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마르

أبو حفص عمر بن الخطاب (Abū Ḥafṣ `Umar ibn Al-Khattāb), الفاروق (al-Fārūq)
아부 하프스 우마르 빈 알-하타브, 알-파루크[1]

(586~590)~644, 재위 634~644 이슬람의 제2대 정통 칼리파. 네 명의 정통 칼리파 중 가장 강력했던 인물.[2]

정통 칼리파
1대 아부 바크르2대 우마르 이븐 알-하타브3대 우스만 이븐 아판

1 이슬람으로의 개종

우마르는 메카의 바누 아디 부족 태생이었다. 610년경 무함마드이슬람을 포교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는 이 사상이 쿠라이시 부족들 사이를 어지럽혀 놓을 것이라 생각하였고, 이 운동을 멈추기 위해 무함마드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슬람으로의 개종 이전 우마르는 사나운 인상에 체격이 건장한데다 술을 좋아하고 자존심이 강하며 다혈질인, 거기에 싸움마저 잦아 타인들이 꺼리는 전형적인 오만한 인간이자 문제아였다. 이런 그가 무함마드와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을 극도로 혐오하니 모두 두려워했는데, 어느 날 무함마드가 알 아르캄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집회를 연다는 소식을 들은 우마르는 이 기회에 무함마드를 죽여 무함마드로 인해 생겨난 혼란을 끝내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알 아르캄의 집으로 가던 중 이슬람 개종자인 사아드 이븐 아비 와카스(Sa'ad ibn Abi Waqqas)[3]와 만나 칼부림이 발생하기 직전까지 가나 "그거 아나, 우마르? 자네 집안 단속이나 먼저 하는 것이 어떤가. 자네의 여동생과 처남도, 이미 이슬람으로 개종했단 말일세."라는 사아드의 말을 듣고 불같이 화를 내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들이 무함마드의 제자 카아브와 함께 꾸란을 읽는 소리를 들은 우마르는 눈이 뒤집혀 집으로 쳐들어갔고, 카아브는 다른 방으로 달아났지만 꾸란이 기록된 종이를 방에 놓아두었기에 여동생은 그것을 보고 분노한 우마르에 의해 머리를 다친다. 이후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을 배신하는 것이냐" 며 매제를 추궁하나 "그러나 새 종교(이슬람)가 옳다" 며 반박하는 매제와 그를 말리는 여동생을 심하게 구타하지만, 그럼에도 "이미 이슬람교도로서 순교를 각오했으니 마음대로 하라" 라고 버티는 여동생을 보며 다소 마음이 진정된 우마르는 그들이 읽던 꾸란을 읽어 보았다.[4]

마침 그가 읽던 구절은 ‘타하’라는 시구였는데 이 구절은 마치 신이 직접 그에게 언명하는 것과 같은 충격을 우마르에게 주었고, 우마르는 그 길로 알 아르캄의 집으로 뛰어가 무함마드 앞에 무릎을 꿇고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서약했다.

우마르의 개종은 무슬림에게는 큰 힘이 비무슬림에게는 뼈아픈 타격이었다. 그 전까지 무함마드 및 무슬림 탄압에 누구보다 열심히던 우마르였으나 무슬림으로 개종한 후에는 누구보다도 앞장서 이슬람을 포교하고 무함마드의 충실한 부하이자 동료로써 활동했다. 기도 시간이 되면 길거리에서라도 기도하는 규칙을 처음 주장한 것도 우마르라고 하고, 이후 메카세력과의 분쟁에서도 크게 활약했으며, 무함마드의 사망소식을 듣고 “누가 그런 거짓을 말하느냐!”라고 분노하다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2 2대 칼리파 취임과 변화

많은 사람들은 모두에게 사랑받던 겸손하고 자상한 초대 정통 칼리파 아부 바크르를 이어 개종 이전이나 이후나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주던 우마르가 칼리파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데에 탐탁치 않아했고, 따라서 아부 바크르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우마르의 칼리파 즉위는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또 다른 유력 후보자인 알리가 우마르의 칼리파 즉위를 적극 추천함으로서 우마르의 칼리파 즉위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마르는 움마(이슬람 공동체) 내부에서 자신이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그것은 지금까지의 지도자인 무함마드와 아부 바크르가 자상한 사람이기에 자신은 그들의 검이자 도구로써 강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따라서 칼리파가 된다면 자신도 변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우마르의 발언에 많은 사람이 미심쩍은 반응을 보였지만, 실제로 칼리파의 지위에 오른 우마르는 자신이 말 한 바를 충실히 지킨다. 그 결과 과거 폭력적이고 다혈질이고 두려움의 대상이자 거만하고 오만했던 우마르는 약자를 보호하고 지나친 팽창과 경제적 타락으로 인한 이슬람의 미래를 걱정하며 허세를 부리지 않는 현명한 통치자로 거듭나게 된다.

