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임보

W020090810385337689608.jpg

李林甫[1]
(683 ~ 752)

당 제국 상서좌복야
전임 배요경이림보
742년~752년
후임 안록산

당나라 현종 당시 정치가중국 역사상 최강의 간신으로 꼽힌다. 어느 정도인가 하니, 입으로는 꿀처럼 달콤한 말을 하지만 뱃속에는 칼을 숨기고 있다는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는 고사성어를 낳았을 정도다.

위 고사성어를 보면 알 수 있듯 모략, 위선, 권모술수에 있어서 독보적인 인물로, 온갖 권력암투가 설치는 중국 역사에서도 단연 역대 최강이었다. 덕분에 17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세월을 재상자리에 앉아있었고 재상인 상태로 죽는다. 그에 대한 공포심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니 안록산이 반란 준비를 마쳐놓고도 그가 죽을 때까지 기다렸을 정도. 양귀비의 엄청난 총애를 받았던 양국충도 감히 이임보가 누리는 재상자리를 넘보지 못했다.

1 생애

1.1 시작

당의 창시자 이연의 할아버지의 자손으로 당 황실과 아주 먼친척이었다. 즉, 관롱집단의 일원이었다. 어렸을 적에 음악과 그림에 남다른 솜씨가 있었고 사냥을 좋아하는 등 무예에도 소질이 있었다. 하지만 그다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노는데 바빴는데, 그래도 황실에 연줄이 닿아 숙부를 통해 관직에 오른다.

간신이면 갖추어야 할 필수 능력을 이미 가지고 있었는데, 당연하게도 성격이 둥글둥글하였고 특히 그를 대면한 사람들에겐 온화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철저히 계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내시와 황후 쪽과 친목을 다지는데 주력하였다. 주로 관리와 환관의 마찰을 빚는 경우가 대부분인 궁중에선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임보가 내시와 후궁 줄을 타려고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현종은 연로하여 점점 정치에 싫증을 내기 시작하였고 점차 후궁에 지내는 시간이 잦아졌다. 양귀비에 빠진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래서 내시와 후궁에 연줄이 있으면 황제와 더 가까워 질 수 있다는 이점이 있으며 또한 그들의 호감을 산다면 황제에게 좋은 평판이 전달될 테니 출세에도 유리하다.

뿐만 아니라 내시와 후궁들은 현종이 어떤 기분인지 그리고 어떤 의중을 가지고 있는지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다. 이임보는 그들과 친분을 최대한 이용, 현종의 이런 의중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고 따라서 최대한 현종의 의중에 맞는 정책을 펼 수 있었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이임보는 순조롭게 출세가도를 달린다. 726년 어부중승으로 승진하였고 이때 구파의 수장이었던 장설을 탄핵하는데 참여한다. 그 뒤 형부시랑, 사부시랑 등의 벼슬을 누린다.

또한 현종의 총애를 받고 있는 무혜비와 그 유모의 후원자가 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그는 이들의 도움으로 황문시랑에 발탁된다. 그 뒤 734년 예부서경에 승진한 뒤 재상 후보에까지 오른다.

1.2 전개

그런데 이때 구파의 수장인 장구령이 반대하였고 따라서 이임보는 그와 사이가 나빠진다. 그러나 이임보는 이런 불편한 감정을 일절 내보이지 않고 그에게 겸손하게 대했다. 736년엔 현종이 낙양에서 장안으로 천도할 마음을 품었는데 장구령, 배요경이 반대하는 가운데 이임보는 적극적으로 옹호하였고 마침내 실행시킨다. 이때 그는 "지금 천도하면 밭을 망치게 된다"는 주장에 "밭을 망치면 세금을 면제하면 된다"고 반박하여 천도를 옹호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현종의 신임을 사게 된다.

또 현종이 절도사를 임명하는 가운데 장구령이 절도사 후보가 학문이 깊지 못하다며 반대하자, 이임보는 현종에게 "장구령은 절도사의 임명에 대해 그의 학문이 되어있지 않는다고 반대하는데 장구령도 학생일 때가 없었습니까? 재능이 있다면 학문은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천하의 다양한 유능한 인물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하며 지지했다고 한다. 이렇게 이림보는 현종에게 점점 점수를 딴다.

