昭容 趙氏
1 개요
조선 인조의 후궁. 인조의 총애를 받아 종 1품 귀인까지 되었지만, 대체로 소용 조씨로 불린다.
출신이나 본관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본명이 확실치 않은데, 최근 드라마에서는 얌전, 조여정 등의 이름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살아생전 해온 짓거리들을 보면 이름과 전혀 맞지가 않는다. 게다가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의 아버지 조기의 정식 부인으로 기록이 되어있지 않아 정확한 신분을 알기 어렵다[1]. 1630년 궁으로 들어와 종4품 숙원의 첩지를 받았고, 이후 1638년에 정4품 소원, 1640년에 정3품 소용, 1645년에 종2품 소의를 거쳐 1649년에 종1품 귀인의 첩지를 받게 된다.
인조의 총애를 믿고 무척 오만방자하게 굴었는지 실록에는 그녀가 패악무도했다고 대놓고 기록했을 정도다. 성품이 간사하여 왕의 총애를 믿고 자신이 싫어하는 이들을 모함했다는 기록도 있다. 1643년에 상궁이었던 이정민이 소용 조씨를 저주하다 발각되어 저주를 실행한 직속 나인 애향과 연옥은 각각 거열형과 참형을 당하고 자신은 유배되었다가 사사당했는데, 이 사건은 소용 조씨가 이정민을 제거하기 위해 스스로 저주물을 묻어놓고 이정민이 했다고 덮어씌웠다는 의혹이 전해진다. 특히 그녀가 소용이던 시절 주특기는 인조에게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를 틈만 나면 모함하는 일이었다. 이런 탓에 그녀가 소현세자를 독살한 주범이라는 설이 있다. 야사에 의하면 소현세자의 주치의였던 이형익은 조씨의 사가에 자주 왕래해서, 세간에는 조씨가 어머니를 통해 이형익을 사주하여 소현세자를 독살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소용 조씨와 민회빈 강씨의 사이가 험악했던 것은 분명해, 민회빈 강씨가 죽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사건인 소위 전복 독살 미수 사건도 소용 조씨의 자작극이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2] 결국 그로 인해 민회빈 강씨는 죽음을 맞게 되었다. 강빈은 죽으면서 "소숙[3]과 조씨 때문에 어미가 죽으니 그 원한을 갚아달라!!"라고 했다는 걸 보면, 강빈이 얼마나 조씨에게 원한이 깊었는지 알 만할 듯.[4][5]
또한 그녀는 장렬왕후 조씨를 인조에게 모함해서 사실상 인조가 장렬왕후를 찾지 않게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는 소문이 세간이 파다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조씨에게 갈굼 받은 장렬왕후는 장희빈을 이용해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던 그녀의 기세는 인조가 사망하면서 꺾이기 시작했다.[6] 친청파 숙청 과정에서 그녀의 사돈이기도 한 김자점이 모반을 꾀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그녀 또한 장렬왕후와 숭선군부인 신씨[7]를 저주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게 밝혀지게 된 것도 괜히 밝혀진 게 아니라, 평소 며느리 숭선군부인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조씨가 딸 효명옹주의 여종 영이를 데려다 숭선군의 첩으로 삼았는데 신씨는 이모인 장렬왕후에게 가서 하소연을 했고 분노한 장렬왕후가 영이를 문초했더니 영이가 저주에 대해 자복한 것이다. 결국 영이를 비롯해 소용 조씨와 효명옹주의 심복 나인, 하녀 등 저주 관련자들은 줄줄이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8]을 당한 끝에 자복해 줄줄이 거열형을 당하고 조씨는 자진을 명받아 생을 마감했다.
