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1 조선시대의 정치인 정철의 호

한자로는 松江. 밑의 3번 송강과는 다른 사람이다. 어차피 사람됨은 그놈이 그놈

이 송강은 전라도(현 전라남도) 담양군 지곡면(芝谷) 성산(星山) 기슭의 송강(松江) 가에서 10년 동안 수학했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 때 그는 11살 터울인 선배 서하당 김서원을 존경해서 이 곳을 마음의 고향으로 삼아 이 를 붙였다고 한다.

2 중국 강동의 송강

한자는 역시 위의 송강과 같다. 삼국지연의에서 좌자조조에게 소환하여 조조를 골탕먹인 그 송강농어가 나오는 곳인데, 사실 실제로 이 말이 관용어가 된 것은 백 년 이상 뒤인 동진 시대이다. # 지금의 상하이 지역, 즉 장강 하류로 비정된다.

3 북송의 도적 혹은 장군

宋江
(? ~ 1121년 4월?)

중국 북송 말기의 도적 혹은 장군.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와 다른 이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보통 동일인으로 본다. 이 케이스가 수호지. 등장 시기가 극명히 짧은데 그 시기도 겹치기 때문.

조정의 착취에 못 이겨 백성들과 하급 관리들과 함께 1119년 12월에 산동에서 반란을 일으켜 하삭을 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10여개의 도시를 함락하고 이렇게 산동 지방을 휩쓸고 다녀 그 세력이 청주, 제주, 복주를 아우를 정도였다고 한다(송사의 기록).

1120년에 조정에서 투항을 권했지만 이를 거절하자 이 때문에 조정에서 증효온에게 군을 이끌도록 해서 파견하자 이를 피하면서 청주에서 남하해 기주(지금의 산동성 임기현)에서 약 1년 동안 관군과 대치했다.

1121년 2월에 회양군을 점령하고 술양을 거쳐서 해주로 갔다가 상선 10여 척을 탈취하고 빼앗은 물품을 싣고 있던 도중, 첩자를 통해 동향을 파악한 장숙야가 육지로 유인하자 배에서 내리는 틈에 공격을 받아 복병으로 포위되고 부장이 사로잡히자 항복했다. 그 이후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행적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도적 송강의 일생이다.

보통 두 인물이 일치하다 여기는 것은 한자도 같을 뿐더러 후몽 등이 송강을 투항시켜 방랍의 난을 토벌해야한다는 발언 등이 있기 때문.

1120년에 방랍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항주, 목주 등으로 세력을 확대하자 조정의 명을 받아 방랍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유연경, 유광세, 신기종 등 약 20명 가량에 다른 장수들과 함께 환관인 동관 휘하에서 참전했으며, 이전부터 이름을 떨쳤다. 1121년 1월 27일에 출발해서 4월 24일에 방랍이 조정에서 파견한 군의 공격으로 방원동으로 도망치자 그 배후로 들어가 도주로를 차단했다.

방랍이 붙잡힌 이후에도 방랍의 반란은 6개 주에 걸쳐 일어난 반란이었기 때문에 잔당들이 저항하자 남아서 이듬해인 6월 5일에 상원동에서 방랍군의 잔당을 공격해 승리했으며, 이후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행적을 알 수 없다고 한다.

1939년에 발견된 절가존이라는 이의 비문에는 방랍의 난 직후인 1121년 4월에 송강 등을 송휘종의 명으로 죽였다고 기록이 되어 있어 소설처럼 토사구팽 당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일본의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동명이인 설을 주장한다.

송강이 언급된 사료로는 황송십조강요, 속자치통감장편기사본밀, 삼조북맹회편에서 인용된 중흥성씨간사록 등이 있다.

3.1 이를 모티브로 한 수호지주인공

송강(수호지) 참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