또한 초대 칼리파였던 아부 바크르의 행적을 본받아 절대적인 지도자의 명령이 아닌 평등한 공동체의 수장으로서 행동했으며, 생계를 꾸리기 위해 직접 소젖을 짜기까지 했던 아부 바크르의 행동은 칼리파로서 적절하지 않다는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여 과거보다 높은 봉급을 받았지만 그것은 ‘평균적인 아랍인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으로 관리되었다. 그렇기에 결코 풍족하지 못했던 우마르는 전임자들을 본받아 해진 옷을 꿰어 입고 다녔는데, 이 때문에 까디시야 전투에서의 승전 이후 우마르에게 승리의 소식을 전하고자 했던 전령은 메카로 향하던 도중 만난 ‘페르시아 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를 묻는 해진 옷을 입은 사람이 우마르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알려주겠다.’ 라며 무시했고, 나중에서야 그가 칼리파 우마르인 것을 깨닫는 일도 있었다.

특히 형편이 어려운 이웃을 돕는 등의 고단한 일을 빼놓지 않고 행했으며, 누군가가 “칼리파가 굳이 이런 행동을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라고 묻자 “여기서는 나 대신 이런 일을 행해주는 사람이 있지만, 신 앞에서는 나 대신 누가 이런 일을 해주겠는가?” 라고 대응할 정도로 남에게 봉사하고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한편으로는 꾸란의 본격적인 집대성을 시작하고, 622년 헤지라를 이슬람 원년으로 삼는 등 여러 가지 의견으로 나뉜 이슬람의 종교생활을 하나로 집대성 하는데도 큰 노력을 했다.

3 꾸란의 집대성과 울라마의 창설

초대 정통 칼리파 아부 바크르 시대부터 우마르의 주장으로 시작된 꾸란의 집대성은 우마르 자신이 칼리파 직위에 오른 이후 더더욱 탄력을 받게 된다. 무함마드는 신의 계시를 양피지, 낙타가죽, 나뭇잎, 뼈조각 등 그 당시 가장 가까이 있는 물건에 닥치는 대로 기록했는데, 무함마드 사후 아라비아 반도 각지의 독립 운동으로 인해 가짜 물건이 다수 생겨난 탓에 진위를 가리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그렇기에 우마르는 이런 자료들을 최대한도로 수집해 무함마드와 함께 했던 인물들과 자신이 생각할 때 가장 믿을 만한 사람들을 모아 수집한 물건에 적힌 구절을 하나 하나 점검하기 시작했다. 또한 우마르는 학자들이 무함마드의 일생과 계시를 집대성해 진위를 가려 낼 수 있도록 후원하는 한 편,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경우에는 이렇게 양성된 전문 학자 집단의 도움을 요청하고 이에 따라 결정된 결과물을 기록하게 하여 각지의 총독들에게 보내 지침으로 삼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관행이 훗날 이슬람 사회의 주요 학자 집단인 울라마의 창설의 바탕이 된다.

4 칼리파로써의 대외활동

4.1 정복전쟁

무함마드의 사망과 이후 벌어진 아라비아 반도 내부 이슬람 세력의 분열을 세력 확장의 기회로 여긴 동로마 제국은 군대를 파견해 아라비아를 정벌하고자 했고, 아부 바크르는 악조건에서도 동로마 제국의 군대를 격파해 냈고 따라서 우마르의 치세 동안 이슬람 군대는 처음으로 방어전에서 벗어나[5] 다마스쿠스를 비롯한 동로마 제국령 시리아로 진격해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는 636년에는 동로마 제국과 벌인 야르무크 전투에서 승리해 시리아를 완전히 장악했고, 사아드 이븐 아비 와카스(Sa'ad ibn Abi Waqqas)는 동년도에 까디시야 전투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대군을 완파하는 쾌거를 올렸다. 결국 642년 사아드 이븐 아비 와카스가 사산조 페르시아의 최후의 항전을 분쇄시키며 수도 크테스폰을 함락함으로써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켰으며 서쪽으로는 641년 아므르 이븐 알 아스(Amr ibn al-As)가 동로마 제국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함으로써 이집트정복을 완료시켰다.

