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영

역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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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윤태일13대 윤치영14대 김현옥

윤치영(尹致暎)
1898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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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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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에 아들 윤인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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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의 모습.

한국의 정치인이자 친일파. 호는 동산(東山)이다. 한때는 독립운동을 잠깐하다가 중일전쟁 시기 흥업구락부 사건 전후로 친일파로 변절했다. 해방 후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하였으며, 제3공화국 때는 박정희의 참모로 활동했다.

윤치호의 사촌동생, 윤보선의 삼촌, 사학자 두계 이병도의 매제, 고려대학교 설립자 김성수의 사돈이었다.

KBS 아나운서인 윤인구가 이 사람의 손자이다.

2 생애

2.1 생애 초기

해평 윤씨 윤영렬한진숙의 7남 3녀, 서모의 자녀까지 합치면 10남 5녀 중 여섯째 아들로, 둘째 형 윤치소의 아들이 윤보선이다.[1] 윤보선, 윤일선은 그의 조카이지만 윤보선은 그보다 1살이 더 많고, 윤일선은 두살이 더 많다. 더 후덜덜한 사실은 큰형인 윤치오는 윤치영과 30살이나 나이차이가 난다는 사실.

한성에서 태어난 뒤 아버지 윤영렬의 부임지로 이동했다. 어렸을 때는 조카 윤보선의 말동무이자 친구였으나 성장한 뒤에는[2]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일출소학교를 거쳐 중앙중학교에 가서는 이상재, 이승만의 밑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 수주 변영로 등을 친구로 사귀었고, 선배로는 안재홍과 친하게 지냈다.[3] 변영로와는 자주 기방에도 출입했는데, 이때 이상재변영로에게 변정상씨 라고 부른 일화를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고....

유명한 역사학자 두계 이병도의 여동생 이병영과 결혼, 아들 윤기성을 얻었으나 일찍 요절하고 이병영도 곧 병으로 사망했다.[4] 그뒤 기독교 장로 이서린의 셋째 딸 이은혜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더 두었다.

중앙중학교 재학 당시에는 야구부와 축구부에 참여했고, 졸업후에는 모교의 야구부 코치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1923년 하와이 교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린 한일전에서는 참패하기도 했다.

2.2 해방 이전

일본 와세다 대학교 유학 후 미국에 가서 이승만의 사무를 돕다가 임정 구미외교위원부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젊은이들과 격의없이 어울리기 좋아했고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축구와 야구를 즐겨 하던 그의 주변에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을 통해 정보를 입수할수 있었다. 이런 정보수집능력으로 그는 이승만에게 발탁되었다.

컬럼비아, 프린스턴대학교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귀국했는데 흥업구락부 간사로 연루되어 서대문경찰서에 끌려가 일본 순사들과 '조용한 면담'을 했다. 그 면담과정을 목격한 언론인 동아일보서정억 기자가 '면담 과정'을 항의하다가 현장에서 구타당했고, 기자가 구타당했다 하여 조선을 벌집 쑤시듯 이슈거리를 제공했다. 서정억은 일본 기자협회에 사실을 말했고, 기자들과 일본내 기독교인들을 분노케 했다. 결국 사태는 사촌형인 윤치호조선총독부에 가서 신원보증을 서주는 바람에 겨우겨우 풀려났다.

윤치영은 이때 물고문, 매달은 뒤에 나무 판으로 팔, 다리를 깎지끼우는 고문 등을 당했다고 기록하였다.

그 이후 1940년대 초반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하였다. 예를 들어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한 채권을 팔기 위해 채권 친일단체에 협력했다든가 여러번 친일담화를 발표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하였다. 이로서 윤치영은 명예에 치명타를 입었는데, 일제강점기의 말기에는 일제가 거의 모든 분야에 발악하고 있었고 수양동우회 사건과 흥업구락부 사건 이후로 수많은 변절자들이 나타나던 시기였고, 윤치영 역시 여기에 휘말려 들어갔다. [5]

2.3 해방 이후

2.3.1 친이승만 정당 운영

1945년 광복후에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지만[6] 이승만이 귀국하자 이승만의 비서로 돈암장, 이화장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이 귀족출신이고 고급스러운 덕에 프란체스카가 하녀로 부리기가 어렵자, 프란체스카는 자신에게 싹싹했던 이기붕의 처 박마리아를 가까이 하게 되면서, 윤치영 역시 자연스럽게 이승만의 주변에서 밀려나게 된다.[7]

윤치영은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는데, 국회 제헌헌법을 제정할 때 유진오인민이라는 단어를 고집하자 "인민이라는 단어는 공산당이나 쓰는 단어라 쓰면 안된다" 는, 어처구니없는 이데올로기 공격을 가해 인민국민으로 바꾸도록 압박했다.[8]

그뒤 내무장관과 유엔파견대사 등의 여러 직책을 지내다가, 친이승만성향의 대한국민당을 창당해서 활동하기도 했다. 1949년에 반민특위 해체에 일조를 한 부분이 있어 이 부분에 그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있다.

1948년 12월 부터는 친이승만 성향의 정당 대한국민당 을 창당하여 운영하기도 했다.[9] 대한국민당 해산 후 일시적으로 강단에 서기도 했다.[10]

다만 1950년대의 경우는 이승만의 독재에 반대한 것으로 무풍지대(드라마) 등에서 묘사되었다.

해방 직후에는 이기붕과 사이좋게 이승만의 비서일을 보았지만 나중에는 이기붕을 미워하여 이기붕을 떨어뜨리겠다고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11] 이기붕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부통령으로 출마한 것은 이윤영도 마찬가지.[12] 이 일로 이기붕에게 갈 표가 많이 갈라져서 이기붕은 4대, 5대 부통령 선거에서 번번히 떨어진다.

