영국군이 지는데 한몫 거든다.

이후 애덤 스미스의 학설을 도입해 자유 무역 등을 이끌고 수상제 이후 근 50년간 정치적 실권을 쥐고 있던 휘그당를 몰락시킨다. 1770년 이래 근 60년간 토리당이 득세한 것은 조지 3세의 공(?)이 큰데, 이건 아버지 프레드릭 왕세자의 영향도 크다. 프레드릭 노스 경이 토리당의 첫 수상으로 12년간 재임하고(어엇? 여기도 프레드릭?), 윌리엄 피트(소 피트)가 토리당으로 입당 한 것이 좋은 사례. 조지 3세의 치하에서 영국 내에서 산업혁명의 기틀이 나타났다.

3.1 미국의 독립 이후 겪은 위기

그러나 재위 직후 북아메리카의 13개 주가 미국 독립전쟁으로 독립해 버리면서 미국이 건국되었다, 치세 말년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때문에 국운이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호주(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를 개척하고 거기에 죄수들을 이주시키기도 했다.


청나라건륭제에게 섬 좀 몇 개 달라고 했다가 건륭제가 빡쳐서 영국 사절단을 쫓아냈다.[4]

말년엔 정신병이 나타나 미치광이 왕 조지로 유명하기도 했다. 조울증이 심해 궁을 뛰쳐나가기도 하고, 정원의 나무들에게 말을 걸곤 했다고. 결국 1811년부터 1820년 사망할 때까지 왕세자인 조지 4세섭정을 맡았지만, 조지 4세 쪽도 만만찮은 막장이었던지라... 최근 의학사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하노버 왕조에 유전적으로 내려오던 포르피린증이 뇌에 영향을 미쳐 정신병이 생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 칭호들

조지 3세는 재위기에 칭호도 많았고 이들의 변동 사항도 상당히 복잡했다. 그래서 아래에 상세한 표를 정리한다. 단 왕세자 시절의 칭호들은 아래에 기재하지 않았다.

그레이트브리튼 국왕 겸 아일랜드 국왕(1760~1800)
조지 2세
(George II)
조지 3세
(George III)
(양국 합병)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국왕(1801~1820)
(양국 합병)조지 3세
(George III)
조지 4세
(George IV)
하노버 선제후/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신성로마제국 대재무관(1760~1806[5]/1814[6])
게오르크 2세
(Georg II)
게오르크 3세
(Georg III)[7]
(신성로마제국 멸망)
하노버 국왕(1814~1820)
(신규 칭호)게오르크 3세
(Georg III)[8]
게오르크 4세
(Georg IV)
코르시카 국왕(1794~1796)[9]
(신규 칭호)조르조 3세
(Giorgio III)[10]
(프랑스의 코르시카 탈환)
자칭 프랑스 국왕(1760~1800)[11]
조지 2세
(George II)
조지 3세
(George III)[12]
(칭호 포기)

