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화

프로야구 30주년 Legend All-Star BEST 10
in 2011. KBO-NAVER
장효조
OF / 삼성
이순철
OF / 해태
양준혁
OF / 삼성
김재박
SS / MBC
박정태
2B / 롯데
한대화
3B / 해태
선동열
P / 해태
장종훈
1B / 빙그레
김기태
DH / 쌍방울
이만수
C / 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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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8월 선동열과 같이 나와 시구와 시타를 하고 인사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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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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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왕 어째 지석진과 닮았다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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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코치 시절.

한화 이글스 역대 감독
김인식
(2005~2009)
한대화[1]
(2010~2012)
김응용
(2013~2014)
이름한대화(韓大化 / Dae-hwa Han)
생년월일1960년 7월 8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대전광역시 동구
본적지평안남도[2]
출신학교신흥초-한밭중-대전고-동국대
포지션3루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83년 OB 베어스 1차 3지명
소속팀OB 베어스 (1983~1985)
해태 타이거즈 (1986~1993)
LG 트윈스 (1994~1996)
쌍방울 레이더스 (1997)
지도자동국대학교 감독 (1998~2003)
삼성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 (2003~2004)
삼성 라이온즈 1군 수석코치 (2004~2009)
한화 이글스 감독 (2010~2012)
KIA 타이거즈 2군 총괄코치 (2013)
KIA 타이거즈 1군 수석코치 (2014)
역대수상

1986년 ~ 1991년<1993년 ~ 1994년
한국프로야구 3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1988년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 미스터올스타
1990년 한국프로야구 타격왕
보유 기록
1989년, 1990년 한국프로야구 최고 출루율

한대화와 한 대화

1 소개

해결사(解決士)

현역시절의 모습.미소가 아름다운 남자, 누구세요?? 홍대광?

별명은 해결사.[3]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유달리 찬스에 강했던 원조 해결사.

선수 시절의 등번호는 5번(OB)-8번(해태)-9번(LG)-8번(쌍방울)이다.

2 현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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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고-동국대를 졸업했으며 동국대 졸업반이던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 국가대표로 선발, 사실상 결승이나 다름없던 일본과의 최종전[4]에서 2-2로 맞선 8회말 2사 주자 1, 2루 상황에 타석에 나와 풀카운트 씨름 끝에 오른쪽 폴대를 강타하는 결승 3점 홈런으로 대한민국 야구 사상 2번째 세계 대회 우승[5]을 이룩하는 데 1등 공신이 되었다. 이날 이후 한대화는 해결사 이미지가 굳어진다. 그리고 이때 홈을 돌고 나서 상심한 일본 투수의 팬티끈을 잡아당겼다!...고 불암콩콩코믹스 한대화 편에서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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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고향 팀인 OB 베어스[6]에 입단해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시즌 개막전에서도 3점 홈런을 기록하며 라뱅 쓰리런3점 홈런의 사나이라는 묵직한 별명이 붙기도 했지만 그 해 타율 0.272에 5홈런이라는 평범한 성적에 그쳤고, 1984년과 1985년에는 오히려 타율이 2할대 초반으로 뒷걸음질치며 팀의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1985년 시즌 직전에는 대전에서 개인훈련(OB팀에서 주체한 보문산 동계훈련때라고도 한다) 도중 갈증을 해소하던 뒷산 약수터의 돌려쓰는 바가지가 화근이 되면서 간염이 발병해 체력 관리에 애로사항이 꽃피게 되었고, 거기에 임금지어처럼 척추 분리증을 앓고 있었으니 말 다한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OB가 재일동포 출신 내야수 박창언을 영입하면서 한대화의 입지는 더더욱 좁아지고 있었다. 특히 부상과 A형 간염으로 인해 김성근의 강훈련을 소화할 수 없게 되자 훈련덕후로 유명한 김성근 감독에 눈밖에 나게 되고, 불화가 생기게 된다.