2.3.2 박정희의 참모

제2공화국 때는 장면과 사이가 안좋아서 야당으로 생활하다 5.16 군사정변박정희에게 협조해서 민주공화당 의장과 서울특별시장을 지냈다.

5대, 6대 대선에서 박정희공산주의자로 몰렸는데, 박정희를 공산주의자로 몰고간 사람 중엔 그의 조카인 윤보선도 있었다. 그러자 그는 구정치인이 다시 집권하면 쿠데타를 일으킬 거라고 협박을 했더라는 일이 있다.[13]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할 때 서울특별시를 아름답게 정비하면 지방의 인구가 서울특별시로 더 몰려들어 도시 과밀화 문제를 부추길 것이라는 생각에 도시 개발에 소극적이었다. 이 때 유명한 발언이 "서울의 과밀화를 억제시키기 위해 지방민들이 서울로 전입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평양이냐 그러다가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경질되었고, 후임으로는 원조 불도저 시장으로 유명한 김현옥이 들어오게 된다.

박정희단군 이래의 최고의 지도자 라고 칭찬했다가 야당인사들로부터 단군 이래 최대의 아부꾼 이라는 역비난을 받기도 했다고.[14]

68년 겨울부터는 유신의 정당성을 역설하였고 강력한 영도력이 필요하다며 3선 개헌을 적극 지지하기도 했다.

2.4 80년대 이후

1980년 국정자문위원, 81년 다시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었으며 1982년 민족 해방 운동에 일부 기여한 공으로[15]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 기간 동안 국정원로로 활동했으며, 건국의 정당성을 외치며 민족 해방 계열 대학생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이 건강한 덕에다가 축구, 야구를 즐겨하여 몸이 단련되었는가는 모르겠지만, 그 밖에 이승만 기념사업회 회장을 하기도 했고, 골프나 친목 활동에도 수시로 다녔다.

3 기타

오래 살아서 90이 넘어서도 왕성한 활동을 했고 100살을 바라보도록 살다가 사망했다.

만년 여당으로 처세술에 능하다는 것과 친독재 정권 인사였다는점등 비판과 합리주의자라는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아나운서 윤인구는 그의 손자이다.[16]

고려대학교 창립자 김성수와는 사돈이다.[17]

위에서도 설명되었지만, 이병도집안과 자기 집안이 3중 사돈으로 맺어졌었거나 맺어진 것이라 역사학계가 윤두수 문제에 언론매체 등을 통해, 알려지는 것을 껄끄럽게 여기는 지도 모른다는 음모론 비스무리한 것도 나올만한 떡밥이다.

2010년 12월 10일, 국가보훈처에서 국가유공자 서훈 취소 결정을 내렸다. 유족들이 소송하였으나 2015년 1월 서울고법에서 취소 판결을 받았다.

  1. 윤치영이 한진숙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2. 정확하게는 1948년 이후 윤치영은 이승만의 측근을 지켰고, 윤보선은 한민당-민국당-민주당으로 나가게 된다.
  3. 윤치영은 안재홍을 말할때 '안재홍 형은 싱거운 사람'이라고 추억했다.
  4. 이병도의 형 이병묵의 아들이 그의 둘째형 윤치소의 딸, 윤보선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이중 사돈이 됐다. 게다가 그의 둘째 누나 윤노덕은 이미 이병도의 6촌 형 이병림과 결혼하여 이병도 가문과는 이중, 삼중으로 사돈관계로 얽혀 있다.
  5. 그 당시를 설명하자면 일제강점기 말쯤에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흑역사 그 자체였다. 특히 1943년부터 1945년까지는 국내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가장 많이 끌려갔으며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문당하고 처형당한 시기였고, 좌우 할 것 없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변절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독립운동단체였던 경성콤그룹이나, 건국동맹 등 독립운동 단체를 제외하면 거의 전멸한 정도였다. 광복 이전 국내에서 박헌영이나 여운형 같이 목숨을 걸고 독립을 외친 것이나 지하비밀운동을 한 것은 의미가 컸던 시기였다.
  6.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하면서 한민당과 멀어져갔다. 결국 그는 대한국민당을 창당해서 활동하다가 국민당이 해산되자, 제2공화국 때 박정희에게 협력하여 민주공화당에 입당한다.
  7. 동시에 프란체스카는 1930년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 할때부터 이승만과 썸씽이 있었던 임영신도 출입금지시켰다. 참고로 임영신은 중앙대학교의 초대 이사장으로 서울 흑석동 캠퍼스 뒤편에 무덤이 있다.
  8. 훗날 유진오는 회고록에서 좋은 단어를 공산당에게 빼앗겼다며 한탄했는데, 사실 민주주의 이념에서 보통 사람(people)을 지칭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는 인민이기 때문이다. 국민은 국가의 소속원임을 내포하고 있고, 자연스럽게 국가에 대한 종속적인 개념이 포함되기 때문
  9. 49년 11월에 신익희, 지청천 등이 탈당하지만 그런대로 58년까지 원내 제3당으로 당을 유지해 나갔다.
  10. 이기붕 세력의 견제를 받기도 했을 것이다.
  11. 자서전 윤치영의 20세기 참고
  12. 이윤영 자서전인 백사회고록 참고.
  13. 덕분에 숙질간의 싸움이라는 뒷말도 많이 나왔다.
  14. 한민당으로 정계 입문했으면서 한민당 인사들을 노골적으로 까다가 야당에게 제대로 미운털 박혔다.
  15. 외교 독립운동 및 국내 흥업구락부 관련하여...
  16. 둘째 아들 윤인선(국회사무처 서기관)의 장남이다.
  17. 그의 딸 윤성선이 김성수의 아들 김상석과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