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之菡
1517~1578
1 개요
본관은 한산(韓山)[1] 이고, 자는 형백(馨伯), 호는 토정(土亭)이다.
1.1 생애
1517년에 충청남도 보령군에서 이치(1477~1530)의 아들로 태어났으며[2] , 맏형인 이지번(李之蕃)[3]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러나 14세와 16세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어 한양으로 올라왔다. 하지만 1547년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안명세(安名世)가 을사사화로 죽음을 맞자, 불의의 권력을 혐오하게 되었다. [4]이후 출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살 것을 결심했다. 그러다가 형인 이지번에게 '처가의 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을 했는데, 그 화는 바로 1549년 4월에 일어난 이홍남의 고변이었다.[5] 이 과정에서 장인 모산수를 포함한 충주 지역의 인사들이 대거 희생되었는데, 당시 충주 지역이 "한 고을이 텅 비게 되었다." 라고 할 정도로 큰 타격을 받았으며, 심지어 충주가 유신현으로 강등되고, 충청도라는 명칭이 청홍도라고 변경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6] 그 후 자신의 출생지인 보령과 거주지인 서울 마포를 근거지로 해서 전국을 유람하면서 민생의 현실을 목도하였고 백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이가를 정리했다. 그 후 그의 나이가 56세인 1573년, 유일(遺逸)[7]로 종6품직 관직에 제수되어 포천 현감이 되었다. 그러나 식량 부족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휼하자는 자신의 소가 무시되자 곧 사직했다. 1578년에는 아산 현감에 제수되어 걸인청(乞人廳)을 세우는 등 백성 구휼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1.2 문헌 속의 이지함
워낙 기인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문헌 속에서 이지함이 등장한다. 가까이는 어우야담 [8]과 천예록[9] [10]에서부터 기옹만필, 동패락송, 대동기문 등에 전할 정도로 당대에 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또한 목민심서[11], 백호전서[12], 성호전집[13], 송자대전[14] 등 후대의 문헌에도 간간히 언급된다.
1.3 대인관계
서경덕의 제자였으며, 성리학자 조식과 교유했고 이이와도 친분이 깊었다.[15] 정두와 교유가 있었다. 또한 조헌, 천민 출신의 서기, 송익필 등은 이지함의 제자였다.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나 조카인 이산해에게 이덕형을 사윗감으로 추천했다고 한다.
1.4 철학사상
그의 철학사상은 『토정유고』에 있는 3편의 글인 '대인설'과 '과욕설', '피지음설'을 통해 알 수 있다. '대인설'에서는 노자와 장자가 주로 사용했던 반어적, 역설적 표현을 사용했는데 [16] 이런 점에서 토정 이지함이 유가 사상뿐만 아니라 도가사상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과욕설'에서는 맹자를 인용해서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을 논했는데, 내용을 보면 당시 사상적인 흐름과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피지음설'에서는 인간관을 볼 수 있다. 피지음설의 내용은 '재용과 권세 등의 지음으로 교유를 맺기보다 산수간과 전야간의 지음 등으로 교유를 맺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1.5 경제관
당시 조선사회가 농업을 중심으로 했음에도 상업을 농업과 반대되는 것, 대립하는 것으로 보는 것보다 상호 보완적임을 두 편의 상소문에서 역설하였다.[17]
1.6 사상적 영향
이지함의 사상은 16~17세기 이후 정인홍, 김육, 김신국, 유몽인 뿐만 아니라 유형원[18], 박제가[19], 유수원, 이규경 등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정도이다. 따라서 조선 중후기 사상사에서 반드시 재조명되어야 할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2 토정비결
그의 호가 토정이라 많은 사람들이 토정비결(土亭祕訣)의 저자로 알고 있지만, 그가 《토정비결》의 저자일 가능성은 예상 외로 적다.
그의 학풍은 성리학에 얽매여 있지 않았고 그 당시로서는 기이하게 여겨지는 행동을 자주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화담 서경덕(徐敬德)의 제자로서 잡학(雜學)에 능했다고는 하나, 그러한 그의 면모가 《토정비결》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20]
먼저, 그의 유고집인 《토정유고》는 그의 사후 100년 후 현손인 이정익(李禎翊)이 편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저서에서도 토정비결에 관한 언급은 없다.