[[파일:/image/295/2011/08/12/%25BD%25BA%25C6%25F7%25C3%25F7%25C3%25E1%25C3%25DF.%25B1%25E8%25C0%25C0%25BF%25EB.%25B9%25DA%25B5%25BF%25C8%25F16.jpg|400px]]
OB 베어스에서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된 뒤 모습. 야 신난다

결국 1986년 시즌을 앞두고 양승호, 황기선과의 2:1 맞트레이드로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당초 한대화는 새로운 고향 팀인 빙그레 이글스로의 이적을 원했지만, 그 당시 빙그레 이글스는 신생 구단이라 선수층이 극히 얇았던 탓에 OB 베어스로서는 한대화와 맞바꿀 만한 전력감이 없었던 바 해태 타이거즈와의 트레이드를 적극 추진한 것이었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한대화는 결국 임의탈퇴 공시되며 몰렸다. 이는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임의탈퇴 사례다. 하지만 동국대학교 시절 은사였던 김인식 당시 해태 타이거즈 투수코치의 설득 끝에 해태 타이거즈 이적을 받아들이게 되었고[7],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 후에는 OB 베어스에 있을 때와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며 대활약, 왕조를 이루는 해태 타이거즈에서 주전 3루수로 활약한다. 원래 포지션은 유격수였고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한 초반에는 2루수로도 출전했으나 붙박이 3루수로 자리잡으면서 타격도 살아나고 수비도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이와 함께 기존 3루수였던 이순철중견수로 자리를 옮기고, 중견수였던 김일권은 벤치 신세로 전락하는 포지션 연쇄이동이 일어났다.[8]

한대화가 해태행을 거부했던 것은 고향 팀인 빙그레로 가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해태 특유의 빡센 팀 분위기와 김응용 감독의 철권통치를 두려워한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한대화가 해태 유니폼을 입자, 김응용 감독은 되려 한대화에게 훈련할 때 시간 맞춰 올 생각 말고 오후에 느지막히 운동장으로 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는 간염을 앓고 있던 한대화가 늦잠을 자고 몸을 추스리도록 한 김응용 감독의 따뜻한 배려였다.특히 간질환 환자에게 당연히 과로는 쥐약이고 충분한 휴식은 보약인지라, 이것이 회복에 절대적인 도움을 주며 만개하게 된다.

이후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반드시 실력을 톡톡히 보여 주는 클러치 히터의 면모를 과시하며 김성한, 이순철과 함께 당대 최강의 타선을 이루며 1986년 이후 해태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6회 우승에 큰 공을 세운다. 3루 수비에 있어서도 좌우 수비폭은 넓지 않았지만 부드러운 글러브 핸들링과 정확한 송구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연봉 문제 등으로 구단과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다. 한대화는 매년 연봉 협상에서 함께 주축 타자로 활약했던 김성한에 준하는 대우를 해 줄 것을 해태 구단에 요청하였으나, 구단의 대우는 항상 그에 미치지 못해 관계가 좋지 못한 편이었다. 니 연봉 줄려면 과자를 얼마나 팔아야 되는지 알아? 그 이유로 한대화가 김성한같은 전라도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랬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 그를 뒷받침하는 설로, 공식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해태에 있을 때도 고향팀인 빙그레 이글스로 트레이드해 달라는 요청을 여러 번 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한편 김응용 감독과의 관계 악화가 트레이드의 원인이라 보는 이들도 있다. 그 근거 중 하나가 1993년 올스타전 때 김응용 감독이 한대화에게 발길질을 한 것.[9] 당사자들은 그저 장난삼아 저지른 해프닝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카메라에 잡힌 장면을 보면 꽤나 살벌한 분위기이다... 진실은 저 너머에. 하여간 1994년 LG로의 트레이드는 이런 상황을 기반으로 촉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파일:Attachment/한대화/한대화1.png
LG 트윈스 시절. 아....

아무튼 1993년 시즌 종료 후 팀 동료 신동수와 함께 김상훈, 이병훈과의 2:2 트레이드로 LG 트윈스 유니폼을 입게 된다. 한대화는 LG 트윈스에서 팀의 4번타자를 맡으며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의 신인 3인방과 노찬엽, 김동수 등의 중견급 타자들과 더불어 견고한 타선을 구축하여 신바람 야구의 한 축으로 1994년 한 번 더 한국시리즈 우승의 축배를 들었다. 개인통산 총 7회째 우승이었다.

