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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러시아어: Ѳедоръ Миха́йловичъ Достое́вскій[1]
영어: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Dostoievsky, Dostojevskij, Dostoevski 등 다양한 스펠링이 있다.)
1821년 11월 11일 (구력 10월 30일) ~ 1881년 2월 9일(구력 1월 28일)
러시아어 발음은 표다르 미하일라비치 다스따옙스키.
도스토예프스키는 내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유일한 심리학자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어떤 과학자들보다도, 심지어 수학자 가우스보다도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도스토예프스키를 낳았다는 것만으로도 러시아민족의 존재는 정당화될 수 있다. - 니콜라이 베르쟈에프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가 낳은 악마적인 천재였다. - 막심 고리키 |
목차
1 작가 소개
역사상 손꼽히는 인류 최고 지성. 소설계의 전설, 먼치킨. 천재적인 재능의 소설가.
20세기의 실존주의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 중 하나로 러시아 문학의 최고 거장 중 한명. 인지도는 레프 톨스토이와 함께 최고일 것이다.
20세기 학계를 뒤흔든 네임드 전세계구급 철학자, 심리학자, 소설가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작가가 작품에서 그려낸 캐릭터와 세계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독보적인 묘사로 불멸의 명성을 얻게 하였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아버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도스토옙스키와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도스토옙스카야 사이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머니 쪽은 상인의 딸인 러시아인이지만 아버지 쪽은 직업은 의사인 리투아니아 출신.
아버지는 은퇴한 군의관(나폴레옹 전쟁에도 종군했다)의 중간계급이었으며 알콜 중독자였다고 한다. 여러가지로 자식들을 학대했다는 얘기들이 있지만 사실은 보통의 가정이었다고 한다.[2] 모스크바의 마린스키 빈민병원에서 일했으며, 이곳은 모스크바의 빈민가 중에서도 최악으로 죄수묘지와 정신병원, 고아원이 가득한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어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밖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 밖에서 이런 환자들과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가난하고 핍박받으며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이때부터 다듬어졌다.
1837년에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하고 형제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군사 공병학교에 보내져 수학을 공부하게 되었으나 그는 수학을 싫어했고, 여기서 대신 셰익스피어, 파스칼, 빅토르 위고, E.T.A. 호프만 등의 문학을 공부했다. 이때 젊은 자기자신을 '몽상가' 로 표현하며 낭만적 시와 극을 소수 쓰기도 했다. 물론 이때부터 벌써 당구에 빠져 그의 빚쟁이로써의 삶도 시작된다(...)
2.2 작가 데뷔
학교를 마친후 번역 작업을 하다가 1845년에 처녀작인 <가난한 사람들>을 출판했는데 이 작품을 읽어본 평론가 벨린스키가 "니콜라이 고골이 다시 태어났다' 고 감탄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절찬을 받았으며 아직 24세인 도스토예프스키를 상트페테르부르크 문학계의 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자신은 이 갑작스러운 인기와 관심에 공허한 마음이 들어 사회주의나 급진파 모임에 어울리기 시작했다.
데뷔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면, 초고를 편집장에게 넘겨주고 나서 잠 잘 잤지만, 당대의 유명한 문인인 네크라소프와 잡지 편집장이 당일 새벽에 "지금 잠 같은 건 문제가 아니야!"고 외치며 잠을 깨웠다는 에피소드.
2.3 처형 사건
이런 식으로 지내던 중 1848년에 유럽 전체에 불어온 혁명의 바람에 이끌려 도스토옙스키가 몸담고 있던 페트라솁스키 클럽이 주민봉기를 계획했으며 도스토옙스키도 농노들의 자유를 위해 가담했으나 그 독선적인 성격은 여전해서 곧 모임에서 왕따당하고 빚은 빚대로 늘어날 뿐이었다.
