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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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임영신(任永信) / 영문명 : Luise Yim, 호 : 승당(承堂)
출생1899년 11월 20일, 전라북도 진산군 (현 충청남도 금산군)
사망1977년 2월 17일, 서울특별시
학력1931년 미국 남캘리포니아주립대학 대학원 철학석사
1957년 미국 남캘리포니아주립대학 명예법학박사
1962년 롱아일랜드대학 대학원 명예법학박사
1971년 일본 니혼대학 대학원 명예법학박사
종교개신교
가족부친 임구환(任九桓), 모친 김경순(金敬順)의 12남매 중 다섯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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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 혁명 희생자 합동추모식에서 추도사를 읽던 중 울음을 터트려버린 임영신

1 생애

1.1 생애 초반

1.1.1 출생과 가계

임영신은 1899년 11월 20일 전라북도 진산군 (현 충남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에서 아버지 풍천 임씨 임구환(任九桓)과 어머니 김경순(金敬順)의 열두 남매 중 다섯째, 딸로는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임구환(任九桓)은 독실한 개신교 장로였으며, 금산의 명문거족인 김해 김씨와 인척관계이기도 했다.

그녀의 선조는 임온(任溫)으로 중국 원나라 때 소흥부(紹興府) 자계현(慈溪縣) 출신이었는데, 고려로 왔고 은자광록대부를 지냈다. 후일 임온의 6대손 임주가 다시제국대장공주를 배종하고 고려로 건너와 정착했으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임주의 아들 임자송의 6대손 임원준, 임사홍 부자를, 다른 아들 임자순의 8대손 임유겸, 9대손 임권, 임추 등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임영신의 7대조 대에 금산군으로 낙향하였으나 가세는 기울었고, 그녀의 아버지 임구환의 대에까지 6대독자로 겨우 이어왔다 한다. 아버지 임구환은 10세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에게서 자라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아버지 임구환은 그녀의 회고에 의하면 '할머니의 중매로 5년 연상의 여자와 결혼했다'고 한다. 그녀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아들이 태어나게 해 달라고 오래 기도를 하여 오빠 상희(尙熙), 양희(亮熙), 건희(建熙), 언니 선유가 태어났고 그 다음에 다섯째인 임영신이 태어났다. 그 뒤로도 남동생 춘희(春熙), 여동생 영애(永愛), 남동생 태희(泰熙), 여동생 영실(永實)과 영선(永善)이 태어났다.

1.1.2 소녀시절

아버지 임구환은 산기슭 근처에 큰 밭을 마련하여 농사를 지었는데 당대의 지식인이라 각지의 사정에 밝았다. 아버지 임구환은 아들들을 불러 특별히 정치나 시사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딸 중 임영신도 그 틈에 끼어있곤 했다. 아버지 임구환은 여자아이가 머슴애처럼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어머니에게 가라고 했으나 그녀는 옆에서 남자 형제들과 함께 정치, 시사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다 한다.

임영신은 유년 시절 아버지가 동학 농민 운동과 동학 농민군의 활약상, 최시형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을 오래도록 기억하였다. 그녀는 어려서 동리 어른에게 들은 것 중 러시아와 일본의 동전이 대한제국에 유입된다는 것과 조선 사람들이 러시아 동전과 일본 동전을 위조한다는 것과, 조선의 지폐가 일본에서 인쇄되어 유입된다는 것도 기억하였다.

그녀는 개신교 가정에서 출생하여 기독교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으나 아버지 임구환은 외부에 집안이 기독교인인 것을 어느정도 사회 분위기가 개화될 때까지는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임구환은 백인선교사들을 집안으로 데려왔는데, 임영신은 당시 할머니가 '괴상하게 생긴 백인 여성을 보고 놀랐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 백인 여성은 유창하게 조선말을 하였고 그녀의 설교를 듣고 이해가 빨랐던 그녀는 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어려서 언니 선유와 함께 아버지 임구환이 동리에 설립한 서당에 다니다가 1909년 금산의 심광소학교(心光小學校)에 입학하였다. 이때 그녀는 학교에 다니다가 시집을 보내겠다는 집안의 뜻에 의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비밀리에 담을 넘어 학교에 등교했고, 키가 가장 커서 몰래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금산 사람들은 내가 길을 지나갈 때면 나를 비웃고 좋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수군거리곤 했다. “저렇게 큰 계집애가 학교엘 다니다니....., 저 계집아이는 예절도 모르고 부모 생각도 하지 않는 모양이야.

이 말에 충격을 받고 일시적으로 집에 있다가 다시 학교에 등교, 1914년 심광소학교를 졸업했다. 8세 때 그녀는 활동 사진(영화)를 보고 놀랍고 신기해하였다.

1.2 학창 시절

1.2.1 청소년기

일본에서 강제로 조선의 처녀들을 끌고간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자 1911년 그가 12세가 될 무렵 그의 부모는 딸들을 일찍 시집보내려 하였다. 곧 언니 임선유를 시집보내게 되었고, 바로 임영신 역시 시집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는 중매장이들이 올 때마다 "결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강제로 혼사를 치르게 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대답하였다.

열두 살이 될 무렵, 한국 계집아이들을 강제로 일본인들에게 시집보낸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모든 부모들은 딸을 치우는 데 바빴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곧 언니가 시집을 가게 되어 있었고, 그 다음은 내 차례였다. 하루는 두 여인이 내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얼른 알아차렸다. 그들은 중매쟁이였다. 나는 그 두 여인처럼 사람이 미웠던 적은 없었다. 나는 그들이 나를 감옥에 가두려는 것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그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해대었고 그들의 생각이 잘못됨을 일깨워 주려고 했다. 그들은 놀라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내가 말을 하는 동안 때때로 신음소리를 냈다. 나는 그들에게 결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강제로 혼사를 치르게 하는 것은 죄악이라 말하였다. 이 말이 그들에게 견딜 수 없는 충격을 준 것 같았다. 이처럼 말할 수 있는 한국 아이들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방을 나가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저 처녀 어머니에게 말 해야겠어. 저 처녀는 순탄하지 못 하겠구먼 그래.”그날 하루 종일 나는 방을 나가지 않았다. 나는 정말 결혼하기 싫었다. 나는 겨우 열두 살이었다.

어린 소녀의 논리에 당황해한 구식 부인들은 그대로 얼굴을 붉히며 되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그를 설득하려 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그러나 매일처럼 어머니는 날 타이르셨다. “너는 말을 잘 듣는 아이지 않느냐 혼약을 해야겠다.”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난 이렇게 대답했다. “말씀은 잘 듣겠습니다마는 혼인은 하지 않겠어요.나는 중매쟁이가 집으로 올 때면 어머니 방 문 뒤로 살그머니 가서 엿듣곤 하였다. "마나님, 따님은 보통 아이가 아니올시다. 강제로 혼인시켜서는 안돼요. 따님은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 여자 일보다도 남자가 하는 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 중매하러 온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가 하면 '제 인생은 제 것이지 가문의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여 자기 주관을 밝히기도 했다. 시집가기 싫어했던 그는 상급 학교로 진학하게 해달라고 부모를 졸라 성사시켰다.