당시 경기 도중 중요한 시점에 한대화가 나오면 구장이 일순 조용해졌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한대화에 대한 믿음이 컸다. 프로야구의 재미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줬다고 할 수 있는 선수. 이런 이유로 인해 당시 언론에서 붙여준 별명이 해결사. 그러나 그가 해결사였던 이유는, 애초에 그가 타이거즈 시절 9시즌동안 WRC+ 150을 찍었던 당대의 초 강타자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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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을 보낸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중앙일보

1996 시즌 후 투수 신영균을 상대로 쌍방울 레이더스에 트레이드되나, 당시 노장이었던 한대화에게 이전같은 3루 수비는 보이기 힘들었고 지명타자 슬롯도 마땅하지 않았다. 게다가 쌍방울 트레이드 당시 감독은 김성근. OB 베어스 시절 갈등이 있었던 사이었는데 김성근식 훈련에 맞지도 않았고, 소화도 하기 힘들었던 한대화는 구석에 몰리고 만다. 한대화는 시즌 중 은퇴를 결심하고, 이에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은 3루수 레전드인 한대화에게 은퇴식을 준비해 주려 했으나, 김성근 감독이 쌍방울에서 한 것이 없는데 무슨 은퇴식이냐며 거절했다. 결국 한대화는 1997 시즌 후 쌍방울에서 임의탈퇴 공시되면서 그라운드를 떠나게 된다.

통산 성적으로 1983~1997년까지 15시즌 동안 1,331경기에 출장, 타율 0.279, 홈런 163, 타점 712, OPS 0.820을 기록. 커리어 하이인 1990 시즌에는 타율 0.335, 홈런 15, 타점 86, OPS 0.937을 기록.

그 외에도 역대 최다 골든글러브 수상(8회, 양준혁과 타이.), 6년 연속 골든글러브 수상이라는 진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 부문 1위는 이승엽의 7년 연속 수상 기록.

3 지도자 시절

3.1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 시절

쌍방울 레이더스를 끝으로 1997년 현역생활을 마감하고 그해 겨울에 바로 동국대학교 감독으로 부임한다.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었던데다가, 프로 출신 1호 대학 감독이었기 때문에 화제가 되었다. 게다가 당시 나이가 37세로 상당히 젊은 나이.

그러나 2000년에 체육특기생 입학과 관련, 학부모로부터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약식기소되었다는 흑역사가 존재한다.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 사건 이후 2003년까지 동국대 감독으로 재직. 이 사건은 완전히 잊혀지는 듯 했으나…. 이후에 한대화까들에 의해 성지가 발굴되었다.(…)

3.2 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

2004년 해태 시절 둘도 없는 선후배 사이였던 선동열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부임하자 삼성의 타격코치로 영입된다. 그리고 2005년부터는 술친구수석코치로 활약.

3.3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역대 감독 전적
연도소속팀경기수정규리그포스트시즌
2010한화 이글스133498228위-
2011133597226위-
2012105396428위[10]-
총계3711472186­

한the화, 한大화

3.3.1 2010 시즌, 안습의 꼴칰

2009년 9월 24일, 계약이 만료된 김인식 감독의 뒤를 이어 한화 이글스의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비록 빙그레 혹은 한화에서 선수생활은 하지 않았으나 구단역사상 첫 연고지역(대전) 태생 감독이라 지역내에선 기대가 컸었다. 그러나 2009시즌이 종료되자마자 팀의 주축 선수였던 김태균이범호가 모두 일본프로야구로 진출해버렸고, 마무리투수였던 브래드 토마스마저 미국으로 떠났다. 그야말로 차포 떼고 시작하는 격.

불암콩콩코믹스에서는 이게 리빌딩이냐 재창단이지!!라는 안습한 대사까지... 그리고 왠지 시즌이 진행될수록 만화 속에서 자꾸 개그 캐릭터가 되어가고 있다. 칰익진! ㅆ! 야신에 의해 지옥으로 보내질 때 했던 대사가 음…, 차라리 지옥이 나을 수도 있지.(…) 실제로도 인터뷰 내용을 살펴보면 위트있고 재밌는 답변이 많다. 주로 암울한 팀 사정을 빗댄 자학개그지만…. 한술 더 떠 남의 팀 트레이드때마다 "우리도 선수 필요한데 선수 좀 주세요." 하면서 구걸개그까지 시전한다.

별명으로 대전간디, 대전호구, 돌대화가 추가되었다. 보다시피 하나같이 안 좋은 의미의 별명들.

자세한 것은 한대화/2010년 문서 참조.

3.3.2 2011 시즌, 野王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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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스타전 피규어 2011년 07월 23일 올스타전에서. 프로야구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10에 유일한 현역 1군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야왕 전하로 칭송받았는데...

