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철/선수 경력

1 개관

하하 제가 제 소개를 하려니까 어색하네요.

마구마구에서 해설위원이 이순철일 때 선수 이순철 본인이 등장하면 나오는 멘트. (최근에 나온 해설위원 이순철은 자기 자신의 별명을 말해준다. "이 선수의 별명은 센터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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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글러브를 5번이나 탈 정도로 뛰어난 선수였다. 홈런생산능력+도루능력+외야수비능력 전반적인 밸런스가 좋은 선수. 다만 타율은 기복이 심한 편이다. 좋은 시즌에는 3할을 어렵지 않게 쳐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2할대 중반까지 하락하기도 한다. 따라서 통산타율은 0.265로 레전드급 선수 치고는 높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이순철의 타율에 가려진 다른 툴이 있었으니 바로 장타력이다. 30홈런 이상은 쳐야 거포 소리를 듣는 지금의 KBO와는 달리 이순철이 뛰던 시절의 KBO는 20개 대 홈런왕이 나오는 경우가 흔했다. 30홈런은 1988년 김성한이 때려낸 것이 최초였으며 1991년 장종훈이 35홈런으로 홈런왕이 되기 전까지 두 시즌 동안 30홈런 타자가 없었다. 이런 시대에 이순철은 꾸준히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 특히 1988년부터 1993년까지 6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는데 리드 오프로서는 대단한 기록이다.

즉 이순철은 컨택 능력은 평균을 조금 상회하는 수준이었지만(통산 타율만 보면) 출루하면 상대를 뒤흔들고 심심챦게 홈런을 때리면서 스스로 해결도 하는 당시로서는 완성형 리드오프에 가까웠다. 해태의 이런 장타력 있는 리드오프의 계보는 이후 이종범이 이어 받는다.

2 해태 타이거즈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1985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여 선동열이나 이종범도 못 해본 타이거즈 역사상 최초이자 2016년 현재 유일의 신인왕이 되었다. 입단 당시 포지션은 3루수였다. 이후 1986년 3루수 한대화가 OB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되어 영입되자 외야수로 전향했다.[1] 그 후 김일권에 이어[2] 해태의 붙박이 1번 타자로 뛰면서 세 번의 도루왕과 네 번의 골든 글러브를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선수였다.

특히 외야와 내야 모두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인물이며, KBO 역사상 모든 타순에서 홈런을 날린 적이 있는 유일한 선수. 중견수 수비에 있어서는 역대 최고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라면수비의 원조이자 대가격적인 인물.

TV 중계로 야구를 보고 있노라면 타자가 공을 때린 다음, 외야를 잡아주면 내가 ㅅㅂ 지금 여기까지 나와서 이딴 공이나 잡고 있어야 겠냐 투수 XXX야라는 표정으로 세상 만사 귀찮음은 다 끌어안은 표정으로 공을 캐치하곤 했다. 사실은 타자의 특성에 따른 정확한 수비위치 예측과 '딱'소리와 거의 동시에 낙구지점을 파악하는 뛰어난 타구판단에 빠른 발이 더해져서 중계화면을 외야로 돌리는 그 짧은 시간에 이미 수비위치를 잡고 공을 잡아내는 최고급 수비. 김C가 선수 시절에 가장 존경하는 선수가 이순철이었는데 그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고 브레인 서바이벌에서 밝힌 적이 있다. 이후 이병규에게 라면수비의 계보는 계승된다.

이러한 수비능력은 이순철의 피나는 노력의 대가이다. 한대화의 입단으로 외야수로 전향했을 때 이순철의 외야수비 능력은 형편이 없었다. 그러자 이순철은 체육관에서 뒤돌아서 타구소리만 듣고 공을 잡는 연습을 하였다. 정확히는 타구가 뻗어가는 소리를 듣고 타구의 낙구 포착 지점을 판단하는 연습을 기른 것. 실제로 외야 수비는 공이 배트에 맞는 타구음을 듣고 재빠르게 공의 위치를 판단하는게 제일 중요하다.

팀 내에서는 유명한 군기반장이였으며 해태 2군 감독으로 있던 김성근조차 어떻게 하지 못한 임창용의 머리 염색을 하루아침에 다른 2군 선수들과 함께 스포츠 머리로 변신시킨 전력이 있다.

이외에 선수협 결정에 영향을 미친 사건이 있는데, 당시 해태 소속인 이순철과 김대현이 차를 몰고 가다가 김대현이 교통사고로 죽었는데도 불구하고[3] 아무런 보상 등을 받지 못하자, 다른 프로 선수들이 이 사건을 기점으로 적극적으로 선수협을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4] 야구 선수협의 설립에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어느 정도 합당한 근거[5]를 제공한 인물. 하지만 구단주들의 압력과 보복성 트레이드[6]로 인해 무산되었고, 21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선수협이 창설된다. 물론 선수협이 제대로 자리잡기까지는 또 수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도루왕을 달성하기도 했던 1988, 1991, 1992년도가 대표적인 그의 전성기며, 이종범이 등장하기 전까지 매년 20개 안팎의 도루와 두 자릿수 홈런(1987년에는 6개)을 기록해줬다. 다만 타율이나 안타 측면에서는 롤코 기질이 있었던 듯하다.

