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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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독립장(單章)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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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윤동주윤자영이강훈이상룡이상정이애일라
이윤재이인이재유이재현이춘숙이회영이희승
장도빈장지연정인보정화암조동호조명하조병옥
조지 쇼주기철최중호함석은함태영호머 헐버트장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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友堂 李會榮 1867년 4월 21일 ~ 1932년 11월 17일

이회영 평전

이완용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

상상조차 하기 힘든 행운(부)을 안고 태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이 된 인물

생과 사는 다같이 인생의 일면인데 사를 두려워해 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는가.

이루고 못 이루고는 하늘에 맡기고 사명과 의무를 다하려다가 죽는 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가치 있는가.

1 소개

독립운동가. 호는 우당. 본관은 경주 이씨.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의 자손으로 조선 말 10대 부자 안에 들던 집안의 6형제 중 넷째. 바로 아래 동생이 바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이다. 조선 말기에 애국 계몽 운동을 벌였으며, 신민회에 참여하였는데 이는 후의 만주 독립 기지 건설과 연관이 된다. 이회영의 며느리는 고종의 하나밖에 없는 누님의 외동딸, 즉 고종의 조카딸이다.

호를 풀이하자면 '벗들의 모임 터'가 되겠는데, 우당선생은 관습보다는 사람을 중요시했다.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가 자제임에도 불구하고 봉건적 관습에서 가장 먼저 벗어난 인물인데, 신분제가 엄격하던 조선 사회에서 그의 나이 약관에 이르러 집안 노비들에게 존대를 하고 노비문서를 파기하여 그들을 평민으로 풀어주었다.

또한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누이동생을 친정으로 불러들인 뒤, 급사했다고 속이고 개가시키기도 했다. 조선시대, 여성의 덕목은 첫째도 둘째도 부군에 대한 절개이고 특히나 반가의 규수라면 이러한 잣대는 더욱 엄격했다. 하물며 명문가 중 명문가였던 우당선생의 가문이라면 상상조차 못할 일인데, 이것을 악습이라고 여기고 실제로 행동했던 선생의 선각자적 면모를 볼 수 있다. 말은 쉽지만 행동하기란 어렵다 ..라는 말은 선생께는 해당이 안되는 말이다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6형제 모두조선 안의 명성을 포기하고 만주로 이주하였는데, 이 때 이 집안의 부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전 재산 급처했더니 당시 13,000마리 값이다. 현재 시세로 환산해도 600억 원 전후다. 다시 말하지만 급히 처분한 재산이다. 게다가 다 팔지도 못하고 일부는 버리고갔다.[1]그러나 이 재산도 독립운동 8년만에 바닥나 아들 이규창의 자서전에 따르면 "일주일에 3번 밥을 하면 운수가 대통"이라고 할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했다고 하니 국외 독립운동이란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형제인 둘째 이석영 선생은 고종 최고의 갑부의 집으로 양자를 가게 되는데, 마성 묘란공원 묘지 이후에 경춘 고속도로 절반 쯤에 있는 집이었다고 한다. 동대문부터 80리라고 했는데, 한양 나들이를 갈때 동대문에 당도해서야 남의 땅을 밞았다고 했다. 동대문구, 중남구, 구리시, 남양 정도가 자기땅이었을 것이다. 이석영 선생은 34년 74해의 나이로 '굶어' 죽었다.

본래 이회영 일가는 조부가 이조판서를 지냈을 정도였기에 한일합방을 지지하거나 묵인시 일제로부터 충분히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부분을 딱잘라 거절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은 실로 엄청난 대인 집안이라 할 수 있다. 영미권에서는 칼레의 여섯 시민이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대명사인데, 이회영의 6형제는 바로 이것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경술국치 전에는 신민회 활동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 때는 상동교회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전덕기 목사와도 친하게 지냈는데, 이회영 본인도 감리교로 개종을 한 후였다. 그리고 경술국치가 터지고 만주로 이주한 이후 현지의 한인 단체와 신흥강습소[2] 건립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국내와 연해주, 상하이 등의 독립 운동 조직에도 다수 참여하였으며 고종(조선)의 망명을 계획하기도 하였으나 무산되었다.

대부분의 무장 투쟁파들이 그렇듯 초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고 내부 자유분열에 조정 역을 맡은 적도 있으나 1921년 노선 불만의 문제로 이탈하였다. 이후 만인의 자유권리에 대해 외치는 아나키즘 사상에 심취하여 남화연맹등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체를 결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사실 이회영 자신은 임시정부 수립에 대해 처음부터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임시정부 같은 조직이 있으면 대통령이니 국무총리니 하면서 지위를 놓고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감투싸움이나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결국 사실이 되어버렸다....