차르 니콜라이 1세(재위 1825~1855)는 이런 개혁 모임들에 여러 스파이를 두고 있었으며 1849년 도스토옙스키와 그가 가담한 그룹 스물 세명이 체포된다[3]. 8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후에야 형 선고를 받기 위해 꺼내졌으며, 이전에는 보통 이 정도 죄는 몇 개월 간 유배가 고작이었으므로 이들은 '이제야 끝나는구나'하고 안심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신부, 수십 명의 병사들과 수천 명의 군중, 그리고 관들이었다. 그들 앞에 한 장교가 나와 '죄인들은 모두 반역죄로 총살'이라 선고했다. 장교가 형수들의 죄명과 형을 낭독하는 동안 도스토옙스키는 정신이 멍해지면서 근처 교회의 종탑에서 쏟아내리는 금색 햇빛이 차차 구름에 가려지며 어두어지는 것을 보며 그 또한 곧 영원히 어둠의 세계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때에 그는 "만약 내가 죽지 않는다면, 만약 산다면 나의 삶은 끊임 없는, 영원처럼 느껴지며 일분이 백년과 같으리라, 만약 내가 살아남는다면 인생의 단 일초를 소홀히 하지 않을 텐데'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신부에게 고해를 본 후, 머리에 두건이 덮히고 병사들이 총을 발사하기 직전 갑자기 형장에 마차가 급히 난입해 황제가 특사로 그들의 형을 감형하였음을 알렸다.[4][5] 대신 4년간 시베리아에서 중노동 후 군입대를 하게 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미 1844년 중위로 제대한 상태였다. 군입대는 재입대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번엔 사병이었다(...).
2.4 이후
도스토옙스키는 이 사건 이후로 사람이 바뀌어 4년간 최악의 환경을 견디면서 [6] 머릿속에 글을 썼다고 하며, 군에 들어가게 된 후 출판하는 것을 허가받게 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후에 죽는 날까지, 마치 페이지 하나하나, 작품 하나하나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처럼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 불후의 명작을 연달아서 내게 된다. 그 전에는 글자 하나마다, 한장마다 시간을 들이며 하루종일 망상을 하던 그였지만 이후로 쉬지 않고 글을 썼으며 쓰고 있지 않을 때는 쓸 내용을 중얼거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탓인지는 몰라도 그의 작품들은 거의 극도로 세밀하고, 편집광적인 집념이 느껴지는 묘사가 눈에 많이 띈다.
실제 이 경험은 도스토옙스키의 저작 백치에도 므이슈킨이 말하는 삽화로서 등장한다. 시간을 낭비하던 한 남자가 사형대 앞에 서고 나서야 1분 1초가 아깝다는 사실을 깨닫고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는 이야기.[7]
사형 사건 이후 그의 글은 어둡고 현실적으로 바뀌게 되지만 멜로드라마적인 요소에서부터는 탈피를 하지 못한다. 오죽이면 나보코프가 도스토옙스키를 용서할 수 없다고 그랬을까.
또한 이 시기 부터 그는 서유럽의 자유주의 사상을 멀리하고 깊은 신앙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국수주의적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의 전기 저자에 따르면, 황태후나 차르에 대한 탄원서와 징징거리는 편지를 수도 없이 썼다고 한다. 또한 누군가 감옥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 불쌍하게 여기면 오히려 화를 냈다고 한다. 그만큼이나 그 경험에 고마워했다.
2.5 생애 후반
그리고 나머지 여생 동안 수많은 빚에 시달렸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제정 러시아의 수도)에서 돌아와 형 미하일과 한 출판사 일이 연거푸 실패하였고, 이 와중에 세상을 뜬 형 미하일의 빚도 자진해서 맡고 그 과부와 자식들도 지원했고, 거기다 아내 안나가 이전 결혼에서의 자식들까지 돌보게 된다. 그런데 미하일의 미망인인 형수는 사치가 심했고 양아들도 양아치라서 그는 경제적으로 시달림이 많았다. 원하는 돈을 내놓지 않으면 양아들은 그를 두들겨 패기도 하고 물고문을 할 정도였으나 마음 약한 그는 대응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원고료로 겨우 먹고 살았으며 이 때문의 그의 후기 소설들은 굉장히 길다. 소설의 길이가 늘어나면 원고료를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 그나마 돈이 조금 남으면 도박장에서 날리고 빚만 더 벌어왔다. 이렇게 돈에 쪼들리다 보니 쓰고 있던 <죄와 벌>을 급하게 완성했으며 <노름꾼>은 약 20일만에, 그것도 <죄와 벌>을 쓰는 중에 구두로 완성했다. 방 안을 돌아다니면서 소설을 중얼거리면 당시 도스토옙스키의 비서로 일하던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가 타자기로 내용을 받아 적었다고 한다(그녀는 훗날 도스토옙스키와 결혼한다).