2011년 들어 한화가 작년과 같이 어이없이 무너지지 않으며 탈꼴찌에도 성공하고 5월에는 SK 와이번스와의 3연전에서 야신 김성근 감독과의 지략싸움에서까지 승리를 거두며 와이번스를 터는 등 선전하자 팬들 사이에서 새로이 나온 별명은 야왕. 쓸데없이 멋있다 한대화 본인은 야왕이란 별명을 아들에게 전해 들었고 야갤러 인증, 비교적 만족하는 듯 하다. 간혹 야황(野皇)으로 불리기도…. 야왕 예끼니미 18세 하지만 다음해에는...

자세한 것은 한대화/2011년 문서 참조.

3.3.3 2012 시즌, again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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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돌대화 고물상에 어서오세요

예끼, 니미 식빵
땡깡왕 돌대화.

시즌 개막 전에는 선수들이 감독의 재계약을 원한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로 언론과 팬들이 호의적이었다. 2011 시즌에 끈기를 보여주며 6위에 올랐고 한대화의 작전 야구가 잘 통하기도 했으니 기대가 있을 만했다. 거기다가 김태균박찬호가 팀에 합류하면서 올해는 정말 뭔가 일을 낼 것만 같이 보이기도... 희망과 기대에 찬 2012 시즌이 개막, 그리고 한화는 멸망했다.

팀의 총체적인 부진도 그렇고 본인의 용병술에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재계약을 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중도 퇴진은 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한화의 부진은 계속되었고, 결국 9월도 안 됐는데 한화는 포스트시즌 탈락이 확정됐다. 이에 대한 대가로 한화 프론트는 태풍 볼라벤이 상륙하기 전 밤이었던 8월 27일 한대화 감독을 전격 경질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씁쓸한 점은 김성근과 달리 한화 팬들 중 아무도 한대화의 경질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교롭게도 한대화 감독의 후임으로 그의 스승이었던 김응용 전 해태/삼성 감독이 선임되었다.

자세한 것은 한대화/2012년 문서 참조.

3.3.4 총평

부임 당시 한화 감독으로 한대화가 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언론이나 팬 모두 다음 한화 감독에게 펼쳐진 것은 고난과 욕의 행군 뿐(..)이라고 한마음 한뜻으로 말하던 상태. 심지어 앞으로 감독이 할 수 있는 것은 구단의 총알받이 역할 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즉, 누가 한화 감독이 되더라도 자신의 경력만 망칠 게 뻔한 상태였던 것.

그런데 갑자기 이전까지 한화 구단과 별 연관성이 없었던 한대화가 감독에 임명된다. 그만큼 갑작스러운 등장이었고, 한화 감독직을 수락한 한대화는 대인배라고 말하는 사람조차 있었다(..)[11]이 때문에 감독 부임 초창기에는 웬만하면 까지 말자는 공감대가 은연중에 형성돼있었다. 즉 반쯤 까방권을 획득한 상태로, 2010년 그의 행적이나 팀 성적에 대해선 어느정도 눈 감아 주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2011년 야왕이라 불리며 인터넷 야빠계의 스타 자리에 등극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2010년에 비해 한대화가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거나 한화의 사정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운이 좋았던 시즌이었다... 그저 한때 유행이었을 뿐. 사실 세이버메트리션 사이에서는 2011시즌 한화의 6위 달성이 대한민국 야구 역사상 최고 미스테리(...)일 정도.[12]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2년에는 박찬호, 송신영을 영입하고 김태균이 복귀하여 갑작스럽게 한화 4강 가능이라는 설레발칰키워이 등장한다. 결국 이전 해의 야왕 신드롬과 그 해의 전력보강 설레발로 어느 정도 성적은 내야 되지 않겠느냐는 팬들이 늘어났으나,

결과는 망했어요.

이 과정에서 한대화가 보여준 감독으로서의 능력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인간성 좋고 유머감각 있기로 소문난 사람이라 기자들 상대로 드립치는 능력만은 전임 감독 정도로 탁월하긴 했다. 그마저도 성적이 워낙 좋지 않자 기자들을 상대하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곧 잊혀졌다. 그 밖에 불펜 운영, 2진급 선수 발굴 및 활용, 작전 수행 능력, 어려운 상황에서의 리더십 등등은 평범 혹은 평범 이하였다. 특히 지나친 좌우놀이나 1루 주자 나갈 시 자동 번트, 히트 앤드 런[13] 등등 유치원생도 예상가능한 작전을 즐겨 썼는데, 한화 선수들은 이마저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신통한 모습을 보이며 번번이 실패. 돌 같은 감독에 돌 같은 선수가 무엇인지를 팬들에게 확실히 보여주었다.(...)

