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한민국의 전 씨름 선수 및 전 종합격투기 선수 및 현 씨름 감독
모래판의 황태자모래판의 지존.
모래판의 황태자의 위엄. 오오!
1976년 1월 17일 경상북도 김천시 출생.
신장 196cm, 체중 125-135kg
소속 : 청구건설 씨름단(1993~1997)-현대삼호중공업 씨름단(1998~2006)-구미시청 씨름단(2009~2011)
1990년대 중후반~2000년대 초반 씨름판을 지배했던 천하장사.
의성고등학교를 거쳐 1993년 청구건설 씨름단에 입단하여 프로 씨름계에 데뷔했다. 1993년 데뷔부터 2006년 1차 은퇴까지의 전적은 630경기 472승 158패(승률 74.9%)를 기록하며 역대 최다전적, 최다승 기록을 보유했고, 천하장사 3회(1994, 2000, 2002), 지역장사 12회, 백두장사 20회를 기록했다. 특히 백두장사 20회 기록은 이만기의 백두장사 18회를 뛰어넘는 기록이다. 2006년까지 역대 총 상금 역시 5억 9,000여 만원으로 1위.
고교 때부터 그 연령대의 지존으로 통했으며, 1994년 절친이자 라이벌인 백승일[1]을 꺾고 처음으로 천하장사에 올랐다.[2] 이후 백승일을 비롯 이태현의 7개 대회 연속 우승을 저지했던 '모래판의 귀공자' 황규연, '들소' 김경수, 신봉민 등과 라이벌리를 이루며 1990년대 씨름판의 인기스타로 발돋움했다. 특히 당대 씨름선수들과는 달리 잘생긴 외모로 모래판의 황태자라는 별명으로 최고 인기 스타로 자리잡게 된다. 2000년대 들어 이태현보다 한 뼘정도 큰 골리앗 김영현,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 등의 후배들이 등장했지만, 이들도 이태현 앞에서는 버로우였다.
그러나 2006년 한국씨름연맹[3]의 막장 행정, 세력간 정치다툼으로 흑화가 되고 최홍만이 K-1에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자, 이태현은 소속팀 현대삼호중공업과 2012년까지 맺었던 계약을 파기하며 종합격투기에 뛰어든다.[4] 이태현은 국내 복귀 후 인터뷰에서 "그저 관중이 있는 곳에서 시합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었는데, 종합격투기의 화려한 조명과 관중들의 환호, 매스컴의 관심 등을 보면서 엄청난 유혹에 시달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2006년 9월에 있던 PRIDE 데뷔전에서 브라질의 히카르두 모라예스에게 1라운드 8분 8초만에 TKO패를 당했다.(얼굴에 싸커킥 '짝!') 1년 후 10월에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K-1 히어로즈 대회에서 일본의 야마모토 요시히사를 1회 TKO로 꺾어 데뷔 첫 승을 거뒀지만 2008년에 네덜란드의 알리스타 오브레임에게 1라운드 36초만에 KO패를 당했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종합격투기에서 거둔 전적은 1승 2패. 이태현의 타고난 힘으로 상대를 테이크 다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결국 타격부분에서는 밀릴 수 밖에 없었던게 실패의 요인이었다.
어쨌든 대한민국 최고의 천하장사가 종합격투기에서 엄청난 굴욕을 겪자, 씨름팬들은 비록 이태현이 씨름을 저버리고 종합격투기로 전향해서 비난했을지언정 이태현의 고전 앞에서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씨름계의 전설인 이만기는 이 장면을 보며 오열을 했다고 한다.[5] 씨름계의 흑화와 더불어 씁쓸하면서도 슬픈 장면이 오버랩되는 순간.
결국 이태현은 종합격투기를 떠나고 초등학교 때 은사인 구미시청 김종화 감독의 권유로 씨름판에 복귀했다. 복귀 후 다시 씨름판에 잘 적응하며 백두장사 2회를 더 기록,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백두장사 최다 기록을 20회로 경신했다.
2011년 2월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동년 3월 모교인 용인대학교 격기학과의 씨름전공 교수로 정식 임용된 후 씨름팀 감독으로 재직 중에 있으며, 이와 함께 2014년 부터 KBS에서 씨름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육대에도 출연해 여자 씨름 해설을 했고, 출전자들을 지도해 주기도 했다.
2 대한민국의 프로바둑 기사
- 상위 항목 : 바둑
이름 | 이태현(李泰賢) |
생년월일 | 1990년 1월 1일 |
출신지 | 추가바람 |
입단 | 2007년 5월 19일 |
단수(2015년 기준) | 五단 |
대한민국의 프로 바둑기사. 2007년 입단했으며, 2015년 기준으로 五단이다.
2.1 상세
그리 강한 기사 취급 받지는 않고, 그냥저냥 하는 중견기사 정도의 취급이다. 입단 이전의 별다른 경력이 없기 때문에 입단할 때도 주목을 못 받았지만..(...) 2013년 기준으로 아주 최강의 괴물 신예기사로 손꼽히는 신민준, 신진서 初단이 있는데다 이태현 五단의 입단 이후 5년 정도 지나서 신예기사 취급은 뭣하고, 그렇다고 딱히 큰 성적을 낸 기사도 아니기때문에 그냥저냥한 중견기사 정도의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한국바둑리그에서는 50~60% 대의 승률을 매년 기록을 해 주면서 평타정도는 치고 있다. 문제는 개인 기전인데, 개인 기전에 출전할 때마다 16강 내지 8강에서 강호 기사들을 만나서 발목을 잡히고 떨어진다. 안습. 2013년 박카스배 천원전에 출전했는데 16강에서 이창호 九단을 만나질 않나(...) 하여간 대진운이 많이 안 좋은 기사이다.- ↑ 백승일은 2004년 LG투자증권 씨름단 해체 사태 후 순천시청에서 잠시 뛰다가 2005년 2월 설날 대회를 끝으로 은퇴했다. 은퇴 후 트로트 가수로 전향.
- ↑ 문제는 당시 5판 3선승제로 치뤄지던 결승전에서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두 선수가 2:2의 상황이 되자 5차전에서 서로 섣불리 기술을 못걸고 눈치만 보는 상황이 이어지자 연맹에서는 긴급 이사회를 소집해서 경기시간이 계속 길어질경우 두 선수의 몸무게를 측정하여 더 가벼운쪽에 우승을 준다는 계체승이라는 황당한 규칙을 신설하였고 당시 백승일을 의식하며 의도적으로 몸무게를 좀 더 가볍게 유지하던 이태현이 결국 계체승을 거두었고 이후 한동안 이태현에게는 저울장사라는 오명이 따라붙었고 제2의 이만기라 불리던 백승일이 의욕을 잃고 하락세를 타면서 프로씨름이 인기가 점차 시들해져갔다.
- ↑ 흔히 (프로)씨름을 관장하는 단체가 대한씨름협회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잘못됐다. 쉽게말하자면, 야구로 치면 대한씨름협회는 대한야구협회, 한국씨름연맹은 한국야구위원회와 같은 위치의 단체들이다.
- ↑ 이 때 소속 팀인 현대삼호중공업이 이태현에게 계약파기에 대한 소송을 걸었다가 취하했을 정도로 이태현은 종합격투기 진출 선언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었다.
- ↑ KBS가 2011년 추석특집 2부작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던 '천하장사 만만세'에서 이같이 술회했다. 당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 씨름이 얻어터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