5 여담

그는 황제 칭호의 사용을 제안 받은 바 있었다. 18세기 말 아일랜드 왕국에서 일어난 반영 반란을 진압하고 아예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한 나라로 합쳐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이 1801년에 탄생하게 됐다. 그런데 당시 영국은 별도로 프랑스 제1 공화국과 외교 협상을 하고 있었는데, 프랑스가 영국 왕이 계속 써왔던 사칭 프랑스 국왕 칭호와 백합 문장을 지우라고 요구를 해왔다.[13] 그 전에 부르봉 왕가에서는 영국에서 프랑스 왕을 사칭하는 거 알고서도 그냥 내버려 뒀었으나, 프랑스 혁명 세력은 처음 외교에 임하는 거라 기존 관례와 안 맞는 무리한 요구도 했던 것이다.[14][15] 영국은 "우리가 정말로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옛날부터의 관행이라 쓰고 있는 것일 뿐이다" "다른 나라에도 이런 예가 많다"[16]며 설득했지만, 프랑스 측이 워낙 완강했다. 그래서 영국 정부는 눈물을 머금고 조지 3세가 프랑스 왕의 칭호와 문장을 1801년부터 포기하도록 했다. 조지 3세는 할 수 없이 그에 따랐지만 기분은 썩 좋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 왕국을 한 나라로 합병하기로 하여[17] 조지 3세의 두 칭호(그레이트브리튼의 왕, 아일랜드의 왕)을 하나로 통합하게 되었는데, 영국 국내에서는 이왕 두 왕위를 통합하는 김에 황제로 업그레이드해서 조지 3세의 서운함도 달래는 게 어떨까 하는 제안이 있었다고 한다.[18][19] 하지만 조지 3세는 이게 뻘짓이라 생각했는지 거부했고 계속 왕의 칭호를 쓰게 됐다. 사실 당시 중서부 유럽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만 황제를 칭하고 있었는데[20] 굳이 영국 혼자 티나게 갑자기 황제를 자칭하면 외교적 마찰을 빚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조지 3세는 하노버의 선제후를 겸하여 형식상 신성 로마 황제의 봉신이라는 이중 지위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괜히 더더욱 쓸데없는 갈등을 일으킬 수 있어서 꺼렸을 수 있다. 하지만 이때 그가 황제 칭호를 사용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불과 몇 년 뒤 1804년에 나폴레옹이 황제를 자칭하게 됐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2세는 쫀심이 상해 오스트리아 황제라는 칭호를 하나 더 만들어내면서 유럽에 황제 칭호 남발이 시작됐기 때문... 이에 따라 최초의 영국인 황제는 조지 3세가 아니라 그의 손녀인 빅토리아 여왕이 되었다. 단 그녀는 영국의 여제가 아니라 '인도 여제' 칭호를 추가하는 방식을 택했다. 자세한 건 해당 항목 참고.

남극에 있는 대한민국세종과학기지가 위치한 이름이 좀 거시기한 킹 조지 섬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말년의 정신병 투병기간을 다룬 조지 왕의 광기라는 영화가 있다.[21] 국내에서도 TV 방영된 적도 있고, 상당한 명작으로 평가되니 관심 있는 위키니트는 감상해 보시라.

HBO 드라마 <존 애덤스>에서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에서 커틀러 버켓역을 맡은 톰 홀랜더가 출연한다.

