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옮겨심는다는 뜻의 한자어 移植
본래는 식물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심는다는 뜻을 가진 단어. 이 뜻에서 파생되어 식물뿐만이 아닌 문화 매체 등을 원래 발생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져가 퍼트리는 것도 이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장기 이식이나 소프트웨어 이식 역시 이 뜻에서 파생된 것.
1.1 의학적인 의미의 이식
장기이식 항목을 참조.
1.2 소프트웨어의 이식
영어로는 포팅(Porting)이라고 한다.
한 컴퓨팅 환경(운영체재나 기기 등)에서 작동하도록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다른 컴퓨팅 환경에서도 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말한다.
처음부터 여러 플랫폼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크로스 플랫폼과는 다른 경우. 쉽게 말해 오픈오피스는 처음부터 PC, 매킨토시 등에서 돌아가게 만든 크로스 플랫폼이지만 Microsoft Office는 윈도우용으로만 나왔다가 이후 맥 버젼도 개발해 출시하고 있는 이식 케이스.
1.2.1 게임 업계에서
한 기종으로 나온 게임을 다른 기종으로 다시 만들때 '이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지극히 직관적인 단어라 할 수 있다.
보통 이식이란 암묵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방법이다. 옛날엔 아케이드 머신의 성능이 가정용보다 강력했기 때문에 이식이란 보통 다운이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아케이드에서 가정용으로, PC에서 가정용으로 내려오며, 이 반대가 되었을 때 혹은 이로 인해 게임이 완전히 바뀌는 경우를 역이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정용으로 나온 격투게임이 아케이드로 출시되거나, 전연령용 콘솔 미연시가 PC판 성인용으로 이식된다거나 하는 흔치 않는 경우가 그러하다.
전술했듯 가정용 머신은 여러가지 한계로 다운이식이 불가피했으나, 오락실 게임을 집에서 즐긴다는 일은 큰 축복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발매 그 자체가 매우 환영받는 일이었다. 주로 그래픽쪽에서 손해를 많이 봐야했고 캐릭터가 작아지고 프레임이 삭제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기에 그것들이 생명인 격투게임은 게임성이 다소 훼손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오락실에서도 없는 기능 (아랑전설 2인데 사천왕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거나) 을 추가해 준다거나 하는 서비스는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가정용 게임기의 성능이 올라가자 이식의 완성도도 높아지기 시작했고, 그 예로 남코의 철권 시리즈는 오락실 기판과 플레이스테이션이 사실상 엇비슷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케이드의 게임성에 더해 각종 추가요소로 서비스를 듬뿍 집어넣어 이식판을 출시했다. 그 양이 너무도 어마어마했기에 초월이식 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근래 들어서는 과거의 게임을 다시 이식하는 것이 유행으로 보통 HD 리마스터라는 단어를 붙인다.
다른 기종으로의 이식은 쉬운 일이 아니다. 프로그래밍을 처음부터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래픽 리소스도 처음부터 다시 손봐야 하고 음악도 기계의 음원에 맞춰 다시 프로그래밍 해야 했다. 옛날 기기의 게임을 이식하는 HD 리마스터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어서 ZOE 아누비스처럼 이식 결과물이 엉망이라 다른 회사에 맡겨 처음부터 다시 작업 한 경우도 있다. 그나마 게임이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기획으로 골머리를 앓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행운이다.
게다가 옛날 게임은 대부분 해상도가 4:3 비율에 맞춰 제작되었기 때문에 현재 가장 많이 쓰이는 16:9 비율로 옮기는 데에서도 문제를 겪는다.
에로게의 경우 콘솔 게임의 엄격한 심의 때문에 이식할 경우 전연령판으로 변경되는 경우가 많다.
게임 제작사가 직접 이식하기도 하지만 기술이나 자금 등의 문제로 다른 회사에 이식을 맡기거나 협력을 요청하는 경우도 많으며, 아예 프로토타입처럼 이식을 주로 맡는 게임 회사도 있다.
리듬게임에서는 한쪽 기종의 수록곡을 다른 기종에 수록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2 이탈리아 요리의 한자식 표기
伊食이라고 쓴다. 이탈리아 요리 항목을 참조.
3 조선의 문장가 이식
이식(李植, 1584년∼1647년)
자는 여고, 호는 택당, 본관은 덕수이다.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618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등용되어 이조좌랑이 되었다. 그 후 부제학·대제학·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1642년 김상헌 등과 함께 청과의 화의를 반대하였다 하여 선양에 잡혀 갔다가 돌아올 때, 다시 의주에서 붙잡혔으나 탈출하여 돌아왔다.
그는 또한 장유와 더불어 당대 일류의 문장가였으며, 이정구·신흠·장유와 더불어 조선중기 문장 4대가 월상계택(月象谿)으로 꼽혔다. 이는 네명의 호를 딴 것으로, 이식은 택澤로 네번째에 든다. [1] <선조실록> 수정 작업을 전담하였다.
이식은 상당히 복고적인 문장가였다. 그 성리학적 결벽은 문장 뿐만 아니라 자해서인 <초학자훈증집>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식은 주자의 제자인 진순의 <북계자의>를 참고하여 <초학자훈증집>을 저술하였는데, 진순이 '道'항목을 설명할 때 노장老壯사상을 곁들여 설명한 반면 이식은 '도'를 설명할 때 노자의 노자도 꺼내지 않았다.
당시 조선에서는 양명좌파의 문장이 인기를 끌었는데, 중국의 양명좌파 문인들이 거친 행동을 한 것을 듣고는 조선의 문인들까지 이에 경도될까봐 걱정한 택당이 일부로 이런 식의 복고적 노선을 취했다는 주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