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영국 국왕 | ||||||
하노버 왕조 | ← | 하노버 왕조 | → |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 ||
윌리엄 4세 (william IV) | ← |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 → | 에드워드 7세 (Edward VII) |
400px | ||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 초상화, 조지 헤이터 경, 1840년 | ||
왕호 |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여왕, 인도의 여제 (Queen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Empress of India) | |
이름 |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Alexandrina Victoria) | |
생몰년도 | 1819년 05월 24일 ~ 1901년 01월 22일 (81세 264일) | |
출생지 | 영국 런던 켄징턴 궁전 | |
사망지 | 영국 와이트 섬 오스본 하우스 | |
재위 기간 | 영국의 왕 | 1837년 6월 20일 ~ 1901년 01월 22일 (63년 216일) |
인도의 황제 | 1877년 01월 01일 ~ 1901년 01월 22일 (24년 21일) | |
대관식 | 영국의 왕 | 1838년 06월 28일 |
인도의 황제 | 1877년 01월 01일 | |
장례식 | 1901년 02월 04일 |
젊은 시절 | 말년 |
목차
1 개요
대영제국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영국의 국왕[1]
그러나 영국의 제국주의적 만행이 극에 달했던 시대의 군주
대영제국의 여왕이자 인도 제국의 여제이며 하노버 왕조의 마지막 군주.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군주인 동시에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여왕이었으나 2015년 9월 9일 오후 5시 30분부로 현손녀 엘리자베스 2세가 기록을 경신해 두 번째로 오래 재위한 군주가 되었다. 하노버 영지에는 살리카법이 적용되어 여왕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즉위와 함께 조지 1세 이후 지속된 영국과 하노버 왕국의 동군연합이 종료되었다.
만약 여왕이 즉위하지 않아서 이 동군 연합이 계속되었다면 그리고 1866년에 하노버 왕국이 프로이센에 합병되어 망하지 않았다면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영국의 군주가 군림하는 나라[2]가 독일 한복판에 떡하니 알박기되어 있었을 것이고, 독일 제2제국은 대영제국과 땅따먹기를 하려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독일의 운명은 어떤 방식으로 달라졌을지 모르는 일이다. 세계 역사가 바뀔 수 있었던 순간이다.
영국 왕 중 흔하지 않게 같은 이름을 가진 자가 없었다. 그렇기에 빅토리아 1세 등으로 불리지 않는다.
2 칭호
처음 즉위할 때는 영국의 여왕이었지만 나중에 인도 제국의 여제를 겸임한 결과 공식적인 호칭은 다음과 같이 늘어났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여왕, 신앙의 수호자, 하노버 여대공, 브라운슈바이크·뤼넨부르크 여공작,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작센 공작부인, 인도의 여제, 조지 4세 왕립 기사단장, 가터 기사단장, 씨슬 기사단장, 성 패트릭 기사단장, 바스 기사단장,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기사단장, 영국령 인도 기사단장, 인도 메리트 기사단장, 인도성(星) 기사단장, 로열 빅토리아·앨버트 기사단장, 인도 제국 기사단장, 인도 왕관 기사단장, 무공 기사단장, 로열 빅토리아 기사단장이신 빅토리아 폐하(Her Majesty Victoria, by the Grace of God,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Queen, Defender of the Faith, Princess of Hanover and Duchess of Brunswick and Lunenburg, Princess of Saxe-Coburg and Gotha and Duchess in Saxony, Empress of India, Sovereign of the Royal Family Order of King George IV, Sovereign of the Most Noble Order of the Garter, Sovereign of the Most Ancient and Most Noble Order of the Thistle, Sovereign of the Most Illustrious Order of Saint Patrick, Sovereign of the Most Honourable Order of the Bath, Sovereign of the Most Distinguished Order of Saint Michael and Saint George, Sovereign of the Order of British India, Sovereign of the Indian Order of Merit, Sovereign of the Most Exalted Order of the Star of India, Sovereign of the Royal Order of Victoria and Albert , Sovereign of the Most Eminent Order of the Indian Empire, Sovereign of the Imperial Order of the Crown of India, Sovereign of the Distinguished Service Order, Sovereign of the Royal Victorian Order)' |
3 즉위 배경
빅토리아는 조지 3세의 4남인 켄트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어거스투스의 딸로,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왕위에 오르기 힘든 입장이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상황이 발생해 즉위가 가능했다.
빅토리아의 할아버지인 조지 3세는 9남 6녀를 두었다. 조지 3세 사후 장남인 조지 4세가 즉위했는데, 그의 외동딸 샬럿 공주가 자식 없이 요절했다. 이렇게 되자 당시 조지 3세의 아들들 중 3남 클래런스 공작 윌리엄 헨리, 4남 켄트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어거스투스, 6남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퍼스 프레더릭, 이 세 사람 중 먼저 자녀를 얻는 사람에게 왕위계승에서의 우선순위가 주어지게 된다. 이 상황에서 켄트 스트래선 공작이 1819년 외동딸 빅토리아를 얻었다.
그런데 켄트 스트래선 공작은 빅토리아가 태어난지 1년 만인 1820년에 사망한다. 1830년 조지 4세가 사망했을 때는 3년 전에 조지 3세의 차남 요크 공작이 자식을 두지 않은 채 사망한 상태였으므로, 3남인 클래런스 공작이 즉위해 윌리엄 4세가 되었다. 그런데 윌리엄 4세의 적자인 두 딸이 모두 요절해[3], 결국은 빅토리아가 차기 왕위 계승자가 된다.