드디어 일이 벌어진다. 훗날 황태자인 이영과 형제인 이요, 그리고 어머니가 무혜비에게 현종의 총애를 뺏긴 것에 대해 원망하는 것을 무혜비가 전해듣고 현종에게 호소하는 일이 생겼다. 현종은 대신을 모아놓고 이영을 폐위하겠다고 하자 장구령은 강하게 반대한다. 대다수 대신들이 보기에는 이 정도의 일로 황태자를 폐위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었다. 이임보도 초기엔 이것에 동의하였고 장구령 등과 함께 황제에게 나아가 건의키로 하였는데, 황제를 알현한 자리에서 이임보는 아무런 의견을 내놓지 않는다.[2]

그 뒤 친분이 있었던 환관 등에게 "이것은 폐하의 가정문제인데 외부인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면서 뒤통수. 그 뒤 이들이 붕당을 지어 황제의 권력에 반항한다는 명분을 삼아 기어이 정구령, 배요경의 실권을 빼앗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후 무혜비의 자식으로 황태자를 세우려던 이임보의 기도는 고력사가 충왕 이형을(이영, 이요가 사사되면서 사실상 장자이기 때문에) 황테자로 밀면서 실패한다.

1.3 절정

이임보는 중서령을 겸한 재상이 된다. 그가 재상이 된 뒤 황제에게 간언하는 일은 없어졌다고 한다.

737년엔 감찰사 주자량이 이임보가 재상의 그릇이 못된다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었는데 현종이 이에 분노해 주자량을 때려 죽이는 일이 있었다.

현종은 이임보가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뒤 황태자인 이영과 형제인 이요, 그리고 이부인을 서인으로 폐하고 자살을 명한다.

그러나 이임보는 나름 실적도 있어서, 당의 율법인 당률과 소의를 편찬하는 일을 완수한 뒤 해마다 50만 매에 이르는 보고서를 간략화해 매주 2매로 올리게 하게끔 개혁하기도 한다.

738년, 관서 절도사도 겸한다. 그런데 이임보와 강하게 끈이 닿았던 무혜비가 죽는다.

739년, 이부서경을 겸직하고 인사권도 장악한다.

744년엔 현종이 "10년간 이임보에게 맡겨 아무런 문제없이 군정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 이임보에게 모든 정치를 맡기는 것이 어떨까"하고 말할 정도로 신뢰를 받는다.

745년엔 이임보는 양귀비의 인척 등을 심복으로 삼는다. 이때 이임보는 아예 자기 집에서 정무를 처리했다고 한다.

746년부터는 이임보가 싫어하는 인물들이 적극적으로 좌천당하거나 암살된다. 이로써 현종의 주위에는 철저하게 이임보의 심복들만 남게 된다.

현종은 재주가 있는 사람을 새롭게 발탁하려고 시도하는데 이임보는 재능있는 자가 발탁되어 새로운 정적으로 떠오르게 될 것을 우려해 시험을 매우 어렵게 출제한다. 때문에 급제하는 자가 한명도 나오지 않았고 이에 이임보는 재야에 현인이 없음을 축하한다(...).

또한 이임보는 문신들이 장성내 절도사를 거치며 군공을 세우고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하면서 재상으로 승진하는 개원시기의 승진 관행을 억제하기 위해 절도사 직책을 철저하게 무관들에게 준다. 그리고 이들 무관들은 이민족 출신이 많았다. 이임보는 이를 현종하게 간할 때 "문신들은 겁이 많기 때문에 병사를 이끌어야 하는 절도사 직책엔 걸맞지 않습니다. 이러한 직책은 이민족들에게 주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이민족들은 용감하고 싸움에 단련되어있고 또한 파벌에 휩싸이는 일이 없습니다. 또한 이들은 천한 출신인데 황제의 은혜로 인해 발탁이 된다면 이들은 이것에 감격하여 목숨을 걸고 싸울 것입니다"라고 한다. 이에 현종은 동의하였고 그 결과 안록산, 고선지와 같은 번장들이 등용된다.

이는 장성내 절도사직까지 무관들에게 줌으로써 이들이 중국 영토 내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휘두르는 군벌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안사의 난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는 정책이다.

