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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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주(1901년 6월 24일 ~ 1942년 6월 2일)

한국의 독립 운동가.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감천리 출신. 아버지의 윤희규(尹熺奎)와 어머니 김경이(金卿伊)사이에서 1901년 6월 24일 태어났다.

본디 겸손한 성격이었으나 가슴속에는 뜨거운 애국심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경술국치 시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였다고 하며 국민학교 재학 당시 덴노의 출생기념일에 받은 일장기를 화장실에 쳐박아 버렸을 만큼 일제에 대해 큰 적개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이름에 대해서 기록에 약간의 혼선이 있는데 거론되는 이름이 3가지가 있다. 세주(世胄), 소룡(小龍), 소용(小用)으로서 이중 하나만 본명이며 나머지 이름들은 가명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본명이 윤세주로 기술하고 소룡, 소용, 석정등의 가명을 사용하였다고 한다.네이버지식백과참조 두산백과에서는 본명이 윤소용으로 기술되어 있고 세주, 소룡을 가명으로 사용하였다고 되어있다.동아백과참조 위키백과에는 본명이 윤소룡, 호는 석정(石正)으로 기술되어있다.위키백과참조

네이버, 다음, 네이트 등 국내 포털에서는 윤세주로 검색해야 그의 프로필 정보가 나오고 있고, 다른 자료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자료가 더 공신력이 높은 것으로 여겨지기에 이 문서에서는 '윤세주'라는 이름으로 등록이 되어 있다.[1]

약산 김원봉의 동향 사람으로 윤세주는 세살 위인 김원봉과 같은 마을에서 어릴 때 부터 친하게 지냈다,김원봉의 집 바로 앞에 윤세주의 집이 있었다고 하니 이웃사촌이기도 하다.어릴적부터 함께해온 김원봉과 함께 학교에서 일장기를 쳐박는 등 항일 운동을 해왔고 ,성인이 된후 국경을 넘어 김원봉가 같이 의열단의 일원이 되고 그와 평생을 함께 독립 운동을 하는 동지가 되었다.

밀양의 민족주의적 사립 학교인 동화중학에서 항일인사였던 을강(乙江) 전홍표(全鴻杓, 1869~1929) 교장의 영향으로 항일정신을 키워갔다. 이 학교를 나온 인물로 약산 김원봉, 최수봉(1894~1921), 김상윤(1897~?) 등이 있다. 윤세주는 전 교장의 애국사상에 감화되어 학교 내 비밀결사인 연무단(練武團)을 조직하고, 당시 금지됐던 개천절 기념행사를 갖고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동화중학은 폐쇄되었으나 그는 항일운동을 포기하지 않고 1919년 경성부에서 3·1 운동 시위에 참가한 뒤 고향에 내려와 밀양 지역 만세운동을 조직했다.

당시 19세로 나이가 어린 편이었지만 윤치형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도했던 것으로 드러나, 궐석재판[2] 에서 밀양 만세운동과 관련자들 가운데 가장 중형인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이회영 형제가 세운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그해 11월에 결성된 의열단에 단원이 되었다. 이후 단원 윤치형, 곽재기, 황상규, 이성우 등 수명과 결사대를 조직하여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경성일보사 등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을 폭파할 것을 결의하였다.

1920년 3월 중국인으로부터 폭탄을 구입한 뒤, 동지들과 폭탄과 무기의 국내반입 및 군자금모금, 폭파공작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협의한 다음 각기 별도로 국내에 잠입하였다. 그러나 이해 6월 즈음 거사를 위한 공작 도중 정보가 누설되어 윤세주와 그의 동료 50여명이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1921년 경성지방법원에서 7년징역형을 선고받고[3] 1927년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중외일보 기자, 경남주식회사 사장 등으로 독립운동의 뜻이 없는 듯 조용이 지내다 1932년 여름 경에 중국 난징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1932년 10월 20일 중국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단 제6대(약칭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에 입교, 1933년 4월 21일 제1기로 졸업했다. 이후 독립운동단체들은 연합준비위원회를 구성한 뒤 다른 여타 해외독립운동단체들을 규합하여 그 해 11월 10일 한국대일전선 통일연맹(韓國對日戰線 統一聯盟)을 결성, 윤세주는 송병조, 김두봉, 김규식 등과 함께 핵심 인사로 참가하였다.