3.1 어린 시절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 | 어린 시절 |
빅토리아 공주는 조지 3세의 4남인 켄트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어거스투스와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의 딸인 빅토리아 사이에서 1819년 5월 24일에 늦둥이로 태어났다. 즉위 배경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막 태어났을 무렵엔 조지 3세의 살아 있는 유일한 손녀로서 언젠가는 왕위를 계승할 추정상속인으로 여겨졌다. 아버지 켄트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가 죽은 뒤에는 추정상속인이 될 가능성이 낮아졌지만, 윌리엄 4세의 두 딸이 요절하면서 다시 추정상속인으로 지위가 부상한다.
본래 독일 출신인데다가 남편마저 잃은 뒤 궁정에서 경원시당하며 영국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친정에 돌아가고자 했던 여왕의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은, 장차 딸이 즉위하면 섭정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비서인 존 콘로이와 함께 어린 빅토리아를 옥죄기 시작했다. 이게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콘로이의 딸을 빅토리아의 소꿉친구로 데려오고, 혹시라도 미끄러져 넘어지기라도 해서 죽으면 절대로 안된다며 빅토리아 혼자서는 계단을 오르내리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물론 딸의 교육에도 많은 신경을 써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음악, 역사, 미술 등의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시켰다. 또한 자신들 이외의 다른 영국 왕족들이 빅토리아와 친하게 지내는 걸 막으려고 윌리엄 4세와 아델레이드 왕비가 빅토리아와 만나는 것도 방해했다.
비록 친딸은 아니었지만 빅토리아를 진심으로 아끼고 좋아했던 아델레이드 왕비는 그녀와 만나기 어렵게 되자 매우 슬퍼했고, 윌리엄 4세는 켄트 공작부인과 콘로이가 그들의 야심을 이루기 위해 어린 조카딸을 괴롭힌다고 생각해 저 둘을 혐오했다. 그는 아예 켄트 공작부인의 면전에 대놓고 '짐은 빅토리아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서 그대가 섭정이 되는 꼴은 결코 보지 않게 할 것'이라 일갈했는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빅토리아가 18번째 생일을 맞아 성인이 되고 나서 26일 후에 세상을 떠난 것.
빅토리아는 이처럼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를 극성스런 어머니와 그 비서의 등쌀에 시달려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한 채 억눌린 채 자랐다. 어린 빅토리아가 의지했던 유일한 인물은 유모인 렛젠 여남작이었는데, 그녀는 콘로이와 켄트 공작부인의 섭정 요구를 거절하기도 했다. 여남작은 빅토리아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것을 우려하여(특히 켄트 공작부인과 콘로이 경) 강하고 타협하지 않는 여성이 되도록 가르쳤다. 이런 유년기를 보낸 빅토리아는 자기 주장이 매우 확고한 꼴통고집스런 성격으로 자랐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은 죽을 때까지 고쳐지지 않으며, 여왕과의 금슬이 좋았던 남편 앨버트 공도 그녀의 성격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저 비위를 맞춰가며 달랬을 뿐. 사실 당대에도 앨버트 공이 보살급 멘탈이라 저 성격 받아주고 산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있었다.(...)
빅토리아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준 렛젠 여남작은 여왕의 즉위 이후에도 개인 비서와 조언자로 일했는데, 앨버트 공과 빅토리아의 결혼 이후 첫 아이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공주가 태어난 1840년 겨울에 은퇴하여 고향인 하노버로 돌아갔다. 렛젠 여남작은 1870년 사망할 때까지 빅토리아와 평생 편지를 교환하며 친분을 유지했다.
3.2 여왕 즉위
1837년 6월 20일 큰아버지인 윌리엄 4세가 재위 7년만에 71세를 일기로 타계하자 빅토리아는 여왕으로 즉위했다. 성인이 되어 즉위했기 때문에 섭정을 둘 필요가 없었던 여왕은 어린 시절 자신을 달달 볶았던 어머니와 콘로이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내연관계에 있다는 추문까지 나돌 정도로 가까웠던 콘로이는 연금을 주고 퇴직이라는 명분으로 내쫓았으며, 켄트 공작부인의 거처를 외딴 곳으로 정해 버킹엄 궁전에서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했다.[4] 다만 첫 아이인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공주가 태어난 후에는 남편인 앨버트 공의 노력과 자신도 어머니가 되는 일을 겪고 나서 사이가 많이 나아졌고, 켄트 공작부인은 빅토리아의 궁정에서 환영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녀는 손주들을 아주 예뻐했다고 한다. 다만 완전히 화해한 건 아니었는데, 켄트 공작부인이 1861년 3월 16일 사망하자 그녀가 썼던 일기와 자신의 어릴 적 물건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것을 발견하고, 어머니와 평생 사이좋게 지내지 못한 걸 몹시 후회했다고 한다.
즉위한지 얼마 안돼서 존스란 소년이 버킹엄 궁전에 몰래 들어와서 여왕의 편지나 속옷(...) 등을 훔치는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4 치세
이른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던 전성기의 영국을 통치하던 여왕이다. 이 시기 영국은 자본주의 선진국이 되는 동시에 2대 정당제 의회정치가 전개되었고 그 동향이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본인이 여성이었음에도 정작 여성 참정권 보장에는 반대했지만, 64년간의 긴 치세를 통해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따라 오늘날의 영국 군주제의 패턴을 확립했다.
하지만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빅토리아 여왕 치세도 말기로 가면서 독일, 미국 등의 후발주자에게 산업적으로 밀리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경제가(특히 농촌 경제가) 어려워지자 노동자와 농민들의 불만(보호무역론)이 상당해졌다. 또한 군사적으로도 보어 전쟁 등에서 체면을 구기는 등 점점 쇠퇴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를 흔히 빅토리아 여왕의 갱년기라고 부른다(…). 보통 "현대(모던) 영국"은 불경기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한 왕립상공회의소가 설립되고 선거권을 확대, 평등화 하는 개혁법, 의석재분배법이 통과된 1885년을 기준으로 하는데, 이 때가 바로 그 쇠퇴가 시작된 시기였다(1969년 저작인 Henry Pelling의 "현대 영국사(Modern Britain), 1885-1955").