서유럽에서 선인세로 받은 돈을 원정도박으로 날리고 다시 받고 하던 즈음에는 <악령>을 집필하다 결국 러시아로 다시 귀국한다. 귀국할 돈도 도박으로 날려먹어서 출판사에게 "러시아로 가서 글 써야함"이라 징징대서 간신히 차비를 뜯어냈다. 이때 그의 나이 50세. 이후 본격 좌파까기 소설인 <악령>이 성공하자 보수층과 친해진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판 조중동 신문사 주필자리를 얻게 된다. 그러나 역시 그 성격 어디 못가서 1년도 안돼서 때려치워야 했다.
그가 도박중독에 걸린 이유를 있는 돈을 다 날리는 방법으로 사형수가 되었다가 살아났을 때를 다시 느껴보고 싶어서라는 얘기가 있다. 판돈이 걸렸을 때의 느낌(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과 두근거리는 쾌감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심리를 소설 <도박자>에서 묘사하고 있다. 왜 도박에 빠지느냐는 질문에, '주변이 가능성으로 충만할 때, 그것을 무시하고 지나가기란 굉장히 힘든 일이다'라고 답했다. 이 말이 간지나는지 몇몇 도박광들은 이걸 그들의 좌우명쯤으로 여기고 살아간다.
나중에 이런 경제난은 알뜰한 세번째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가 출판 관리를 하게 되면서 해방되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이런 좋은 환경에서 나왔다. 참고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미완성 작품이다. 이 작품의 서문을 보면, 자신이 앞으로 20년동안 이야기의 뒷부분을 쓸 것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문학평론가들은 프란츠 카프카의 장편들과 함께 미완성이라서 더 가치가 높은 문학작품으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뽑는다.
2.6 죽음
생활에 안정을 찾은 도스토옙스키는 <미성년>과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차례로 발표하고 러시아의 국민 작가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불과 1년 뒤인 1881년 1월 26일, 재산 상속 문제로 여동생이 집에 찾아와 말다툼을 하고 간 후 갑작스럽게 각혈이 시작되고 병상에 누워 투병하다가 1월 28일 저녁 8시 38분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상 유례없을 정도의 의식이었다고 한다. 2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장례식 보러왔다고 하니 말다했다. 이때, 추모사를 읽은 건 드미트리 팔름이라는 듣보잡 작가였다. 다만 이 사람은 도스토옙스키와 매우 친했는데 바로 도스토옙스키와 처형대에 묶여서 같이 유배당했던 사람이었기 때문. 러시아 황실에서도 유족들에게 매해 2천 루블 연금을 하사하게 했다.그리고 이 연금 상속을 두고 양아들이나 아내랑 친가들이 싸우다가 러시아 황실에서 연금 및 재산에 대해 아내와 아이들에게 전적으로 상속권을 인정받게 한다고 엄명을 내린 통에 양아들이나 친척들은 데꿀멍해야했다. 아내랑 딸을 비롯한 식솔들은 경제적으로 부족함없이 살아갔지만 양아들은 뒷골목에서 찌질하게 살다가 1895년 칼에 맞아 살해당했고 사치스런 형수나 여동생같은 친가들도 비참하게 살아가야 했다.
시베리아 유형 이후 보수인사들과 친했던 그를 볼셰비키 혁명으로 세워진 소련이 곱게 봐 줄리가 없었다. 그래서 톨스토이와 달리 그는 묻혀졌고 후손들에게 주어지던 연금도 당연히 끊겼으며 소련 치하에서 눈치보며 살아가야 했다. 그러다가, 소련이 몰락하고 러시아 공화국이 되면서 정반대가 되었다. 러시아 정교회를 비판했고 파문당한 톨스토이와는 달리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정교회의 독실한 신자였고 그리스도는 러시아인의 그리스도라 믿었으며 극우성향의 작가였다. 현재 러시아인들에게 도스토옙스키는 푸쉬킨 다음으로 러시아를 대표하는 위대한 작가로 여겨지고 있다. 모스크바의 국립 러시아 도서관(구 레닌 도서관) 앞에도 도스토옙스키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지하철 역도 건립되었다. 러시아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기념관을 가면 그의 유품에서 별별 게 다 남아있다. 심지어 그가 죽던 날, 딸아이가 슬퍼하며 쓴 낙서가 그의 담뱃갑에 그대로 남아있는데 러시아어로 "1881년 1월 28일 사랑하는 아빠가 하늘로 가셨다..."라고 적혀있다.
