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대군

(이방번에서 넘어옴)

撫安大君
1381년 ~ 1398년 10월 6일, 음력 8월 26일

1 개요

고려조선 초의 인물. 이성계의 7남. 어머니는 신덕왕후 강씨이다. 이름은 이방번(李芳蕃).

2 생애

고려에서는 어린 나이에 고공좌랑이 되었고 공양왕의 조카딸과 결혼했으며, 1388년에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기 전에 우왕이 요동 공략에 나선 장수의 가족들을 볼모로 삼으려고 하면서 포천으로 피신할 때 따라나섰다.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자 무안군에 봉해지면서 의흥친군위 절제사가 되었으며, 세자로 책봉될 예정이었지만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의 대신들이 "무안군은 거만하고 경솔해 볼품이 없으므로 공신들이 어렵게 여겨 신덕왕후가 낳은 아들 중에 세자를 한다면 의안군이 낫다"고 해서 의안대군이 세자가 되었다. 물론 성격은 핑계고 실제론 그의 혼인 관계가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의 부인 삼한국대부인 왕씨는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의 딸로 다름아닌 공양왕의 조카딸이었다. 방번을 세자로 삼으면 태조가 죽인 공양왕의 형이 왕의 장인이 되는 사태가 벌어지니 성품과 상관없이 그는 절대 세자가 될 수 없었다.

1393년에 좌군절제사가 되었고 1395년에 병이 생겨 아버지 이성계가 2차례 동안 문병을 갔으며, 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때 살해당했다. 시호는 공순(恭順).

3 성품

세자 결정과정에서 거론된 성품문제야 대놓고 혼인관계를 언급하기 껄끄러웠던 대신들의 핑계였지만 실제로도 다소 경망스러운 구석이 있긴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정황을 볼 때 동복동생에게 세자 자리를 내준게 이복형들(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 못지 않게 불만스러웠던 모양. 이복형들도 부글부글 끓고 있었는데, 동복형이면서 밀린 본인은 오죽했을까.

조선왕조실록 "태조 14권,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8월 9일(임자)" 기사를 보면, 당시 정도전이 주도한 진법 훈련에 태만하게 대했던 절제사들의 명단 가운데 방번의 이름 역시 끼어 있어 그가 사병 혁파에 반발하던 이복형들과 같은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방번이 세자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고 싶어서 하인들을 시켜서 궁궐을 정탐하게 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4 왕자의 난을 방관하다

이방원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킬 당시 방번을 찾아가서 합류하겠느냐고 물었는데 방번은 시큰둥하게 거절했지만, 그 사실을 아바마마에게 아뢰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그냥 강 건너 불 구경한 셈이다.

이 기록은 흔히 큰 비중을 가지고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만, 1차 왕자의 난에서 무안대군 방번은 어느 쪽으로 움직이건 '중대한 변수'가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방번이 거느린 군사력이 막강했기 때문이다. 태조는 왕자들과 사위의 군호를 정하면서 이들의 절제사(節制使) 임명도 병행해 친위군사력을 재편성했다. 이때 방번은 매형 이제, 이복형 방과와 함께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임명되었다. 방과는 개국에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아예 모른척 할 순 없으니 방과를 대표료 맡긴 것이고 방번과 이제는 당연히 세자의 동복형과 매형에게 힘을 싣어주어 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조치였다. 게다가 태조 3년 군제개편으로 이방원이 받아서 거느리고 있던 동북면 가별초까지 인계받는다. 방번의 하인들 중에는 말을 타거나 활을 쏘는 걸 즐기는 불량한 무리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는 개인적으로 거느린 사병 규모도 만만찮았다는 뜻이다. 심지어 왕자의 난 이후에도 방번의 하인들 잔당이 복수를 하려다가 이숙번에게 걸려서 진압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방원이 일부러 난을 일으키는 가운데 굳이 방번에게 '회유'를 했다는 것도 이 시점에서 동원할 수 있는 방번의 군사력이 결코 적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방번 자신이 움직이고자 하면 왕자의 난에 대항을 하든 오히려 합류를 하든, 움직일 수 있었겠지만 전혀 손을 쓰지 않았다. 실록에서는 "방번이 세자 자리에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방석이 죽으면 자신이 자리를 이어 받을 것이라고 하인들이 말하자 그 말을 믿고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록했으며, 사람들이 이를 비웃었다고 언급한다.