4.1 치세 초반
젊은 시절 | 여왕 부부 |
여왕이 즉위한 19세기 중반은 외국과의 전쟁으로 인한 경제 불황과 맞물려 노동자들이 과격한 러다이트 운동에서 상대적으로 온건한 차티스트 운동을 통해 참정권 보장을 주장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시급히 처리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이 때문에 여왕은 즉위하자마자 매일 1시간씩 총리 멜버른 경을 접견해 여러 현안을 논의하면서 군주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갔다.
치세 초기의 여왕의 정치적 성향은 자유주의에 쏠려 있어 휘그당을 옹호하고 토리당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1839년 2차례에 걸쳐 여왕을 모시는 시녀들이 정치적 성향을 문제삼아 궁전에서 쫓겨나는가 하면, 시녀 교체를 주장한 총리의 의견을 여왕이 거부해 총리가 사퇴하고 내각이 교체되는 등 젊은 여왕의 등장에 환호했던 영국 국민들은 궁정에서 들려오는 파벌싸움에 실망하여 인기가 떨어지기도 했다. 휘그당에 우호적인 시녀들에 둘러싸인 여왕의 영향력을 국정에서 차단하기 위해 그녀가 정치적으로 부족하다는 토리당의 선전이 먹혀들어간 것으로, 유달리 멜버른 경과 친밀했던 처녀 여왕을 '멜버른 부인'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한편 여왕은 미혼인 상태에서 즉위했기 때문에 그녀의 남편 자리를 놓고 여러 나라의 왕족들이 나섰다. 원래 여왕은 독일 출신인 어머니에 대한 반감 때문에 독일인과 결혼할 생각이 없었지만, 영국에 온 외사촌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작 앨버트에게 반했다고 한다. 결국 1840년 2월 10일, 앨버트와 결혼했다.
지식과 교양이 풍부했던 앨버트 공은 여왕의 남편이라는 위치 때문에 공직도 작위도 받지 못하며 아내를 보필하는 조력자 역할에만 충실해야 해서 결혼 초기에는 백수가 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의 임신 이후 거동의 제약이 생기고 점차 남편에게 깊이 의지하면서[5] 앨버트 공의 역할이 커졌고, 앨버트 공은 고집세고 외골수였던 아내의 곁에 머무르며 여왕의 부군으로서 여러가지 업무를 훌륭하게 처리했다. 19세기 중반의 시대적 변혁에 따라 당대의 민중이 요구한 노예제도 폐지나 교육제도 개혁에 힘썼고 왕실 가족과 재산의 관리도 담당했으며 1851년의 제1회 국제박람회의 개최도 그가 추진한 행사였다. 이런 앨버트 공이 있었기에 여왕은 양당제 의회에서 정치적인 균형 감각을 유지하며 입헌군주제를 공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 하지만...
4.2 과부 여왕
앨버트 공의 초상화와 함께한 여왕 |
1861년 12월 14일 여왕의 부군 앨버트 공이 4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동안에도 금방 훌훌 털고 일어날 거라며 애써 현실을 외면한 여왕은, 남편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이 너무나 커서 앨버트 공의 사후 모든 국정에서 손을 떼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어린 자녀들과 함께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춘 채 윈저 성으로 은거해버렸다.
정신병을 앓았던 조지 3세는 왕세자를 섭정으로 임명한 후 공무에서 물러났지만, 섭정도 두지 않은 채 갑작스럽게 은거해버린 여왕의 무책임한 행동에 내각과 의회는 매우 당황했다. 명목상 군주이긴 해도 국가대사를 처결할 때는 여왕의 의견을 묻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총리는 하는 수 없이 런던에서 멀리 떨어진 여왕의 처소로 매번 똥개훈련찾아가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빅토리아를 동정하던 국민들도 여왕의 부재가 길어지자 일각에서는 거액의 생활비를 지급받고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면서 국정에는 소홀한 여왕의 행태에 염증을 느껴 '윈저의 과부는 물러가라'며 퇴위를 주장하는 등 불만의 여론이 터져나오게 되었다.
