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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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尙沃. 생몰연대 1779~1855

재상평여수(財上平如水) 인중직사형(人中直似衡)

재물은 흐르기가 물과 같고,[1]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2]

상즉인(商卽人)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

조선 역사상, 아니 한국 역사상 최고의 상인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상인.
한국의 역사에 수 많은 부유한 상인들이 있어 왔으나, '거상(巨商)'이라는 호칭은 오직 그에게만 붙는다.

1 개요

어릴적에 역관이 목표였던 아버지가 거듭된 낙방을 했지만 아버지 아래에서 중국어를 배웠다. 하지만 결국 임상옥의 아버지는 역관 시험을 포기하고 당시 만상인 대금업자한테 돈을 빌려 금수품을 챙기고 밀무역에 나서서 돈을 벌었으나 비참한 일을 맞이한다. 결국 임상옥의 집은 빚더미로 인해 만상의 집에 노비로 갔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본 만상은 그에게 밀무역을 시키기 시작하면서 상업에 종사하기 시작한다. 1810년 순조 때에는 국경 지방에서 인삼의 무역권을 독점하였다. 1811년 순조때에는 홍경래의 난으로 인해 의주가 위험해지자 의병 모집 및 군수물자를 살 자금을 제공하였다. 1821년 변무사의 수행원으로 청에 갔을 때, 베이징 상인들의 불매 동맹을 교묘한 방법으로 깨뜨리고 원가의 수십 배로 매각하는 등 막대한 재화를 벌었다. 그동안 기민 구제 등의 자선사업으로 천거를 받아 1832년 곽산 군수가 되고, 1834년 의주 수재민을 구제한 공으로 이듬해 구성 부사에 발탁되었으나 비변사의 반대로 물러났다. 이후 빈민 구제와 시와 술로 여생을 보냈다. 시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2 후세에 대한 평가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종 3품 부사까지 출세한 입지전적인 인물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물론 부사를 제수 받은 뒤 얼마 안되서 논척을 받고 물러나긴 하지만 당시 조선 사회에서 상인 등 양인 아래의 계층들이 받던 대우를 생각해보자. 장영실이 벼슬을 받을 때에도 펄펄 뛰던 양반들이다. 게다가 조선 후기는 돈 많은 사람들이 공명첩을 사서 나도 양반이요 하고 마구다지로 행세하던 시절이다. 이 와중에서 정식 천거로 제수된 것이니 진정으로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도 결국 상인이었으므로 양반들 사회에서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었고, 이는 본인의 정치 인생에서도 큰 콤플렉스였다.

애초부터 상인은 법적으로 차별받기도 했었다. 모시,베, 명주, 무명이나 무늬 옷 길이 제한, 기자화(起子靴(가죽신의 일종)) 금지, 비단으로 옷 지어 입기 금지, 갓 크기 제한 등등, 돈이 유명무실하게끔 하는 신분의 굴레의 온상이 법제화 되어 내려오고 있었다.[3] 결국 양반들 눈에는 돈 많다고 자신네들처럼 떵떵거리고 사는 꼴이 아니꼬웠던 것이다. 이런 법도 하에서 재산만으로 나라를 뒤흔들 수 있었던 임상옥도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여서 돈을 맘대로 쓸 수도, 사치할 수도 없었다. 야사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벼슬살이를 하던 시절, 선정을 베풀어 인심 좋은 사람으로 유명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암행어사가 들이닥쳐 취조를 받으니.. 죄목은 다름이 아닌 집을 너무 크게 지어 돈으로 양반을 우롱했다라는 요즘 관점에서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죄목이었다. 임상옥이 자신은 가족들을 한데 모으고자 집을 그리 지었다고 주장했고, 집 크기도 실제로 법도상에 어긋난다고 하기엔 뭐한 수준이었지만 암행어사는 일언반구도 듣지 않고 결국 임상옥은 위리안치되었다. 이렇듯 벼락출세한 그를 사회가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떠나 그가 후세 경영인들의 귀감이 된 주요한 이유는 역시 단순한 상재를 넘어선 그의 신념과도 같은 사람을 중시하는 장사꾼이라는 것이다. 아래 일화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는 거상임에도 불구하고 돈에 크게 연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철저히 신용 위주의 장사를 행했다. 설령 사회의 굴레가 아니더라도 그는 돈을 벌었다 하여 자만하거나 자랑하는 일이 일절 없었고, 그의 마지막은 그의 호인 가포(채소밭지기)처럼,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채소밭 하나를 일궈가며 조용히 살다가 숨을 거뒀으니, 공수래 공수거,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부합하는 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3 소설과 드라마, 현실과의 차이