또한 토정비결이 유행했던 시기는 19세기인데, 16세기 사람인 이지함이 생존했던 시기와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 따라서 그가 직접 저술한 저서인지는 불분명한 상황이다.
연암 박지원의 작품으로 유명한 허생전의 주인공 허생의 실제 롤모델로 설정했다는 설이 있다.
3 여담
정확한 출처를 알기 힘든 이야기로 소설 열왕대전기를 보면 이지함은 예언에도 능했다고 전해진다. 위에 따르면 철도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시기에 자신이 살던 마을 위로 철길이 생길 것을 정확히 예언했다고 하며, 또 자신의 무덤 위에는 늘 천둥번개가 친다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겼는데 후대에 이르러 그의 무덤 근처에 송전탑이 생겼다고도 한다.- ↑ 고려시대 대학자 이색의 7대손.
- ↑ 신병주, 『이지함평전』 , 글항아리 47쪽
- ↑ 조선 선조 시기에 영의정을 역임했으며, 북인(北人)으로써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인 아계 이산해(李山海)의 아버지다.
- ↑ 이런 것에 대해 실록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오직 사화가 혹심하였기에 기미를 하는 선비들은 모두 출처에 근신하게 되었습니다. (...) 이지함은 안명세의 저형을 보고 바다와 섬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미치광이로 세상을 피했습니다."(선조수정실록, 선조 19년 10월 임술일)
- ↑ 신병주, 『이지함평전』, 글항아리 58쪽 참고.
- ↑ 신병주, 『이지함평전』, 글항아리 59쪽 참고.
- ↑ 초야에 은거한 선비들을 찾아 등용하는 제도. 과거 시험없이 등용되었다. 이때, 최영경(崔永慶), 정인홍(鄭仁弘),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제수되었다.
- ↑ 유몽인 저, 신익철 외 3인 역, 돌베개, 『어우야담』,179~182쪽 참고.
- ↑ 어우야담을 잇는 야담집.
- ↑ 임방 저, 정환국 역, 성균관대학교출판부, 『천예록』 95~96쪽 참고.
- ↑ 공전 6조 중 제2조 '천택-못에서 생산되는 물고기, 연마름, 마른꼴, 부들 등속은 엄중하게 지켜서 그 수입으로 백성들의 용역에 보충해야 하고, 수령이 스스로 취득하여 사복을 채워서는 안 된다.' 중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 아산 현감(牙山縣監)이 되었을 때 백성의 질병과 고통을 물으니, 어지(魚池)가 고통이 된다고 하는 이가 있었다. 이것은 고을에 양어(養魚)하는 못이 있어 백성으로 하여금 번갈아 물고기를 잡아 바치게 하므로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던 것이다. 지함(之菡)이 곧 그 못을 메워버려 영구히 뒷근심을 없게 하였다."
- ↑ 권 21 '행장' “어디서 이렇게 뛰어난 아이가 왔습니까? 후일에 반드시 세상에 명망 높은 순유(醇儒)가 될 것입니다.”
- ↑ 권8 해동악부 중 '무쇠 갓에 대한 노래'
- ↑ 권148 토정선생유고발
- ↑ 이지함은 이이가 낙향 할 때 비판적 충고를 했는데, 이이가 이를 받아들일 정도였다.
- ↑ 예-노자: 1장 "도를 얘기한다지만 사람이 그것을 도라고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도가 아니다"(김학주, 노자, 연암서가 151쪽)
- ↑ 이태복, 『조선의 슈퍼스타, 토정 이지함』, 동녘출판사, 부록 328~360쪽 참고.
- ↑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언급함.
- ↑ 이지함의 사상은 박제가도 찬탄했을 정도였다. 박제가 저, 안대회 역, 돌베개, 『북학의』 '내편-배' 65~66쪽 참고.
- ↑ 단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점괘와 사주에 능했던 어느 서민이 잡학에 능했던 그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토정비결》을 썼을 것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