5 방번의 처분에 대해서

아무튼 난에서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 자신의 목숨까지 앗아가게 될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라리 그 때 이복형 이방원을 따라 난에 합류했으면, 비참하게 죽은 동생과는 달리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다만 실록의 기록으로는 이방원이 "남은 등이 이미 우리 무리를 제거하게 된다면 너도 또한 마침내 면할 수가 없는 까닭으로, 내가 너를 부른 것인데, 너는 어찌 따르지 않았는가? 지금 비록 외방에 나가더라도 얼마 안 되어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라고 약속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실록에서는 이성계가 "방번은 세자 방석과는 달리 죽지는 않고 귀양만 갈 것"이라 생각해서 내보내주었으나, 방간등이 도당에서 논의해 방번. 방석등을 죽이니 이방원이 이숙번에게만 "이거이 부자들이 나에게는 알리지도 않고서 도당에게만 의논하여 나의 동기를 살해했는데, 지금 인심이 안정되지 않은 까닭으로 '내가 속으로 견디어 참으면서' 감히 성낸 기색을 보이지 못하니, 그대는 이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 당시 실록의 기록을 무작정 신뢰하긴 어렵겠지만 이방원 입장에서도 세자의 위치에 어린 방석을 올렸고 세자 외 다른 왕자들과 종친들을 모해했다는 명분만으로 난을 일으켰다는데 방번 역시 같이 정도전, 남은 등에게 같이 정치적 견제를 받는 처지였다는 점이나 난에 동참할것을 요청했다는 부분, 세자위와는 별 상관없는 방번까지 살해했다면 정치적 부담을 느꼈을수도 있다는 점, 자신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마음대로 일을 처리했다는 점에 화를 냈을수도 있다. 물론 방석에 대한 처분도 같이 화를 냈다는 것이니 곧이 곧대로 믿긴 어렵겠지만.

6 후일담

사후에 태종 대에 공순군의 시호를 받고, 어린 나이에 죽었기에 후사가 없어 세종 대에 광평대군을 그의 봉사손으로 해서 후사를 잇게 했다. 다만 광평대군 역시 20세의 나이로 요절(...).

7 미디어

용의 눈물에선 실록의 기록을 충실히 참조했다. 배우는 정태우. 경망스런 성품으로 방석이 주색에 빠져 엇나가는데 한몫 단단히 했다. 이숙번이 무장들을 이끌고 쳐들어와 이성계의 처소에 피난와있던 방번과 이제를 내어 달라 청하고, 이성계는 방석이야 가만 안 놔두겠지만 방번과 이제야 죽이긴 하겠냐 귀양이나 보내겠지 하면서 내준다. 이후 방원은 방석은 죽였지만 방번은 죄가 없으니 그냥 보내라고 명령을 내리지만 방간이 인정을 베풀 때가 아니라고 쫓아가서 이제와 함께 죽인다. 살려주겠다던 이방원은 "형님!"하고 한번 크게 외쳐 말리는 시늉만 하고 그냥 구경만 한다. 다만 본작의 방번은 방석과 상당히 사이가 좋은 것으로 나온다.

정도전에서는 용의 눈물과 달리 친동생 방석과 척을 지고 이복형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 나오며 방과, 방원도 방석에게는 까탈스럽게 굴어도 방번은 동생으로 대접해주는 면모를 보여준다. 그외에는 딱히 비중이 없다가 1차 왕자의 난 와중에 피살당했다는 사실과 시신만 나온다.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이방석과는 달리 거의 공기신세인데 전원에게 군호를 내려줄 때와, 이성계가 왕자들을 불러 전쟁 나가자고 부탁할 때 잠깐 나온다. 무인정사때도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48 화에서 이방간이 "여기도 아기 그 아새끼 모가지 하나 따니까 전부 항복하드라. " 라는 말로 보아 이방간이 죽인 것 같다. [1] 다음으로 이방원이 세자에 대해 묻고 이방원에 의해 이방석도 살해당한다.
  1. 이방번의 호위병들로 보이는 자들이 이방간의 사병들에게 포위되어 칼을 내려놓는 장면이 초반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