  • 김정희와의 연분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다. 인삼 에피소드에서도 그에게 조언을 해준 것은 드라마처럼의 내용이 아닌, 김정희였다. 덧붙여, 소설에서는 이희저와도 친분이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리고, 이희저의 딸과..친구의 딸을 사랑했네
  • 소설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언급이 묘사되고, 시기상 순조 대에 오가작통법 같은 법이 생길 정도로 천주교를 엄금하였던 때지만, 드라마에서는 그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다. 큰 전개에는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천주교 에피소드와 관련된 캐릭터가 드라마에서는 짤렸으므로(...)
  • 홍경래와의 관계는 드라마와 실제로의 차이가 있다. 실제로 홍경래는 임상옥의 서기로 일한 적은 있으나, 임상옥은 관상을 보고 그의 범상치 않음을 알고 미리 내보내버렸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서기로 일하다 홍경래가 임상옥을 떠보고 실패하자 그냥 간다. 이 때 가져간 돈이 드라마 말미에서 임상옥의 발목을 잡게 된다.
  • 드라마와 소설은 현실과 전개 순서가 다르다. 홍경래의 난은 1811년, 인삼소각 사건은 1821년인데, 전개 순서가 다르다. 미디어물에는 인삼소각 사건이 먼저 등장한다.
  • 박종일은 드라마에서는 비중이 픽 쪼그라들었다. 1회 엑스트라로. 원래 허삼보 포지션에 들어가야 할 인물이 얘인데.. 이병훈 사단의 골드 엑스트라인 이희도에 맞는 캐릭터를 만들다보니(?) 짤렸다(...) 지못미..
  • 홍득주와 홍미금의 비중이 대폭 상승. 소설 원작에서 홍득주는 달랑 대사 몇 줄, 홍미금은 이름도 대사도 없다..(어흑...) 거기다 캐스팅이 어마어마하다.. 박인환홍은희에..
  • 박종경과의 관계 또한 현실과 드라마가 차이를 보인다. 실제로 임상옥은 박종경과의 첫 만남 이후 그 관계를 끝까지 지속했다. 하지만 드라마의 박종경과의 관계는 첫 만남 이후 박종경이 먼저 '님 우리 친하게 지냅시다 그러니 돈 주면 내가 계속 뒤 봐줌 ㅇㅇ'라고 말했으나 임상옥이 '난 이제 노기브 노테이크 할거에욤' 정도로 완곡히 거절하니 그 뒤부터는 삐져서 임상옥을 공격하는데 제일 앞장 선다. 물론 그 뒤 박종경은 송방과의 너죽고나죽고 식 자폭크리로 스스로 망테크..
  • 드라마에서는 임상옥이 구성부사를 제수 받은 후 스스로 물러나지만, 실제로는 비변사의 논척을 받고 사퇴한 것이다.[4] 대신 드라마에서는 중추부 호군에 봉해지는데, 종 3품 부사와 정 3품 중추부 호군은(비록 체아직이더라도)당상관과 당하관을 나누는 어마어마한 차이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순조 연간뿐 아니라 조선시대를 통털어 중추부에는 호군이란 관직이 없었다. 중추부는 당상관 직임으로 정1품 영사(領事), 종1품 판사(判事), 정2품 지사(知事), 종2품 동지사(同知事), 정3품 첨지사(僉知事)가 있었다. 대신 오위에 상호군(정3품 당하), 대호군(종3품), 호군(정4품), 부호군(종4품)이 있었다.
  • 이병훈 식 사극으로 악역을 맡은 것이 송상. 어찌보면 드라마 최대의 피해자이다. 그 뒤 크게 얘기가 없어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송상은 이후에도 인삼 관련 품목으로 구한 말에 밀려들어온 외국 상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잘 버텨냈다. 당장 지금에만 봐도 '인삼은 개성' '고려인삼'이란 말이 남는 걸 보면..
  • 드라마에서 이상한 점으로 허삼보 행수의 고모가 서씨로 나온다. 허삼보는 홍미금을 가리켜 자신과 내외종 사촌지간이라고 말한다. 사촌누이의 어머니를 고모라고 부르는데 성이 다르다니 이해하기 어렵다.

