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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協雨
1921년 ~ 1987년 8월 11일
대한민국의 전 경찰공무원, 친일반민족행위자, 정치인이다.
1921년 경상북도 경주군(현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에서 태어났다. 대구농림학교(현 대구자연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 고등계 형사, 내남면 서기로 근무하였다.
8.15 광복 후 우익 정치인이 되어 대한청년단 내남면 오단부단장, 내남면 수리조합장을 지냈다. 1949년경 경주군에서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청년단 후보로 경상북도 경주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여러 후보가 난립한 끝에 당선되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역시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온갖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당선되었다. 같은 해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상북도 월성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역시 온갖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당선되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주민 학살 사건으로 구속 기소되었고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후 혁명재판에서 이협우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재판을 진행하여 감형되고, 결국 1963년 이협우는 석방되었다.
1975년 10월 유신에 반대하여 민주회복국민회의 경주시지부 상임대표위원으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