인조에게서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녀인 효명옹주는 김자점의 손자인 김세룡과, 장남인 숭선군은 신익전의 딸과, 차남인 낙선군은 김득원의 딸과 결혼했다. 이 중 효명옹주는 저주 사건의 원흉이라 대신들과 종친들이 여러 차례 극형에 처하라는 요구를 할 정도였지만 효종이 혈육을 극형에 처하는 걸 꺼려 유배로 감형되었고, 그냥 어머니와 누나의 뻘짓에 연루된 숭선군과 낙선군도 유배되었다. 그나마 효종이 혈육의 사사로운 정에 계속 얽매인 까닭에 숭선군과 낙선군은 1656년에 유배가 풀려 돌아왔고 효명옹주 또한 효종이 관료들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1658년 석방하였다. 김자점 등을 비롯해 사건에 연루된 가문이 완전히 풍비박산이 난데 비해서 이들은 효종의 비호를 받아 상당히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2 평가
장녹수, 정난정, 김개시 등의 조선 3대 악녀의 반열에는 못 들지만 만만찮은 포스를 내뿜었던 악녀라 할 수 있겠다. 오히려 근래에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부부가 재조명 받으면서 그녀의 악행이 새롭게 부각되는 면도 있다.
3 비슷한 사례
그녀와 비슷한 인생은 이이첨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모시는 왕을 혹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해 버리는 것이 닮았다. 특히 이이첨이 정권을 위해 영창대군, 임해군을 사사하고, 인목왕후와 정명공주 모녀를 폐서인 시키는 것도 모자라 죽이려 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여론조성 다 해놓고 자신은 슬쩍 빠지는 게 장기인 광해군이 있었다. 소용 조씨도 인조의 비호 아래 정적인 세자빈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권력을 부여해주던 인조가 죽자 그녀의 권력도 약화되다 결국 효종에게 죽임을 당한다.[9] 이이첨과 매우 닮은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면으로 유사한 사례는 영조의 후궁인 숙의 문씨.
숙의 문씨는 조소용과 달리 권력에 접근한 적은 없으나 정조 즉위 원년에 사도세자를 무고했다는 혐의를 받고 사약을 받는다. 젊디젊은 후궁에 불과한 그녀에게 실제로 그럴만한 능력도, 동기도 없었기에 무고를 했다는 것 자체가 무고일 가능성이 높다. 인조의 소현세자 제거나 영조의 사도세자 제거 모두 어디까지나 왕 본인들의 이성적 의지가 절대적으로 개입되어 있었던 행위이며 일개 후궁들의 베갯머리 송사로 그런 중대사를 결정지을 리도 없다. 하지만 대신들은 정조가 사도세자 일을 추궁할 것을 겁내고 정조는 할아버지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는 데다가 대신들 입장도 고려해야 했으니, 그들에게 선왕의 후궁에 불과한 그녀는 굉장히 만만한 먹잇감이었고, 덤터기를 쓰고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4 미디어에서의 등장
상술했듯이 소용 조씨의 권세는 어디까지나 배후에 있는 인조 덕분이었다. 인조 사후 급격하게 몰락한데 알 수 있듯 인조가 없으면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미디어에선 반대로 자식과 손자들까지 배제하는 냉혹한 권력자 인조는 호구로 만들고 내버려두고 소용 조씨를 모든 일의 배후조종자로 만드는 정반대의 연출이 대부분이다. 따지고보면 노론 음모론 못지 않은 역사왜곡이다.
- JTBC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 (2013): 김현주의 악랄하고 지독한 악녀 연기가 독보였던 꽃들의 전쟁에서 나오는 귀인 조씨는, 그야말로 연민정 따위는 가볍게 쌈싸먹는 최악의 악녀로 나온다.
- ↑ 이에 대해선 첩이었기 때문이라는 주장과, 정식 부인이 맞지만 조 귀인이 왕명으로 자살하고 한옥이 사사되었을 때 그 집안에서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을 빼버렸기 때문이라는 2가지 주장이 있다.