4 일화

대다수 일화의 근거는 대체로 그의 저서인 가포집을 참고하고 있다. 또한 일화의 대부분은 문화컨텐츠닷컴에 등재되어 있으니 찾아보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 곳의 일화를 거의 이 곳으로 등재했다는 것이 함정 그리고 철종 시기의 만상 임치종의 일화가 혼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성씨가 같은데다 의주 상인라는 점, 시대가 비슷하다는 점. 선행을 베풀었다는 점에서 혼동의 여지가 많다.

  • 임상옥이 만상의 문상이 된 이후,[5] 문상의 신분으로 처음으로 중국행에 올랐다. 그러다 한 청루에서 자신을 붙들고 살려달라는 미인을 만났다. 사정을 들은 임상옥은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그녀의 몸값으로 천은 200냥[6]을 지불하고 그녀를 청루에서 빼내주고 살아갈 수 있는 약간의 자금도 마련해 주었다.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이름이라도 알려달라 청하자, 그는 '의주상인 임상옥' 이라는 7글자만 알려주고 돌아왔다. 이후 의주에 돌아왔지만, 그는 10년 가까이 고생을 해야했다. 임상옥은 어찌나 고달펐는지 돈을 괜히 내준건 아닌가 후회하기도 했었고 결국 이 일을 흑역사로 치부하고 기억에서 묻어버린다.[7] 그렇게 10년이 지난 어느 날 그에게 박종일이 찾아와서 북경의 최근 현황에 대해 알려주었다. 북경에서 제일 장사를 크게 하는 갑부가 임상옥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중국길에 오른다. 그는 그 곳에서 자신이 구해준 여인을 다시 만났는데, 그녀는 그 갑부의 측실로 들어간 후, 아들을 낳아 정실부인이 되었다. 그야말로 인생이 역변한 셈. 그녀는 감사를 표하며 그 때 임상옥이 치른 돈의 10배의 돈을 내주었고,[8] 그 갑부와 독점 거래를 트게 해 주었으니, 이 거금은 훗날 임상옥이 거상으로 올라 설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참고로 이 이야기는 종계변무를 성공시킨 홍순언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 아니, 아예 생판 모르고 둘을 비교하면 표절급이라 할 정도이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종계변무내용 참조. 은혜갚은 기녀 만상 축출이후 거의 상계에서는 영구 제명되다시피해서 아무 자본 없는 무일푼이었던 임상옥이 갑자기 안정된 기반을 잡을 방법이 사실상 없다고 해도 무방하니 실제로 가능성이 있었을 수 있는 일이기는 하다. 역관을 따라가 장사하는 것이 상인이니 둘의 행보도 비슷하고.. 일화에 살을 붙일 때 아마 홍순언의 일화를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 인삼교역권을 얻기 위해 박종경 대감의 부의금으로 백지 어음[9]을 내어서 그를 놀라게 하여 관심을 얻게 된 후, 그와 담판을 지어 인삼교역권을 따냈다. 박종경이 임상옥에게 던진 질문도 유명하다. 그는 임상옥에게 '하루에 숭례문을 드나드는 자가 몇이냐?'라고 물었고, 임상옥은 이(利)가와 해(害)가의 둘이라 답했다. 박종경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자 임상옥은 '숭례문을 드나드는 자가 몇백이건 몇천이건, 대감에게 이익이 되는(利)자와 해가 되는(害)자 둘 밖에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박종경이 이에 크게 웃고는 임상옥에게 그대는 '그 둘 중 어느 쪽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임상옥은 '소인은 심(心)가 이옵니다. 이해를 떠나, 대감의 마음을 얻고자 합니다.'라고 답했다. 이 대화를 바탕으로 그는 인삼교역권을 얻어냈고, 임상옥은 이 관계를 티 내지 않고 평생 지속하였다.[10]
  • 북경에서 상인들의 담합에 맞서 홍삼을 태우며 최대 이문을 남기며 팔게 된 일은 임상옥을 이야기하면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에피소드. 드라마에서도 다른 일화는 죄 짤렸어도 이 에피소드는 몇 화를 소비하면서 나왔다. 상인들은 임상옥의 인삼 독점을 시기하여 청나라 상인들을 선동하여 불매동맹 담합을 맺어 임상옥을 골려주려 하고 있었다. 사신 일행의 귀국 시기 이전에 인삼을 팔아야만 하는 임상옥이 결국 헐값으로 내다 파는 것을 다분히 노린 수작이었으나, 임상옥은 귀국 하루 날까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오히려, 귀국 하루 전날 인삼을 쌓아넣고 장작을 준비해 불을 지핀 후, 그 위에 주저 없이 불을 질러버렸다![11][12] 누구도 날 막을 수 없어! 