소학교 시절 그는 언니 임선유가 기독교신자가 아닌 사람에게 시집간다는 말을 듣고 언니 선유에게 굶으라는 것과 매일 울라고 조언하였다. 그의 조언대로 언니 선유는 매일 울거나 굶어서 수척해졌고 결혼은 파혼되었다. 그 뒤 언니 선유는 최용환과 결혼했는데, 그는 목사인 최학삼의 아들이었다. 신랑의 생김새가 흉하지 않을까 궁금해한 임영신은 신랑의 자매들을 찾아갔다가 그들의 수려한 외모와 달변에 매료되어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

1.2.2 기전여고 재학시절

1914년 전주의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에 진학하였다. 기전여학교 재학 당시 그는 기독교인 여학생들의 소모임을 주관하고 기도와 신앙 활동을 하였다. 그의 노력에 감동한 기독교인인 기전여학교 교사 박현숙은 오히려 그들을 더욱 독려하고 자발적인 그들의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학생들 중 수업시간에 교사들에게 한국사를 가르쳐 주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교사들은 일본의 눈치를 보느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가장 친한 친구 세 명을 모았다. "한국사 책을 한권 구하여 매일 밤 수 페이지씩 베껴 쓰자. 쉽게 할 수는 없겠지만 얼마 안가서 우리들은 제각기 우리나라의 귀중한 역사책을 가지게 될 거야."라고 말하고는 학교의 교목인 김 목사의 집으로 가서 한국사책을 구해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는 하고자 하는 바를 목사에게 말했고 목사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한국을 구하려는 결심이 대단하다. 하여간 도와주겠어요. 하지만 위험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네. 만일 일본인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며 만류하였다. 그는 무섭지 않다고 말은 했으나 두려웠고 목사님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곧 목사님은 ‘동국역사’라고 쓴 가죽으로 싼 책을 한 권 가지고 왔다. 그 책은 우리나라에 관하여 한국 사학가들이 쓴 책이었다. 그는 그 책을 나에게 주면서, "이것은 대대로 물려받은 한국인의 유산이지, 아끼고 잘 간직해야 하네."

그는 김 목사에게서 받은 동국역사 책을 쓰개치마 속에 감추어 가지고 학교로 돌아왔다. 그날 밤부터 그는 친구들과 동국역사를 붓으로 베끼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전등을 켤 수 없었으므로 촛불을 키고 조심스럽게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임영신과 친구들의 작업은 몇 달을 두고 계속되었다. 복사가 끝나자 그것을 몰래 학교 밖으로 가지고 나왔다. 그 책은 목사님에 의해 애국 청년들과 지도자들의 손으로 전해졌다. 그들은 비밀 연구회를 조직하고 있었는데 장차 항일 운동의 중심이 될 것이었다.

1.2.3 항일동맹 휴학운동

1915년 기전여고 2학년 시절 친구인 오자현 등과 함께 항일 자살특공대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명칭을 자살대 (自殺隊)라고 하였다. 첫 번째 모임에서 행동을 결정하였다. 학교에서는 매일 아침 일본 국가를 부르고 일본 황제의 사진 앞에 절하게 했다. 임영신과 자살대 멤버들은 그것을 거부하였고, 매일 아침마다 행해지는 여학생들의 거부 행위에 일본인 교사들은 분노하고 당황해했다. 그리고 얼마뒤 기전여고내에 자살대의 소문이 확산되었다.

그는 이어 학교의 각 교실마다 일본 천황의 사진이 붙어있었는데 하루는 수업이 시작되기 전, 새벽에 친구들과 몇몇이 뾰족한 나무 연필을 가지고 교실 창문으로 비밀리에 각 교실로 들어가 숨어들어가 모든 교실마다 붙어 있는 일본 천황 사진의 눈에 구멍을 뚫어 놓았다. 그 날 아침 조회에 이를 발견한 일본인 선생들은 분개하여 교장인 미스 골든 선교사에게 찾아가서 항의하였다. 임영신과 자살대 회원들은 스스로 자신이 한 것이라고 했고, 주모자를 찾을 수 없던 미스 골든은 이들을 기숙사로 보냈다.

1.2.4 쓰개치마 거부운동

이어 교내에서 그는 쓰개치마 안입기 운동을 주도했다. 조선이 멸망하고도 한국의 여성들은 외출시 쓰개치마를 입고 다녀야 했다. 그는 이를 인습이라 주장했다.

우리들의 적은 일본인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평생 동안 우리를 억압하는 한국의 오랜 풍속하고도 싸워야 했다. 쓰개치마가 그 한 예였다. 쓰개치마는 성장한 여자가 외출할 때 머리에서 부터 몸을 가리기위해 쓰던 치마였다. 그것은 불편할 뿐만 아니라, 여성은 생활 공동체에서 남자와 평등한 위치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쓰개치마를 입은 여자가 자신의 말에 남자들이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는 것은 여의치 않은 일이다. 비가 쏟아지는 어느 일요일 우리는 이 전통에 반항할 기회를 얻었다. 우리는 쓰개치마라는 구속물 에 싸여서 교회에 가기 위하여 투덜거리며 기숙사를 나왔다. 교회에 도착할 무렵에 우리들은 축축하게 빗물에 젖어 있었다. 많은 학생들은 재채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예배당을 떠날 때 몇몇 학생들이 미스 골든에게 비에 젖은 쓰개치마를 입는 대신 들고 가도 좋으냐고 물었다. 그녀가 놀랐다. “선교사가 온 것은 여러분의 도덕성을 높이려고 온 것이지 풍속을 바꾸려고 온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빗물에 흠뻑 젖어 미끄러지듯 진흙길을 걸어서 기숙사로 돌아갔다. 온 몸은 물에 빠진 듯 젖어 있었다.

그는 친구 오자현 등과 함께 교장실로 가 교장인 골든에게 쓰개치마를 입지 않게 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러나 우리들은 학교 밖으로 나갈 때 쓰개치마를 더 이상 입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바보처럼 보일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해롭습니다.

그러나 교장 골든은 이를 거절하였다. '우리들이 일본 국가 부르기를 거절하였고, 기물을 파손한 사건들이 겹쳐 일어난 뒤였으므로 미스 골든은 화가 쌓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그녀의 화가 폭발하고야 말았다. “나쁜 사람들! 여러분은 나쁜 사람들이오. 심히 나쁜 사람들이오. 좋은 기독교인들을 괴롭히려는 생각만을 가지고 있는 나쁜 사람들이오. 여러분들은 학교를 계속 위기로 몰아넣는 사람들이오!"라고 비판하였다.

아버지가 지역유지라서 그는 퇴학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함께 쓰개치마 입기 거부운동을 벌이다 퇴학당한 학생들의 복학을 위해 1915년 10월 2학기 중 동맹휴학을 주도한다. 그는 동료 학생들에게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고 쓰개치마는 입지 않되,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건물과 기숙사에서 나와서 복학 요구를 하였다. 이어 교목인 김목사의 사택에 가서 집단 시위를 하였다. 김 목사는 교장을 설득하겠다 하여 학생들을 되돌려보냈고, 이어 학교에서는 비상이 내려져 학부형들이 소환되었다.

학부형들이 소환되는 등의 사태를 겪은 뒤 교장 미스 골든은 아버지들과 상의하였고 아무도 퇴학당하지 않을 것이며, 쓰개치마도 입지 않아도 된다고 허용하였다. 조선총독부나 일본인 시학관이 강요하지는 않았으나 여자가 외출시 쓰개치마를 입는 것은 조선의 오랜 전통이었고, 일본인이나 미국, 서양인 선교사들도 없애지 못한 풍습이었다. 이후 경성부에도 알려지게 되면서 1916년부터는 소녀나 처녀들이 외출 시에 쓰개치마를 입지 않는 현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3 일제강점기 교육활동과 독립운동

1.3.1 고교졸업

1916년 7월 기전여고 3학년 여름방학 때 금산의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나는 학교에 다니겠다는 내 고집으로 부모님께 이와 같은 모욕과 수치스러움을 느끼게 한 데에 죄책감을 느꼈다. 동리의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나는 옳지 못한 여자였으며 그들은 내가 정신적으로 잘못된 데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채소밭에 간다던지 집 근처 들을 산책하는 것 외에는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은 없었다. 때때로 남산에 올랐는데 거기에는 우리 집 뽕밭이 있었다. 나는 숨어버리고 싶었다. 미스 골든이 옳았다. 나는 내가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을 불쌍하게 만드는 말썽꾸러기였다.'고 회상하였다.

