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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해시의 지명
장유(지역) 문서 참조.
2 나이가 많고 적음
長幼라고 씀. 장유유서 등에 사용된다.
3 조선의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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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維, 1587~1663
호는 계곡(谿谷)이며 본관은 덕수 장씨다. 효종비 인선왕후의 아버지. 말하자면 왕의 장인이다.
우의정까지 지냈으며, 김장생의 문인으로 인조반정에 가담했지만 당시 공신들의 전횡을 비판하다 좌천되기도 했다고 한다.
최명길, 이시백, 조익 등과 친했다고 한다. 최명길과 함께 대표적인 주화파였으나 최명길의 입지에 아무래도 묻힌다(...) 왠지 최명길만 혼자 주화파 했던 것 같아
천문·지리·의술·병서·그림·글씨에 능통했고,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신흠·이식과 더불어 4대가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 꼽혔다. 이는 네명의 호를 딴 것으로, 장유는 계谿로 세번째에 든다. [1] 여한구문가로 꼽힌 적도 있다.
그런 인물이었는지 자신감도 대단했던 모양.
“중국에는 학술에 갈래가 많아 정학자(正學者)도 있고 단학자(丹學者)도 있고 정주(程朱, 정자와 주자)를 배우는 자도 있고 육씨(陸氏, 육구연)를 배우는 자도 있어 문경(門經)이 불일(不一)한데 우리나라는 유식무식(有識無識)할 것 없이, 책끼고 글 읽는 사람은 다 정주(程朱)를 송(誦)하여 다른 학(學)이 있음을 듣지 못하나 우리 사습(士習)이 과연 중국보다 훌륭하고 그런 것인가?”
심지어 양명학을 선학이라며 의롭지 않다 하는 것을 까버리기도 했으나, 송시열에게는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와 주자를 주로 하였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만한 이가 없다"라며 좋은 평을 받았다.
척화파의 수장인 김상헌의 형이자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의 사위였다. 그런데 담배에 관해서 지독한 혐연가였던 장인과 달리 장유는 조선 최초로 담배를 핀 인물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골초였다. 오죽하면 자신의 저서 <계곡만필>에 보면 구구절절 담배 예찬론과 변호 일색 투성이다. 하지만 장인이 보기에는 썩 좋지 않았던 모양. 승정원일기같은 당대 기록에도 담배 문제로 장인과 사위가 사이좋게 투닥거린 내용도 남아있을 정도다. 야사에도 탑전삽화(榻前 揷話)와 구용정 일화가 가장 유명하다.
어느 날 장인과 사위가 인조를 친견하던 중 담배 얘기가 나오자 문득 김상용이 자신의 사위 장유를 보며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요초(妖草)인 담배를 그렇게 사랑하는고? 그것은 분명히 밝지 못한 일이니 그렇게 사물에 어두워서 어찌 국사를 담당할 수 있을꼬?"
하는 말로서 왕 앞에서 힐책을 하였다. 장유는 이 말을 듣고,
"장인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영초(靈草)를 배척하십니까? 장인께서 만일 담배를 사랑하셨더라면 지금보다 더욱 명상(名相)이 되셨을 것입니다."
하는 말로써 응수를 하였다. 인조가 이 모양을 보고 웃으며 둘의 말이 모두 일리가 있다며 중재를 했다.
장유가 어전(御前)에서도 거리낌없이 한 대 피워 물고 담배연기를 뿜어댔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담배를 피울 줄 모르고 있었다. 그때 한참 눈여겨보던 김상용은 마지못해 한 마디 건네었다.
"사부빈객(士夫賓客) 장유는 어전에서도 흡연하는가?"
따끔하게 사위를 나무랐다. 장유는 그 뜻을 깨닫고 담뱃대의 불을 껐다. 그러나 김상용은 다시 한번 한마디 했다.
"구용정(口容正)일세."
이것은 입의 모양을 바르게 가지라는 말이다. 담배를 피우려면 입을 삐죽이며 뻑뻑 소리를 내야 하니 이 모양이 단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장유는 그 후부터 어전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이후부터 존귀한 사람이나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풍습이 일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의견이 달라 투닥거려도 옹서지간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던 모양. 그러나 문제는 장유의 동생 장신인데 장신은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 김류의 아들이자 강화 수비 총책임자인 강도순찰사 천하의 개쌍놈 김경징과 함께 졸속으로 강화도를 지키다가 어이없게 청군의 침입을 허용한 무능한 인물이였다. 이 와중에 김상용은 평소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찾으며 일부러 화약에 불을 지펴 손자와 김만중의 부친 김익겸 등과 함께 자폭했다.[2] 결국 자신의 동생이 장인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고 강화도를 함락시킨 주범이 된 셈. 이 탓에 장신은 자진함으로서 죗값을 받지만 결국 장신의 형이자 김싱용의 사위인 장유도 일생의 큰 오점을 남긴 셈이다.
사후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지고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4 삼국지의 인물
장유(삼국지) 문서 참조.- ↑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당송팔대가의 고문(古文)을 모범으로 삼은 점, 주자학적인 사고가 규범이 되고 있는 점, 이들 모두가 화려한 가문 출신이며 관료로서 출세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 ↑ 문제는 김상용 사후에 벌어지는데,이때 김상용이 정말 담배를 피려다가 실수로 폭발 사고가 일어난것인지,아니면 의도하고 자폭한 것인지에 대해 조정에서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당시 정황상 다소 당략적인 요소가 짙었던 이 논쟁은 김상용의 자손들이 거칠게 항의하면서 최종적으로는 순절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장유와의 일화에서도 보듯이 생전 본인이 담배를 노골적으로 증오한 점도 순절쪽으로 기우는데 유리했다. 비슷한 사례로 이순신의 조카 이완도 이런 경우가 있다. 술먹고 전투 도중 불화살을 쏘다가 실수로 화약단지에 떨궈 폭사한 것이라는 의혹이 있었다. 정묘호란 당시 의주성을 지키다가 상황이 불리해지자 자폭한 것으로 일단락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