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청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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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칭한청

1 개요

1948년 12월 19일에 창단된 정당정치깡패 단체. 약칭으로 '한청'이라 한다. 우익청년단들의 암투와 권력투쟁이 심해지자 이승만은 하나의 단체로 청년단체들을 통합시켜 탄생했다. 이승만이범석조선민족청년단이 세력이 커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한 청년단체도 필요로 했다. 한편으로는 여순사건 의 발생으로 지방의 민병대의 필요성이 증가됨에 따라 이승만이 조직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 단체는 기본적으로 해방 이후 난립한 청년단체 들 중 조선민족청년단을 제외한 청년단체들의 연합이라 보면 된다. 우선 5개 우익청년단체들을 기본으로 20여개 군소단체이 통합되어 탄생하였다. 이 단체는 이승만을 총제로 하였으며 이후 준국가기구로 발전한다. 이승만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한청년단을 청년방위대라는 준군사조직이라는 명목으로 향토방위에 투입시켰다. 대한청년단은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10석의 의석을 차지하기도 한 정치단체이다.

2 통합, 합당, 창당

사건 순서대한청년단의 통합과 창단, 창당 과정[1] [2]
1대동청년단청년조선총동맹국민회청년단대한독립청년단서북청년회20여개 군소단체 통합조선민족청년단국민회(國民會)대한노동조합총연맹[[농민조합연맹 |농민조합연맹]]대한부인회공화민정회(원내 이승만 지지기반)
2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 창단
31949년 1월 20일 대한청년단조선민족청년단을 흡수함.
4대한청년단
55개 사회단체 연합
61951년 이기붕 중심의 원내 자유당 창당

'조선민족청년단'처럼 대한청년단은 1951년에 창당한 자유당기원(起原;origin) 세력 중 하나이다. 1948년지청천대동청년단[3]이승만의 청년단체 청년단체 흡수, 통합 정책에 의해 일부 정치세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력들이 대한청년단에게 흡수 당하게 된다. 1949년 1월 20일, 이범석은 이승만의 강압에 의해 명목적으로 조선민족청년단을 대한청년단으로 합류시킨다. 이후 족청(조선민족청년단)의 정치세력은 원외 자유당을 창당하며 원내 자유당과 경쟁하기도 했다. 1954년 1월. 자유당 내에서 이기붕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이범석조선민족청년단을 완전 통합, 흡수하였다.

3 6.25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문제

(학살시작: 1950년 7월 15일) 한국전쟁 당시 경상남도 마산지역의 보도연맹 결성을 주도하고 학살에 관여한 , , 우익단체 간부들[4][5]
소속/직위이름기타
경남경찰국장(경무관)최철용임기 1949년 6월 13일 ~ 1950년 4월 26일/국민회(한민회) 초대 선전부장
서북청년단, 독립촉성 청년단 등을 개편하여 대한청년단을 만듬.
하동 경철서장/부산 경찰서장
마산경찰서장조영운1949년 12월 7일(부림극장에서 보도연맹 결성 당시)
마산경찰서 사찰계장정도환
마산경찰서 형사강상봉1950년 보도연맹원 학살에 개입 후 1952년 대한민국 방위
포장 받음.
1965년 진주 해륙물산(주) 대표이사/서부연탄공업사 대표
경남냉동주식회사 대표
1981년 마산의 경남에너지(주) 사장
1985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1987년 재향경우회[6] 경남지부 회장
마산경찰서 형사노장현
육군/마산지구 위무사령관이유성육군 중령
해군/마산지구 정보대장이유성해군 대위
육군본부 직할부대/특무대(Special Operation Unit)[7] 마산파견대장허태영
육군본부 직할부대/특무대(Special Operation Unit)이우정
육군본부 직할부대/특무대(Special Operation Unit) 특무계장이진영
육군본부 직할부대/특무대(Special Operation Unit)노양환육군 상사
국민회(國民會) 마산 지부장손문기국민회(한민회) 초대 부회장/미군 특무대(CIC)의 통역
1946년 12월 개원한 미군정의 과도입법의원
국민회(國民會) 마산 부지부장김순정보도연맹 보도부장
대한청년단 단장유석형 국민회(한민회) 초대 조직부장
서북청년단, 독립촉성 청년단 등을 개편하여 대한청년단을 만듬.
1952년 김종신자유당 마산시당 조직부장
1952년 4월 25일 지방선거 대한청년단 후보로 출마해 당선, 마산시의원
1956년 자유당 마산시당 감찰부장/1957년 4월 자유당 마산시당 고문
1957년 국민회 지부장

대한청년단은 한국전쟁 당시 국민회(國民會), 서북청년단[8](대한청년단 소속), 경찰과 함께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것으로 의심되는 단체이다.[9][10]

4 1950년~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청년방위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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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모

대한청년단의 예전 단장이었던 신성모6.25 전쟁 이승만 내각의 국방장관이었다. 또한 신성모는 '국민방위군 사건'[12]의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대한청년단 출신이었던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1950년에 대한청년단의 단장 김윤근을 준장으로 임관시키는 동시에 국민방위군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이후 대한청년단의 고위 장교들은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착복하여 대량의 아사자를 만든다. 결과적으로 보면 국민방위군 참사의 원인은 이승만이 방위군 부대의 운영을 자신의 친위조직인 대한청년단과 대한청년단을 기초으로 만들어졌던 청년방위대에 맡겼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 청년단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던 당시 사건을 한 교수는 "9만명 가량의 군인이 동사ㆍ아사ㆍ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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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김윤근은 '국민방위군 사건'의 책임자로 총살당한다.

5 한청의 선언문

"우리는 총재 이승만 박사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우리는 피와 열과 힘을 뭉치어 남북통일을 지급(至急)히 완수하여 대한민국의 국위를 천하에 선양하기를 맹세한다. 민족과 국가를 파괴하려는 공산주의의 도구배(徒狗輩)를 남김없이 말살하여버리기를 맹세한다."

6 한청의 주요 인물

6.1 초기 조직

초대 단장신성모
초대 건설국장/감찰부국장김두한
초대 최고위원장택상, 지청천, 전진한, 노태준, 유진산, 서상천, 강낙원

7 선거

1948년제헌 국회의원 선거[13]1석
1950년제2대 국회의원 선거[14]10석

8 관련 문서

위키: 대한청년단
국가기록원: 대한청년단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한국 청년단체-브리태니커

9 관련 항목

  1. 대한청년단의 통합과 창단, 창당 과정-근거자료1
  2. 대한청년단의 통합과 창단, 창당 과정-근거자료2 (자유당)
  3.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4883&cid=46626&categoryId=46626
  4. (PDF)마산지역 토호세력의 뿌리 - Tistory
  5. (민간인학살)학살과 지역사회의 지배구조-학살 거쳐 정치권력 장
  6.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81721&cid=40942&categoryId=34509
  7.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2551&cid=46624&categoryId=46624
  8.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으로 흡수 통합됨.
  9. 한국전쟁 전후 대한청년단의 지방조직과 활동
  10. 국민회-민간인 학살 근거
  11.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63456&cid=46628&categoryId=46628
  12. http://ko.wikipedia.org/wiki/%EA%B5%AD%EB%AF%BC%EB%B0%A9%EC%9C%84%EA%B5%B0_%EC%82%AC%EA%B1%B4
  13. http://ko.wikipedia.org/wiki/대한민국_제헌_국회의원_선거
  14. http://ko.wikipedia.org/wiki/대한민국_제2대_국회의원_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