2.7 주변 관계
비록 강하게 감추었지만 도스토옙스키는 후배 작가인 톨스토이에게 항상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다. 당대의 비평가 스트라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트라호프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높게 평가하는 것에 불만을 제기했다는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도 안나 카레니나의 완성도에는 굴복했는데 이 작품을 읽고 도스토옙스키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길거리를 뛰어다니며 "톨스토이는 예술의 신이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러한 열광적인 반응은 작가의 개인잡지라 할 수 있는 작가의 일기에서도 확인된다. 거기서 이 작품을 "완전무결한 예술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도스토옙스키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막심 고리키가 쓴 톨스토이 회상록에서 톨스토이는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자신이 병들어있기에 모든 사람들이 병들어있다고 믿었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톨스토이가 그나마 가장 높게 평가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죽음의 집의 기록인데 시베리아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담은 내용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들처럼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등장 인물이 처한 험악한 환경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에 보통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으로는 간주되지 않는 작품이다.
또한 당대의 또 다른 대문호 투르게네프와의 관계도 굉장히 나빴다. 하긴 서민 출신에 러시아빠인 도스토옙스키 눈에 좋은 집안 출신의 유럽빠(특히 프랑스빠) 투르게네프가 좋게 보일리가 없다. 그래서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에서 유럽 갔다와서 "프랑스 혁명을 직접 목격 했다"면서 거들먹거리는 겉멋만 든 등장인물을 계속 등장시키며 줄기차게 깠다. 그런데 웃기게도 생활난에 시달리던 그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투르게네프에게 와서 돈 좀 빌려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투르게네프는 그리도 자신을 욕하던 주제에 굶어죽을 것처럼 비굴하게 100탈러를 발려달라고 온 도스토옙스키에게 별다른 말 없이 50탈러를 빌려줬다. 물론 도스토옙스키는 그 돈의 상당수를 도박으로 아낌없이 날렸다(...). 이를 보다 못한 투르게네프의 지인들이 '쓰레기같은 놈에게 왜 돈을 빌려주냐?'며 분노 어린 반응을 보이자 투르게네프는 "막상 내 욕 해놓고 돈 급하면 또 나에게 와서 오만상으로 빌어대잖아? 난 그거 보는 재미로 빌려주는 거지. 그리고 저 작자는 그 굴욕감을 글로 나를 욕하면서 씻으니 뭐 서로가 각자 피해보는 게 없잖아."라고 대꾸했다.[8]
이 때문인지 그의 작품은 높게 평가해도 사생활 면에서는 톨스토이보다 못하다는 이들도 있고 러시아에서도 호불호가 갈린다. 러시아에 유학하던 한국 유학생이 겪은 일인데 대학에서 문학 평론 과목 시간에 러시아 문과 학생들이 논쟁을 벌인 걸 보면 도스토옙스키는 사람됨에 있어서는 글러먹었다는 반응에서 사생활과 작품은 별개라고 옹호하기도 하고 종교적으로 찬양하는 이가 있는가하면 종교적으로 저러면서 도박에 중독되던 게 뭐가 찬양할 일이냐는 반론이 나오면서 극과 극이었다고 한다. 또한, 일본의 러시아어 통번역가이자 동유럽 전문가, 작가였던 요네하라 마리(1950~2006)가 소개한 일화에 따르면 소련 붕괴와 동구권 해체 직후, 러시아의 상황이 지극히 암울하던 시기 만났던 한 러시아 지식인이 당시 러시아의 상황처럼 암울하고 우울한 표정으로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종교적인 숙명론이 '진보와 발전을 거부하는 것으로 읽혀서' 끔찍하게 싫다고 술회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유난히 한국과 일본에서 더더욱 각광받는데, 그렇게 평가하는 문학 종사자들에 의하면 도스토옙프스키는 셰익스피어의 영향력을 넘는 문학 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이자 20세기를 창조한 작가라는 평을 하기도 한다.[9]
명실상부 현대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가들중 하나이며 20세기 실존주의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기에 무리없는 작가이다.
3 유명인들의 평가
도스토옙스키는 내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심리학자였다. 그는 내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운 가운데 하나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가 낳은 악마적인 천재였다. - 막심 고리키 |
그는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자리를 차지한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지금까지 쓰인 가장 장엄한 소설이고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세계 문학사의 압권이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
톨스토이가 큰 산인 줄 알았는데, 조금 물러나서 보니 그 뒤에 아스라하게 뻗어있는 거대한 산맥은 도스토옙스키였다. - 앙드레 지드 |
도스토옙스키는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을 창조해냈다. 사람들이 광기라 부르는 그 안에 그의 천재성의 비밀이 있다. -제임스 조이스 |
도스토옙스키는 육체와 영혼의 고귀함보다는 불행과 악덕, 욕정과 범죄에 기독교적인 공감을 보인 작가였다. - 토마스 만 |
4 작가 연보
- 1821 러시아력 10월 30일, 모스크바의 말린스키 빈민구제병원에서 일등군의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도스토옙스키의 둘째아들로 태어나다.