1916년 8월 다시 전주로 올라갔다. 3학년 2학기 무렵 교목 김목사는 우수한 성적의 여학생들과 국내 명문가의 자제들과의 결혼을 주선하였다. 그는 '한국의 딸들을 결혼시키는 전통적 풍습의 야만성을 여기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1917년 고향 사람들 중 일부는 일본의 강제이주정책 혹은 생계로 고향을 떠났지만 그의 집은 지역 유지인 덕에 무사하였다. 오히려 그가 학교생활을 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딸들을 학교로 보내는 것이 고향 마을에도 점차 확산되었다. 4학년 2학기 무렵 일본인들이 조선인 청년들을 구타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한국인 지하활동에 대한 자료를 찾아서 접하기도 했다.

1918년 3월 20일 기전여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때 학교 동료들과 함께 일본인 교사와 시학관을 골탕먹이기 위해 조직했던 자살대를 공식 해체하였다.

1.3.2 소학교 교사 생활

아버지는 그에게 이화학당에 보내주겠다고 제의하였다. “이제 나는 너를 강제로 결혼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네가 공부하여 가문에 끼친 영광만큼 수치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네 생각은 어떠냐? 너를 이화 대학에 보내 주겠다. 그것은 네게 4년 동한 더 공부할 기회를 주는 것이야. 그리고 공부가 끝났을 때 결혼을 하는 게다.” 그는 아버지가 기대한 바에 대하여 기대와 유혹을 느꼈으나 거절하였다.“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의외라는 듯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는 항상 공부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느냐?” “예, 그러나 저는 어떤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는 결혼을 할 수 가없습니다.” “너는 계집아이다. 좋은 여자가 되는 것이 너의 유일한 사명이야!”더이상 대화가 되지 않았고 그는 헤어져서 전주시내로 갔다.

1918년 전주 기독전문여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3월 기전여학교 시절 교사의 한사람인 이순길의 주선으로 천안 양대소학교(良垈小學校)의 교사가 되었다. 대전역에서 천안역으로 열차를 타고 천안의 한 광산촌 하숙집에서 숙식하며 교사로 생활하였다. 그는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매질을 하지 않아서 화제가 되었다.

1.3.3 민족자결주의 운동과 지하 독립운동

1918년 겨울 독감의 유행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그는 고무되었다. 그는 전주 기전여자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에 이승만이 미국에서 지하 조직을 결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1918년 12월 어느 사업가를 통해 경성부에 있는 한국인 지하조직 활동가를 만났고, 그에게 이승만이란 사람에 대해 물었다. 이 활동가는 행상으로 가장하여 천안으로 내려와 그의 숙소에 드나들었다. 그리고 비밀리에 인쇄한 삐라들을 그에게 건네 주고 1919년 초에 전국적인 소요사태를 일으키는데 동참할 것을 부탁했다.

상하이에 있는 한국 지하운동 본부는 프랑스 조계 내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박사의 메시지는 한 지하 운동원에게 전달되었으며 그는 그것을 남경으로 가지고 갔다. 남경에는 제2의 비밀 본부가 있었다. 그 다음에 한 연락원이 그 메시지를 가지고 두만강까지 와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연락원에게 전달하였다. 한국으로 메시지를 가지고 들어오기에는 겨울이 가장 안전하였다. 그것은 강이 얼어서 지하 운동원들이 일본군이 순찰하는 다리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 메시지가 접수된 바로 직후에 유행성 감기가 퍼졌다.

미국에서 이승만이 지하조직을 만들어서 소요사태를 일으키려 한다는 정보 외에 중국 상하이에 한국인 지하운동 조직이 있고, 난징에는 그 조직의 지부가 있으며 이들이 1919년 초에 전국적인 사태를 일으키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동지들을 만나, 비밀리에 사태에 동참할 계획을 세운다.

1919년 2월 중순 경성부에서 온 연락원과 만났다. 그는 '태황제께서 돌아가셨소. 일본인이 독살하였소.'라며 거사를 결행할 때가 다가왔음을 알렸다. 이때 '연락원들은 자주 왔다. 때로는 말을 타고 왔으며, 때로는 여행자나, 행상, 거지로 가장하고 오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경찰의 순찰이 더 잦아졌다. 낯모르는 방문객들은 검문을 당했으며 그들의 증명서를 조사하고 몸을 검색했다. 연락원들은 그들이 검문에서 무사히 통과되면 노래를 부르면서 학교 옆을 지나갔다. 그 노래 소리가 신호였으며 나는 산 밑으로 가 그들을 만났다. 그들이 가지고 온 메시지들은 가장 신나는 뉴스가 되었다.'고 한다.

1.3.4 3.1운동 전후

1919년 2월 초, 경성에 있던 지하조직원들은 각지로 흩어졌다. “지하운동본부는 3월 1일 큰 시위를 결정하였소. 그것은 전 세계에 우리들의 자치 결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오.” “서울의 파고다 공원에서 정오를 기해 종이 울리면 모든 한국은 자유를 위하여 절규할 것이오. 우리들의 시위가 베르사이유에 알려지자마자 세계의 민주국가들은 우리들을 자유로 만들 것이오.”라 하였다. 어느새 임영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하 조직의 충청남도 천안군지부의 대표가 되어 있었다. 3월의 시위를 위하여 동지들을 규합, 국기와 삐라들을 입수하고 삐라와 기타의 문서를 배포하며 국기를 나누어줄 계획을 세웠다.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전주 만세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3월 1일부터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천안역으로 가서 만세 운동에 동참하였다. 만세 시위가 확산되자 주부처럼 머리를 땋아올리고 상복을 구하였다. 천안에서 만세 운동을 벌이던 중 수상하게 본 일본 경찰에 의해 수색되었으나 자신을 시골 부인이며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야 된다며 우겼다. 몸에 소지하고 있던 독립 선언서는 발각되지 않았다. 형사들은 몇명을 감시인으로 딸려서 내려보냈고, 열차로 이동하던 중 이들이 점심 식사하러 간 사이에 열차의 다른 손님의 아이를 빌려서 자신의 아이인 척 위장하였다. 그는 부인에게 자신이 쫓기고 있음을 설명하고 전주까지 가는데 같이 가달라고 부탁하였다. 부인의 승락으로 전주까지 아이 엄마 행세를 하면서 내려갔다.

3월초 전주역에 도착하여 이동우, 김건보를 비롯한 전주, 완산, 익산 지역의 인사들과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12일에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신일룡이 운영하던 완산 병원에서 계획을 추진했다. 3월 12일 전주 남문에서 열린 만세 시위에 동료들은 그에게는 참여하지 말 것을 권고했으나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고, 곧 들이닥친 일본 형사들에 의해 체포당했다.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곧 체포되어 구타당한 후 전주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후 고문을 당했고, 나체로 검문검속을 당했으며 옥문 밖에서는 이 형문을 두고 시민들의 항의가 계속되었다.

1.3.5 3.1운동 실패이후

3월 19일부터 고문이 계속되었고, 곧 재판에서 징역 7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어머니는 다시는 전주에 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그를 석방시키려 했지만 그는 어머니의 부탁도 거절하고 투옥, 그해 6월 가석방되어 풀려났다. 석방 직후 전주로 내려가 완산 병원의 의사인 신일용과 잠깐 교제하였다. 그러나 대구고등법원에 다시 소환되어 집행유예 3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신일용과도 헤어졌다.

그 뒤로도 신일용은 금산군의 그의 집에 비밀리에 연애편지를 계속 보냈고 이는 아버지 임구환에게 발각되었다. 아버지 임구환은 처녀에게 편지를 보낸다며 좋지 못한 사람이라며 분개하였다. 신일용이 그에게 보낸 연애편지는 그대로 아버지에게 압수당하였다. 1919년 10월 그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다. 그러나 그는 집행 유예 상태였고 금산의 집에 감금당해 있었다. 그 뒤 상해임시정부의 연통제(聯通制)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1.3.6 일본 유학 생활과 감시

1919년 11월 비밀경찰의 눈을 피해 집을 나와 열차편으로 부산에 도착, 배를 타고 일본에 도착해 히로시마로 갔다.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廣島基督女子專門學校)에 입학, 그는 게인스(Gaines)와 샤론(Sharon)이라는 수녀들을 만났다. 그러나 형사들 사이에도 연락이 계속되어 형사들은 밀착하여 그를 감시하였다. 이때 일본인 동기로부터 일본 여자와 한국 여자의 차이점을 듣게 된다.