- ↑ 실록에 소용 조씨의 자작극을 암시하는 글이 남아있다. "궁인(宮人) 정렬(貞烈)·계일(戒一)·애향(愛香)·난옥(難玉)·향이(香伊)·천이(賤伊)·일녀(一女)·해미(奚美) 등을 내사옥(內司獄)에 하옥하고 내환(內宦)으로 하여금 국문하게 하였는데, 자복하지 않았다. 처음에 상이 세자빈 강씨(姜氏)를 미워해 오다가 드디어 여러 강씨를 귀양 보내니 안팎이 의구(疑懼)하였다. 이에 이르러 상이 전복구이를 드시다가 독이 있자, 강빈(姜嬪)을 의심하여 그 궁인과 어주 나인(御廚內人)을 하옥시켜 심문한 것이다. (중략) 상이 궁중의 사람들에게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고 경계하였기 때문에 양궁(兩宮)의 왕래가 끊겼으므로 어선(御膳)에 독을 넣는 것은 형세상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상이 이와 같이 생각하므로, 사람들이 다 조씨(趙氏)가 모함한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 의심하였다."(인조실록 인조 24년 1월 3일 3번째 기사).
- ↑ 인평대군이라는 설도 있으나 대부분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이라 본다.
- ↑ 여기에서 의문은, 과연 인조가 배후에 없었다고 할 수 있을지 하는 것이다. 아무리 조씨가 왕의 총애를 받는다고 해도 왕의 총애는 사라지면 그만이다. 대표적인 예가 장희빈이다. 인조는 소현세자를 견제했고, 자신의 몸이 좋지 않자 다음 권력을 가질 민회빈 강씨와 그녀의 친정을 박살 냈다. 그런 점에서 인조는 자신의 뜻을 알고 행동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게 소용 조씨일 수 있다. 만약 인조가 소용 조씨에게 휘둘렸다면 봉림대군이 왕이 될 수 없었을 텐데 아무렇지 않게 봉림대군은 왕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인조에게도 소용 조씨는 아끼는 사람이 아니라 부리는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 ↑ 그리고 해당 발언은 강빈을 죽인 뒤 인조가 말한 것으로, 이를 들은 신하들이 정식 조사를 해보자고 요청했지만 인조가 무시했다.
- ↑ 보통 왕의 총애나 배경으로 권력을 잡은 사람은 그 왕이 죽으면 힘을 잃는다. 전 시기에 명나라를 마음대로 움직였던 환관 위충현이 자신의 뒷배가 되는 천계제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황제에게 죽임을 당한다. 삼국지의 사마씨나 손준-손침 같이 군부를 장악한 상태가 아니라면 결국에 그 왕의 죽음과 동시에 몰락한다. 이는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대통령 측근들이 대통령이 물러나고, 공격당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 ↑ 신익전의 딸로, 장렬왕후의 조카가 된다. 조씨에겐 맏며느리가 되는 여성.
- ↑ 추안급국안의 기록을 보면 잡혀온 나인, 하녀들에게 매일같이 30대씩의 신장이나 압슬, 낙형을 가할 정도로 추국을 가혹하게 진행했다. 심지어 소용 조씨와 가까웠던 나인이며 저주물을 땅에 묻었다는 의혹을 받아 체포된 김선례의 경우 도합 240대의 매를 맞고 1차례의 압슬, 2차례의 낙형까지 당한 끝에 결국 고문받던 중에 사망했을 정도였다. 훗날 숙종 연간 장희빈의 무고의 옥에 연루된 나인들을 심문할 때는 때리는 댓수를 줄이는 등 비교적 관대하게 진행한 것에 비하면, 소용 조씨의 저주 사건 추국은 정말 피 튀기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는 인조 시대의 공안정국의 영향이 그대로 전달된 시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희빈 장씨의 경우는 한때나마 왕비였고 사건 당시에도 세자의 생모였던지라 소용 조씨와는 처지가 다르다. 사건을 지나치게 가혹하게 다룰 경우에는 세자의 정치적인 입지에도 영향이 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 ↑ 어떻게 보면 그녀 입장에서는 굉장히 억울 할 수도 있다. 효종이 왕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김자점과 소용 조씨였다. 이 둘이 필사적으로 소헌세자 사후 세자빈과 세손을 공격해 전통성을 잃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덕분에 효종이 왕이 되었다. 실제로 김자점을 내쫓을 때 명분이 굉장히 졸렬했지만, 이미 주위에 적이 많았던 김자점과 소용조씨는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 여겼던 효종이 이를 외면하자 김자점은 이판사판으로 청나라와 내통해 나라를 통째로 팔아버리려다 실패하고 죽음을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