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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Ива́н Серге́евич Турге́нев
Ivan Sergeyevich Turgenev

1818년 11월 9일(율리우스력 10월 28일) ~ 1883년 9월 3일
19세기 러시아의 작가이자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3대 거장이다. 러시아 발음은 뚜르게니프.

러시아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인텔리겐치아 출신으로, 독일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뒤, 알렉산드르 푸시킨 , 니콜라이 고골 등 대표적인 러시아 진보 지식인들을 만난 후 '서구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작인 <첫사랑>, <루딘> 등의 소설은 세련된 필체와 묘사로 유명하다. 중년기 이 후에는 로마노프 왕조의 구체제에 반대하는 소설을 다수 썼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에 <아버지와 아들>은 거의 항상 지명된다. 사실 원제는 <Отцы и дети> , 즉 복수형으로, <아버지들과 아들들>이다. 이는 이상적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귀족 계층의 아버지 세대와 혁명적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잡계급의 아들 세대들의 갈등을 다루기 때문이다. 단순히 한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당대 러시아의 시대적 현실을 충실히 반영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아버지와 아들>은 후에 염상섭의 <삼대>에 어느정도 영향을 준다.

투르게네프에 대해 가장 유명한 것은 러시아 농노 문제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엄청난 부잣집 태생이지만 아버지가 일찍 죽고 어머니가 재산을 상속하면서 [1] 대규모의 농장을 관리했는데 어머니가 채찍으로 농노들을 마구 후려쳤던 채찍으로 아들도 함께 때렸을 정도로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어서 어릴적부터 어머니에 대한 반감을 가졌다. 그래서 1850년 어머니가 죽자마자 물려받은 농노 약 천 명(5천명 이상이라는 말도 있다)을 해방시켰다. 투르게네프의 이러한 행동은 러시아 귀족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좋은 의미이기보다는, 이 때부터 정부에게 '사회 전복의 가능성이 있는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

농노를 해방하고 몇 년 후 발표한 <사냥꾼의 수기>에서는 러시아뿐 아니라 서구권까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농노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알렸다. 심지어 당국이 이 책 때문에[2] 그를 체포, 감금할 때, 러시아 전역에서 반대 여론이 거세게 들고 일어났을 정도. 이에 '대체 뭔 내용이길래 난리야?'하고 놀란 당시의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이 책을 읽고 1861년 2월에 농노 해방령을 발표하여 농노들을 해방했다는 엄청난 전설까지 있다. 그러나 말만 해방이지 특권층인 귀족과 부유층 눈치 때문에 일단 법적으로 땅은 지주들의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고 모든 땅을 자세히 조사하여 농노들에게 나눠줄 몫을 계산하고 값을 매길 때까지 농노들은 지주에게 봉사해야만 했다. 게다가 명목상 해방된 농민들은 정부의 융자를 받아서 지주에게 땅값을 갚아야 했으며 정부에 '상환금'을 내야했다. 당연히 농노 해방에 반대하는 지주들은 상환금을 받고도 안 받았다고 서류를 조작했고 결국 알렉산드르 2세는 과격단체의 폭탄 공격으로 끔찍하게 죽는다. (팔과 다리와 몸 절반 가까이가 박살난 상태로 살아서 궁궐에서 죽고 싶다는 유언을 하여 궁궐에 도착하여 죽었다) 결국 러시아 정부로부터 추방당한 투르게네프는 [3] 이후 파리에 살면서 러시아 농노제를 반대하는 각종 작품을 발표하여 서구권과 러시아의 인텔리로부터는 찬사를, 정부로부터는 공갈협박을 받았다. 1883년 친하게 지내던 비아르도 별장의 별저에서 병사.