- 1831 (10 세) 양친이 툴라현에다 영지를 사들이자 매년 이곳에서 여름을 지내다.
- 1834 (13 세) 모스크바에 있는 체르마크가 경영하는 기숙학교에 입학하다.
- 1836 (15 세) 문학사(文學史)를 가르치는 교사의 감화를 받아 푸시킨에 열중하다.
- 1837 (16 세) 2월 27일, 어머니 마리아 표도르브나 도스토옙스키야가 죽다. 5월, 형과 함께 테르스부르크로 가서 코스트바로프 기숙학교에 입학, 공병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하다. 7월, 군무에서 아버지가 제대하다. 9월, 육군공병학교에 입학이 허가되다.
- 1838 (17 세) 1월 16일, 공병학교에 정식으로 입학. 이때부터 발자크, 위고, 호프만 등의 소설을 탐독하다. 가을 진급시험에 낙제하다.
- 1839 (18 세) 영지 농노들의 원한을 사서 아버지가 피살당하다.
- 1840 (19 세) 호메로스, 실러, 프랑스 고전 비극을 탐독하다. 11월 29일에 하사관, 12월 27일에는 견습사관이 되다.
- 1841 (20 세) 이해가 시작될 무렵 <보리스 고두노프>, <마리야 스추아르트>의 극작을 시도했으나 둘 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8월 5일, 공병소위로 임관되었으나 특별연구를 위해 공병학교에 남다.
- 1842 (21 세) 8월 11일, 중위로 진급하다.
- 1843 (22 세) 8월 21일, 공병학교를 졸업, 페테르스부르크 공병대에 편입되다. 23일, 제도과에 지원하여 근무하다.
- 1844 (23 세)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데> 번역하다. 조르주 상드의 번역도 시도하다. 10월 19일, 중위로 진급함으로써 제대가 허락되다. <가난한 사람들> 쓰기 시작하다.
- 1845 (24 세) 5월, <가난한 사람들> 완성하다. 네크라소프, 벨린스키의 격찬을 받다. 여름에 <분신>을 쓰기 시작하다. 가을 <아홉 통의 편지에 담긴 소설> 쓰다. 풍자 신문 ≪즈브스칼≫의 발행을 계획하다.
- 1846 (25 세) 1월 15일, <가난한 사람들>을 네크라소프가 편집하는 ≪페테르스부르크 문집≫에 발표하다. 2월 1일 <분신>을 ≪조국의 기록≫에 발표하다. 봄, 페트라세프스키와 알게 되다. 10월에 <프로하르친씨> 발표하다. 12월 <네토치카 네즈바노바> 쓰기 시작하다.
- 1847 (26 세) 이해 첫무렵 벨린스키와 사이가 나빠져 페트라세프스키와 가까워지다. <아홉 통의 편지에 담긴 소설>을 ≪현대인≫ 1월호에 발표하다. <여주인>, <조국의 기록> 10,11 월호에 발표하다. <가난한 살마들>이 단행본으로 출간되다.
- 1848 (27 세) <폴준코프> 발표하다. <약한 마음>, <유부녀>, <정직한 도둑>, <크리스마스와 결혼식>, <백야>를 ≪조국의 기록≫에 발표하다.
- 1849 (28 세) <네토치카 네즈바노바>를 ≪조국의 기록≫ 1,2,5,6 월호에 발표하다. 3월, 페트라세프스키 집에서의 회합에서 벨린스키의 고골리에게 보낸 편지를 낭독하다. 4월 23일 페트라세프스키 회의 검거로, 다른 회원들과 함께 붙들려 페트로파블로스키 요새감옥에 감금되다. 감금된 동안 <작은 영웅>, <첫 사랑> 쓰다. 12월 22일,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에 끌려갔으나 황제의 특사로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과 4년간의 병역근무를 선고받고 24일 밤에 페테르스부르크를 출발하다.
- 1850 (29 세) 유형지인 움스크 감옥에서 복역하다.