결국 여왕은 떠밀리듯이 공무에 복귀하긴 했으나, 앨버트 공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언제나 검은색 상복만 입고 지내는 등 우울한 감정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고, 상복을 입을 때 머리에 얹는 베일을 착용하기 불편하다며 제국 왕관(Imperial State Crown)[6]을 쓰는 것도 거부하였다. 그러자 이러한 모습이 국가의 위신과 왕실의 체면에 손상이 갈 거라고 판단한 영국 정부는, 여왕을 위해 특별히 제국 왕관의 축소판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은으로 골조를 만들고 다채로운 보석이 사용되지 않아 겉보기에는 소박한 직경 9cm, 높이 10cm의 작은 왕관에는 오로지 다이아몬드만 1,187개가 사용되었으며(…), 1871년 2월 9일 의회 개원식 때 처음 착용한 뒤로 쭉 애용했고 공식 초상사진을 촬영할 때도 항상 이 왕관을 썼으며 사후 장례식 때 여왕의 관 위에도 올려졌다. 이 왕관은 에드워드 7세의 아내 알렉산드라 왕비가 한때 착용하기도 했으나 그 이후로는 왕실 보석으로 사용되지 않고 현재 런던 탑에 보관되어 있다. 사진
4.3 인도 여제
x300px | |
디즈레일리가 인도 제국의 왕관을 여왕에게 바치는 것을 풍자한 주간지 '펀치(Punch)'의 만평(1867년, John Tenniel). 만평의 캡션에 "헌 왕관을 새 것으로 바꿔 드립니다!"(New crowns for old ones!)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7] | 여왕과 인도인 시종 두 사람 |
1857년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영국은 그동안 인도를 간접 통치하는 수단으로 활용한 동인도 회사를 해체하고 인도 제국을 통해 본격적인 직접 통치에 들어갔다. 여왕은 인도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은 걸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군주로서의 책무를 다시금 절감했다는 감상을 일기에 적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74년 총선거를 통해 다시 집권하게 된 벤저민 디즈레일리 총리는 여왕의 공식적인 칭호에 '인도 여제(Empress of India)'라는 칭호를 덧붙이는 것을 골자로 한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것은 기존 무굴 황제 대신에 영국의 왕이 인도의 황제로서 인도 각지의 제후들 위에 군림하는 형태로 변경한 것이다.[8][9]
디즈레일리가 굳이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 황제 칭호를 부여하게 된 동기 중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공주(어머니와 이름이 같음)도 있었다. 빅토리아 공주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왕세자(이후 프리드리히 3세)한테 시집을 갔는데, 이후 1871년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해 독일 제국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자 영국 국내에서는 "프리드리히가 즉위하면 빅토리아 공주는 Empress[10]가 되는데, 어머니는 Queen이 돼 칭호가 서로 역전된다"며 불만스러워 하는 얘기가 돌았다고 한다. 영국인들 스스로 대영제국[11]이라고 할 정도로 세계 최강국인데 신생 독일 제국보다 못날 것도 없다는 자존심도 있었을 것이고. 근데 그렇다고 그 동안 익숙하게 잘 써온 연합왕국(United Kingdom)이란 국호를 갑자기 무슨무슨 제국으로 고치고 여왕의 칭호를 여제로 바꾸는 것은 여러 모로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마침 영국이 인도를 완전히 장악[12]함에 따라 디즈레일리가 묘수를 낸 것이다. 영국 여왕을 인도 여제로 군림하게 함에 따라 인도의 기존 지배 질서 위에 영국이 지배력을 행사하게 만들면서, 칭호 문제로 촉발된 영국인들의 자존심 문제를 적당히 해결한 것. 물론 영국 국내에서는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비아냥이 나오긴 했지만(위 풍자화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디즈레일리의 제안은 잘 관철되었다. 따라서 1877년 1월 1일부터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의 여왕이자 인도의 여제이신 빅토리아 폐하'로 불리게 되었으며 109캐럿짜리 인도산 다이아몬드 코이누르를 제국 왕관에 박아넣었다. 빅토리아 이후로 영국의 국왕들은 1948년까지 인도 황제의 칭호를 같이 썼다.
4.4 치세 후반
노년의 여왕 |
1878년 12월 14일 차녀 앨리스 공주가 디프테리아에 걸려 병사했고 60세가 된 다음해에는 첫 증손녀인 작센-마이닝겐의 페오도라가 태어남에 따라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남편과 자식을 앞세우는 비극을 겪은 여왕은, 가장 아끼던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에게 한층 더 매달렸다. 베아트리스 공주가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와 사랑에 빠졌을 때도 딸과 사위가 자기 곁에서 지내는 걸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할 정도로, 여왕은 젊었을 적의 완고했던 성격이 노년에 접어들어 더욱 강해졌다.
이런 여왕의 고집스럽고 독단적인 성격은 외교와 군사 문제에서 강경한 대응을 통해 영국의 위신을 세우려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1877년 러시아가 오스만 투르크를 공격해 산스테파노 조약을 체결하고 불가리아를 할양받자 이에 반대해 다른 나라들을 끌어들여 1878년 베를린 조약을 통해 산 스테파노 조약을 폐기하고 러시아 몫으로 돌아갈 영토를 크게 줄여버렸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뿐이었고, 뒤이어 각종 악재가 여왕과 정부를 곤경에 처하게 했다.
1881년과 1885년에는 각각 남아프리카와 수단에서 영국군이 패퇴했고, 1882년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발한 아일랜드에서 총독이 비밀결사에 암살되었고, 1870년대와 80년대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은 아일랜드 자치동맹, 아일랜드 토지동맹을 거쳐 아일랜드 민족동맹을 만들고 아일랜드 자치당은 50여명을 영국 의회에 진출시켰다. 아일랜드 자치당은 캐스팅보더 역할을 하며 몸값을 높여 영국 자유당의 글래드스턴을 도와 아일랜드 토지법과 아일랜드 자치법을 통과시켰다.
이런 조짐은 대영제국의 최전성기가 끝나고 내리막으로 접어든 신호탄이었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여왕은 개인적인 비극이나 대내외적으로 산적한 문제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왕위를 지키며 1887년 즉위 50주년을 축하하는 골든 주빌리를, 1897년 즉위 60주년을 축하하는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성대하게 거행했다. 당시까지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할아버지 조지 3세의 재위기간을 뛰어 넘은 빅토리아는 생전에 이미 대영제국의 구심점으로서 국민들이 우러러보는 빛나는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던 것이다. 영국의 팽창주의는 도리어 이 내리막 시기에 더 극대화 된다.[13]
5 장수만세
5.1 즉위 50주년, 골든 주빌리
1887년 6월 20일, 여왕은 남편 앨버트 공이 묻혔던 프로그모어의 나무 아래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것으로 즉위 50주년(골든 주빌리)의 일정을 시작했다. 이후 기차를 타고 윈저 성에서 패딩턴, 다시 런던으로 갔으며 이날 저녁 버킹엄 궁전에서는 왕실 가족과 50개국의 군주를 비롯해 해외의 영국 식민지를 통치하는 고위 관료들이 참석한 호화로운 연회가 열렸다.