그에 의하면 '일본인 여자들은 우리 한국 여자와는 대단히 달랐다. 그들은 혼전에는 우리보다 많은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우리들보다 덜 자유로웠다. 그들은 자유롭게 남자를 만나는 것이 허용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천황에게 미래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사생아를 생산해도 좋다고 격려까지 받고 있었다. 그들의 잡담에는 한 남자가 얼마나 많은 기생을 처리할 수 있는가'하는 토론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어 '그들의 성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세밀했으며 그것은 나에게 충격적 이었다 .물론 일본 여자라고 해서 내가 만난 여자가 전부 관능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침략을 계획하고 있는 나라로서 인력을 증가시키기 위한 정책을 채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몇 년 안 되어서 독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1.3.7 영명학교, 이화학당 교사 생활

1921년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廣島基督女子專門學校)를 졸업하고 귀국, 선교사 친구인 메리 쉐라(Mary Shearer)를 찾아가 그의 도움으로 공주 주 영명여학교(永明女學校)의 교사가 되고, 그 해에 이화학당에서 교사를 구한다는 정보를 입수, 이화학당(梨花學堂)의 교사로 출강하였다. 1921년 4월 딸들이 일본인들에게 끌려갈까 염려한 금산의 주민들이 그에게 자신의 딸들을 데려가줄 것을 요청했고, 그 중 9명을 선발하여 영명여학교에 입학시키고 이들의 생계를 지원하였다. 1학년 1학기 여름방학 때 9명의 소녀들을 데리고 금산으로 내려갔다. 공주군 영명여학교에 재직 중에도 지하 운동가들과 접선, 상하이 임시정부와 줄을 대었다.

1921년 10월 공주 YMCA 청년회에 가입하였다. 강연에서 그는 '우리들은 장래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라는 주제로 강연,“만일 우리들이 그 희망을 버린다면 하나님은 우리들을 돕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들과 딴 사람들을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들과 같이 계십니다.”라고 하였고 군중이 환호하였다. 이어 경찰이 강단으로 뛰어 올라오려 하자 청중들은 몸과 몸으로 벽을 만들었다. '왜놈들을 죽여라'하는 고함소리도 들렸고 경찰들은 후퇴했다.

이 사건으로 다음날 새벽 경찰이 기숙사로 와서 그를 공주경찰서로 연행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구체적인 죄목을 들 수 없었으므로 쉐라 부인의 책임 하에 석방시켰다. 교사 증을 압수하면서“만일 당신이 그와 같은 연설을 다시 한다면 종신 수감될 것이오.”라고 경고했다. 며칠 뒤 경찰은 그가 아직까지 집행 유예(1922년까지)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때 도지사와 공주 시장과 공주 교육 국장이 나의 경력을 세밀하게 조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해임당했다. 그는 공주를 떠나려 했으나 쉐라 부인의 배려로 영명여학교 병설 유치원의 교사가 되어 유치원을 운영하였다. 이때 신일용이 보낸 사람이 그를 찾아왔으나 거절하고 되돌려보냈다.

1922년 영명여학교 교사를 그만두었다. 이후 이화학당 교사로 있다가, 그해 9월 미국으로 건너갈 목적으로 여권을 쉽게 얻으려 일본에 갔다. 일본에 도착, 관동 대지진으로 아수라장이 된 일본 현지를 구경하였다. 곧 요코하마를 거쳐 하와이로 가서 이승만이 운영하는 동지회로 갔다. 1924년 이화학당 교사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1.3.8 미국 생활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일본인이 한인들을 대량 학살한 현장 사진과 사망자 명단을 입수해 국제 여론의 주목을 끌어냈다.[1] 그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이승만을 만나, 그로부터 자유 민주주의 국가,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국가, 외교와 국제 사회에 대한 설득 등으로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그의 견해에 깊이 공감하면서 그를 적극적으로 도와주게 되었다. 이때 윤치영, 허정, 박마리아, 이원순 등을 만나 오랫동안 이승만을 보좌하게 된다. 1924년 미국으로 유학하려 할 때 조선총독부 외무국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았으나 여러번 설득 끝에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하와이 호놀룰루에는 이승만이 세운 동지회와 한국민족당(韓國民族黨)이라는 간판, 태극기가 있었다고 회상하였다. 이때 그는 요코하마에 있던 한국인 지하운동가들이 이승만에게 전달해 달라는 책과 물품을 그에게 전달했다. 이어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오빠들을 만나고 3·1 운동의 결과에 대해 동포들에게 홍보하였다. 이어 둘째 오빠 양희에게서 여비를 받아 그래머시 플레이스(Gramercy Place)의 노인 요양원에 취직하여 노인을 돌보았다. 일찍부터 교육계에 뜻을 두고 일본으로 유학,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廣島基督女子專門學校)를 졸업했다. 그 뒤 다시 미국에서 영어를 배우기 위해 초등학교를 다시 다녔다. 그래머시 플레이스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다.

당시 미국인 교포 사회에는 안창호의 국민회, 흥사단과 이승만의 동지회가 대립하였는데, 안창호에게 편견이 없던 그는 동지회와 국민회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보며 양자간의 시각 차이를 줄이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승만에게 매료되어 그를 지지하였다. 그 뒤 미국 남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동 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했다. 1931년 남캘리포니아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그는 이승만을 측근에서 보좌하였다.

그의 독립 투쟁에 있어서의 일률적인 용기와 정직성, 추진력, 그리고 그의 지혜는 나에게 정신적 자극제가 되었다. 때때로 그는 너무나도 개방적이고 직설적이었으며 따라서 외교적 언사로써 포섭될 수 있었던 사람들도 말로써 놓쳐 버리기도 했다.

1925년 미국 남캘리포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 편입하였다.

1.4 일제 강점기 후반

1.4.1 대학 재학 시절

호탕하고 활달한 성격으로 일본 히로시마에 있을 때와 캘리포니아 주에 체류 중 조선인 유학생들의 모임을 결성, 이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데 노력하였다. 또한 식당과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용돈과 학비를 스스로 조달하였다.

그는 미국내 교포들을 설득시킬 방법을 궁리하던 중, 연극과 영화 상영을 계획하였다. 1925년 3월 1일 기념식에 LA의 한인 교회에서 연극을 하였는데, 그것은 광주의 한 소녀가 시위운동 때 팔을 잘리는 얘기였다. 그 얘기의 절정은 그녀의 부모가 그녀를 살리기 위해 뛰어갔으나 잔인하게도 죽음을 당하는 장면이었다. 연극은 한국인 교회에서 공연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관람하였다. 상영 직후 그는 근처에 사는 한국인 교포의 3살 된 아들이 부엌칼을 들고 이웃집에 사는 일본인 집에 들어가서 소란이 벌어지기도 한 것을 목격하였다.

영어실력이 부족하던 그는 영어로도 고생한 반면, 학비 마련을 위해 노동을 해야 했다. 로스앤젤레스 시의 올랜드 보겔(Orlando Vogel) 부부의 집에서 아침 5시부터 학교 갈 시간까지 가정부와 아이 돌보미 일을 하였는데 '오후에는 4시부터 8시까지 일을 하고 나서 새벽 3시까지 공부를 했다. 나는 영어와 씨름을 하느라고 사전의 책장을 이리저리 넘기며 시간을 보냈다. 웹스터 사전은 불행하게도 내가 고민에 못 견디어 고함을 지를 때면 방바닥으로 날아갈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미국인들도 ‘한국어를 배우는가?“ 하는 회의로 단념하고 싶기도 했다.'고 회상하였다. 학점이 부족했던 그는 방학때의 보강에도 나갔다.

영어 실력의 부족으로 성적은 그다지 우수하지 못하여 B와 C를 전전하였다. 남캘리포니아 대학교 재학 중 그는 아르바이트 등으로 돈을 모았다.