특히 2012년은 각 팀의 전력평준화 현상이 유독 심한 해로 6개 팀이 옹기종기 모여 비슷한 성적을 찍어준 시즌인데, 유독 한화만 저 멀리 아래쪽에 머물러 있으니 팬들로선 환장할 노릇.

이로 인해 2012년 중반기가 되자 부임 당시 획득한 까방권이나 2011년 야왕놀이 따위는 모두 잊고 한마음 한 뜻이 되어 감독 경질을 외치게 된다. 심지어 몇몇 팬들은 야왕이라고 불렀던 것을 창피하다고 까지 말하는 상태. 야왕이란 별명도 '야구 왕 병신' 이라며 까는 용도로 전락했다.

결국 부임 당시 '누가 와도 망함'이라고 사람들이 예상한 그대로의 결과. 누가 감독으로 오더라도 현 한화 이글스의 성적에 큰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한대화는 리빌딩이란 최소한의 목표도 없이 타팀 30대 노장선수 영입에 유망주를 다 퍼다 주고도 성적이 똥망했기에 까여야 마땅하다. 리빌딩은 고사하고 암흑기만 연장시킨 꼴... 그야말로 잃어버린 3년이 되었다. 2011년 탈꼴지 안했으면 8888을 찍을 뻔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의견도 있고, 프런트의 삽질을 감독 한명으로 덮으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골수팬의 의견도 무시 할 수 없다.[14]

그래도 업적을 굳이 꼽아보자면, 그의 재임기간에 최진행, 김혁민, 안승민, 오선진, 송창식 등의 성장이 있었다는 것 정도를 꼽아 볼 수 있겠다. 09년에 한화 방출자 명단에 박정진이 포함 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박정진을 구제한 사람이 한대화로 밝혀졌다. 좌완이라 살아남았다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현재까지의 박정진의 존재를 감안하자면 그래도 업적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견제 구호에 예끼가 추가된 것도[15]

2015시즌 이후 후임 감독들의 삽질로 인해 재평가를 받고 있다. 그저 당시 프런트가 역사상 최악이었고 선수복을 누리지 못했을 뿐, 만약에 한대화에게 정근우, 이용규, 권혁, 배영수, 송은범이 있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적어도 후임자들보다는 훨씬 잘했겠지 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정작 나름대로 지원 받고 임한 2012년의 성적을 설명한 윗 문단의 글을 보면 글쎄 과연 그렇게 될지는. ??? : 야구에 만약은 없다니까?


2012년 한화이글스의 성적은 분명 감독이 경질될만한 시즌이였다. 다만 2012년 이미 늙어버린 박찬호와 김태균 둘만의 영입으로 탈꼴찌를 할 수 있었다고 믿게 만든 한대화 감독과 팬들의 설레발이 가장 큰 문제였다. 2012시즌의 한화와 한대화에 대해 4강 이상을 노려볼 만한 전력으로 일관되게 8위를 함으로써 팬들의 기대를 개발살내버렸을 뿐 아니라 선수와 팬 모두에게 한화는 답이 없다는 패배근성의 그림자를 확실하게 드리운 역대 최악의 시즌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사실 한화의 전력은 4강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제로 2012시즌 직전 자체 전력평가에서 한대화 감독 이하 코칭스탭들은 불안한 센터라인 수비(특히 포수)와 불확실한 선발로테이션을 고려해서 대략 6~7위를 예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야구 모르는 프런트와 모기업의 높으신 분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발끈하면서 작년에 공동 6위였고, 올해 박찬호 김태균이 가세했으니 4강은 기본이고, 가급적 우승을 목표로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정리하자면 전반적인 성적과 평은 좋지 않으나 2011년의 성적만이 평가가 갈리는 시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후 한화가 전폭적인 투자를 했음에도 2015년이 되서야 겨우 6위를 찍어본 점 때문에 더욱 평이 갈리게 되었다. 부정적으로 평하는 쪽은 2011년의 성적은 우연히 좋은 것이고 그 전 및 그 후에는 본 실력대로 8위를 찍은 것이라고 본다. 근거로는 2011년의 아무 이유없이 높은 대타성공률이나 낮은 피타고리안 승률 등을 꼽는다. 긍정적으로 평하는 쪽은 아무리 운빨이더라도 그게 1년이나 지속될리 없다고 보는 측이다. 밖에선 알 수 없지만 뭔가 잘 운용했기에 좋은 성적이 나온 것이지 1년 내내 운이 좋겠냐는 논리. 또한 만약 운빨이라 쳐도 어쨌든 888899라는 전무후무한 비밀번호를 찍을 뻔한 걸 막았다는 점을 좋게 평가한다.