6월 21일, 덮개가 열린 사륜마차를 탄 여왕은 인도 기병대의 호위를 받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행차한 뒤 버킹엄 궁전으로 돌아왔다. 버킹엄 궁전 앞에 운집한 군중들은 궁전 발코니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왕을 향해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이날 저녁 연회에 참석한 여왕은 각국 외교관들과 인도의 라자들을 접견했고,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골든 주빌리 행사 때 여왕은 인도인 시종 두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시중들도록 했으며, 그 두 사람 중 하나인 압둘 카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승진해 여왕에게 우르두어를 가르치고 집사 역할을 수행하기에 이른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당대의 관점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일이라 여왕의 주변에서는 카림을 악의적으로 비방했지만, 여왕은 이런 비난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를 가까이에 두었다.
5.2 즉위 60주년, 다이아몬드 주빌리
1896년 9월 23일부로 당시까지 영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할아버지 조지 3세의 재위기간을 경신했다. 식민지 장관 조지프 체임벌린은 다음해인 1897년 즉위 60주년(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 때 이를 함께 기념해 대영제국과 여왕을 더욱 빛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1897년에 거행된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에서는 영국 식민지 자치령의 모든 총리들이 초대되었으며, 거창한 행렬에는 영국 전역의 군대들도 참여했다.
1897년 6월 20일, 이날은 일요일이었기에 여왕은 윈저 성 내의 성 조지 예배당에서 기도를 했다.
6월 21일에는 외국 사절들을 접견하기 위해 런던으로 돌아왔다.
공식 행사일인 6월 22일, 여왕의 행렬은 세인트 폴 대성당 야외에서 거행된 기념식에 이어 런던 남부와 국회의사당을 지나 버킹엄 궁전으로 돌아왔는데, 무개마차에 탑승한 노구의 여왕을 향해 수많은 인파가 축하와 환호를 아낌없이 보냈다. 이날 저녁 여왕은 '내가 거리를 지날 때마다 본,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열정과 환희로 가득한 모습에 진심으로 놀랍고 감동받았다'고 일기에 적었다. 버킹엄 궁전에서 열린 공식 만찬과 더불어 여왕의 며느리 알렉산드라 왕세자비는 런던의 빈민 40만명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행사를 베풀었다.
영국 역사상 처음 거행된 다이아몬드 주빌리는 여왕과 대영제국 모두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야외에서 거행된 기념식은 78세의 고령인 여왕에게는 무리여서 그로 인해 류마티스성 관절염이 악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빅토리아 여왕 이후 2번째 다이아몬드 주빌리가 거행된 것은 115년 뒤인 2012년, 여왕의 현손녀인 엘리자베스 2세 때였다.
당시 조선에서도 이 기념식에 사절을 파견했는데, 그 주인공은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6개국 겸임공사였던 민영환이었다. 그는 1897년 3월 24일 4명의 수행원과 함께 서울을 출발해 나가사키, 상하이, 마카오, 싱가포르를 거쳐 인도양을 지나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 지중해에 도달했다. 여기서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 흑해로 들어가 오데사에 상륙한 다음 기차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국서를 바치고 열흘 동안 체류하다가 6월 1일에 런던으로 출발했다. 민영환 일행이 런던에 도착한 것은 6월 5일이었으며 6월 22일에 거행된 기념식에 참석하고 7월 17일에 귀국길에 올랐는데, 민영환은 이때의 노정을 <사구속초(使歐續草)>라는 여행기로 남겼다.
6월 26일에는 영국 해군의 대함대(Grand Fleet)가 관함식을 개최했다. 이 때, 선박 엔진의 역사를 바꾼 아주 유명한 난입 사고가 있었다. 증기터빈 항목 참고.
6 개인사
6.1 가족관계
빅토리아 여왕의 가족, 프란츠 사버 빈터할터, 1846년 (왼쪽부터) 차남 앨프리드,[14] 장남 에드워드, 빅토리아 여왕, 앨버트 공, 차녀 앨리스, 3녀 헬레나, 장녀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
자손이 많았으며, 그 공주들이 당대 유럽 왕가로 시집을 가서[15] 유럽의 많은 왕실[16]이 빅토리아 여왕의 피를 잇게 되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유럽의 할머니'. 자녀가 9명에 손자녀는 42명이고 증손자녀는 85명에 달하니 결코 빈말이 아니다(...). 그리고 그녀의 혈우병 인자도 온 유럽의 왕실로 퍼졌다.
자세한 사항은 빅토리아/가족관계 문서를 참조.
6.2 남편과의 순애보
남편 앨버트 공과의 사랑이 널리 알려져 있다. 빅토리아가 발랄한 성격이었던 반면 앨버트는 과묵한 편으로 성격 차이가 컸지만, 둘 사이의 유대감은 어느 누구보다도 강했다고 한다. 둘 사이의 금슬은 무척 각별해 20년의 결혼생활 동안 무려 9명의 자녀를 낳았다. 결혼생활의 반은 임신기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빅토리아는 앨버트 공의 머리카락이 담긴 장신구를 달고 다녔는데, 이게 유행이 되어서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해 머리카락을 담은 장신구를 매다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앨버트 공이 장티푸스로 죽은 뒤[17] 빅토리아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년 동안 남편을 기리는 의미로 매일 고인의 옷을 펼쳐 놓고 언제나 검은색 옷만을 입었다. 이때문에 검은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하얀 레이스를 얹은 모습이 빅토리아 여왕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굳어진다.