748년에는 황태자를 반역죄로 옭아매 갈아치우려고까지 시작한다. 어린 시절부터 황실에서 황태자와 같이 자랐고(개원초기 토번의 침공때 선봉장으로 나섰다가 아버지가 전사했고, 이를 불쌍히 여긴 당현종이 황실로 데려와 키웠다. 황태자인 충왕 이형과 불알친구...), 이때에 군부 최고의 거물로 손꼽히던 왕충사를 목표로 일단 지정하였다. 왕충사가 표적이 된 것은 막강한 군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이때에 들어 하서-농우 절도사직을 겸직하고 있었는데, 이나마도 747년 다른 절도사직을 포기한 결과로, 747년까지 삭방, 하동절도사까지 겸직해 4개 절도사직을 소유하고 서북방 일대의 군권을 한손에 거머쥐고 있었던 인물이다. 한때 지휘병력만 27만에 달해 안록산은 상대도 안되는 위상을 가진 인물이였다. 여기에 조정에서도 어사대부직까지 맡고 있었다.
일단 이 수준에 도달한 사람을 없애려면 큰 죄목이 필요했다. 이임보는 왕충사가 석보성 공략에 소극적으로 태업했고, 동시에 황태자를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기도했다고 참소했다. 여기서 황태자건은 둘째치고 고작 성 하나를 공략하는 데 태업했다고 참소한 이유는 석보성이 매우 중요한 성이었기 때문이다. 석보성은 청해성 황원현에 위치한 성으로, 무후~현종시기 당과 토번의 우열관계를 나타낸다 할 정도로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존재한 성이다. 개원시기 장기간 당의 소유에 있었으나 토번이 747년 이를 공략, 점령한 성인데, 당현종이 석보성 탈환을 주장하자 왕충사가 이에 반대했다.[3] 이를 빌미삼은 이임보는 자신에게 위험인물로 성장한 왕충사와 자신이 세우지 않아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황태자를 한꺼번에 엮어 제거하고자 기도한다.

그러나 군부에서의 반발과[4] 당현종의 소극적인 태도[5]에 의해 황태자 퇴출 기도는 실패, 왕충사 또한 한양태수로 좌천되는 정도에서 마무리지되었다. 또한 호부상서 겸 어사중승인 양신긍이 황제의 호감을 사자 심복이였던 왕홍을 활용해 옥사를 일으켜 제거한다.

749년엔 이를 보다못한 함영태수 조봉장이 이임보의 죄를 상소하였으나 이 상소문이 닿기 전에 이임보는 알아챘고 병사를 보내 조봉장을 죽인다. 또한 그는 중앙군의 반란을 우려하여 중앙군의 병부를 폐지하였고 따라서 중앙군은 군대는 없고 관리만 있는 상태가 된다.

이 시점이 이임보의 권력이 최강이었던 시절이었다.

1.4 종말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고, 양귀비를 방패삼아 등장한 양국충에 의해 이임보는 조금씩 밀려나게 된다.

750년부터는 양국충의 권세는 점점 강해지고 있었고 이임보의 심복들이었던 서경 소사, 대부 송혼 등이 좌천당한다. 이임보는 이들을 구제하고자 하였으나 그럴 수 없었다.

752년 귀족들이 착취한 지방에서 착취한 지방화를 정부에서 양전 하나로 바꿔 시장에 쓰는 바람에 물가가 치솟는다. 이임보는 이를 막기 위해 1개월간에 걸쳐 착취된 돈을 모두 회수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에 반대한 귀족들은 이를 양국층에 일러 이를 저지한다. 이로써 이임보의 입지는 약화된다.

설상가상으로 이임보가 임명한 돌궐족 출신의 아포사가 안록산과의 불화로 반란을 일으켰으며 그의 심복인 왕이가 반란을 일으킨다. 이임보는 왕이를 구하려 하였으나 양국충의 의견에 밀려 왕이는 사형당한다.

양국충은 현종에게 이임보가 두 반란에 연루되어있다고 고하고 다른 대신들이었던 진희열, 가서한 등도 그렇게 주장했으므로 현종도 이임보를 싫어하게 된다.

이임보는 이에 대응하여 양국충이 주도한 남소 토벌이 몇차례나 실패한 것을 핑계삼아 양국충이 직접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검남 절도사의 임지로 파견하여 조정에서 떠나게 하려고 했고, 현종은 양국충에게 임지로 가라고 몇 차례나 재촉하였으나 그때 이임보의 병세가 위중하였으므로 양국충은 이임보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며 일부러 떠나는 것을 늦춘다.

이임보의 죽음이 명백해지자 양국충은 이임보를 병문안 갔고 이임보는 눈물을 흘리며 양국충에게 뒷일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곧 죽는다.