뮤지컬 해밀턴[22]에서는 아메리카 식민지를 자신을 떠난 여자친구 취급하며 사랑타령을 불러대는데 가사가 제대로 시궁창이다.(...) 항목 참조.
  1. 피트에게 임명장을 줄때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다고 전해진다.
  2. 정확하겐 국왕의 이익이지 영국 국익과 무관하다라는 주장.
  3. 이시대엔 용병이 대다수다 프로이센 군대의 70%는 외국인이었다.
  4. 포르투갈의 경우 명나라 때 이미 중국 남부의 현지 관리와 조정을 비교적 잘 구워 삶아서(...) 매년 돈을 바치는 조건으로 최소한 자기들이 마카오에서 사실상의 행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만들어 놨었다. 따라서 당시만 해도 영국이 중국인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교섭할 줄 몰랐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영국은 이후 아편전쟁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홍콩의 지배권을 얻게 되었다. 참고로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관리해 온 건 명나라 때부터지만, 완전히 자기 영토로 삼았던 것은 영국이 홍콩을 할양 받은 이후의 일이다. 청나라는 아편전쟁 이후 열강의 호구로 전락해 버렸으니 포르투갈이 이 참에 마카오를 완전히 자기 땅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고, 청나라는 할 수 없이 포르투갈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5. 사실상. 신성로마제국이 프랑스에 의해 멸망하고 하노버 등이 프랑스의 영향권에 들어감에 따라 조지 3세는 실질 지배권을 상실했다. 프랑스에서는 당연히 이 때부터 조지 3세의 명목상의 지배권도 인정하지 않았다.
  6. 영국 내부적으로는 1814년까지 이들 칭호들의 사용을 고집했다. 1814년에 나폴레옹 전후의 질서가 새로 짜이면서 조지 3세가 하노버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 칭호들이 삭제되고 새로 만들어진 '하노버 국왕'으로 대신하게 된다.
  7. 영어로는 조지 3세(George III).
  8. 영어로는 조지 3세(George III).
  9. 잠시 영국(그레이트브리튼 왕국)에 의해 코르시카 섬이 점령되어 아일랜드 왕국과 비슷한 형태로 영국의 통제를 받는 왕국이 만들어지고 조지 3세가 코르시카 국왕으로서 군림하였다. 단 조지 3세가 국내적으로 사용하는 전체 칭호에 코르시카 국왕의 칭호가 더해진 적은 없었다. 아마 코르시카가 장기간 영국의 지배를 받았으면 그의 칭호에 코르시카 국왕도 추가됐을텐데 금방 그 땅을 상실해서인지 끝내 추가되지 않았다.
  10. 여기서는 이탈리아어명으로 표기했다. 영어로는 조지 3세(George III). 영국(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지배하의 코르시카 왕국은 코르시카어와 이탈리아어가 공용어였다. 프랑스어로 적을 경우 조르주 3세(George III)가 된다.
  11. 백년 전쟁 이래로 잉글랜드→그레이트브리튼 국왕은 관습적으로 프랑스 국왕을 자칭해 왔는데, 그것 중단하라는 프랑스 혁명 세력의 포기 요구가 워낙 완강해 그의 대에서 비로소 중단하였다.
  12. 굳이 프랑스어로 표기하자면 조르주 3세(George III)가 된다.
  13. 영국은 백년전쟁 시작 시점부터 그때까지 프랑스 왕의 칭호와 문장을 쓰고 있었다. 중단했던 적도 잠깐 있긴 한데(백년전쟁 중 잠시 프랑스와 협상이 잘 됐을 때 일시 중단했었고, 백년전쟁 이후로는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정 시기에 중단했다), 거의 대부분의 세월 동안은 프랑스 왕의 칭호와 문장을 사용해 왔다. 물론 백년전쟁 이후로는 형식화되어서 더 이상 영국이 프랑스에 왕위와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요구하진 않았다.
  14. 심지어 이미 수백 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아온 채널 제도를 내놓으라는 요구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영국이 거부했고 프랑스 공화국도 강력히 주장하진 않았던 듯.
  15. 프랑스 혁명 세력이 프랑스 왕 칭호에 까칠하게 반응했던 건 불과 얼마 전에 자기들이 과 사투를 벌이고 그를 처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안 그래도 왕이라는 말만 들어도 이가 갈리고 트라우마에 걸릴 지경인데 영국의 왕이 떡 하니 프랑스 왕을 칭하고 있으니 발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6. 예를 들어 스페인 국왕이 오늘날까지 쓰는 전체 칭호를 보면 현 스페인 국왕이 지배하지 않는 나라나 지역의 군주라고 기재돼 있는 경우가 많다. 체면상 지배권을 잃어버린 지역의 지배자라고 사칭하지만 실제로 그 곳의 지배권을 대외적으로 주장하지 않는 건 흔한 일이었던 것이다. 즉 영국의 항변이 틀린 말은 아니다.
  17. 당시 아일랜드에서 영국과 왕정에 반대하여 독립 운동이 벌어져 영국이 가까스로 진압했다. 기존까지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 왕국이 따로 있었고 동군연합을 이루어 아일랜드를 통제했지만 아일랜드가 완전히 여기서 이탈해 프랑스에 붙을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레이트브리튼과 아일랜드를 한 나라로 통합해서 아일랜드의 이탈을 강력하게 억제하려 하였다.
  18. 유럽의 황제 칭호는 로마 제국의 후예임을 자칭하면서 이뤄졌다. 영국이 로마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없어서 황제 칭호를 안 썼다는 말도 있으나, 솔직히 그런 거 알 게 뭐야 대충 끼워 맞추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사실 이건 별 문제가 안 됐다.
  19. 이 때 제안된 칭호로는 Emperor of the British Isles(브리튼 제도의 황제)#, Emperor of the British and Hanoverian Dominions(브리튼 및 하노버 영토의 황제)# 등이 있었던 모양이다.
  20. 물론 동유럽에 러시아 황제도 있긴 했지만 거긴 중서부 유럽과 달리 동로마를 정통으로 놓고 그 동로마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제3의 로마 물론 대다수 서유럽인들은 저 촌놈들 육갑떨고 앉았네...정도의 반응이었고 표트르 대제이전에는 그냥 모스크바 대공으로 취급하였다.). 또 지리적으로 좀 멀어서 같은 유럽이긴 해도 좀 상황이 달랐다.
  21. 참고로 원제가 The Madness of King George인데, George III가 아닌 이유는 영화사에서 관객들이 1편과 2편은 언제 나왔는지 헷갈려 할까봐라고 한다.(...)
  22. 앤드류 래널즈조나단 그로프 등 배우들이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