1920년대 후반부터 아나키즘 활동을 본격화하였으며 백정기 등과 함께 항일 구국 연맹, 흑색 공포단 등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만주 지역의 독립군과 연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는데 김좌진과의 면담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반응은 대개 호의적인 편이었다고. 1932년 아예 만주에서의 활동을 계획하였으나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대개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이회영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다렌 지역에 거점을 만들려 했으나 밀정들의 활동으로 체포당하여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이 밀정 중 한 명이 이회영의 조카이자 이석영의 차남인 이규서였고, 그가 처단되면서 이석영의 대가 끊기게 된다.[3]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국립현충원에 모셔졌다. 우당선생의 기념관이 종로구 신교동에 있다. 홈페이지

2 가족과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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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줄 오른편 말년의 이회영.

그와 그의 6형제는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그 중 5명이 옥사하거나 굶어죽었다고 한다. 바로 아래 동생이자 대한민국 건국 후 초대 부통령이 되는 성재 이시영만이 유일하게 살아서 조국의 광복을 보고 귀국했다. 여동생인 경주 이씨는 해공 신익희의 형인 독립운동가 신재희에게 시집갔다. 이외에 이회영의 조카들도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달성 서씨와 1885년에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고 달성 서씨가 죽은 후 1908년에 후처 한산 이씨 이은숙과 결혼하여 3남 4녀를 낳았다. 이은숙은 이회영이 사망했을 때 영전에 조사를 써서 올렸는데, 그 내용이 절절하여 종종 회자되곤 하는 명문이며, 광복 후 '서간도시종기'로 잘 알려진 독립운동 수기를 쓰기도 했다.

선처 달성 서씨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이규학 역시 아나키즘 성향의 독립운동을 했다. 아버지와는 달리 임시정부와도 협력하며 독립운동을 했는데,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피난시키는 일을 맡았고, 이후로도 충칭상하이를 오가며 연락 업무를 맡았다. 사후인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부인인 조계진은 흥선대원군의 외손녀로 직접적인 의열 활동에 나서진 않았으나, 비밀연락요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넷째 아들이 전 국회의원이자 국민의 정부 때 마지막 안기부장을 지낸 이종찬이다.

우당의 자녀들 중 이은숙과의 사이에서 난 4남 이규창 역시 '흑색공포단'에 가담하여 아나키즘 성향의 독립운동을 펼쳤고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이외에 차녀 이규숙의 남편인 장기준도 독립운동가였으며, 이규창의 장인인 정이형은 정의부 사령관을 지내기도 했다. 5남이자 막내 아들은 이규동[4]으로 그의 장남이 변호사더불어민주당의 5선 국회의원이종걸이다.

3 미디어에서

2010년 <해방을 향해 쏘다, 자유인 이회영>이란 제목으로 이회영에 관한 특별 기획 드라마가 제작되어 방영되었다. 평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고 매회 마지막에 이회영에 대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소개가 짤막하게 나왔다. 특별 기획이라서 5부작으로 방영되었고 2010년 9월 12일 종영. 이회영 역에 배우 정동환[5]이 분했고, 안재모일본인 기자 기무라 역을 맡았으며 권오중이 백정기 의사로 출연했다.[6] 그리고 이 작품의 작가가 바로 정도전(드라마)의 작가였던 정현민 작가로, 이 작품이 데뷔작이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1. 이회영 일가가 가지고 있었던 땅이 아직도 서울에서 땅값이 제일 비싸다는 명동일대의 대다수의 땅이었다고 한다. 정확히는 명동성당 건너편 YWCA에 1000평 가까운 대저택이었다. 그 땅을 급히 처분했다고 하니 제값에 받았다면... ㅎㄷㄷ 급히 처분한 땅값만 해도 600억이다
  2. 후의 신흥무관학교이다.
  3. 이석영의 장남은 20대의 젊은 나이에 병사했다
  4. 우당이 사망했을 당시 6세였다. 1926년생으로 2014년 3월 12일 작고
  5. 불멸의 이순신의 윤두수, 야인시대의 최동열 기자 등으로 출연.
  6. 여담으로 안재모와 정동환은 야인시대에서는 각각 인터뷰이와 기자로 출연해서 정동환이 맡은 최동열 기자가 김두한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모습으로 나왔는데, 이 작품에서는 정반대로 정동환이 맡은 이회영이라는 미스테리한 인물을 안재모가 맡은 일본인 기자 기무라 준페이가 추적하는 모습으로 나와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