상인이건, 담합쟁이건, 청나라건, 그 누구도! 인삼을 팔 수 없다면 차라리 잿더미로 만들어버릴테다... 북경 상인들은 이 예측불허의 사태를 보고 당황하여 임상옥 이 나쁜 자식! 그러지 마! 인삼을 끌어내려했으나, 임상옥은 그들을 나무라고 그들이 끌어내던 인삼을 다시 빼앗아 태워버리려고 했다. 상인들은 값을 얼마든지 쳐주겠다 애걸복걸했으나 임상옥은 들은 척도 않고 불을 지피기고 인삼을 던져넣기를 재촉했다. 이에 북경 상인들은 담합이고 뭐고 서로 값을 올려서 결국에는 본래 값의 배에다가 이미 타버린 인삼 값까지 치뤄야 했다. 그야말로 혹 떼려다 혹 붙인 꼴. 이 일로 임상옥의 이름이 국내외에 떨치게 되었다.캡처 [13]
  • 임상옥이 청나라와의 거래를 위해 북경에 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임상옥은 사신을 따라 북경으로 갈 채비를 서둘며 먼젓번에 함께 청나라에 다녀온 어느 문상을 불렀다. 그러나 그 문상은 몸이 불편한 것을 핑계로 원행길에 따르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상옥은 이 문상이 일전에 그 장사 밑천을 도둑에게 전부 털린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돈을 갚으려 하기는 커녕 병을 핑계대고 안 가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이 훤히 보이니 절로 화가 나서 벌컥 소리쳤다.
“예끼 고얀 사람 배은망덕해도 유만부동이지. 자네가 못 갈 지경이면 돈이라도 갚아야 할 게 아닌가.”
“뭘 그리 걱정이 심하십니까. 혹 그 호상이 제 안부를 묻거든 중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하면 그만 아닙니까?”
“고얀 사람이군. 다시는 내 앞에 발길도 들여놓지 말아라. 당장 물러가지 못할까.”
임상옥은 못내 그 문상의 장사꾼답지 못한 비겁함과 좀스러움을 괘씸이 여기면서 북경에 당도했다. 그는 바쁜 일정에 그 괘씸한 문상의 일을 잠시 잊고 있었는데, 하루는 북경의 돈 대준 그 호상이 처연한 얼굴빛으로 찾아와서 말했다.
“내 들으니 먼저 내가 장사 밑천을 조금 마련해 준 그 문상이 급살병으로 죽었다더군. 아까운 인재를 놓쳐서 정말 섭섭하이. 우리네 장사 풍습에 한번 그 사람이 눈에 들면 밑천을 대줘서 뒤를 밀어줄 뿐더러, 실패를 해서 본전을 날려도 세 번까지는 봐주는데... 참 아까운 사람이야.”
눈물을 뚝뚝 흘리던 호상이 임상옥에게 약간의 은자를 전해달라며 은자까지 주었다. 임상옥은 정말 난처했다. ‘문상’이 죽지 않았다고 곧이곧대로 말해주자니 눈물까지 흘리며 슬퍼하는 호상의 마음을 배반하기 힘들었고, 말하지 않으려니 죄책감이 들어 참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하는 수 없이 그 은 덩이를 받아 가지고 문상의 배신에 대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돌아왔고, 그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선걸음에 말을 달려 그 문상의 집을 찾았다. 당장 가서 그 호상과 있었던 일을 전하고 그를 나무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의 집 앞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있는 것이 아닌가? 임상옥이 의아해 하며 조심스럽게 마당에 들어섰다. 알고 보니 초상이 났던 것이다. 임상옥은 혼자 생각을 하며 온 김에 문상(問喪)을 하지 않을 수 없어 상청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는 순간 너무 놀라 정지했다. 굴건 제복으로 곡하는 상주는 바로 그 문상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임상옥은 착잡한 심정으로 북경서 가져온 장례 비용을 그 아들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문상이 죽은 경위를 들었다. 아들은 임상옥이 떠난 이후 이 문상이 열병이 들어 백약이 효험이 없었다며 자신들에게 신의를 지키지 못해 부끄럽다고 하며 자신들에게는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 되라 하며 그 호상에게 꼭 돈을 갚으라 엄명을 하였다고 말하였다. 통곡하는 상주를 위로하며 빈소를 물러나온 그는 참 말 한마디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탄식하며 말 한 마디의 무서움과 신용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금 곱씹어보았다.
