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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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宗直,1431~1492

1 소개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 생애에는 정계에서 그다지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세조 대에 출사했으나, 잡학을 익히라는 세조의 권유를 까다가 크게 질책을 당하기도 했고, 《조의제문》으로 세조를 당시의 대역죄 수준으로 뒷담화 비판하기도 하는 등 근본적으로 세조를 좋아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럼 관직에 왜 나갔냐?[1]

어린아이처럼 키가 작았지만 루저 글을 잘 썼고,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2 무오사화

좌천 당시 상관이었던 유자광과 특히 사이가 안 좋았는데, 서얼이라는 이유로 그를 멸시했다. 이와 관련된 일화 역시 유명하다. 유자광이 경상관찰사, 그러니까 지금의 도지사 정도의 직위일 때, 함양에 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은 유자광이 쓴 시를 현판으로 만들어 걸어놓은 것을 보고는, 그것을 떼어 불에 태워버리게 명했다고 한다. 비유를 들면, 경상도지사가 내린 시문이나 그림을 태워버린 것이다. 전하는 말로는 김종직 자신보다 8살 어리고, 출사 시기도 9년이나 늦었으면서도, 게다가 서자 주제에 빠른 출세를 한 유자광을 김종직이 평소 고까워했기 때문이라는 것.[2] 또한 하루는 어느 모임에서 제자들이 자신들보다 관직이 높고 나이도 많은 유자광을 대놓고 서출인것을 비웃는 등 알아서 화를 좌초한면이 있다.
후일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 은유와 화려한 문장 속에 숨겨진 뜻을 연산의 명을 받은 유자광이 잘 풀이해내어, 이에 진노한 연산군에 의해 그의 제자들이 모두 사형이나 유배를 갔고, 이미 죽은 김종직도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조의제문》 항목을, 이로 인해 발생한 사건은 무오사화 참조.

3 그의 제자들

수많은 를 남긴 뛰어난 문인이었고, 정몽주에게서부터 내려오는 도학의 계승자였다. 그의 스승은 아버지인 강호 김숙자(1389~1456)로 야은 길재의 제자이다. 김굉필(이후 김종직과 갈라섬)과 김일손. 정여창, 남효온, 남곤 등 많은 제자를 육성했다. 그런데 다만 제자 교육에서는 좀 애매하다. 이들이 이후 사림의 기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오사화의 배경이 된 김일손의 야사 드립치기나, 남효온의 전기 소설 《육신전(六臣傳)》 등은 유교의 술이부작述而不作[3]과는 안드로메다 차이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걍 깽판친 것으로 후대에 사림이 집권하면서 스승이라고 높이지 않았으면, 오히려 사림의 존재 자체를 없앨 뻔한 위기상황을 초래한 원흉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른바 '영남학파'의 시초가 되는 인물이다. 당대에는 경상도 사당(선비당)이라고 불렸다. 초기 유학에서는 붕당, 이라는 단어가 별로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었지만 송대 이후 성리학 체제에서는 오히려 이익을 탐해 모인 소인당에 맞서 도학을 중심으로 군자당이 결집해야한다는 논리로 전환되었고, 성리학을 완성시켰다고 평가받는 주자는 임금까지도 군자당으로 끌어와야 한다는 인군위당(引君爲黨)을 주장했다. 사당이라고 불린 것 자체가 이미 훈구척신들과는 구별되는 사림의 정체성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육성한 제자들은 훈구파와 갈등을 일으켜 몇 차례 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근데 또 정작 남곤이 기묘사화의 주범이라고, 거의 억울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까이고 있다. 특히 스승과 같이 노골적으로 유자광을 조롱하거나 멸시하였는데 그 이유는 유자광이 노비출신의 어머니를 둔 얼자출신 주제에 고위직에 오른 것이 건방지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중시하는 유교로 심신을 수련했다는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가 참 찌질하다.

4

의외로 조선시대에도 평이 좋지만은 않다. 이황은 말년에 '김종직의 평생 사업은 시화(詞華)였다고 평했다. (성리학의 도를 깊게 닦은 게 아니라) 문장을 아름답게 쓰는 것에 평생을 바쳤다는 뜻이다. 성호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김종직은 하나의 문사(文士)일 뿐이다.' 라고 비판했다. 특히 허균은 《김종직론》에서 '《조의제문》을 쓰고도 세조에게서 벼슬을 한 것은 가소로운 일'이라며 맹비난했다.[4]

사실 결정적 계기는 수제자 김굉필이 김종직이 문장에만 치중한다고 스승과 갈라선 것이다(...). 이후 조선 성리학의 전통이 정통 성리학 공부에 몰두한 제자 김굉필과 정여창, 그리고 김굉필의 제자 조광조로 이어지면서 이들과는 달리 김종직은 조선 문묘배향 18현에서도 제외된다. 송시열을 비롯한 후대 성리학자들의 평가는 대체로 정몽주와 김굉필을 이어주는 중간다리 정도. 그리고 김굉필이 조선 성리학의 정통주자로 인정받다보니, 후대 유학자들은 김굉필이 스승과 결별한 것도 다 진정한 학문의 길을 가기 위함이었다고 옹호해 주는 분위기이다. 군사부일체 아니었나?
  1. 좀 이상한 게 김종직은 성종 앞에서 대놓고 성삼문을 찬양한 적도 있는데 성삼문은 사육신 중 하나이며 성종은 세조손자이다. 따라서 김종직의 말은 성종의 입장에서는 할아버지가 모욕당한 셈이다. 근데 정작 본인은 세조와 성종을 섬겼으니 이뭐병.
  2. 성학(聖學)으로 심신을 수양한다는 선비를 자처한 사람의 태도라고 하기에는 좀 곤란하다.
  3. 공자의 말, “나는 전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을 기술할 따름이지 새로운 것을 지어내는 것은 아니다. 옛 것을 믿고 좋아하기 때문이다. 마음 깊이 은(殷)의 현인 팽(彭)을 본받고자 하는 것이다.” 子曰 述而不作(술이부작) 信而好古(신이호고) 竊比於我老彭(절비어아노팽)에서 유래한 말이다. 없는 사실이나 불명확한 사실은 배제하고, 사실 그대로만 기술한다는 뜻과도 통한다.
  4. 다만 허균도 당대나 후대나 유학자들에게는 이단아 취급받은 인물이라, "네놈이 뭔데 김종직을 까냐?" 라고 역으로 맹비난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