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열왕후

조선의 역대 왕비
광해군
문성군부인 
인조
인열왕후
인조
장렬왕후
인열왕후(仁烈王后)
시호정유명덕정순인열왕후(正裕明德貞順仁烈王后)
사망지창경궁 여휘당(麗暉堂) 산실청
본관청주(淸州)
배우자인조(仁祖)
아버지서평부원군 한준겸
어머니회산부부인 황씨
생몰
기간
음력1594년 7월 1일 ~ 1635년 12월 9일
양력1594년 8월 16일 ~ 1636년 1월 16일(향년 43세, 만 41세)
재위
기간
1623년 ~ 1636년(왕비)

仁烈王后 韓氏
1594~1635

1 개요

조선 제 16대 군주인 인조의 정비이자 조강지처이다. 소현세자효종의 어머니이다. 인렬왕후로 표기되는 경우도 있다.

2 생애

인열왕후는 강원도 원주출신이며 아버지는 서평부원군 한준겸이며 어머니는 회산부부인 창원 황씨이다. 1594년(선조 27년)에 원주읍내 우소에서 태어났으며, 1610년(광해군 2년)에 17세의 나이로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과 혼인하여 청성현부인이 되었다. 1612년(광해군 4년) 장남인 이왕(훗날 소현세자)를 낳고, 7년 후에 차남 이호(훗날 봉림대군 효종)를 낳았다.

1623년(광해군 15년) 남편 능양군이 쿠테타로 광해군을 쫓아내고 보위에 오르면서(인조반정) 아내 한씨도 왕비가 되었다. 이후 한씨는 적극적으로 남편 인조에게 진심으로 조언을 하기도 하였다.

1635년(인조 12년) 12월 5일에 창경궁 여휘당에서 아들을 사산, 그 충격으로 한씨는 산욕열에 걸려 나흘 후에 42세의 나이로 사망 하였다(1635년 12월 9일). 인을 베풀고 의를 따르는 것을 인(仁), 공로가 있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열(烈)이라 하여 '인열(仁烈)'의 시호를 받았다. 원래 인조는 명헌(明憲)의 시호를 내리길 원하였으나, 대사헌이었던 김상헌이 "시호를 정하는 일을 담당 관원이 아닌 군주의 의향대로 할 수 없다" 하여 바꾼 것이다. 전호는 숙녕(肅寧), 능호는 장릉(長陵)이다. 후일 정유(正裕)의 휘호를 받았으며, 아들인 효종이 명덕정순(明德貞順)의 휘호를 더 추상하였다.

인조는 왕후의 장릉(長陵) 곁에 자신의 수릉(壽陵)을 만들어두었으며, 인조 승하 후에 효종이 그곳에 아버지를 봉릉하고 장사지냈다. 장릉은 원래 파주 운천리(雲川里)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묘 주위에 뱀과 전갈이 살기 시작하자 영조가 현재의 파주 갈현리로 이장하였다.

자녀는 6남 1녀이나 안타깝게도 소현세자,효종,인평대군을 제외하면 모두 태어난지 얼마되지않아 죽었다.

3 성격

인열왕후는 성격이 인자롭고 때로는 엄격한 여자였다. 현부인 시절에 살림이 어려워졌는데, 직접 자신의 재물을 모아 팔아서 살림을 꾸렸다고 한다. 왕비가 된 인열왕후는 남편 인조에게 항상 살생을 하지 말고, 언제나 긴장의 경계를 풀지 말라고 조언을 하였는데, 이런 노력으로 인해 민심은 인조에게 향했다고 한다. 인조와 사이도 좋아서 6남 1녀를 낳았다. 또 중전으로서 내명부를 엄하게 다스려 내명부가 안정되었다. 자식들도 엄격하게 교육했다.

4 인열왕후의 사망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인 1636년, 당시로는 적지 않은 나이인 43세로 7번째 아이(아들)를 낳았다. 하지만 왕자는 곧 죽었고, 인열왕후는 정신적인 충격이었는지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출산 7일도 채 되지 않아 산실에서 사망한다. 이 때문에 왕실의 봉보부인인 응옥이 벌을 받아 강령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1]

5 인열왕후의 사후

그녀가 죽은 후에 바로 병자호란에서 패하고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하게 된다. 이후 인열왕후의 아들들인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다.

3년 후 44살의 인조는 조창원의 15살 난 딸(장렬왕후)과 혼인한다. 장렬왕후가 너무 어려서 주변 후궁들의 세력이 커지자, 인열왕후가 엄하게 잡아 두었던 내명부의 기반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조선의 천하의 개쌍년소용 조씨가 소현세자와 강빈부부를 자주 모함하여 인조와 소현세자 간의 관계를 악화하게 만들었다. 그로인해 소현세자가 의문사를 당하고 조씨가 강빈을 음해하여 사약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만약 인열왕후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끔찍한 비극은 아예 없었을 것이기에 그녀의 죽음은 더욱 안타까운 죽음이다. 하지만 영조의 경우 사랑하는 영빈 이씨가 눈 벌겋게 뜨고 살아 있음에도 아들을.... 그래도 영조와 사도세자의 경우는 세손을 살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고 치자...

원주시 인동(仁洞)은 그녀의 출생지인데서 유래한 이름이며 인근 개운동에 인열왕후 탄생지비(誕生地碑)가 있다. 이 지비는 6.25 전쟁에서 불타 이후에 새로 건립된 것이라고 한다. 특이한 점이라고 하면 대부분 언덕이나 도시 외곽에 보존되어 있는 여타 비석들과 다르게 도심 한복판, 그것도 도로 코앞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
  1. 조선시대 여성의 유배기록은 많지 않은데, 왕이나 왕비가 사망했을 당시 어의를 벌주던 것과 비슷한 개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