  • 어느 날 전주 감영에서 이방이 찾아와 뜬금없이 그에게 5만냥을 꾸어달라고 요청하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 부탁하는 데다, 당시 5만냥이면 기와집을 한 채 지어낼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이었으나, 임상옥은 선뜻 5만냥을 꿔주었다. 사람들이 왜 그런 거금을 선뜻 내주었는지 묻자 임상옥은 이리 답했다.
"내 그를 보니 눈에 살기가 어려있기로, 돈을 내어주지 않았으면 무언가 사생결단을 내려 할 것이다. 나는 그런 꼴을 보기 싫었을 뿐이다."
사람들이 믿으려 하지 않자, 그는 사람 한 명을 딸려붙여 이방의 뒤를 밟게 했다. 이윽고 따라갔던 사람이 돌아와 '거액의 공금을 횡령한 것이 탄로가 나서 당장 벌충해 갚지 않으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5만 냥을 꾸러 왔다가 불여의하면 이왕 죽을 몸이라 돈 많은 부자에게 칼부림이나 한번 속시원히 해보려고 비수를 품고 있었다 하더이다.'라 하자, 사람들은 모두 그의 사람 보는 안목에 감탄하였다.
  • 이처럼 사람 보는 안목으로 홍경래의 회유를 사전에 차단한 적도 있다. 홍경래가 일찍이 임상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그의 밑에서 서기로 일했는데, 임상옥은 홍경래가 하는 일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적당한 구실을 붙여 좋은 말로 그를 내보냈다. 이유는 '그가 물상 객주집 서기로는 그릇이 너무 넘친다'는 이유에서였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던 홍경래였으나, 임상옥은 그런 점을 오히려 마음에 걸려했다. 그가 떠난 지 얼마 후, 그는 홍경래의 난을 일으켰으나, 임상옥은 이와는 조금도 연관되지 않았다. 오히려, 홍경래는 임상옥 때의 실패를 거울삼아 회유하는 방법을 바꾸어 이희저를 포섭하였다.
  • 그는 사람 보는 눈만 아니라, 물건 보는 눈도 뛰어났다. 어떤 사람이 큰 산삼을 가지고 와서 임상옥에게 감정을 청하니, 그는 아침 햇빛에 비춰보고 나서 그것이 경삼(옮겨 심어서 자란 산삼)임을 밝혔다. 산삼주인은 사실을 실토하면서 탄복했다. 이처럼 감정안이 뛰어났으므로 사람들은 절대 임상옥을 속일 수 없었고, 그와 거래할 때 정직하게 장사를 했다고 한다.
  • 언젠가는 도정(都正) 홍미산(洪美山)이 진귀한 산호 지팡이를 짚고 왔다가 부러진 일이 있었다. 그 산호 지팡이는 본인의 것이 아니라 친구에게서 잠시 빌려 온 것이 었기 때문에 무척 난감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중국에서 어렵게 구해온 물건이라 조선에서는 아무리 돈을 주어도 구하기 매우 힘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임상옥의 창고에는 없는 게 없다고 귀뜸해 주어 홍미산은 바로 임상옥을 찾아갔고, 사정을 들은 임상옥은 흔쾌히 자신의 광을 열어 주어 그 속에서 있는 수많은 산호장 중에서 같은 것을 골라가게 했다고 한다. 물론 공짜로. 저런 그 귀한걸 깨드리셨군요? 걱정마세요 그런 거 따윈 썩어넘칩니다 ^^ 산호 지팡이를 구하긴 했으나 홍미산은 기가 팍 죽어 돌아갔다. 앞으로 돈가지고 장난질 안할게요 ㅠ 또 어느 날 의주 부윤의 갓머리에 다는 장신구 옥로(玉鷺)가 깨져[14] 임상옥의 집에서 급히 구했더니 몇 백 개의 옥로가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의 재산이 얼마나 많았는지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또 한번은 임상옥의 집에 원접사(遠接使-중국 사신을 멀리 와서 맞는 사신), 평양 감사, 의주 부윤과 그 일행과 기타 일꾼 등 도합 700여명이 임상옥의 집을 찾아왔다. 예고도 없이 일시에 불쑥 찾아온 것이라 사람들은 떡이라도 하나 얻어먹으면 다행이겠거니 했으나 임상옥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한 상 가득하게 내오너라! 그 일행 700명의 요리상을 일시에 각상(各床)으로 내놓는 범절을 보였다.[15] 700명분의 술과 안주와 밥과 국을 눈 앞에서 곧바로 장만하는 대응력도 대응력이지만[16] 그 음식을 담는 상과 그릇과 수저도 얼마나 많았겠는가. 이 모든 것이 임상옥의 재물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의 부분이다.

