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러시아 제국 차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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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16대 황제.
생애 : 1818년 4월 29일 ~ 1881년 3월 13일
재위 : 1855년 3월 2일 ~ 1881년 3월 13일
풀네임은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оманов).
2 행적
1818년 4월 29일 , 당시 황제의 동생이었던 니콜라이 1세와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선황 니콜라이 1세는 크림 전쟁 중이었던 1855년 3월 2일에 죽었고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가 알렉산드르 2세로 즉위했다. 당시 러시아의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의 종결을 위해 노력했고, 1856년 파리 조약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전쟁 중 러시아의 낙후상을 절감한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군의 근대적 개혁을 위해서는 곧 국가의 체제 전반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특히 러시아에 남아 있던 중세적 자취인 농노제를 폐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유명한 농노해방령.
3 영토 문제
개혁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한 것이 당연하지만 전쟁에서 진 러시아 정부에는 그럴 재원이 모자랐기 때문에, 광대한 (그리고 쓸모 없는 것으로 인식되던) 영토의 일부인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아치우기도 했다. 우습게도 당시에는 미국에서 이렇게 돈주고 사온데 앞장선 정치가들이 황무지 사왔다고 신나게 욕을 처먹었지만 나중에 냉전이 시작되자 소련 정부는 이를 몹시 아까워 했다. 엄청난 매장량의 석유 및 금을 비롯한 다양한 광물이 가득했고 그리고 쿠바 사태로 난리칠 것 없이 소련 턱밑을 찌르는 터키의 미군 핵미사일 배치의 대항마로 충분한다든지 무엇 하나 버리는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편 남하정책은 왕조의 기본적인 강령이었기 때문에, 흑해->지중해 방면의 남하가 좌절되자 태평양으로의 남하를 채택해 1858년 톈진 조약 중재의 대가로 우수리 강 이북의 땅을, 1860년 베이징 조약 중재의 대가로 연해주를 청나라에서 뜯어와 총 한 방 쏘지 않고 엄청난 영토를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발칸에서의 좌절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비교체험 극과 극(...). 1904년~1905년과는 달리 이때는 영국이 제2차 아편전쟁에 묶여 있었고 일본은 한창 막부 말 동란의 와중이었기 때문에 두 나라 모두 러시아를 견제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 주효했다. 이런 공세적인 남하전략은 몽골과 중앙아시아는 물론 "부동항"인 한반도(조선)에도 적용되었다.
4 실패한 개혁
1861년 농노해방령을 내렸으나 이건 문제가 많았다. 거저 해방한게 아니라 상환금이라는 명목으로 정부 및 소유 귀족에게 돈을 내야했으며 낸다고 해도 귀족이 나몰랑하면 그만이었기 때문. 농노 대다수가 까막눈인 현실이니 당연했다. 이러다보니, 말만 농노 해방령이기에 여론은 반발이 심해졌다...
그 뒤 러시아의 압제 하에 있던 폴란드 입헌왕국에 대한 처우 개선도 이루어졌는데, 폴란드인들은 이를 독립의 기회로 보고 1863년 최후의 무력 봉기를 통한 독립을 시도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등, 이들이 목을 메고 바라보던 열강들의 외면과 러시아의 강경한 탄압으로 좌절. [1] 그리고 폴란드 입헌왕국은 완전히 러시아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이 시기를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기점으로 알렉산드르 2세의 정치는 다시 전제정으로 복귀하기 시작해, 정치적 탄압은 지속되었다.
5 러 - 독 관계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재상에 올랐던(1862년) 비스마르크는 폴란드 봉기에 대해서 러시아의 입장을 지지하고, [2] 폴란드 독립운동가들이 프로이센으로 넘어오면 즉각 체포해서 넘겨주기로 합의함에 따라(알벤스레벤 협정),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관계는 급속히 개선되었다. 크림 전쟁 이후 외교적 고립 상태에 놓여 있던 러시아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이에 자신감을 회복한 러시아는 독일 통일 문제에서 전적으로 프로이센의 편을 들어주며 오스트리아를 엿먹였고, 그러는 사이 착착 군제 개혁과 군사력 확충을 지속하며 기회를 노렸다. 그러다가 1875년 오스만 령의 보스니아에서 발생한 반란을 계기로 다시 발칸 문제가 불거지자 오스만 정부의 야만적인 탄압을 이유로 간섭, 1877년 제2차 동방 전쟁을 일으켰다. 개혁의 성과인지, 오스만 군대가 너무 약했던 건지 압승을 거두며 이스탄불까지 위협했으나, 영국의 위협으로 협상에 나서 산스테파노 조약을 체결해 불가리아 공국을 성립시키고 세르비아와 루마니아를 위성국으로 독립시키며 발칸 반도에서 패권을 장악하나 싶었으나...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맹렬한 반발과 양국의 전쟁 불사 위협으로 위기가 고조되자, 독일이 끼어들어 '성실한 중개인'을 자처한 비스마르크에 의한 베를린 회의(1878년)에서 문제의 조정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결과는 시궁창(...).