그러나 양국충은 그의 말을 별로 귀담아 들을리 없었다. 753년 양국충은 안록산, 진희열과 함께 이임보는 아포사와 공모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미 죽은 이임보의 과거 관직을 박탈하고 그를 서민으로 삼은 뒤 재산을 몰수한다.

2 이것저것

이임보는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도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를 눈치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 자신은 싫어했으나 현종의 신뢰를 받은 대신과도 친하게 지냈고 그의 직위가 오를 때까지 후원한 뒤 결정적인 순간에 실각시킨 일도 수두룩했다. 이로 인해 구밀복검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기게 된다.

하루는 현종이 물었다. "엄정지(嚴挺之)는 어디 있는가." 엄정지는 이임보가 지방으로 내쫓은 충신. 질투의 화신 이임보는 엄정지가 중앙 요직에 발탁될까 겁이 났다. 꾀를 냈다. "높은 벼슬을 받기 위해선 폐하를 배알할 기회를 잡는 게 좋으니, 우선 신병을 핑계로 상경하고 싶다는 상소를 올리시오." 동생을 통해 이 말을 들은 엄정지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자 이임보는 현종에게 "아무래도 늙고 몸도 약해 중책은 어려우니 한가한 자리를 맡기지요"라고 고했다. 나중에야 이임보의 농간을 깨닫고 울분이 치밀어 오른 엄정지는 병이 나 죽고 말았다.

이임보의 권세가 지나치게 높은 것을 아들인 이수가 두려워하여 이임보와 산책하며 이같이 말했다. "아버지께서 오래 권세를 잡아 세상엔 원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재앙이 하루아침에 들이닥칠까 두렵습니다." 그러자 이임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미 이 지경에 이른 이상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임보는 자객을 두려워하여 외출시엔 백명 이상의 호위를 붙여두었다. 집에 있을 때도 문이나 벽을 여러 겹으로 두고 바닥을 모두 돌로 지었다. 그는 잘 때도 침상을 자주 바꾸어 집의 하인들도 그가 거처하는 곳을 몰랐다고 한다.

재상이 종자를 많이 두는 관습은 이임보 때 시작되었다.

이임보의 집에 언월당이라는 서재가 있었는데 이임보가 이 서재에 가끔씩 들어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할 때마다 반드시 조정에 피바람이 일어났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가 언월당에 들어갔는가 여부에 상당히 신경을 썼다고 한다(...).

안록산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임보만은 매우 두려워했다. 따라서 이임보를 만나면 겨울에도 땀을 흘렸다고 한다. 안록산은 근거지인 범양에 머물 때도 이임보의 동향을 언제나 신경썼다고 한다.

학문은 그다지 높지 않아 가끔씩 글자를 잘못 읽거나 쓸 때 실수가 있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이 과거시험 시험관 총괄이었다는 것.

아들은 이수를 포함한 25명 딸은 25명 있었다고 한다.

3 평가

이임보는 여러 간신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는 존재이다. 클래스가 다른 존재라고 해도 좋을 정도.

이임보는 외척으로써 권력을 잡은 것도 아니고, 유력한 종실 출신도 아니며, 황제와 연줄이 닿은 것도 아니고, 환관으로써 황제의 눈과 귀를 막은 것도 아니다. 심지어 이임보는 거대한 파벌을 만들지도 않았다.(...) 그의 인사는 철저하게 연공서열로 승진시켰으며 재능이 있어도 특별히 승진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뇌물을 이리저리 돌린 교활한 자들은 특별히 승진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심복들과도 기본적으로 거리를 두었고, 어디까지나 이용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이를 통해 이임보는 간신이라 평을 듣는 존재 중 드물게도 천수를 누린, 그것도 심복들이 줄줄히 잡혀가는 스캔들이 터지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천수를 누린 극히 드문 존재로 남을 수 있었다. 저 안록산 또한 이런 이임보의 정치술에 두려움을 느껴 야심을 숨기고 조용히 있을 수밖엔 없을 정도로. 한마디로 정적들이 자기를 알아서 두려워하게 만든 무서운 사람이다.