2년 동안이나 나는 가정부로서 일을 했다. 봉급은 일주일에 6, 7불로부터 12불까지였다. 그 2년 동안 나는 내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질 않았다. 오빠들과 친구들이 입을 옷을 주었고, 밥과 방세는 내가 일을 해준 사람들에 의해서 제공되었다. 그래서 나는 거의 2천불이라는 돈을 저축하게 되었다. 나는 많은 돈을 한국으로 가져가고 싶었다. 왜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나라의 여성들을 지도자로서 훈련시키는 대학을 설립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1.4.2 대학원 수료와 귀국

1927년 가정부 일을 그만두고 오빠 양희가 운영하는 과일 가게의 일을 거들어주었다. 오빠 양희는 그에게 돈이 필요함을 알고 월급을 주었다. 1928년 8월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귀국하지 못하고 계속 미국에 체류하며 일과 공부에 전념하였다. 한때 주유소에 취직하여 돈을 벌기도 했다. 1930년 남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의 대학원으로 진학하였다.

1931년 남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에 유학 중일때 이승만은 그에게 청혼을 하였으나 거절하였다.[2] 1957년 미국 남캘리포니아주립대학 명예박사, 1962년 롱아일랜드대학, 1971년 니혼 대학(日本大學) 등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931년 남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논문은 <한국불교도들의 기독교신앙으로 전향하는 길>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뒤 1932년 배편으로 귀국, 하와이의 이승만을 방문한 뒤, 요코하마 항에서 배를 갈아타고 부산항을 통해 입국했다. 그 뒤 그는 한국인 밀정의 감시를 당하기도 했다.

귀국 직후 그는 바로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에 가입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때 미스 사라 라이언(Sarah Lyon)은 국제 Y.W.C.A.의 서기였는데 한국의 형편을 연구하기 위한 특별 대표로서 제네바에서 왔다. 임영신은 그를 데리고 다니며 한국의 YWCA가 있는 곳을 방문하며 이들의 활동을 소개해주었다.

1.4.3 교육 활동

9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미국에서의 오랜 견문에 견주어 볼 때 너무 초라하고 뒤떨어진 조국의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 후진성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오직 교육이 시급한 과제이며, 학교를 빨리 세워야겠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1935년 4월, 그는 당시 재정난을 겪고 있었던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이 되었으며, 바로 박희도와 김상돈으로부터 재정난에 처한 중앙 유치원 교사 양성소를 인수하여 유치원 교사들을 양성하였다. 북 장로교회로부터 나는 ‘피어슨 성서 학교’(The Pearson Bible School) 라고 알려져 있는 선교학교 건물을 빌려서 중앙보육학교를 개교하고, 직접 교사를 초빙, 철학과 심리학에 이종우, 음악에 홍성유 부부, 회화와 문학에 박봉애, 과학에 이원실, 서무주임은 김태호를 영입하였다. 또한 교과목에는 아동심리학, 교수법, 기독교 교리, 예술, 자연과학, 가정학, 음악, 체육, 문학, 아동영양학, 수공, 구기, 그리기, 위생법, 그리고 일본사 및 동양사 등을 직접 선정하였다. 1933년 중앙사범학교를 개교했고, 그해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무를 지냈다.

보육학교와 유치원 교사 양성소를 운영하면서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하 조직과 꾸준히 접선하였다. '집단적인 대중봉기 대신 훈련된 테러 요원을 통해 운동을 계속했는데, 일본인들을 암살하고 기차를 탈선시키는 등 그들의 활동을 방해'하는 정보를 꾸준히 접하였다. 당시 조선인 지하 운동은 송진우 일파와 여운형 일파, 박헌영 일파가 있었는데, 그는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고 중간파를 형성하였고, 이승만계열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쪽과 연결하여 활동, 국내 정보와 동향을 전달하였다.

유치원과 소학교 교사들을 교육시키는 것 이상의 교육활동을 하고자 하던 그는 조선총독부 교육국으로 가서 고등학교와 전문학교 교수를 훈련할 수 있는 허가를 내줄 것과 중앙사범학교를 전문학교로 승격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번번히 거절당했으며, 그들의 규칙을 조심해서 지키는 동안은 학교를 폐쇄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임영신의 과거 행적을 있었으므로 항상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총독부에서는 번번히 “당신은 일본인의 이상에 따라서 여학생들을 교육시킬 사람은 아니오.”라며 학교들을 폐쇄하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매일 일본인 스파이들이 학교를 염탐했고, 그가 자주 교육국을 방문하자 내 사상 중의 어떤 부분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보고가 들어왔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그들은 학교를 폐쇄하기 위해서 매일 그럴 듯한 구실을 찾았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매우 조심했으므로 경찰은 학교가 어찌 되어 있건 폐쇄할 직접적인 증거는 쉽게 찾지 못했다.

1.4.4 미국에서의 모금활동

1933년 다시 도미, 이승만의 외교 독립운동을 지원하다가 다시 귀국했다. 1937년 3월경 중앙대학교의 설립 명분으로 도미하였을 때에도 그녀는 학교 설립을 위해 교민들이 성금한 돈에서 거금 5천 불을 이승만에게 기증하기도 하였고, 이승만의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해주면서 만난 한순교와 결혼하였으나 곧 파경을 맞이하였다. 이 문제로 교민 사회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승만으로서는 1921년 임시정부에서 공금 유용으로 인해 탄핵을 당한 이후 활동과 자금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므로, 임영신을 비롯한 유학생, 재미 교포들의 자금 지원은 중요한 자금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임영신 스스로가 평생의 업으로 생각하였던 ‘교육’을 위해 모금하였던 교포들의 성금 가운데 상당 부분을 이승만의 활동 자금으로 선뜻 내놓았다는 것은 임영신과 이승만과의 끈끈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와이 호놀룰루로 가서 이승만의 활동을 지원하는 한편, 하와이의 한인 교회에 나가 강연을 하였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새로운 지하운동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지적 기지로 만들겠다며 지하운동의 결정을 이야기 하자, 그 모임에 참가한 사람 중의 몇몇은 핀잔을 주었다. “여자가 남자에 대항하는 싸움을 지도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여학생들이 총을 가진 일본인과 싸울 수는 없다.” “이와 같은 계획은 실현성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이와 같은 계획을 위하여서 기꺼이 자금을 기부할 한국인은 없을 것이라며 비웃었다. 그들은 오히려 임영신에게 구제품을 제공하기 위해서나 지하운동의 선전들을 인쇄하기 위해서 또는 총기류를 구매하거나 테러를 하기 위해서, 그리고 암살을 하기 위해서는 기부를 할 것이라며,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

1940년 귀국하던 길에 그해 5월 요코하마에서 체포되어 심문을 당하고 풀려났다. 이유인 즉, 적성국가인 미국에서 오랫동안 체류했다는 것이었다. 1941년 조선인 저격수들이 탄약공장 등에 방화를 저질렀다. 이승만과 임정과 연계되어 있다고 여겨진 그는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고, 얼굴 왼쪽이 마비되었다.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 경성부의 거처로 온 아버지와 언니의 간호를 받았다. 1942년 봄에 얼굴 왼편의 마비가 서서히 가면서 회복되었고 아버지와 언니는 되돌아갔다.

1.4.5 항일독립운동가 임영신과 중앙보육학교의 휴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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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보육학교 교장 임영신의 강의 모습

일제는 임영신에게 심리사상전 승리를 위해 반미(反美) 선전 방송을 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직접 방송하기 곤란하면 원고를 읽기만 하여 달라고 하였지만 그는 그것도 거절하였다. 온갖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승당은 끗끗이 지조를 견지하였으니 당시의 정세를 아는 이라면 그것이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일제 말기는 대개의 여성 교육자가 학교 하나를 살리기 위하여 친일행위를 거부하지 못하던 때이었다.