비스마르크의 조정의 결과 러시아가 설정한 불가리아 공국의 영토는 절반 이하로 축소되어 지중해로 나갈 길이 막혔고, 러시아의 보상은 몰다비아(몰도바)의 영토를 조금 얻는 수준에 그쳤다. 오히려 총 한 방 쏘지 않은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에 대한 위임통치권을, 영국이 키프로스에 대한 위임통치권을 따냄으로써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일보 전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제대로 빡친 알렉산드르 2세는 독일과의 우호관계를 끝장내기로 하고, 1873년 맺었던 삼제협정도 파탄을 내고 독일 황제에게 전쟁선포에 버금가는 살벌한 서한을 보내는 등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막나가기에 이르렀다. 이에 독일은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킬까봐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여 1879년 독-오 동맹을 맺는다. 결국 신성동맹은 붕괴되고 제1차 세계대전의 협상vs동맹의 구도가 점차 현실화 된 것이다.
6 암살
결국 두 차례의 전쟁에서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고 좌절만을 겪어야 했던 알렉산드르 2세의 행보는 차리즘에 대한 국내의 불신만 키웠다.
1881년 3월 13일, 알렉산드로 2세는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의회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당일 사회주의(혹은 무정부주의, 공화주의) 운동가 인민의 의지파 소속 그리네비츠키, 소피아 페룹스카야 등의 폭탄테러로 암살당하고 만다. 암살 순간에 바로 죽진 않았고 중상을 입었으면서도 궁으로 돌아가 죽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고 결국 그의 소원대로 됐다고 한다. 이미 1879년에 인민의 의지파가 겨울궁전에서 차르를 노리고 폭탄 테러를 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도 차르는 무사했지만 13명의 하인, 근위병들이 폭사하는 등의 피해가 생겼다. 이로 인해 차르는 자신의 개혁에 대해서 다시 고민하며 자신이 언젠가는 암살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고 자신과 어제까지 함께 하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충격까지 겹쳐져 몇달 간 정신적인 문제를 겪었었다고 한다.
7 평가
이 암살 사건에서 이 양반이 정치적으로 뜻한 바는 이루지 못했을지언정 인간적으로는 선한 황제였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첫 번째 폭탄에 맞았을 때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방탄 마차의 안전장치 덕분에 안에 있던 본인은 무사했고 호위병과 마부만 다쳤다. 이에 알렉산드르 2세는 "난 괜찮다"라고 말하며 자리를 피하기는 커녕 마차에서 나와 폭발에 휘말려 다친 다른 사람들을 수습하려고 하다가 그 모습을 본 또 다른 암살범이 기다렸다는 듯이 두 번째 폭탄을 던졌다. 두 번째 폭탄에도 그는 즉사하진 않았지만 팔 하나와 두 다리가 잘려나가고 피투성이로 쓰러져 "짐은 궁궐에서 죽고 싶도다..."라는 말을 겨우 했다. 이미 누가 봐도 가망이 없어서 신하들이 마지막 부탁대로 궁궐로 데려갔고 결국 궁궐 안에서 사망했다. 폭탄 테러 장소에는 아들 알렉산드르 3세가 '그리스도 부활 성당(일명 피의 성당)'을 지어 아버지를 애도했고, 정치범들에 대한 혹독한 복수가 이루어졌다.