1988년에는 .313의 타율에 58도루를 해내며 한 시즌 최다 도루 기록을 갈아치웠다. 게다가 그해 한국시리즈에서는 1,2차전에서 연속으로 1차전 선제홈런 포함 결승타를 때려내 해태가 시리즈 내내 유리하게 가는데 1등공신의 역할을 하였다. 시리즈가 5차전 이내에서 끝나서 문희수가 6차전에 던지지 않았다면 시리즈 MVP를 당연히 탔을 정도. 1989년에는 아이러니하게 이순철의 존재 때문에 태평양으로 트레이드되었던 그 김일권이 62도루를 하면서 이 기록은 깨진다[7]. 1990년에도 김일권이 도루왕을 달성, 역시 구관이 명관이었나 했지만 이순철은 1991년에 56도루를 하면서 부활한다. 다만 타율은 .276으로 조금 모자란 편이었다. 하지만 17홈런을 포함하면서 호타준족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992년은 그의 최고의 시즌이었다. 44도루로 도루왕은 물론 타율 .309에 152안타로서 최다안타왕도 달성. 홈런도 21개나 쳐내며 20-20 클럽에 들었고, 76타점을 쓸어담았다. 홈런은 장채근을 이은 팀내 두번째였다. 최다안타왕과 도루왕을 동시에 석권한 이들 중 20-20을 이룬 선수는 이순철이 유일하다.[8] 이종범부터 본 세대에는 "이 사람 누구야"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에 그가 뛰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안다. 그는 이종범 못지않은 최강의 톱타자였다는 것을.

1993년 이후 이종범의 등장으로 그의 팀내 입지는 급격히 추락하게 되는데, 비슷한 스타일의 이종범은 타격과 스피드, 장타력 등 모든 면에서 이순철보다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사실 92이순철 vs 93이종범을 비교하면 이순철이 한수 위이다. 하지만 1993년 투고타저도 있고 이순철의 급격한 하락도 있기 때문에.. 이순철이 1993년에 전년도와 비슷한 성적을 냈었다면 이종범은 1번을 칠 수 없었다. 그 이후 그는 병살을 좀 많이 쳤다. 1995년에 20개를 쳤을 정도니...게다가 당시 이종범이 출루율, 타율이 좋았기 때문에 그가 친 병살이 더욱 눈에 잘 띄었다.

이후 서서히 나이가 들면서 성적도 떨어지고, 결정적으로 하와이 스프링캠프 때 선수들과 해태 코치진 간의 갈등이 심화된데다가, 선수 대표격이었던 이순철의 유남호 폭행 사건[9][10] 으로 김응용 감독의 눈 밖에 나기 시작하면서, 심지어 주장이었음에도 1997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 제외됐고 1997 시즌 후 해태 타이거즈에서 방출당했다.

3 삼성 라이온즈

그리고 삼성 라이온즈에 이적하여 1년 뛰고 바로 은퇴식도 없이 조용히 은퇴.

4 기타

그래도 시간이 지난 후에 김응용 감독과의 껄끄러운 관계는 청산하고 화해한 듯하다. 김응용 감독은 박동희와의 인터뷰에서 이순철, 선동열과 간간히 만나서 골프도 친다고 언급했다. [11]

의외로 한방능력이 있는 1번타자이다. 도루를 잘하는 이미지때문에 이순철 한방능력이 묻혔다. 커리어하이인 21개홈런을 때린 92년도 이전에도 데뷔이후 매년 홈런을 12개씩 처주는, 요즘시대에도 보기드문 펀치력을 가진 1번타자였다.

1번에서 9번까지 어떤 타순에서도 제 활약을 보인 선수로, KBO 최초로 모든 타순에서 홈런을 기록한 진기록이 있다. 유일한 내야&외야 골든글러브 수상경력처럼, 이순철이 가지고있는 진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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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84 LA 올림픽에서 코너 외야수로 차출되는 등 외야 수비 경력은 이전부터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때는 그저그런 편에 속했다.
  2. 불고기 화형식 사건 등으로 김일권과 앙금이 쌓였던 김응용 감독은 대체 자원으로 이순철이 등장하자 그를 차기 리드오프로 점찍은 이후 김일권을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해 버렸다. 이순철도 이종범이 등장한 후 하위 타선을 맴돌다가 1997년 김창희(사실 하와이 항명사건이라는 대형 사고의 시발점 이순철이기도 했고, 이로인해 김응용과의 관계도 악하되었다.)마저 들어오자 숙청된다
  3. 여기서 이순철은 의자를 젖히고 누워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4. 당시 선수협을 만들려 했던 대표 선수가 그 유명한 무쇠팔 최동원이다.
  5. 나중에 언론에서는 "모든 문제점은 이순철 때문이다"라는 개드립을 쳤다.
  6. 장효조, 김시진 대 최동원, 김용철(롯데- 삼성간 트레이드)이 트레이드 되었다. 둘다 롯대와 삼성을 대표하는 간판스타였다. 이후로 롯데가 최동원을 언급할 때 마다 이미지를 이용한 선수팔이라고 자주 까인다.
  7. 이후 1993년 전준호가 75도루를 기록하며 다시 한 번 갱신, 1994년 이종범84도루를 기록하며 정점을 찍는다. 이 기록은 2010년대에 접어든 후로도 깨지지 않고 있다.
  8. 이종범은 1994년에는 홈런 한개가 모자랐고 2003년에는 박한이에게 최다안타왕을 내주었다.
  9. 사실 이 사건은 이순철이 엉겁결에 휘두른 주먹에 공교롭게도 유남호 코치가 얼굴을 맞아서 시작된 것이다.
  10. 이것이 그 유명한 야구 쿠대타 하와이 항명사건이다.
  11.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 만화로 알아보는 이순철 선수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