중앙보육학교가 1943년.10월의「교육에 관한 전시 비상조치 방책」에 따라 정비 대상이 되자 일본군 통신대로부터 임영신 교장 앞으로 성전(聖戰) 수행상 필요해서 귀교를 군이 사용하기로 결정하였으니 10일 이내로 명도하라는 통첩이 왔다. 승당은 이 때 일제에 대항하던 정황을 「나의 이력서」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다른 학교들은 알아봤더니 징발당한 데는 없었다. 나는 총독부 학무국에 가서 왜 하월이면 중앙보육학교만을 징발하느냐. 내 눈에 흙이 덮이기 전에는 비워 줄 수 없다고 항의했다. 그들은 징발 통고를 해 놓고는 뒤로 사람을 보내 "성전 수행에 협력하면 징발은 면할 수 있을 것” 이라고 교섭을 해 왔다. 그래도 나는 “중앙보육학교의 오늘이 있는 것은 오로지 미국인들의 은혜 때문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내 입으로 그들을 욕할 수는 없다” 고 버티었다. 통고를 받은 지 13일째 되는 날, 일군들의 트럭이 학교 쪽으로 달려오는 것을 본 나는 맨발로 교문 쪽으로 달려갔다. 200여 학생들과 교직원들도 뒤따라 나왔다. 인솔해 온 장교 앞을 가로막고 나는 "나를 죽이기 전에는 들어갈 수 없다” 고 고함을 질렀다. 뒤에서는 200여 명의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나가라! 나가라! 고 외치며 울고 있었다. 1시간쯤 승강이가 계속된 끝에 그들은 욕설을 퍼부으며 일단 돌아갔다. 그리고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총칼을 든 군인들이 나를 밀쳐내지 못해서 되돌아간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학교를 접수하겠다고 한 동기가 대미 방송을 거절한 나를 골탕먹이자는 데 있었고, 총칼을 가진 그들이 꼭 들어올 의도가 있었다면 왜 못들어왔겠는가. 그 증거로 패색이 짙어진 전쟁 말기에 가서는 중앙보육학교도 다른 많은 학교처럼 징발되어 철도학교로 사용되었는데 이 때는 이무리 악을 써 봐야 어쩔 수 없었다.

승당이 학교를 군용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징발하겠다는 일본군에 항거하던 광경에 관해서 당시 『조선일보』 여기자이었던 최은희는 뒷날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일군사령부에서는 임영신씨가 경영하는 중앙보육학교에 소위 대동아전쟁 통신부대용으로 명도 명령을 내렸다. 별안간 일개 중대 병력이 트럭을 타고 학교를 점령하려고 왔다. 황급히 달려나간 그는 굳게 닫은 교문앞에 딱 버티고 서서 "나를 먼저 죽여라. 나 죽기 전에 한 발자국도 못 들어온다:" 라고 호령호령하였다. "비켜라. 비키지 않으면 정말 쏜다." 일군은 총부리를 겨누었다. 임영신씨는 두 팔을 벌리고 가슴을 내밀었다. 총 끝에 칼을 꽂고 위협하던 놈들도 기가 질려 돌아가고 말았다.[1]

당시에 일본군이 자신들의 계획을 승당과 학생들이 항거한다 하여 포기하고 철수한 것은 아닐 것이다. 유독 중앙보육학교를 접수하려 하였던 행위가 실은 승당의 반미 방송 거부에 대한 하나의 위협적인 보복이었을 것이다. 그토록 무시무시한 일본군의 강압적인 요구를 가냘픈 여성이 결사의 기백과 온몸으로 항거하여 물리치고 끝내 교사를 지켜낸 사실만은 장한 일이었다.

한편 임영신은 미국 유학에서 귀국한 이래 항일 지하운동을 하던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민족 독립운동에 끊임없이 헌신하고 있었다.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하고 재차 미국에 갈 때까지 사이에 승당을 지근(至近)에서 수행하였던 조성녀는 당시의 승당의 행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 나는 이제 말할 사건들을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에게도 한번도 발설해 본 일이 없다.. 교육사업은 독립투쟁의 전초요, 요구요, 미명인지 모르겠다.... 나를 어찌 보셨든지간에 곧잘 부르시곤 했다. 마치 망아지 새끼가 어미 뒤를 조랑조랑 따르듯이 뒤를 따라 나서곤 했다... 처음 동행한 곳은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옆 청목당 양식음식점이다.… 신사 손님이 계셨다. 두 분은 … 음식을 드시면서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를 극히 나직이 자못 굳은 표정으로 주고받고 하시다가 다시 한국말로 우스개 말씀도 하시곤 했다. 그 밖에 지금의 시경찰국 뒤 긴지요(金千代) … 지금의 명동 가네보(金寶)에서도 … 같은 사람이 아닌 분을 만나곤 했다. 때로는 만나신 분 중에는 편지도 전하게 하셨다. 나는 … 그분들과의 관계나 그들과의 편지 내용이(편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통속적인 연애 편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속바지 주머니에 깊숙이 넣고 핀으로 단단히 꽂고 극히 조심스럽게 전달되곤 하였다. 나는 함홍 영생여고 때 … 민족운동을 하는 전국학생연합회에 가담해서 일해본 바 있어 그저 육감으로 알아챘을 뿐이다. … 한번도 이런 회합의 발설을 당부한 바 없었다. 온건히 천연스럽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 일제는 패망하고 …… 대한민국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틀림없었다. 승당이 만나셨던 분들은 정부수립에 거물들이고 요직에 군림하셨다.

1940년대에 이르러 태평양전쟁에서의 연합군의 승리는 바로 한국의 독립을 촉진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임영신은 독립운동을 해 오던 인사들과 일제에 타격을 가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 결과로 일어난 사건의 하나가 인천탄약창고 폭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300여 명의 애국 청년이 체포되었고, 그 중 30여 명은 일제의 고문으로 죽었다. 이 사건이 있은 뒤에 승당은 동지들과의 접촉을 모두 끊었다. 그것은 그 배후에 있는 동지들의 발각을 막기 위함이었다.

승당이 동지들과의 접촉을 끊었음에도 일본 경찰의 수사망이 승당 신변 가까이까지 뻗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승당은 마음이 심란해져 학교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1942년 봄, 어느날 그에게는 일본에 반항하는 직접적인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니 만나자는 내용의 편지 한 장이 배달되었다. 그는 이 편지를 받고 검열이 심한 때에 인편이 아닌 우편으로 이처럼 중대한 내용을 보낸 것이 의심스러워 그대로 불태워버렸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하여 마침내 그는 경찰에 붙잡혀가 모진 고문과 매를 맞아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하였다.[2]

그 때의 상황을 승당은 「나의 이력서」 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신경쇠약 증세가 일어나 건강이 날로 나빠져 가고 있었다. 매일 의사가 왕진을 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내게도 "참고인으로 출두하라"는 소환장이 왔다. … 의사도 거들어 주어 참고인 진술은 몇 번으로 흐지부지되었는데 그후에 나는 정말로 병이 도져 중풍증세를 일으켰다. 이 해 늦봄에 있었던 장마로 학교 뒷산에 사태가 나서 밤중에 나가 산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딴 곳으로 돌리느라고 쇠약해 있는 몸을 혹사했기 때문이었다. 가벼운 중풍이라 한 달 후에는 기동을 할 수 있었는데 그 동안 조용했던 일본 경찰이 혐의를 푼 것은 아니었다.