투르게네프는 심각한 유럽의 면모가 있었고 특히 문학이나 사상 쪽에 있어서는 대책없는 프랑스였다고 한다. 사교계에서 매일같이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유럽의 선진국은 저런데 우리는 이래서 아직도 후진국이니 국내 도입이 시급합니다"(...).다만 투르게네프가 유별난 인물인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당대 유럽 문학, 철학의 메카는 단연 프랑스였으며 19세기 러시아에서 서구 우월주의는 차다예프를 시작으로 러시아 사상계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었다.[4] 더구나 마치 조선 시대 황실에서 한글 대신 한문을 썼듯이 러시아 황궁과 귀족들 사이에서는 러시아어가 아니라 프랑스어가 일상용어로 쓰였다. 심지어 하급귀족의 아버지에게 태어난 레닌 또한 어렸을 때 그런 분위기에서 자라서 프랑스어에 유창했다고... 참고로 사상계의 다른 한 축은 호먀코프, 키레옙스키, 도스토옙스키 등으로 대표되는 슬라브주의. '러시아는 유럽의 변방이며 서구 문명의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서구 우월주의와 '러시아는 노쇠한 서구 문명을 대체할 젊은 문명'이라고 주장하는 슬라브주의의 논쟁은 19세기 러시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한국에서는 항상 톨스토이에 밀려서 만년 콩라인 취급을 받으며 가끔은 '톨스토이와 좀 친하게 지냈던 19세기 소설가' 정도로 폄하되기도 하지만, 서구권이나 러시아에서는 오히려 독자나 평론가에 따라서 톨스토이 이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다만 이것은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에 비해 특색이 떨어지는 그의 작품성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에는 인간의 심리에 대한 치밀한 묘사가 존재하고, 톨스토이의 작품들에는 종교적인 인간에 대한 예찬이 두드러지는 반면 투르게네프의 작품들에는 딱히 특이점이 없다. 러시아 문학가들 중 가장 정석적인 작가 중 하나로, 글에는 큰 특색이 없지만 그 정석적인 문체 덕분에 뭘 읽든 평균 이상은 간다. 러시아에서도 그의 생가를 박물관으로 만들고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광장이 곳곳에 존재하는 등 톨스토이 못지 않은 대문호 대접을 하고 있다.

러시아인들의 투르게네프에 대한 존경은 다음과 같은 일화에도 잘 나타난다. 제2차 세계대전때 독일군의 침략때문에 화물칸 열차에 빽빽하게 피난민들이 탔는데, 그곳에는 독일군의 손에 훼손될까봐 같이 옮겨지던 투르게네프의 소파가 있었지만, 아무도 그 소파에 안앉았다고 한다.[5]

한편 도스토옙스키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딱히 투르게네프가 동업자들을 싫어한 건 아니고 도스토옙스키가 투르게네프에게 열폭 + 정신승리 스킬을 시전하면서 사이가 나빠졌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도스토옙스키는 유형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슬라브주의를 표방하며 서유럽 문명을 비판했으니 서구주의자에 가까웠던 투르게네프와는 상극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글로는 그리도 욕하면서 정작 도스토옙스키가 돈이 급하면 그에게 와서 비굴하게 애원하며 돈을 빌려가곤 했다. 나중에 도스토옙스키가 독일까지 가서 원정도박하다 파산하자 도와주기도 했다. 뭐 투르게네프가 돈이 부족함없이 부유한 경제적 환경에서 살았던 것도 있어서 도스토옙스키가 이에 대하여 질투하던 점도 있긴 했지만.

  1. 투르게네프의 아버지는 굉장한 미남이었다고 전해지며 자신보다 10세 가량 손위인 그의 어머니와 결혼했는데 여러가지 정황상, 사랑보다는 현실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결혼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상황은 투르게네프의 소설인 첫사랑에서도 반영이 된다.
  2. 명목은 극작가 고골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에 불순한 내용을 적었다고 잡혔지만 시기도 그렇고 정황도 딱...
  3. 정확히는 정부의 계속되는 압박에 '에라 그냥 내 발로 나가고 말지' 식으로 출국
  4. 당시 미국 부유층도 이런 사고방식이 컸다. 짧은 역사와 유럽 각지에서 온 가난뱅이 개척민이 수두룩하다며 유럽인들에게 비웃음을 많이 받아서인지 유럽 명문 귀족 집안과 결혼하는 미국 부유층은 그걸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다.
  5. 투르게네프가 쓴 <사냥꾼의 수기>가 러시아에서 농노제의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앞서 소개한 것처럼 농노 해방 과정에서도 한계나 어두운 면이 있었기는 해도) 농노 해방이라는 엄청난 역사의 변혁을 가져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부분 농노의 자녀 및 그 후손들인 러시아 국민에게 투르게네프는 단순한 작가가 아니라 거의 본인과 가족, 나아가 사회 전체의 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