알렉산드르 2세는 인간적으로는 선량한 황제였지만, 가족사와 관련해서는 거의 성격파탄자 급의 인성을 보여주고 있다. 장남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가 매우 유능하다는 이유로 장남만 편애했고, 무능했지만 가정적으로는 선했던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후일 알렉산드르 3세)은 찬밥신세였다. 게다가 첩과 사생아들을 두었고, 장남 니콜라이가 1865년 수막염으로 숨을 거둘 때에는 오로지 니콜라이만 신경쓰고 다른 자녀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니콜라이의 동생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차남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정치관을 귀 기울여 보지 않고 황태자 자리에 세웠다. 게다가 니콜라이 황태자의 약혼녀 다그마르 공주를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에게 강제로 결혼하게끔 했다. 알렉산드르는 사랑하는 애인이 있었으나 차르는 신경쓰지 않고 결혼을 밀어붙였고 그 무렵 입헌군주로서의 모습을 버리고 전제정치를 강행하며 나태해졌다.
알렉산드르 2세는 1880년 아내 헤센의 마리 황후가 죽자 애인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비밀 약혼했고, 1881년에는 아예 결혼하겠다고 공식 발표까지 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이 개새끼가 이미 1880년 이전의 알렉산드르 2세와의 사이에서 자녀 4명을 두었다고 하니...
그래도 아들 알렉산드르 3세와 다그마르 황후는 끝까지 금슬 좋게 살았으며, 외도 같은 건 양쪽 다 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점은 이날 그는 두마(의회)에 대한 기회를 실현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자유주의적 개혁이 시작될 찰나였다. 그래서 그 실마리를 운동가들의 테러가 스스로 날려버린 셈이고 러시아 혁명으로 가는 긴 몰락의 길이 시작되었다.
그는 당시 상당히 급진적인 개혁들을 시행했는데 다음과 같다.
법정에서의 변호를 위한 자유 발언권과 더불어 판사들의 힘을 줄이고 배심원들을 들이기 시작한 것(배심원들의 선발은 보통 변호사, 의사 등등의 지식인들이었고 인종 자체에 문제를 두지는 않았다. 심지어 니콜라이 2세 당시 탄압과 경멸의 대명사였던 유대인들에게도 배심원으로써의 권리가 허락 되었을 정도), 경찰 권력의 자율화와 세분화(더욱 효율적인 조사와 치안 유지를 위함이었다. 하지만 경찰 권력이 약해지거나 정치의 틀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비밀 경찰들이 활동하였고 이들은 오히려 심증도 없이 대상을 체포할 수 있을 만큼 권력이 강해졌다.), 검열의 범위 축소(알렉산드르 2세 당시에는 차르와 왕족만 비판하는 것 아니었으면 자유롭게 의견과 사상을 기재할 수 있는 신문이 있었다. 이것이 사회주의와 급진주의를 널리 퍼뜨리는데 한 몫하기도 했다. 뭐 차르 본인도 나중에 이 사상으로 자기가 죽을 줄은 몰랐겠지만...), 무료 교육의 보편(당시 러시아의 문맹률은 매우 높았는데 국민이 계몽적이어야 근대화에 차질이 없다고 생각한 알렉산드르 2세가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사립학교들이 나오기도 했다.) 등이 대표적이다.
8 가족 관계
- 알렉산드로브나는 러시아로 시집오면서 바꾼 이름이고 원래 이름은 마리였다. 6남 2녀를 두었고. 1865년 니콜라이 황태자가 죽자 쓰러져 1880년 57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의식을 찾지 못했다.
- 수막염으로 요절했다.
- 장남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 (1843년 9월 20일 ~ 1865년 4월 24일)
- 머리도 뛰어나고 얼굴도 잘생긴 말 그대로 완벽한 군주감이었다. 또한 미녀 공주로 유명한 덴마크의 다그마르 공주와 약혼하여 알렉산드르 2세는 이들이 러시아를 잘 이끌 선남선녀로써 기대하고 있었는데... 니콜라이 황태자는 1865년에 수막염으로 죽었고 , 동생인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니콜라이 황태자의 뒤를 이어 황태자가 되었고, 약혼녀 덴마크의 다그마르 공주도 계승했다.
앨버트 왕자?
- 러시아 제국 황제.4남 2녀를 두었다.
- 3남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1847년 4월 22일 ~ 1909년 2월 17일)
- 4남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1850년 1월 14일 ~ 1908년 11월 14일)
- 차녀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1853년 10월 17일 ~ 1920년 10월 20일) - 빅토리아 여왕의 차남 알프레드 대공과 결혼.
- 5남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1857년 5월 11일 ~ 1905년 2월 17일) - 러일전쟁 중 암살당함.
- 6남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1860년 10월 3일 ~ 1919년 1월 24일) - 러시아 혁명 직후 망명을 시도하다 체포되 총살당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