내가 조금씩 기동을 하게 된 후, 나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효과적인 항일운동을 위해 어디어디서 만나 의논하자"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편지에 대해서 몇 가지 의문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이 편지를 태워 버렸는데 이 때문에 나는 큰 화를 입게 되었다. 이번에는 어떤 꾀로도 빠져 나갈 수 없이 경찰에 잡혀가 반병신이 된 것이다... 태워 버렸다는 말이 통하지가 않았다. 결국 나는 용산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런 중대한 편지롤 받고도 경찰에 알리지 않은 것은 반역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 날 나는 말투가 건방지다고 서장한테 경찰칼집으로 어깨와 등을 얻어맞았고, 형사들에게 머리채를 끌려 구둣발로 차이고 해서 피투성이가 되었다. 밤늦게야 그들은 반병신이 된 나를 보내주었는데 그러나 이것은 맛보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틀 후 이번에는 관할경찰서가 아닌 서대문경찰서에서 형사들이 들이닥쳐 집안과 학교를 살살이 뒤진 후 나를 연행해 갔다.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는 제자들과 그 남편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일본 경찰은 내가 지하단체와 관련이 있다고 확신을 하면서도 증거를 못 잡아 나와 가까운 제자들을 족친 것이었다. 고통에 못이겨 나를 원망하는 제자도 있었다. 서대문경찰서에서는 다양한 고문을 받았다. 몇 번을 실신한 끝에 닷새째 되는 날, 나는 피를 토하고 뻗어 버렸다. 경찰공의(警察公醫)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진단이 내려 집으로 실려왔는데 감시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한 달 이상 나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1943년 12월에 승당은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는 카이로선언(Cairo Declaration, 1943년 12월 1일)을 비밀 경로를 통해서 알고 곧 송진우(宋鎭禹), 여운형(呂運亨) 등에게 알렸으며, 또한 극비리에 동지들에게 알려 해방의 날에 대비시켰다.

한편 중앙보육학교는 「교육에 관한 전시 비상조치 방책」에 따른 각종학교 정비 조치에 의하여 1944학년도의 신입생 모집을 중단하게 되었고, 1945년 3월 제17회 졸업생 40명을 졸업시킴과 동시에 부득이 휴교하게 되었다.

1.4.6 친일활동 의혹

반민족문제연구소(민족문제연구소의 전신)에서는 『친일파 99인』(1993), 『청산하지 못한 역사 1 - 한국현대사를 움직인 친일파 60』(1994) 등의 저서를 통해 임영신을 친일파로 분류하였고 이후 임영신의 친일파 의혹이 불거졌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는 입장을 선회하여 『친일인명사전』(2009)에서는 임영신을 친일파에서 제외하였다.[3] 임영신은 일제 어용단체에 이름만 올려놓고 활동은 거의 전무한 수준[4]이었고, 창씨개명의 흔적도 없으며, 일제에 의해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받은 것을 미루어 친일파라 보기에는 지나친 무리가 있다는 판단때문이었다.[5] 이로써 임영신의 친일파 의혹은 종결되었다.

1.5 광복 이후

1.5.1 광복 직후

1945년 9월 이은혜, 김활란 등과 함께 여자국민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으며 중앙보육학교를 재개교한뒤 10월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1946년 9월 한국 민주의원 의원을 지냈다.

1945년 10월 16일 중국·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승만이 긴 해외생활을 끝내고 홀로 귀국하였다. 33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이승만은 돈암장에 기거하였으며 대한여자국민당의 부당수 이은혜(異恩惠) 등과 함께 돈암장을 자주 드나들며 이승만을 도왔다.

그러나 이무렵 이승만과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이 소문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이 미국 캘리포니아대에 유학 중이던 그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확대 재생산됐던 것이다.

남편에게서 한국에 들어오라는 답신을 기다리던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에게 이 박사와 임영신의 관계에 대한 낯뜨거운 소문이었다. 소식을 접한 프란체스카 도너는 크게 노하여 한국행을 서둘렀다. 귀국 후 프란체스카는 그를 냉대하였고, 프란체스카 도너에 의해 돈암장 출입이 자제되었다. 그와 이승만의 관계를 떼놓으려는 것이었다. 이후 프란체스카는 임씨의 돈암장 출입을 금지하기까지 했다.

10월부터 11월까지 임정의 지하조직원 여성인 황현숙 등과 함께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남한지역의 중소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들을 방문하며 미군정에 대한 우호적인 강연을 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촉구하였으며, 세계 상황에 대한 개요, 미국의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점, 민주주의 하에서의 개인의 권리 및 종교적 자유, 민주주의를 채택해야 하는 이유 등을 설명하였다.

1.5.2 해방정국의 활동

이후 1945년 10월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으며, 그해 말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6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에 참관하였고, 2월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개원되자 2월 26일 그는 민주의원 공동 비서의 1인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9월 1일, 나는 미국선 케이프 트라이언(CapeTryon)을 타고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를 돌아보고 귀국, 9월 중앙여자대학(중앙대학교의 전신)을 설립, 학장에 취임했다. 이어 민주의원 대표로 유엔 총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뉴욕에 가기 전에 나는 워싱턴으로 가서 트루먼(Truman) 대통령과 번스(Byrnes) 국무장관에게 임시정부 명의의 공식 감사장을 전달하였다. 10월 20일 뉴욕의 플러싱 메도우스(Flushing Meadows)로 가서 UN회의에 참석하였다. 입구에서 출입을 저지당했고, 그의 자리는 없었다. 연합통신의 미스 시그리드 안(Sigrid Arne)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그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남한의 민주의회 대표로 정식 회의 참석 자격을 얻어냈다. 그는 한국의 문제를 말할 수 있도록 폴 핸리 스파크(Paul Henri Spaak) 의장과 트리기브 리(Trygve Lie) 사무총장을 만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워싱턴에 전보를 쳐서 한미협회의 존 스태거스(John W. Staggers)와 제이 제롬 윌리엄스(Jay Jerome Williams), 한국위원회의 임병직 대령이 10월 28일에 도착하였다. 임 대령은 임마누엘 뎀비(Emanuel Demby)에게 그를 소개하고 임영신은 뎀비를 나의 연락관으로 고용했다. 나는 본부를 펜실베이니아 호텔에 설치했다. 46년 11월 1일 한국에 민주정부의 수립을 촉구할 것과 민주의원을 도와야 되는 이유를 설명한 진정서를 각국 대표들에게 발송하였고, 각국 대표단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어 한국 문제를 UN에서 공식 토의에 상정하게 되었다. 그해 12월 국내에서 김구가 보낸 전보를 받고 국내의 소요시위 계획을 접하고 강하게 반대하였다. 이어 미국으로 온 이승만을 만났고, 소요사태를 일으킨다면 한국인들이 더 큰 희생을 당할 것이며, 미군 병사를 희생시킨다면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도와주지 않을 것임을 호소하여 소요사태를 진정시켰다.

그 뒤 중앙여자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군정청 학무국과 교섭하였으나 실패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남녀공학으로 개편시킨 뒤 중앙대학교를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킬 수 있었다. 1947년 여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그해 9월 17일 플러싱 메도우스에 가 미 국무장관 조지 마샬(George C. Marshall)이 한국 문제에 대한 개입 발표를 접하였다.

1948년 1월 단독 정부 수립론과 남북협상론이 대두되자 김활란, 모윤숙 등과 함께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론을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이기도 했던 임영신은 김활란, 모윤숙, 박마리아 등과 함께 각지를 순회하며 이승만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요청, 호소하였다. 모윤숙, 박마리아와 달리 프란체스카 도너의 눈밖에 났지만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돈암장과 이화장을 출입하며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지지, 보좌하였다. 또한 1948년 1월부터 4월 사이에 한국독립당에서 탈당자가 속출하자, 그는 한국독립당 탈당파들을 이승만 진영으로 영입, 설득하는데 노력하여 다수를 영입시켰다.

1.6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6.1 상공부 장관 재직 중

1948년 8월 정부 수립 직후 입각하여 조각에서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48년 9월 상공장관 재직 중 중앙대학으로의 개편과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53년에는 중앙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고 초대 중앙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 11월 대한여자국민당과 지청천의 대동청년단을 흡수하고, 윤치영 등을 참여시켜 대한국민당을 창당케 했다. 그 뒤 지청천, 신익희 계열의 이탈로 군소정당으로 전락했으나 윤치영과 함께 당을 유지해 나갔다.