- 1854 (33 세) 2월 15일 형기가 만료되어 3월 2일 일개 병졸로 시베리아 국경수비연대 제 7 대대에 편입되다. 가을부터 그 마을의 세무관리의 아내 마리아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와 사랑을 속삭이기 시작하다.
- 1855 (34 세) <죽음의 집의 기록> 쓰기 시작하다.
- 1856 (35 세) 2월 15일, 근무성적이 좋아 하사관으로 진급되다. 3월 24일, 황제에게 사면 탄원서를 내다. 10월 1일, 척명으로 대대의 기수(旗手)가 되다.
- 1857 (36 세) 2월 6일,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와 크즈네츠크에서 결혼하다. 4월 18일, 옛 신분으로 돌아가라는 척명이 내리다. 8월, <작은 영웅>을 ≪조국의 기록≫에 발표하다. 이해 말 사표를 제출하고 모스크바에서의 거주를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다.
- 1859 (38 세) 3월 18일 소위로 임관됨과 동시에 예편, 거주지는 트베리로 한정되다. 7월 2일 트베리에 도착, 가을에 거주지 선택의 자유에 대한 탄원서를 황제에게 내다. 12월 27일, 페테르스부르크에의 거주허가가 내려 트베리를 떠나다.
- 1861 (40 세) 형과 함께 ≪시대≫를 창간, <학대받은 사람들>을 1월호부터 연재하다. 연재가 끝나자 단행본으로 내다. <죽음의 집의 기록>을 1월부터 ≪러시아 세계≫에 연재했으나 4월부터는 이 작품을 ≪시대≫로 옮겨 처음부터 다시 게재, 이듬해 완결하다.
- 1862 (41 세) 6월 7일 출발하여 파리, 런던, 제네바를 여행하다. 8월, 페테르스부르크로 돌아오다. 이해 <죽음의 집의 기록>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 1863 (42 세) 5월 폴란드 문제에 관한 스트라호프의 논문 <운명적인 문제>(4월 호) 때문에 ≪시대≫가 발행정지처분을 받다. 여름에 연인 수술로바와 함께 외국으로 떠나다. 여행중에 도박에 열중, 경제적인 궁핍으로 <도박자>를 구성하다. 수슬로바와의 사랑에 파탄이 일어, 10월 모스크바의 아내에게로 돌아오다. 겨울, 아내의 병이 악화,병석을 떠나지 않고 아내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다.
- 1864 (43 세) 3월 24일, ≪시대≫를 계승한 새로운 잡지 ≪세기≫ 창간호를 내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를 창간호에 게재하다. 4월 16일, 아내가 폐결핵으로 죽다. 6월 10일, 형 미하일 죽다. 12월 25일, 친구 그리고리예프 죽다. 이해 말부터 이듬해 초에 걸쳐 마르타 브라운과의 연애사건 일어나다.
- 1865 (44 세) 안나 그로코프스카야에게 구혼했으나 거절당하다. 4월 ≪세기≫ 폐간되다. 7월에 세번째 외국여행을 떠나다. 다시 수슬로바와 사랑을 속삭이며 도박에 열중, 궁핍하여 <죄 와 벌>을 쓰기 시작하다. 다시 사랑에 실패, 11월 러시아에 돌아오다. 출판업자에게 저작권을 팔아 버리고, 이듬해에 걸쳐 전집 3권을 출간하다.
- 1866 (45 세) <죄와 벌>을 ≪러시아 통보≫ 1, 2, 4, 6, 8, 11,12 월호에 연재 발표하다. 여름에 모스크바 근교 류플리노에 머물다. 10월, <도박자>를 여자 속기사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트키나에게 구술하여 탈고하자마자 전집 3권 속에 수록하고 곧 이어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 1867 (46 세) 2월 15일, 스니트키나(20 세)와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결혼하다. 4월 14일, 그냐와 함께 외국으로 떠나 4년간 머물다. 6월, 드레스덴에서 투르게네프와 말다툼하다. 8월, 제네바로 옮겨가다. 9월 <작가의 일기>를 계획, 연말에 <백치>를 쓰기 시작하다. 이해에 <죄와 벌>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 1868 (47 세) <백치>를 ≪러시아 통보≫ 1, 2, 4~12 월호에 연재, 이어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2월 22일, 제네바에서 맏딸 소피야가 태어 났으나 5월에 폐렴으로 죽다. 스위스를 떠나 이탈리아로 옮겨 12월 플로렌스에 도착, 연말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구상하기 시작하다.