1937년 김원봉 등과 통일연맹을 모체로 한 조선민족혁명당을 창설하고 1938년에는 중국군과 제휴하여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였다. 조선의용대에서 손꼽히는 이론가였던 그는 민족혁명당 편찬위원회 등에서 일하였다.

1941년 김원봉과 헤어져 박효삼과 함께 화베이 지방으로 북상, 8로군과 공동으로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이무렵 김원봉과 노선 차이로 갈등이 있었던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국공 내전으로 중국의 권력이 양분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 관할 지구에 전략적으로 분산 배치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1941년 4월에 윤세주는 황하를 건너 화북을 향해 북상해 갔다. 조선의용를 조선의용으로 개칭하고 국민혁명군 8로군과 함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4] 1942년 2월 일본군은 4만 명의 군대를 동원해 태행산을 공격하기 시작하다가 5월에는 20개 사단 40만 명의 병력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다. 이때 조선의용군의 규모는 불과 3000~4000명 수준이었다. 일본군은 20개 사단 40만 명으로 태행산을 완전 포위한 후 전투기와 전차까지 동원, 맹공세를 퍼부어 5월 29일 항일 연합군사령부에서는 조선의용군에게 전군의 탈출로를 확보해 탈출을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양쪽 산봉우리 사이의 탈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두 산봉우리를 조선의용군이 공격, 전 부대원이 탈출할 때까지 사수하기로 했다. 작전개시 5시간 만에 마침나 탈출로를 확보하였으나, 윤세주는 이 전투에서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3일 뒤 동지들이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선생을 발견했으나 이미 중태였다. 6월 3일 선생은 석굴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중국공산당의 주요 인물인 좌권(左權) 장군이 함께 전사했다.

“단결해서 적을 사살하기 바란다.”

그가 동지들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향년 41세.[5] 사후 시신은 진광화[6]와 중국 공산당 군벌들의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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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타이항산에 있는 진광화 열사와 윤세주 열사(오른쪽)의 묘.[7]

그가 전사한 뒤 1주년이 된 1943년 6월 중경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군 등이 합동으로 그의 추도회를 가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011년 이육사의 생애를 소재로 한 드라마 "절정" 에서 이육사의 친우로 등장. 항일의 뜻은 같이하면서도 무장투쟁과 문학활동에서 방황하는 이육사를 비판하면서도 그의 시에 공감하고 동조하고, 그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복합적인 인물로 그려젔다. 배우는 이승효

여담으로 키가 무척 컸다고 한다. 지금도 크다 싶은 184cm인데 일제강점기 당시 성인 남성 평균 신장 164cm를 훌쩍 넘어선 수치다.
  1. 일단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여러 가명으로 활동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2. 당시 윤세주는 일본경찰의 수배를 피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3. 감형되어 5년 4개월 수감
  4. 이때 일본군측 지휘관이 한국인 출신 홍사익이었다.
  5. 일설에 의하면 일본군에게 붙잡혀 총살당하였다는 설도 있다.
  6. 조선의용대에서 활약했던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역시 태항산 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전사했다.
  7. 이 묘에는 열사들의 유해가 안장되었지만 이후에 공산당 당원들이 있는 진기로예 열사릉으로 이장되었다. 진기로예 열사릉에는 이곳에서 함께 전사한 주권이 안장되어 있다. 태항산에 있는 묘 아래에 이들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다. 크기에 비해 상당히 잘 만든 편. 한국어 설명이 제공되고 있다. 근데 여기까지 가는게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