남편 앨버트 공의 죽음이 빅토리아 여왕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는, 두 사람이 결혼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1세[18]에게 쓴 편지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저의 행복은 끝났습니다. 제게 이 세상은 없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앨버트 공은 빅토리아 여왕을 번쩍 안아서 집무실에서 침실로, 침실에서 집무실로 데려다주었다고 하는데 아무리 앨버트 공이 건장한 남자였다고 해도 이건 분명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빅토리아가 날씬한 편도 아니었다 심지어 앨버트는 나이 먹을수록 힘이 빠지는데 빅토리아의 살은 계속 늘어남 앨버트 공의 사후에는 브라운이라는 하인이 이 역할을 대신하게 되는데, 브라운이 앨버트 공의 외모를 닮기도 해서 잠깐 동안 스캔들이 퍼지기도 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워낙 일편단심 앨버트 공이라 곧 사라지기는 했지만.
두 사람 사이의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어느 날 둘이 부부싸움을 하고는 앨버트 공이 너무 화가 나 방에 틀어박혔다. 빅토리아 여왕이 노크를 하자 앨버트 공이 누구냐고 물었고, 빅토리아 여왕이 '영국의 여왕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여왕이 노크를 하고 '당신의 아내예요'라고 대답하자 기쁘게 문을 열었다고 한다. 츤데레?
7 사망과 평가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 행렬.
프로그모어 영묘에 있는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석관.
군인들의 행군 소리, 쇼팽의 장송곡과 드럼소리가 울려 퍼졌고, 모든 영국인들이 부모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런던 시민, 여왕의 장례식에서
1898년 백내장이 발병하고 나서 점차 쇠약해지기 시작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상실증에 걸렸고, 결국 1901년 1월 22일 영국 역사상 가장 긴 64년 동안 재위한 빅토리아 여왕은 81세를 일기로 와이트 섬의 오스본 하우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윈저 대공원(Windsor Great Park)의 프로그모어 영묘(Frogmore Mausoleum)로 운구된 여왕의 유해는 40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이에 따라 하노버 왕조는 그녀의 대에 이르러 단절되고, 이후 영국의 왕조는 부군 앨버트 대공[19]의 가문인 독일의 삭스-코버그-고타 가문으로 이어진다.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산업, 군사 등 다방면에서 엄청난 변혁이 있었던 여왕의 64년 치세는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로 불리며 고전적이면서 보수적이고 도덕주의, 엄숙주의와 더불어 허영과 위선 같은 상반된 면모가 병존한 시대로 기억된다.
이전 국왕들과는 달리 사생활에서 매우 엄격한 도덕주의를 추구한 여왕의 영향으로, 귀족 부인이 누군가와 스캔들이 있다는 소문이 날라 치면 그 여성은 살롱에 출입할 수 없었고, 남성 귀족들은 자신의 정부를 가정부라 속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만 그런 거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할 거 다 하면서도 그걸 드러내지 않고 더욱 은밀하게 변한, 속되게 표현하면 '뒷구멍으로 호박씨를 깐' 시대였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국제적으로 최전성기를 누렸으나, 그 말은 다시 말해,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제 3세계의 수천만명의 사람들이 영국에 의해 고통받았던 것을 의미한다.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수많은 국가들의 국민들은 나라를 잃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산업 혁명의 여파로 극심한 가난과 고된 노동 속에서 살게된 노동자들이 뭉친 차티스트 운동의 전성기도 빅토리아 시대였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참정권, 선거권을 요구했으나 군홧발에 짓밟혔다. 그래도 노동자들의 요구를 계속 무시할 순 없었고 결국 노동자들도 선거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는 남성에 한해서였고, 여성이 선거권을 가지게 되는건 1차 세계대전 이후로 가야한다. 빅토리아 여왕 자신도 여자였으나 여자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
재미난 것은 최전성기이지만 산업혁명의 후발주자로 추락한 적기조례를 성은으로 내렸다는 점이다. 자승자박. 불쾌한다면서 뭔 일을 하는지에 한편의 희극이다.
8 이야깃거리
명대사로는 "We are not amused(짐은 재미가 없느니라)"[20]가 있으나 그 진위는 불확실하다(닥터후에서 로즈가 계속 이 말을 유도하려는 장면이 나온다.).
참고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혈우병 보인자. 이로 인해 유럽 왕실이 골치를 앓았는데 특히 러시아의 경우, 하필이면 니콜라이 2세의 외아들 알렉세이가 혈우병 환자였고 이 때문에 라스푸틴 같은 놈이 득세하게 되었다. 덕분에 고등학교 생물 교과서에서 유전병 가계도가 나올 때 언급된다(…). 그런데 여왕의 부모와 남편 모두 혈우병 보인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왕의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이 불륜을 저지른 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으나, 여왕이 늙어 갈수록 켄트 공작을 빼닮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돌연변이로 보고 있다.[21] 여왕의 자식들 중 차녀인 앨리스와 4남인 레오폴드, 5녀인 베아트리체가 혈우병을 물려받았다.
나폴레옹 3세를 남편인 앨버트 공 다음으로 매력적인 남자라고 평한 바 있다.
1832년부터 죽기 열흘 전까지 일기를 빼놓지 않고 썼는데 2번에 걸쳐 이를 출판하기도 했다. 지근거리에서 비서 역할을 하던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는 여왕 타계 후 일기의 내용을 편집하면서 어머니의 체통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적인 부분 등은 따로 골라내 남김없이 불태워버렸다. 그럼에도 현존하는 일기의 양은 꽤 많은 편. 2012년 5월 24일, 영국 왕실이 여왕 탄생 193주년을 맞아 여왕이 생전에 쓴 개인일기 전량에 대한 인터넷 열람 서비스를 시작한다고 밝혔으며, 빅토리아 여왕 일대기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어렸을 때 중병을 앓다가 낫게 해준 의사가 내린 건강지침을 평생 동안 철칙으로 삼았는데, 그건 바로 춥게 지낼 것. 따뜻함은 사람을 나태하게 만들지만 추위는 정신을 맑게 하고 긴장감을 유지시켜 사람을 최적의 상태로 만든다는 소리로, 겨울에도 창문을 활짝 열어놓는 건 다반사요 비바람이 불 때 산책하는 걸 좋아했다. 여왕 본인은 80살 넘게 건강했지만 여왕을 모시는 주변 사람들의 건강에는 이상이 생겼다(…). 언제나 여왕 곁에서 지내며 시중들던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는 급기야 30대에 류마티스 관절염에 걸려 따뜻한 지방으로 요양갔는데, 그녀 없이는 못산다던 여왕은 따뜻한 곳에 같이 가는 게 싫어서 어쩔 수 없이 베아트리스 공주의 요양을 허락했다(…).