2016년 들어서는 재평가의 움직임이 많이 보인다. 지금의 선수층을 가지고 8~9위 싸움을 하는 김성근감독과 비교되면서, 전근표를 4번으로 쓰던 시절에 저정도면 훌륭하다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3.4 KIA 타이거즈 2군 감독, 수석코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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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KIA 타이거즈 2군 총괄코치라는 호칭으로 타이거즈 공식 트위터에 올라온 사진[16]

2012년 10월 24일, KIA 타이거즈가 2군 감독으로 한대화를 선임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선동열이 삼성 감독 시절 수코를 역임한 바 있었기 때문에 선동열과의 인맥으로 영입된 것으로 보인다. 잘리자마자 다시 부활...

3.4.1 2013년

2012년 시즌 후 KIA가 본격적으로 2군 물갈이를 시작하면서, 2013년에는 2군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2군에서도 강제 리빌딩 하지만 2군에 다녀온 안치홍이 컨디션을 회복하고, 무엇보다도 김주형이 살아나면서(!) KIA 팬덤에서 야왕매직은 실존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즌이 지나면서 여론이 좋지 않게 흘러갔다. 퓨쳐스리그 남부리그 최하위권인 건 그렇다 치더라도, 타자진이나 투수진 모두 성적이 좋은 편이 아니었으며 무엇보다도 투수 전향 1년차 김윤동이 과부하에 걸려 재활군으로 가면서 선수 발굴은커녕 없는 자원마저 갉아먹냐며 비난을 들었다. 당연히 KIA 타이거즈 갤러리에서도 돌대화라고 까였다. 어차피 선동열 사단인 점도 있고, 선동열 감독이 경질된다 하더라도 후임 감독으로 선임될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

3.4.2 2014년

2013년 10월 5일 이순철 수석코치가 경질되면서 후임 수석코치로 거론되기 시작했고, 10월 17일에 수석코치로 임명되었다.마른 하늘에 날벼락

이후 2014 시즌 동안 선동열 감독을 보좌했고, 선동열이 자진 사퇴하고 김기태 신임 감독이 부임하면서 같이 정리되었다.

현재는 KBO 경기감독관으로 재직 중이다.

4 경기감독관

2015년에는 KBO의 경기운영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김재박 못지 않게 우천취소를 남발한다는 지적이 있다.

5 김성근의 제자???

일반적으로 SK 팬이나 OB(현 두산) 팬들은 김성근이 감독을 하는 동안 그 밑에서 활동했기에 다른 여느 감독들(조범현, 김경문, 박종훈 등등)과 같은 김성근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본인에게는 썩 달가운 소리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

일단 OB 시절 한대화가 훈련 중 A형 간염으로 쓰러져 팀 훈련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하자 훈련광인 김성근 눈 밖에 나면서 구단과의 사이도 틀어지게 되었다. 이후 선수 말년에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은퇴할 때도 구단 측에서는 '그래도 3루수 레전드니 은퇴식은 챙겨줄게' 하는 마당에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잉여에게 무슨 은퇴식?' 이라고 김성근이 디스를 넣은 통에 더 사이가 틀어졌다. 지금도 표면적으로 디스는 걸지 않지만 아마 속은 상당히 곪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10년 류현진 등판으로 김성근과 한대화 사이에 설전이 오갔을 때의 분위기에 의하면 여전히 좋지 않은 관계로 보인다.

게다가 김성근 밑에서 활동한 시간보다는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된 이후 김응용 감독과 야구를 한 시간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선수시절만 해도 김응용과 더 오래 있었으며, 코치직도 김응용과 같이 시작했다. 물론 이 당시엔 김응용삼성 라이온즈 사장. 지금도 사이가 나쁘지 않은걸 보면 이쪽이 더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애초에 김성근의 광팬들은 언제 어디서 어느 선수와 함께 했었으니 가르침을 받았다며 원포인트 레슨받은(?) 박찬호고 김병현이고 다 감돇님 제자!! 타령을 하니 김성근 제자 타령은 걸러 들어야한다.