- 1869 (48 세) 7월 말까지 플로렌스에 머물다. 스트라호프가 편집하는 ≪여명≫에 관계하다. 8월, 이탈리아를 떠나 프라하를 거쳐 다시 드레스덴에 머물다. 9월 14일, 둘째딸 류보피(에메) 태어나다. 생활이 궁핍하여 <영원한 남편>을 쓰기 시작, 12월 초에 탈고하다.
- 1870 (49 세) <영원한 남편>을 ≪여명≫ 1, 2 월호에 연재. 1월부터 <악령>을 쓰기 시작하여 이듬해 탈고. <죄와 벌> 제 4판이 나오다.
- 1871 (50 세) <악령>을 ≪러시아 통보≫ 1, 2, 4, 7, 9, 11 월호에 연재, 제 2편까지 완결했으나 그 후 1년간 중단하다. 7월 8일, <영원한 남편> 단행본으로 출간되다.
- 1872 (51 세) 근동 지방으로의 여행을 계획하다. <악령> 제 3 편을 ≪러시아 통보≫ 11, 12 월호에 발표하여 완결하다. 주간지 ≪시민≫의 편집국에 입사하다.
- 1873 (52 세) <작가의 일기>를 ≪시민≫ 1 호에 50 호까지 1년에 걸쳐 연재하다. <악령>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 1874 (53 세) 2월 말부터 정식으로 ≪시민 편집자≫가 되다. 3월 말 검열법 위반으로 구속되다. 가을부터 페테르스부르크의 남쪽 지방 온천장으로 옮기다. <미성년>을 쓰기 시작하다.
- 1875 (54 세) 네크라소프의 요청으로, 그가 편집하는 잡지 ≪조국의 기록≫에 <미성년>을 발표하다. 1, 2, 4, 5, 9, 11, 12 월 호에 연재하여 완결하다. 여름에 서부 독일에 머물다. 8월 둘째아들 알렉세이 태어나다. <죽음의 집의 기록> 제 4판 나오다.
- 1876 (55 세) 1월부터 <작가의 일기>를 원간으로 게재하다. <미성년>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 1878 (57 세) 5월, 둘째아들 알렉세이 죽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쓰기 시작하다. <죄와 벌> 제 5판이 나오다.
- 1878 (58 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러시아 통보≫ 1, 2, 4, 5, 6, 8, 9, 10, 11 월호에 연재하다. 이해 <작가의 일기> 재판 발행하다. <학대받은 사람들> 제 5판이 나오다.
- 1880 (59 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러시아 통보≫ 1, 4, 7, 8, 9, 10, 11 월호에 계속 연재하다. 5월 25일 모스크바의 작가, 저널리스트가 주최한 도스토예프스키를 위한 축하회가 베풀어지다. 8월, <작가의 일기>를 복간하다. 푸시킨제(祭)에서 연설하다.
- 1881년 1월 28일 오후 8시 30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영면하다. 향년 59세. 1월 31일, 페테르스부르크 대사원 묘지에 묻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단행본으로 출간되다.
5 작품 목록[11]
중·장편
(1846) 가난한 사람들 (Бедные люди)
(1846) 분신 (Двойник)
(1847) 여주인 (Хозяйка) [12]
(1849) 네또츠카 네즈바노바 (Неточка Незванова : 미완성소설)
(1859) 아저씨의 꿈 (Дядюшкин сон)
(1859)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Село Степанчиково и его обитатели)
(1861) 상처받은 사람들(Униженные и оскорблённые)[13]
(1862) 죽음의 집의 기록 (Записки из Мёртвого дома)
(1864) 지하로부터의 수기(지하에서 온 수기 : Записки из подполья)
(1866) 죄와 벌 (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
(1867) 노름꾼 (도박꾼 : Игрок)
(1869) 백치 (Идиот)
(1870) 영원한 남편 (Вечный муж)
(1872) 악령 (Бесы)
(1875) 미성년(Подросток)
(1880)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Братья Карамазовы)
단편
(1846) 쁘로하르친 씨 (Господин Прохарчин)
(1847)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 (Роман в девяти письмах)
(1847) 빼째르부르크 연대기(Петербургская летопись)
(1848) 질투하는 남편(Ревнивый муж)
(1848) 남의 아내 (Чужая жена)
(1848)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Чужая жена и муж под кроватью)[14]
(1848) 약한 마음 (Слабое сердце)
(1848) 뽈준꼬프
(1848) 정직한 도둑 (Честный вор)
(1848)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Ёлка и свадьба)
(1848) 백야 (Белые ночи)
(1849) 꼬마 영웅 (Маленький герой)
(1862) 악몽같은 이야기 (Скверный анекдот)
(1865) 악어 (Крокодил)
(1873) 보보끄 (Бобок)[15]
(1876)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Мальчик у Христа на ёлке)
(1876) 백 살의 노파 (Столетняя)
(1876) 농부 마레이 (Мужик Марей)
(1877) 우스운 사람의 꿈 (Сон смешного человека)
6 기타
러시아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일생을 다룬 사극을 2010년에 방영한 적이 있다. 자세한것은 도스토옙스키 참조.
