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洪景來(홍경래) |
생몰년도 | 1771년? 1780년? ~ 1812년 5월 29일 |
1 개요
19세기 초 평안도에서 일어났던 홍경래의 난의 최고 지도자.
출신 지역은 평안도 용강군 다미동. 아버지를 포함한 가계를 알 수 없으며, 아들만 네 형제인 집안의 셋째로 부인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외숙인에게 학문을 배웠고, 평양 향시를 통과하였다.그러나 1798년 사마시에는 도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대체로 조선왕조는 태조 이성계 시절부터 평안도인을 쓰지 않았으며, 이때문에 평안도인이 과거를 통과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지역차별때문인지 정말 실력이 없어서 그랬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이렇게 그는 과거를 치를 만큼 경서에 대한 일정한 수준의 교양을 지니고 있었으며 더불어 병서나 제반 술서, 특히 정감록 등에 통달했다고 한다.
그래서 홍경래의 신분은 대개 몰락양반이라고 설명하여 왔으나, 사실상 평민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경제적으로는 전답이나 노비를 지니지 못한 빈궁한 처지에 있었다. 결국 과거에 실패한 뒤 관로를 포기하고 집을 나와 풍수로서 각지를 전전하며 빈한한 생활을 하였는데 이 때 당시 과거제도의 부패상,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삼정의 문란 등으로 인한 일반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체험하면서 사회의 모순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홍경래는 당시의 세도가들의 폭정과 민중탄압을 비판하고 민중의 희원을 반영하여 초인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정진인설을 봉기의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니고 있어 직접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기도 하였으며, 병법에도 밝아 다양한 전술로 관군과 대항하였다고 전한다. 이 밖에 성장과정과 과거응시 등에 대해서는 19세기 후반 작자미상의 한문단편 <홍경래전>를 근거하고 있지만, 그 내용들은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과거에 실패한 후 차별받던 서북민들을 규합해 홍경래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최후의 전투인 정주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2 대중매체
김삿갓의 집안[1]을 몰락시킨 장본인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정확한 내용은 김삿갓 항목 참고
맹꽁이 서당에선 여러모로 비범한 인물로 나오는데,[2] 어렸을 때 역수장사가 대낮에 황제의 머리를 날려버린다는 내용의 시를 쓰질 않나, 축지법을 쓰질 않나, 홍총각을 반란군으로 포섭할 때 거구의 장사 홍총각을 가볍게 개발살내고 심지어는 팔씨름 대결에서 정면으로 관광보내버리는 졸라짱센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다(...).
구르미 그린 달빛(드라마)에서는 홍라온의 아버지로 나온다.
3 북한의 평가
- 참고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