믿기 힘들정도인 단기간의 군사적 성공에는 우마르 자신의 뛰어난 지휘,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Khalid ibn al-Walid), 아므르 이븐 알 아스(Amr ibn al-As), 사아드 이븐 아비 와카스(Sa'ad ibn Abi Waqqas) 같은 명장들의 존재, 오랜 총력전을 겪은 동로마 제국사산조 페르시아의 약화, 초기 이슬람 전사들의 순수성과 용맹, 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총력전 와중 양 제국에 의해 학살당했던 유대인[6]들이 이슬람 세력의 팽창을 환영하며 적극적인 도움을 준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또 승기의 물결이 이어지면서 이슬람인들은 신이 우리를 가호하신다는 신념하에 사기가 충천한 반면, 적들에게는 신이 가호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들의 성공에 질려 이슬람에게 저항하는 것이 의미 없는 일로 인식된 것도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승리가 승리를 부른 것이다.

4.2 성지 예루살렘 입성

승리의 전진 속에서 무함마드가 승천한 곳으로 알려진 성지 예루살렘이 637년 항복을 요구해 오자 손수 항복을 받고자 하인 한 명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했는데,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던 우마르는 당나귀 한 마리만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이에 하인과 우마르가 번갈아 가며 당나귀를 탔는데 마침 예루살렘에 도착할 무렵에는 하인이 당나귀에 타고 있어 예루살렘의 주요 인물들은 하인에게 인사를 올리는 일이 있었다.

이후 승자의 특권을 누리리라 지레 짐작한 기독교 측 인물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당에서 이슬람의 예배가 행해지려 했으나, 우마르는 “만일 내가 이 곳에서 예배를 올린다면 이 장소는 조만간 무슬림들에 의해 모스크로 바뀔 것이다. 우리는 그러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무슬림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너희는 지금까지처럼 살고 너희가 원하는 대로 신을 숭배하라. 다만 이제부터 우리 무슬림들이 너희와 함께 살아갈 것이며 우리 방식대로 신을 숭배할 것이며 더 나은 모범을 보일 것이다. 너희가 보고 마음에 든다면 우리에게 합류해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대로도 괜찮다.”라고 거절했으며 이는 “종교는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무함마드의 뜻과 정확히 부합되는 것이었다.

한 편 성지 예루살렘이 몹시 더러운 것을 보고 화를 내며 대대적인 정화작업을 실시하기도 했으며, 훗날 바위의 돔이 건설될 장소의 기틀을 다지는 한 편 이슬람 세계에 영구히 영향을 미칠 또 다른 규범인 지즈야를 성립시켰는데, 기독교도들은 이슬람 세력에게 특별 인두세를 세금으로 바쳐야 하는 것이었다. 이는 새로운 세금이라는 부담이 더해진다는 의미였으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시기 발생한 선페스트 이후 급증한 세금 부담과 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총력전 시기에 큰 어려움을 겪은 시민들에게는 견딜 만한 부담이었기에 의외로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게 된다. 우마르는 이 외에도 몇몇 조치를 행하며 성지 예루살렘의 안정에 힘쓴다.

4.3 팽창의 후유증

하지만 이런 엄청난 정복들을 총지휘한 엄청난 정복자라는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우마르 자신은 정복전쟁에 대단히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는 지속적으로 점령군을 보내면 군사적, 도덕적 재앙이 일어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고, 심지어 페르시아 정복을 반대하며 이슬람 세력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국경을 유프라테스 강으로 설정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후 엄청난 정복활동을 통해 각지에서 엄청난 부가 축적되자 오히려 눈물을 흘려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알라는 이런 커다란 보상을 주시면 그 다음에는 사람들 사이에 질투와 증오를 불러일으키신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사실 우마르의 걱정은 이미 당대부터 ‘도시에 입성한 군사들이 게을러진다’ 혹은 ‘뚱뚱해진다’는 식의 보고가 들어오면서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고, 이를 막고자 우마르는 이슬람 정벌군에게 도심이 아닌 별개의 군영을 설치하고 머물 것을 명령하였다.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벌군과 토착민의 교류는 계속되어 이슬람 초기의 순수한 열정은 점차 퇴색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었다. 일례로 정복지에 설립된 군영 중 하나를 방문한 우마르를 환영하고자 군사들이 도열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황금과 비단을 비롯한 각종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었고 이에 분노한 우마르는 돌을 집어 던지며 그들의 인사를 무시하는 일이 있었다.