도서 갤러리에서는 도끼 선생(...)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2005년에 바뀐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기존에 쓰이던 도스토예프스키에서 도스토옙스키로 표기하기로 결정되었다. 참고1, 참고2- ↑ 현대 러시아어 표기로는 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 ↑ 그래도 상당히 괴팍했던 성격이었던듯 하다. 그랬던 탓인지 1839년 자신의 영지 농노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이 일로 도스토옙스키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공식석상에서 아버지 이야기는 꺼려했다고 한다.
- ↑ 이 때 도스토옙스키는 클럽에서 인쇄기를 맡고 있었는데, 이는 대중 선동 담당을 뜻하기 때문에 중죄인으로 취급되었다고 한다.
- ↑ 사실은 황제가 정말로 처형할 생각은 없었고 단지 '혁명놀음'을 하겠다고 설치는 젊은이들에게 본 때를 보여주겠다고 처형쇼를 한 것일 뿐이었다. 실제로 니콜라이 1세는 소위 지식인들에 대해서는 이런 처형 연극을 즐겼고, 나름대로 효과도 있었다고 한다.
- ↑ 도스토옙스키는 이 때의 경험을 '죽음의 집에서의 기록'이라는 소설에서 풀어놓고 있다. 몇몇 형수들은 이 사건의 영향으로 미쳐버렸으나(...) 도스토옙스키는 '죽을 고비를 넘겨야 정신을 차리는 인간'의 표본이 되었다. 단 도박 중독은 죽는 날까지 없어지지 않았지만...
그럼 정신차린 게 아니잖아 - ↑ 하지만 시베리아에서도 그 성격 못죽이고 따돌림당했다. 위에 언급된 책에서는 "동료들은 내가 너무 잘난 집안 출신이라서 날 왕따시킴"이라고 정신승리했다만...
- ↑ 그러나 묘하게도 그 남자는 살아나게 되자 결심했던 대로 살지 못하고 다시 시간을 낭비하면서 보냈다는 결말로 끝을 맺는다(...).
- ↑ 사실 원래부터 도스토옙스키가 투르게네프를 싫어했던 건 아니다. 그가 처음 문단에 들어섰을 때, 투르게네프를 보고 "투르게네프는 러시아의 문인들 중 한 순간에 친해지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다" 라고 표현할 정도로 투르게네프를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또한 도스토옙스키가 죽기 사흘 전 알렉산드르 푸시킨에 대한 연설회장에서 투르게네프와 극적으로 화해했다고 한다.
- ↑ 도스토옙스키 전집 서문 참조
- ↑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혐오하던 사상 중 하나가 무신론임을 생각해보자(...) 또한 <죄와 벌>의 여주인공이자 도스토옙스키가 생각하는 이상적 인간인 소냐는, 니체의 기준에서 보자면 '노예의 도덕'을 신봉하는 부정적 인간상이기도 하다. 물론 니체가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에 공감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좋아했지만 자신의 사상에서는 그를 깐 전례도 있고(...)
- ↑ 발표년도를 기준으로 했다.
- ↑ 한국에선 단편 모음집인 뻬쩨르부르그 연대기 외에 실려있다. 열린책들 기준
- ↑ 영어로 하면 Humiliated and Insulted이고, 굳이 직역하자면 '모욕당한 그리고 굴욕당한'이 되겠다.
gg - ↑ '남의 아내'와 '질투하는 남편'을 합쳐서 하나의 작품으로 묶어서 개작한 단편
- ↑ 이 작품부터 마지막까지 쓰여진 단편들은 전부 도스토옙스키가 쓴 「작가의 일기」라는 연재 일기의 부분으로 발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