5 대중 매체에서의 임상옥

  • 최인호의 소설 상도 : 임상옥에 대해서는 어찌 보면 최초로 다뤄진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을 통해 임상옥이 널리 알려졌다.
  • 드라마 상도 : 소설을 읽은 사람들에게는 드라마되는 임상옥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임상옥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 맹꽁이 서당에서의 임상옥 : 홍경래의 난이 언급될 때 딱 한 컷 나온다. 홍경래를 '객주집에서 일하기에는 그릇이 크다'고 언급하는 모습으로 등장. 그 외에도 훈장님이 학동들에게 '너희들처럼 돈을 밝히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하고 묻자 학동들이 '임상옥 같은 거부가 된다'고 대답하면서 한 차례 언급된다.
  1. 물은 일시적으로 가둘 수는 있지만 영원히 소유할 수는 없다. 물을 소유하려고 가두어 두면 그 물은 썩고 만다. 재물도 마찬가지로 손 안에 들어온 재물은 일시적으로 거쳐가는 것. 실제로 임상옥은 평생 모은 재산을 빈민구제와 자선사업으로 썼다. 물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보낸것.
  2. 저울이 중심을 잡았을 때 평등을 이루는 것이 사람도 마찬가지로 잠시 재물을 빌려 비단옷을 입는다 해도 그 옷을 벗으면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고 만다.
  3. 다른 때도 아닌 세종대왕 시대에 법제화 된 것이다. 법령이 발표된 건 세종 11년경. 이 외에도 집의 크기나 대문 크기까지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4. 헌종실록 1년에 비변사가 올린 내용을 보면 '임상옥이 얘 저번 심사에서 점수 높게 받은 것도 아닌데 반 년만에 또 승차했어요. 기존 심사 제도 고려해보면 이거 공정하지 못한데 짜르고 딴 사람 보내죠?'하고 대신들이 간하고 이를 헌종이 윤허한다. 본격 줬다 뺏기
  5. 의주의 풍속은 사람을 고용하면 품삯은 몇 해가 지나도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다. 다만 5년이나 10년을 겪어보고 싹수가 있어보이면 독립시켜 장사를 해보도록 뒷받침해주었다. 사람이 성실하지 못하면 새경은 커녕 맨몸으로 쫓겨나기 십상이어서 주인의 눈에 들기까지는 온갖 고생을 무릅써야 했다. 아무리 궂은 일이라도 싫다 않고 다 해야 하며 걸핏하면 일 잘못한다고 인정사정 없이 꾸짖는 꾸지람도 감수해야 했다. 그 후에야 점주(店主)가 몇 천 냥을 떼주어 이른바 문상(門商)이 되게 해주었다.
  6. 드라마 방영인 2002년 기준 돈으로 약 3천2~3백여만원
  7. 이 부분은 드라마와 소설이 차이를 보인다. 소설에서는 저 사건 후 공금을 횡령한(몸값으로 자기 몫 뿐 아니라 점주 몫의 자금도 일부 사용했다.) 죄로 만상에서 쫓겨나 이후 10년간 온갖 고생을 한다. 드라마에서는 그냥 본전으로 들어와 서기로 승직한다.