세계 최초의 교통법을 만든 군주기도 하다. 적기조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법인데 이 법 때문에 영국의 자동차 산업은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항목 참조. 근데 이걸 단순 이야기거리로 삼는다는 점부터가 빅토리아 시절에 대한 중요성을 외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미식가였던 것으로 유명하며 처음에는 궁정 요리사에 프랑스 요리사를 배치했으며 인도 여제가 된 이후에는 인도인 요리사도 데려왔고 영국에 인도 요리를 정착 시켰다. 즉 영국 요리를 살렸다.
2011년 11월 1일 에든버러에서 열린 경매에서 여왕이 말년에 사용한 비단속옷이 9,735파운드에 낙찰되었다.#
9 미디어매체의 빅토리아 여왕
빅토리아 시대가 영국이 세계를 주름잡던 시절을 상징하다보니 '산업화가 왕성하게 일어나 사회가 급속하게 발전하고, 제국주의적 팽창이 미화되었으며, 상류층과 하류층의 격차가 뚜렷하고, 사회 분위기가 어딘가 어두우면서 엄숙한데, 여왕이 다스리는 시대'라는 서브컬처 내의 묘사가 있으면 십중팔구는 빅토리아 시대 또는 그 시대를 모델로 삼았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영 빅토리아. 남편인 앨버트 공과의 사랑과 결혼을 중심으로, 그의 즉위 전~즉위 후의 삶을 영화화했다. 에밀리 블런트 주연.
북미에선 사실 좀비 헌터였다(…)라는 내용의 소설이 나오기도 했다. 에이브러햄 링컨: 뱀파이어 헌터 같은 케이스.
흑집사의 시대적 배경이 바로 이 여왕 시기였다. 애니 1기에서는 그 부분이 더욱 부각되었고. 타락천사인 애쉬에게 농락당하는 안습인 인물. 하지만 새로 제작된 3기에서는 원작 기준으로 갈 것으로 보여서 안습함은 조금 줄 듯. 원작에서는 사람 좋은 할머니로 보이지만 노회한 면도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22]
어쌔신 크리드: 신디케이트의 주 시대이기도 하고, 직접 등장한다고 한다. 제이콥 프라이가 트레일러에서 자본가들이 빅토리아 여왕의 재산보다 더 많은 돈을 숨겨두었다고 까기도 했으니.
파라독스의 전략 게임인 빅토리아 시리즈는 제국주의가 만연했던 1836년부터 1936년까지의 시대를 나타내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이 게임의 이름이 이 항목의 인물을 담고 있다.
죽은 자의 제국의 시대적 배경인데, 여기서는 시체를 되살려내 살아 있는 인간 대신 노동자나 군인으로 이용함으로써 사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부각되지 않았지만, 소설에서는 시체를 죽은 자로 소생시킬 때 남성만을 사용한다. 여성을 이용한 죽은 자가 금기시된 이유는 대영제국의 최고권력자가 바로 빅토리아 여왕, 즉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 H. 왓슨이 봄베이에서 여성인 죽은 자를 보고 크게 놀라기도 한다.
영국 ITV 방송국에서 제나 콜먼 주연으로 여왕의 젊은 시절을 다룬 드라마 '빅토리아'를 방영 중. 참고로 제나 콜먼은 닥터후에서 클라라 오스왈드 역을 맡은 적 있는 배우인데, 아래 문단에서 나오는 닥터후와 빅토리아의 연관을 생각하면 재미있는 우연이다.[23]
문명 시리즈에서는 4와 6에서 영국 문명 지도자로 등장한다.
9.1 닥터후에서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영국의 SF 드라마(영드) 닥터후의 뉴 시즌 2 에피소드 2 <Tooth & Claw>에 등장한다.
여행을 하던 도중 닥터와 로즈 타일러를 만나지만 철로가 막히는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근처의 토치우드 저택에서 묵게 된다. 허나 그 날 밤 거기에 늑대인간들이 나타나 위기에 빠지지만 10대 닥터와 로즈로 인해 그 사태를 겨우 피한다.
하지만 목숨이 위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해결하려는 두 사람이 마치 이 사태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면서 두 사람을 쫓아내고는 외계의 위협으로부터 대영제국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토치우드 연구소를 설립한다.
참고로 할머니 배우가 닥터후 올드 시즌에서 아역으로 등장한 경력이 있다고 한다. 기네스북에 등재된 최장기 방영 드라마의 위엄.
이 틀 아래의 내용은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의 줄거리나 결말, 반전 요소가 직, 간접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품의 내용 누설을 원치 않으시면 이하 내용을 읽지 않도록 주의하거나 문서를 닫아주세요.
사실 XXXX일지도 모른다. 닥터는 빅토리아의 혈우병이 너무 갑작스럽게 생겼다면서 그녀의 가족들에게 발병된 혈우병도 실은 가족들을 만나서 물어서 전염된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했다. 영국 왕실 전부를 늑대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 닥터후 클라스. ㅎㄷㄷ
- ↑ 실제로 대영제국을 선두로 하여 여러 유럽 국가들의 제국주의와 기술발전이 절정에 달했던 이 시절을 아예 빅토리아 시대라 일컫기도 한다.