6 기타

대전 출신으로 대학교 빼고 초중고 모두 대전에서 다닌 레알 대전광역시 토박이지만, 광주광역시를 연고지로 두고 있는 해태 타이거즈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탓에 올드 해태 팬들 중에는 그를 호남 출신으로 아는 사람도 많다.[17] OB 시절 트레이드 대상 명단에 올랐을 때도 자신은 새로 창단될 대전 연고 팀인 빙그레 이글스로 가기를 매우 희망했지만 구단은 그 말을 쌩까고 해태로 트레이드해 버렸다. 때문에 한때 대전 한밭야구장에서 "배신자 한대화"라는 플랜카드가 붙었을 때 상당히 억울함을 피력하기도 했다. 훗날 디씨 한화 이글스 갤러리에서 조공을 받았을 때 자신의 이름이 마킹된 빙그레 이글스 유니폼을 보면서 뭔가 짠해지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고... 지금은 칰갤 흑역사

성격이 상당히 순하고 유들유들한 편이다. 하지만 그런 점 때문에 심판들에게 항의할 때 한대화 감독이 만만해 보이는지 심판들이 막 뻗대는 경향이 있다. 그러고 나선 필드의 지배자에게 쳐발린다

모 언론사에서 야구 감독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을 뽑으라고 했을 때 유일하게 답변 곤란이라는 답변을 했던 감독이다. 이만수[18]박종훈[19]의 답변이 상당한 논란이 된 것을 보면 꽤 현명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왜 성적은 그 모양

독실한 천도교 신자다. 부친이 대전의 천도교 교구장이었다고. 한창 리즈시절 인터뷰에서 치성을 드려 성적이 잘 나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천도교의 교세가 워낙 쪼그라든 탓에 아마 천도교 신자 중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 한대화일 것이다(...).

김시진과 무척 친하다. 고교부터 대학. 프로시절, 코치시절에도 같이 있었던 적이 없는데 사이가 가깝다. 한화 이글스 감독 당시 넥센전이면 넥센 덕아웃으로 찾아가 김시진에게 "꼴뚜기 형님"이라 별명을 부르며 아이스크림을 먹여주는 정도로 친하다. 이런 관계로 한때 둘의 관계를 소재로 한 혀갤문학이나, 칰갤문학이 판치기도 했다.(......)

한편 2014년도마저 한화가 부진하자 일부 팬들은 지금보다 안 좋은 팀 상황에서 어떻게 6위를 했는지에 대해 재평가를 내리기 시작했다.진짜 기적이라 말할 수준 물론, 결론은 2011시즌이 플루크 시즌이라는 것이고, 그러한 플루크는 기아 2군에서 그대로 밑천이 드러났다. 근데 그 후루꾸 없었으면 롯데의 4연속 꼴지의 기록을 갱신하게 됐을께 뻔한지라.. 후루꾸라고 해도 11년 한대화는 한화팬들사이에선 인정해주는 분위기다.

하지만 한대화의 감독 시절의 업적이 2015년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엄청난 혹사 논란과 육성 문제까지 겹치면서 재평가받고 있다. 최진행 발굴, 박정진 등용, 김경언 트레이드부터 시작해서 조인성 트레이드의 시발점이 되었던 이대수 영입에 없는 선수로 6위를 한 것까지. 그 당시 2015년만큼의 지원이 있었다면 달랐을 것이라고 한화 팬들이 한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엄청난 지원을 받고도 위태위태한 6위를 하는 2015년 vs 없는 선수에 6위로 마무리한 2011년 라인업만 봐도 밸런스 붕괴다 그리고 역대급 지원을 받은 김성근 감독이 끝없는 추락을 하기 시작하자 한대화는 진정한 야왕이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1년도 안 되서 퇴위하셨지

한화팬 발암주의 타선만 봐도 깝깝하다. 이도형이 4번치고 신경현이 5번치던 시절


동대 3년 선배인 강석우와 친한 편인지라, 그 영향으로 강석우가 한화의 잠실 원정 경기 직관을 오기도 했다.