  8. 역시 2002년 기준 돈으로 무려 3억여 원에 달하는 거금이다! ㅎㄷㄷ..
  9. 오늘날의 백지수표. 적어서 내는 만큼 그 돈을 지불해 주어야 한다.
  10. 드라마에서는 순전히 언변만으로 인삼교역권을 따낸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는 권력가의 뒷받침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하물며 양반이나 일반인도 아니고 일개 상인이니..
  11. 이게 오늘날로 예시를 들면 국가간 거래로 물품을 가지고 외국에 갔는데 그들이 담합을 맺어 사지 않으려 하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안 사? 안 사면 태워버림 ㅇㅇ 너 죽고 나 죽자'식으로 미련없이 홀랑 태워버린 격이다. 정말 어마어마한 짓. 물론 어디까지나 예시이므로 실제처럼 믿으면 골룸.
  12. 인삼이 아니라 도라지를 태웠다는 설도 있다. 도라지는 증포한 인삼과 외형이 매우 비슷하지만 값은 인삼의 1/4 정도밖에 안되어서 퍼포먼스로 도라지를 태우고 인삼을 판매했다는 이야기. 실제로 임상옥이 불매 소식을 듣자 그가 묵고있던 여곽에 도라지가 다량으로 반입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출국 하루 전까지 버틴 것도 도라지가 준비될때까지 기다린 것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13. 다만 이 같은 패기는 임상옥이 당시 청나라의 사정을 속속들이 꿰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국에서도 인삼이 양산되고 있었지만 사람의 손을 타다 보니 도라지 급의 조악한 품질이 되어 홍삼과는 약효가 천지차이였고, 아편 중독을 홍삼으로 치유할 수 있다는 말이 있어 정조 시대부터에도 가격이 어마무시하였다. 게다가 당시 임상옥이 공무역으로 가져왔던 홍삼들은 몇 년치의 물량으로 임상옥이 이를 모두 태워버리면 임상옥도 망하고 참형에 처해지긴 하지만(국가의 공식 교역량을 전부 태워버렸으므로 공금횡령급.) 자신들도 몇 년 치 물품을 구할 길이 없어 싸그리 망해버리기 때문이다. 그 사이 홍삼값이 천정부지로 뛰어 막대한 손해가 생기는 것은 덤. 임상옥은 이 모든 것을 다분히 계산하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14. 옥로는 사신 파견될 때나 고위관리임을 표기해야 할 때 달아야 하는 일종의 장신구이다. 달아야 할 상황에 달지 않으면 당연히 중죄. 어떤 느낌인지 모르겠다면 국방부 장관이 방문했을 때 대대장이 계급장 없이 맞이했다고 생각해보자. 충격과 공포.. 허허허 자네 계급장이 없구먼 허허허 으아아아 잘못했습니다 장관님
  15. 사극에서 흔히 보는 국밥 한 상이 아닌 한식 풀세트 한 상이다! ㅎㄷㄷ.. 눈 앞에서 700인분을 먹이는 오병이어의 기적 조선 로얄판
  16. 당연한 이야기지만 700인분의 음식을 고작 한 두사람이 운반했을 리는 없다(...) 그만큼 부리는 비복 수도 많았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