한 편으로는 엄청난 팽창을 통해 넓어진 영토를 관리하기 위해 정복된 지역들의 행정풍습을 받아들여 총독을 파견하기 시작했는데, 이 결정을 통해 언제나 분열과 대립을 우려하던 우마르의 걱정은 현실화 한다. 이 시기부터 이슬람 세계는 미약하게나마 분열의 조짐을 보였고, 각지의 사령관은 칼리파의 지시를 무시한 채 정벌활동을 벌이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렇게 중앙 정부의 의사와는 별개로 진행된 정복 사업에서 나온 막대한 부는 차후 사령관 휘하의 군대가 사령관의 사병으로 변하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특히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된 쿠라이시 가문 출신의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이 두드러질 정도로 세력 확충에 열을 올렸는데, 무함마드가 자신을 반대하던 무아위야를 용서하고 중용하면서도 항상 그를 가까이에 둔 것은 그를 가까이에서 감시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마르 시대부터 고삐가 풀린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은 친족 우대 성향을 지닌 3대 칼리파 우스만 이븐 아판 시기 총애를 받으며 세력을 크게 확대했고, 4대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치세에는 그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한편 능수능란한 외교술을 통해 알리의 세력을 고립시켜 끝끝내 이슬람의 근본 체계를 무너트려 초창기 이슬람이 그토록 반대하던 통속적인 왕정국가인 쿠라이시 가문을 위한 우마이야 왕조를 창설하는 데 성공한다.

5 여성혐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엄청난 여성 혐오자로 많은 비판을 받는 이슬람 세계의 여성관을 확립하는데 톡톡한 공언을 했다. 그 시대를 초월한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였던 선지자 무함마드는 여성을 보호하고자

'신은 여인들에게 재산을 가질 권리를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여인들의 상속 재산을 신성한 것으로 인정한다.'
'상속이 많든 적든 그들은 일정한 몫을 가질 자격이 있다.'
'이혼은 상황에 따라서 남편과 아내의 합의 아래 가능하다. 왜냐하면 합의가 가장 좋은 것이다.'
'근거 없는 비방을 견제하기 위해 간통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네 명의 증인이 필요하다'

등 당시 시대상을 앞서나가는 개명된 정책을 펼쳤다. 그 때문인지 초창기 이슬람의 군대에는 여성들이 다수 참전했고 그들의 존재는 아군의 사기를 고양시키고 적의 사기를 꺾으며 초기 이슬람 성장의 중요한 주춧돌이 되었다.

그런데 우마르 시대에 이르러 갑작스럽게 무함마드가 모든 일을 여자에게 맡기는 자는 번영하지 못한다.라는 말을 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신빙성있는 이야기로 추앙받기 시작하더니, 무함마드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남녀는 따로 예배를 올리고, 남편이 아내를 교육시킨다. 라는 이상한 제도들이 확립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편견은 간통 혐의를 받았으나 무함마드의 개명함때문에 무혐의로 인정된 무함마드의 세번째 부인 아이샤의 적극적인 지지와 '간통한 여자는 돌로 쳐 죽여야 한다'라는 무함마드의 행적을 볼 때 도저히 믿기 힘든 주장을 남편이 했다는 발언으로 인해 더욱 강력하게 굳어지게 된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우마르 개인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무함마드가 당시 시대상에 비해 너무나도 앞서나간 사상을 지니고 있었고, 결국 무함마드 사후 당시 시대의 풍습을 이겨내지 못하고 회귀했던 것에 가깝다.

공정을 기해 말하자면 우마르 자신이 여성 혐오자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그의 시대에 무슬림 공동체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전원이 의무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치세엔 여성이 메디나의 상업 감독관에 임명되는 등 여성의 사회활동도 유지되고 있었다. 그라나 그의 치세 기간 동안 이슬람의 여성차별 현상의 씨앗은 깊게 뿌리를 내리니, 결국 이 방면에서 우마르의 책임은 막중하다 할 수 있다.

6 최후와 분노

우마르의 치세기에 행해진 엄청난 정복 사업은 자연히 대규모의 원한을 가진 이와 적을 생성시켰고, 그 결과 우마르는 644년 페르시아계 기독교도 노예의 칼을 맞았다. 우마르가 임종에 들어가기 전 그의 후계자 문제를 걱정한 움마의 유력 인사들이 우마르에게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할 것을 제안하자, 우마르는 “내가 나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위해 이 일을 했다고 생각하나!” 라고 응수하며 불같이 화를 냈다.