1949년 정현모의 경상북도 도지사 취임으로 공석이 된 경북 안동군 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1949년)에서 임영신은 대한국민당 당수로서 출사표를 던졌다. 이 보궐선거에서 임영신은 장택상을 이겨 화제를 모았다. 임영신과 장택상은 서울에 주소를 둔 원정 출마에다 성(性) 대결까지 펼쳐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여성 최초의 장관 경력 소유자인 임영신이 승리함으로써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탄생하였으나, 객지에서 임영신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의 입김(관권지원)과 임영신 자신의 화끈한 돈 씀씀이(자금살포)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1949년 5월 28일 보궐선거 때의 독직사건(瀆職事件)으로 배임, 증뢰, 수뢰, 사기, 횡령 등으로 비서 등 18명과 함께 기소되었으며, 정부 감찰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임장관은 1948년 총선에 출마해 생긴 선거빚을 갚기위해 1.상공부 산하 대구메리야쓰공장의 면사를 담보로 3백만원을 융자받고, 공장공금 2백44만원을 유용했으며 2.이승만 대통령 생일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상공부 각 국장들과 국영기업체에 각각 5천만원, 5백95만원을 모금토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장관 등 9명은 무죄판결을 받았고 나머지 9명은 집행유예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1949년 6월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자국민당 후보로 전라북도 금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0년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5차 국제 연합 총회에 한국 대표단으로서, 임병직(단장), 장면, 장택상, 김동성과 함께 참석하였다. 1953년 빨치산 이현상이 사살되자 동향 출신인 유진산과 함께 찾아가서 이현상의 신원을 확인해 주었다.

1.6.2 교육, 정치 활동

1950년 1월 국회 부의장인 윤치영과 함께 애치슨 라인을 한반도까지 확장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2월 상공일보사(商工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였고, 그해 6월 22일 출국, 한국 전쟁 직전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뉴욕에 한동안 체류하였고, 이승만의 급보로 소환되어 전시 내각에 특별히 참여하였고, 1952년 여성계사(女性界社)사장 등 언론계에도 관여하였다.

1953년 2월~1961년과 1963년~1971년 중앙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1961년 11월 중앙문화학원 이사장을 지냈다. 1961년 이후에는 대한여자청년단 단장을 지냈다. 1961년~1974년 한국부인회 회장, 1965년~1972년 대한교육연합회 회장, 1966년 세계교직자연합회장, 1969년 재건국민운동중앙회 부회장을 지냈다. 또한 이은혜, 박마리아 등 우익성향의 여성 인사들과 함께 대한여성청년단을 운영하는 한편, 우익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52년의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제3대 부통령 후보자로 자유당의 예비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자 그녀는 단독으로 출마하였다. 그러나 낙선했다. 1956년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그 뒤 자유당내 이기붕 계열이 성장하면서 그를 견제, 윤치영, 이범석, 이윤영 등과 함께 이승만의 곁에서 밀려나 배척당했다. 이후 친이승만인사이면서도 이기붕 계열을 공격, 비판하는데 가담하였다.

1.6.3 야당 정치인 활동

1958년 대한국민당이 해체되자 일시적으로 자유당에 복귀했다가 1959년 대한국민당의 후신으로 그해 11월 대한여자국민당을 다시 부활시키고 부통령 후보자로 추대됐다. 대통령 후보자로는 이승만의 지지를 선언했다. 그러나 1960년 3월 15일의 3.15 부정 선거로 낙선했다.

그 뒤 임영신은 1960년 8월 장면 정권이 출범, 장면 정권에서 적극적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가 시도, 추진되자, "친일분자들의 망동과 일본의 흉계를 규탄한다"는 성명까지 발표해 가면서 결사반대의 전면에 나섰다. 1961년 우익여성단체인 대한여자청년단의 단장이 되었으며, 윤치영 등과 함께 장면 내각에 반대하는 운동과 이승만 환국 운동을 벌였다.

1.7 생애 후반

1961년 5월 16일 임영신은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나자 극찬을 보내면서 공화당에 참여했다. 이후 대한여자국민당은 군정 세력과 합당하여 재건당으로 조직하였다. 1961년 5월 5·16 군사 정변이 발생하자 정구영, 윤치영, 윤일선, 임병직 등과 함께 군사 혁명 지지 선언을 발표했다. 1963년 2월 재건당 창당에 참여하고, 민주공화당으로 개편될 때도 창당발기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64년과 1965년 한일협정 문제로 인한 국회의 파행에 대해서 오히려 민주당 등 야당을 국정을 방해하는 세력이라며 규탄, 성토했다.

제3공화국 기간 중 친여 성향의 사회원로로서 박정희의 각별한 지우를 받았다. 1963년 2월 윤치영, 정구영, 윤일선 등과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고 곧 민주공화당 총재고문에 선임되었다.

1963년 한국부인회에 참여하고, 그 해 한국부인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1965년 대한교육연합회 회장, 1966년 세계교직자연합회 회장이 되었고, 1969년 재건국민운동중앙회 부회장이 되었다.

이후 1971년 민주공화당 고문, 대한교원공제회 초대 이사장을 지냈으며 박정희의 1969년의 3선 개헌에 윤치영 등과 함께 적극 지지를 보냈다. 1971년 대한교원공제회 제1대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10월 유신 출범 이후 1972년 중앙문화학원 이사장, 1972년∼1976년 통일주체국민의회 대의원 및 운영위원 등을 지냈다.

1977년 2월 17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7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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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 교정에서의 임영신 장례행렬

2 사후

상훈으로는 문화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사후 유해는 중앙대학교 교정에 묻혔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문화, 종교, 언론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

3 저서

석사학위논문으로 〈한국불교도들의 기독교신앙으로 전향하는 길〉(1931년), 저서로 〈내가 한국을 위해서 분투했던 40년 My Forty Years Fight for Korea〉이 있다.

4 사상과 신념

4.1 일본식 윤리에 대한 반감

기독교인이고 자결을 죄악이라고 생각한 그는 일본의 윤리관에 반감을 가졌다. 그 이유는 일본의 윤리와 도덕은 그들의 국민으로 하여금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고 어떻게 죽느냐를 가르쳤다. 그는 일본인들의 윤리가 비윤리적이라고 지적하였는데 그 이유는 '일본의 아들들은 어린 시절부터 천황에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어떻게 사람을 죽이며, 그 리고 어떻게 죽느냐 하는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일본인들의 생활을 알았을 때, 나는 우리 민족이 그들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투쟁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다 더 확신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5 기타

임철순민주정의당 국회의원, 중앙대학교 총장이 그의 조카이다.
  1. 최은희, 「민족정기의 표상」, 『아직도그목소리가』, 84쪽
  2. 한국여성개발연구원, 『한국 역사속의 여성인물』, 「下편 : 항일독립운동기 - 임영신 : 항일운동의 선구자, 여성교육의 선구자」,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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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항일 지하운동을 감추기 위한 위장으로 추정.
  5. 편찬위원장 : 윤경로(전 한성대 총장) / 편찬지도위원 : 강덕상(재일한인역사자료관장), 강만길(전 상지대 총장),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김석범(재일 문학가), 김우종(재중 사학자), 김윤수(전 국립현대미술관장), 김태영(전 경희대 교수), 김호일(전 중앙대 교수), 김홍명(조선대 교수), 리영희(전 한양대 교수), 리중화(재중 저술가), 박석무(한국고전번역원장), 박영석(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박창욱(중국 연변대 명예교수), 박현서(전 한양대 교수), 백낙청(전 서울대 교수), 변철호(재중 언론인),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염무웅(문학평론가), 윤병석(전 인하대 교수), 이만열(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이연복(전 서울교대 교수), 이우성(전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 이이화(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이해학(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상임대표),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조동걸(전 국민대 교수), 주섭일(언론인), 최병모(변호사), 최삼룡(재중 문학평론가), 한상범(전 동국대 교수), 함세웅(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현기영(소설가) 등 각 분야의 권위있는 역사학자들이 참여하여 일제강점기 공문서, 신문, 잡지 등 3천여종의 문헌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250만 건의 인물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 등의 과정을 통해 2만5천 건의 친일혐의자 모집단을 추출하고, 20여 분야의 전문분과회의와 상임위원회 심의를 거친 결과 4,430명을 선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