7 연도별 주요 성적

  • 한국야구위원회 기록실에 표기되는 리그 TOP 10위 이내 기록은 순위가 등재.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표시는 리그 5위내 입상성적.
역대기록
년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4사구장타율출루율
1983OB 베어스88313.27285175
(2위)
54439419.406.313
198474189.238458111622529.307.339
19853853.226121027501.358.241
년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4사구장타율출루율
1986해태 타이거즈103342.298
(5위)
10224
(2위)
214
(5위)
66
(2위)
50
(10위)
842.503
(2위)
.372
(5위)
198794301.2367116013
(5위)
3639552.419.347
1988101356.320
(7위)
114
(5위)
18
(8위)
118
(3위)
57
(6위)
51651.528
(3위)
.403
(7위)
1989106358.27910014213
(5위)
63
(6위)
521581.439
(7위)
.409
(1위)
1990119418.335
(1위)
140
(2위)
20
(7위)
315
(5위)
86
(2위)
73
(2위)
1076.505
(5위)
.432
(1위)
199192336.30110117322
(4위)
73
(8위)
62855.565
(3위)
.392
(7위)
1992110362.2689716120
(9위)
74
(9위)
69867.483.379
1993107335.2668913113
(8위)
4646453.427
(9위)
.364
(10위)
연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4사구장타율출루율
1994LG 트윈스106357.297
(9위)
1061511067
(9위)
49353.429.384
(6위)
199598295.2417113083725126.366.300
199652138.232325051612116.377.312
년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4사구장타율출루율
1997쌍방울 레이더스43111.225252042416120.351.344
KBO 통산
(15시즌)
13314264.27911901992016371261079641.450.370
  1. 시즌 도중 경질.
  2. 부친 한상준(1924년생)의 출생지.
  3. OB입단 시절의 별명은 네즈미였다. 언젠가 LG로 갈 운명
  4. 당시 쿠바가 불참한 가운데 9개 국가가 풀 리그로 대회를 치루었고 대한민국일본간의 최종전을 앞두고 공교롭게도 두 나라가 6승 1패의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대한민국일본의 패배는 모두 이탈리아에게 당한 것으로, 이탈리아는 이 대회에서 그것이 유이한 승리였다.
  5. 첫번째 우승은 1977년 니카라과 슈퍼 월드컵 대회였고, 당시 김응용이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다.
  6. 당시 OB 베어스대전을 연고지로 하는 팀이었다.
  7. 공식적으로 그렇긴 하지만 한대화의 부친 고향이 김응용 감독과 같은 평남이라는 점이 작용했다고 한다. 영입에 매우 적극적이었고 결국에는 영입 성공. 김응용이 보이지 않은 조력자인 셈이다.
  8. 김일권은 1984년 이른바 불고기 항명 사건으로 김응용 감독의 눈밖에 난 상태였다.
  9. 이후 1997년 김응용 감독이 심판판정 항의중 뒷통수에 참외를 투척당하는데, 심판에게 던진 참외가 김응용의 목으로 간 것이 아니냐는 설이 지배적 이지만, 만약 고의적인 투척이라면 김응용에게 앙금이 있는 선수가 하지 않았겠냐는 썰이 있다.아마 한대화가 아닐까
  10. 시즌 도중 경질
  11. 하지만 대전태생에 성인되기전까지 대전에서 컸다. 선수시절에도 대전으로 오고싶어 트레이드파동을 일으킨 만큼 한화가 대전연고팀이라는게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야구 커리어 첫 프로팀 감독도전이라는 점도 있었으리라
  12. 실제로 팀 득실점으로만 승률을 예측하는 피타고리안 승률은 압도적으로 최하위였다.
  13. 팀 타자들 주루 능력이 시원찮으니 그랬겠지만, 매번 히트 앤드 런을 거는 것만으로도 문제지만 볼카운트 상관 없이 작전을 걸어댄 것이 더 큰 문제였다. 히트 앤드 런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 작전은 타자에게 볼카운트가 불리할 땐 매우 위험한 작전이 되어버린다.
  14. 구대성 은퇴식, 한대화 경질 등등 이 당시 한화 프런트는 심히 맛이 가있었다.
  15. 김응용 감독 때부터는 다시 빠졌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16. 조범현 체제 이후 KIA 타이거즈는 다른 구단들과는 달리 1군 감독이 1군은 물론 2군, 3군까지 직접 총괄하는 형식이고 선동열 감독 부임 이후 그러한 경향이 더 강해졌다. 이는 선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선 감독 후반기에 2군 감독 대신 2군 총괄코치로 故장효조를 임명한 바 있다.하긴 KIA 2군이 워낙 부실하기로 유명하다보니 1군 감독이 직접 총괄하는 것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17. 다만 본적지는 평남. 부친 한상준(1924년생)의 고향이 평남에 실향민이다. 따라서 한대화는 대전 출신 실향민 2세. 대구 출신 실향민 2세(부친 고향이 경기도 개성)인 김재박과 동일한 케이스라고 보면 된다.
  18. 노무현을 뽑았다.
  19. 이명박을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