이 일화는 우마르가 그토록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마르가 걱정하던 이슬람의 세속화가 이미 상당히 진행됐음을 보여준다. 무함마드의 사망 이후 ‘신의 점지한 계승자 자리는 혈연 따위로 계승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이유로 최유력 후보였던 알리가 밀려나던 과거와 달리, 우마르 시대 말미에는 움마의 지도자들조차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한 후계자 지명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우마르는 최후에 와서 변질된 이슬람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노력한 인생 전반이 부정되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며, 이러니 다 죽어가는 마당에까지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결국 그는 임종시까지 칼리파의 직위를 수행하며 마지막 선례를 창설했는데, 여섯 명으로 구성된 자문단인 슈라를 지명해서 그들이 새로운 칼리파를 선택하고 움마의 동의를 얻어 임명되게 한 것이다. 이는 이슬람의 세속화를 우려하던 칼리파 우마르 최후의 노력이라 할 수 있으나, 이미 세속화된 이슬람 상층부는 차기 후계자로 초창기 이슬람의 순수성과 변혁의 기치를 내건 알리보다 전형적인 상류층인 우스만을 선택했고, 칼리파로 선출된 우스만은 혈족을 우대하며 세속화를 한층 더 강화시킨 결과 이슬람은 시아파와 수니파의 대립이라는 최종적인 분열국면에 돌입하게 된다.

7 기타 - 알렉산드리아 세라피움 도서관 파괴 혐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웠다는 얘기도 있는데 사실 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도 유사한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누가 더 책임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테오도시우스가 파괴했다는 주장에선 이미 몰락할 때로 몰락하여 이집트 정벌군 사령관 아므르 이븐 알 아스와 그의 장교들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대해 아는 바 없었으며 심지에 그에 관련된 소문을 들은 적 조차 없었고 따라서 광신적인 기독교 신자들이 4세기 말에 파괴했을거라고 본다. 우마르가 그랬다는 주장으로는 비록 기독교 시대에 쇠퇴하긴 했지만 이 도서관을 결국 불태워서 상당한 그리스 고전을 소실시킨 건, 642년에 알렉산드리아를 함락한 칼리프 우마르였으며 초기 선출 칼리프 시대의 칼리프들은 전원 호학에 개방적인 마인드를 가진 뛰어난 군주였지만, 우마르만은 예외였다고 주장한다.

다만 우마르에 의한 파괴설은 13세기가 되서야 양지로 떠오른 의견인 반면, 기독교도에 의한 파괴는 4세기 중엽부터 당시 사람들에게 "세라피움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라는 식의 한탄을 샀던 걸 보면 아무래도 기독교도에 의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파괴됐을 가능성이 높다. 상식적으로 당대인들에게 부들부들, 기독교 놈들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다 박살낸다. 소리를 듣는 것과 600년 후에야 설득력을 갖기 시작한 우마르 놈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다 박살냈다! 를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하긴 어렵다. 특히 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칙령은 그 결정타가 됐으리라 여겨지며, 그런 의미에서 얼마 후 일어난 히파티아의 사망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황혼기를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7] 이 시기에서 최소 200년 후에야 알렉산드리아에 당도했을 우마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나마 남아있던 최후의 요소를 끝장내는 정도였을 것이다.
  1.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2. 동명이인으로 어쌔신 크리드의 주인공 알타이르 이븐-라 아하의 아버지가 우마르이다.
  3. 공교롭게도 훗날 우마르의 명을 받고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는 명장이다.
  4. 이 과정에서도 우마르의 여동생은 피가 묻은 불경한 상태로는 꾸란을 만지면 안된다며 버텼고, 결국 우마르는 자신의 몸을 씻은 이후 꾸란을 읽어보게 된다.
  5. 이 일은 이슬람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엄청난 의미를 지니는데, 그 이전까지 자기 내부의 ‘투쟁’혹은 침공하는 적을 격퇴하는 ‘방어전’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던 지하드가 적에 대한 공격의 범위로 확장되는 지금까지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실로 세계구급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확장된 지하드의 의미는 우마이야 왕조의 영토확장 시기 정책적인 의미로 이용당하게 된다.
  6. 호스로 2세의 총공세 시기 동로마 제국에 불만을 품은 유대인들이 대거 사산조 페르시아를 도왔는데, 헤라클리우스의 대반격 이후 이들은 끔찍한 보복 학살을 당했다. 그런 와중에 이슬람 세력이 팽창을 시작하자 유대인들은 이슬람 세력에게 각종 도움을 아끼지 않으며 동로마 제국 붕괴 및 이슬람 세력 확장에 힘썼다.
  7. 다만 히파티아의 사망은 순전히 이성 VS 종교라기 보다는, 나름대로 정치적 문제가 섞인 복잡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