- ↑ 동군 연합의 특성상 하노버는 영국 영토는 아니었다.
- ↑ 서자가 10명 정도 있었다고 한다. 이 서자의 후손 중 1명이 데이비드 캐머런이다.
- ↑ 콘로이를 지나치게 믿고 의존했던 공작부인은 후에 콘로이가 횡령을 한 사실 등을 뒤늦게 알자 잘못을 깨닫고 딸에게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 ↑ 여왕이 앨버트 공 사후 딸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에게 보낸 편지에 "앨버트에게 모든 것을 의존했다. 그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사진이나 서류도 정리하지 않았고, 그가 동의하지 않으면 드레스를 입지도 보닛을 쓰지도 않았다"라고 적었다.
- ↑ 맨 위의 대관식 초상화에서 쓰고 있는 것.
- ↑ 만평엔 그렇게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바꾼 게 아니라 새로운 관을 추가한 것임에 유의.
- ↑ 영국은 식민지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영국화해 영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부여하는 데에 인색했던 대신, 영국의 지배에 방해하지 않으면 되도록 기존 사회 체제에 손을 대지 않는 방식을 취했다. 그래서 이런 형태를 취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영국은 식민화 과정에서 현지의 토착 지배자들과 타협해 영국의 왕이 그들 위에 존재하는 더 높은 군주라는 관계를 정립하는 경우가 여럿 있었다. 예를 들면 피지에서는 (여)왕에 대응되는 현지어 표현을 '대추장'이라고 번역했었다. 말 그대로 피지 각지의 추장들 위에 군림하는 더 큰 추장이라는 의미. 다만 영국의 왕에게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해서 통치한 곳은 인도가 유일했다.
- ↑ 이렇게 유럽 국왕에게 비유럽 지역 식민지의 전통적인 황제 칭호를 부여해서 격을 높이는
똥폼방식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따라하게 된다. 무솔리니 시기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 제국을 침공했는데, 그때 무솔리니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에티오피아 황제의 칭호를 바친 것. 하지만 국제 사회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지배를 인정하지 않아 대부분의 국가가 이를 인정해주진 않았다(...). - ↑ 알다시피 영어에서 남성 군주의 배우자와 여성 군주의 칭호 형태는 동일하다.
- ↑ 영국은 연합왕국(United Kingdom)이라고 하지만 이건 본토 지역에만 한정해 쓰는 표현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영국 본토뿐만 아니라 본토 외 속령까지 다 아울러 부르던 명칭이 바로 대영제국(British Empire)이다. 한국에서 양자를 혼동하는 경우도 많은데 실제론 구분이 되는 표현이다.
- ↑ 단 포르투갈령이었던 고아(Goa)처럼 예외가 있긴 했다.
- ↑ 여담으로 인도 제국의 마하트마 간디는 빅토리아 말기 당시 런던에 있었고 이후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 영업을 했다. 1893년 남아프리카 기차에서 1등석에서 쫓겨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직시하게 되지만, 그가 인도로 돌아온 건 좀더 훗날의 일인 1915년이다.
- ↑ 치마를 입고 있는 이유는, 당시엔 남자아이도 어릴적에는 여자아이 처럼 꾸미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 ↑ 여왕은 딸들을 외국 왕실로 시집보내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장녀와 차녀는 앨버트 공의 의사가 워낙 강해서(평생동안 조국인 독일을 사랑하고 그리워했으며 독일의 통합을 꿈꾸었다.) 설득당했다고 한다. 3녀 이후로는 사위들에게 영국에서 평생 살 것을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했다. 근데 장녀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와 차녀 앨리스가 정말 많은 자식을 낳은데다가, 그 자식들이 또 다른 왕실과 결혼을...
- ↑ 기타 공국을 제외하고 왕실만으로 따져도 독일,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노르웨이, 스웨덴, 러시아, 덴마크, 스페인에 이른다.
- ↑ 아들 에드워드 7세 때문에 공이 42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다는 설도 있다. 나이 20살이 되도록 주색잡기에 빠져있던 큰아들 에드워드가 여왕과 다툰 후 가출하듯 별장으로 떠났고, 앨버트 공이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무리하게 따라 나섰다가 비를 맞아 폐렴에 걸려 죽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왕은 큰아들 에드워드를 죽는 순간까지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 ↑ 빅토리아에겐 외가 쪽으로, 앨버트 공에겐 친가 쪽으로 숙부가 되는 인물. 빅토리아의 사촌 언니로 조지 4세의 딸인 샬럿 공주의 남편이기도 하다.
- ↑ 독일어로는 작센-코부르크-고타 대공 알브레히트.
- ↑ 번역이 틀린 게 아니라, 유럽에서 왕과 교황은 자신을 복수형으로 지칭한다. 이를
나는 단수가 아니다장엄복수형이라고 하며 유럽권에서 일반적이다. - ↑ 학설에 따르면, 아버지의 나이가 많을 때 태어난 딸에겐 돌연변이로 혈우병 인자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참고로 빅토리아 여왕은 아버지가 50대일 때 태어난 늦둥이다.
- ↑ 실제 역사속에서도 훈훈한 할머니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정치와 외교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모습도 보여주긴 했다.
- ↑ 여담으로 닥터후에서 11대 닥터 역으로 제나 콜먼과 호흡을 맞춘 맷 스미스는 다른 드라마에서 빅토리아의 현손녀의 남편이자 역시 빅토리아의 후손이기도 한 필립 마운트배튼 역을 맡게 되었다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