또한 능력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어서 그가 재상을 17년에 걸쳐 지내는 동안 그다지 커다란 소동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반란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고선지와 같은 장군이 서역을 개척하는 등의 군사원정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당률의 편찬이나 절차의 간소화 등 여러가지 개혁을 꾀하는 등 어느 정도 정무처리에도 신경을 쓰기도 하였다. 관중에 많은 곡식을 쌓아두었다는 기록이 남는 등 재정 운영도 꽤 건전하게 하였으며, 말년에 지방관의 탐욕을 막게하거나 귀족들이 정부의 돈을 제멋대로 쓰는 일을 제재하려다 양국충에 의해 실패하는 등의 모습을 보면 그가 단순히 사리사욕에만 관심이 있는 탐관오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임보는 훗날 간신의 대부격으로 남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사실상 당나라 멸망의 주춧돌을 놓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권력을 잡은 방법은 매우 정교했다. 자신 외에 실권을 잡을 수 있는 모든 파벌을 철저하게 쪼개고 나누어 서로 이전투구하게 만들었으며, 그 사이에서 홀로 우뚝 선 존재로 언제든 어떤 파벌과도 손을 잡고 끊을 수 있는 상태를 17년간 유지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놀음 과정에서 여타 파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거물급 관리들은 좌천시키거나 지방 태수로 임명해 쫒아낸다. 오로지 그 혼자만이 중량급 정치인으로 중앙정계에 남아있었던 것.

그 결과 중앙 정부는 정계의 중심이 될 수 없는, 빈약한 수준 인물들이 판치는 반면 지방 정부는 거물급 인사들이 있었고 그 결과 그의 사후 이렇게 갈라지고 쪼개진 여러 파벌들의 정치투쟁은 정국의 혼란을 가져온다.

게다가 문신들이 장성내 절도사를 거처 재상이 되어 정계에 부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절도사들은 장성내외 할것 없이 무관들로 채우는 정책을 폈고, 그 결과 정부에 대한 충성이 낮은 인물들이 지방 군권력을 잡게 된다. 덤으로 중앙군까지 사실상 해산시켰으므로 유사시 조정이 직접 지휘할 군대가 없게 만들었다. 이는 훗날 안사의 난이라는 대규모 반란을 초래하게 된다.

이임보는 이런 매우 정교한 정치공작을 통해 중앙정부를 운용했고, 그 외에 중앙 정부를 이끌 수 있는 수준의 거물급 인사가 없었기에 그가 죽고 양국충이 권력을 잡자 중앙 정부는 말 그대로 수많은 파벌이 난립하는 혼란상이 빚어진다. 게다가 양국충은 능력도 별로인데다가 안사의 난 초기에 죽는 바람에 그 이후가 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 결과 군사 반란이 일어나자 이들은 잘 싸우는 장수들에 대해 지독한 견제를 하게 되어 결국 조기 진압도 가능했던 반란을 질질 끌게 만든다.

안사의 난이 일어났을 때도 민중들이 절도사들에 대한 지지는 약했으며 따라서 정부군이 그렇게까지 불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유능한 장수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임보 집권 17년을 거치면서 산산히 쪼개진 파벌들은 자신 외의 파벌로 여겨진 장수들의 등을 찌르기 바빴고, 고선지와 같은 명장들이 그 희생양이 되어 처형되는 등 조기 진압에 실패, 당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즉 이임보는 권력을 견고하기 위해 그 자신만이 운용할 수 있고, 자신이 죽고 나면 정국에 대 혼란을 가져오는 근시안적 방법을 썼고, 그 결과 당나라를 멸망시키는 토대를 쌓는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그는 후세에 간신 중에서도 최고봉에 속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게 된다.

여담으로 관롱집단과 비관롱집단의 대립으로 당의 역사를 이해하게 될 경우 이임보의 집권은 관롱집단으로의 회귀의 상징적인 사건이 된다.
  1. 이림보라고도 읽는 경우도 있다.
  2. 여담인데 이 장면이 바로 조선 선조송강 정철이 홀로 후사를 주장해 입을 다문 류성룡, 이산해와 달리 잘려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3. 이시기에 이는 돌궐 제2제국이 멸망했기 때문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 참고로 석보성은 후에 가서한이 탈환하는데, 수백명이 지키는 성의 탈환에 수만명의 사상자가 생겨서 '왕충사가 옳았다' 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4. 가서한이 왕충사 후임으로 절도사로 부임되면서 당현종에게 직접 왕충사를 살려달라 빌었다.
  5. 황태자를 내세운 쿠데타건은 '황태자가 궁궐 안에만 있었는데 그런 말을 할 수 있을리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황태자 이형도 고력사 등 자신의 연줄을 최대한 활용하고 자중하는 태도를 보여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