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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니파 | 시아파 |
1 개요
2 이바디 어원
이바디즘은 우세한 무다르의 한 부족 출신인 압둘라 빈 이바드 알-무리 알-타미미의 부친 이름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는 메카를 방어하기 위해 우마야드의 통치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의 주요 지도자 들 중의 하나였는데 그는 우마야드 통치가 쿠란과 순나에 위배되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그룹을 이끌어갈 강력한 지도자를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압둘라 알-주바이르와 같은 당시 중요 인물들로부터 거절을 받았다.
이 때문에 이븐 이바드는 이 저항 운동을 직접 이끌게 되었고, 실질적인 기반과 명확한 경계 그리고 지도력을 바탕으로 이바디 학파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맘 제도는 19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1]
3 이바디의 역사
수니파에 반기를 든 카와리지파 라는 이슬람 과격파가 있었다. 그들은 예언자 무함마드, 제1대 칼리파인 아부 바크르, 제2대 칼리파인 우마르 시대에 있었던 순수한 이슬람 국가 건설을 이상으로 내세웠다. 또한 카와리지파는 칼리파가 반드시 예언자 가문 출신일 필요가 없으며, 당대의 사람들을 잘 이끌어갈 수 있는 인물이 칼리파로 선택되어야 한다는 혁신적인 사상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이들은 우마이야조로부터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고, 이란, 이라크,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등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7세기 무렵 여러 지역에 흩어진 카와리지 분파 가운데 오늘날 이라크의 바스라 지역에 정착한 분파가 바로 이바디파다. 이바디파는 과격한 행동주의를 없애고 온건하면서 순니파와 절충적인 교리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 같은 이유에서 일부 학자들은 이바디파가 비록 카와리지파로부터 유래했고 교리적인 측면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두 파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바디파는 684년 이라크 남부 바스라에서 압둘라 빈 이바드 알 무리 알 타미미(Abdullah bin Ibad al-Murri al-Tamimi)에 의해 창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바디파에 속한 학자들은 순니파 무슬림들도 학생으로 받아들일 만큼 개방적이었으며, 우마이야조나 압바스조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바디파 역시 정권으로 부터의 탄압을 피하지 못했고, 결국 새로운 안식처를 찾기 시작했다.
압둘라 빈 이바드의 제자였던 자비르 이븐 자이드 알 아즈디(Jabir ibn Zaid al-Azdi, 642-714)는 새로운 안식처를 찾아 자신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바스라를 떠나 오만으로 향했다. 그는 오만에서의 이바디파 창시자가 되어 하디스를 편찬하고 교리를 정립했다. 이때부터 이바디파는 오만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749년 오만의 이바디파는 알 줄란다 이븐 마스우드(al-Julanda ibn Mas'ud)를 이맘으로 선출하고 내륙에 위치한 니즈와(Nizwa)를 수도로 하는 최초의 이맘국을 건설했다. 최초의 이맘국은 9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