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삼국지)

1 棗祗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인물로 한호와 함께 둔전제를 건의한 자로 본래 극(棘)씨였지만 선조가 조씨로 개명했다고 하며[1], 천성이 충성스러우면서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애초부터 의병을 일으켜 조조의 정벌에 따랐는데, 그의 활약을 보고 원소가 등용을 시도하지만 조지는 조조를 선택한다. 그런 조지에게 조조가 준 관직은 동아현령으로 그가 동아현령으로 있을 때의 활약도 뛰어나서 진궁장막, 여포 등이 연주를 기습하자 조지는 관리와 백성들을 이끌고 성에 의지하면서 지키는 것에 진력해 동아현을 지켜낼 수 있었고 설제, 정욱과 힘을 합쳐 조조의 원군이 오기까지 버텨내는 것을 성공한다.

훨씬 대단한 점은 이 반란이 일어났을 때 조조가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범현과 동아현 밖에 없었는데, 하의, 황소, 하만 등 여남의 황건적 세력을 물리치면서 군량을 얻기 전까지는 동아현의 군량에 의존했던 것이다. 이런 빈약한 식량 사정으로 그는 196년 한호와 함께 둔전제를 시행할 것을 건의하니 조조가 이를 받아들여 대부분의 의견대로 백성들에게 소를 빌려주고 곡물로 조세를 받아들이게 하는 경작에 대한 조세 규정을 결정하고 임준에게 이를 시행하게 한다.

이 정책을 시행을 한 후에는 조지는 소를 빌려 주고 세금을 징수했지만 가을이 되어도 징수량이 그리 늘어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뭄과 수재가 났을 때는 더욱 조세를 걷기가 불편했다고 보고했으며, 조지가 이처럼 몇 차례 같은 보고를 하지만 조조는 일단은 예전에 하던 대로 하라면서 쉽게 개선책을 결정하지 못한다.

그래도 조지는 포기하지 않고 거듭 이 건을 상주하니 조조는 이 일을 순욱과 함께 논의케 한다. 그 무렵, 전 군제주 후성이 와서 말한다.

관청에 있는 소를 농민들에게 빌려주고 조세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관전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낫습니다. 조지의 주장은 관에서는 편리하지만 백성들로서는 상당한 부담이 된다는 뜻입니다.

일단 순욱은 후성에 말에 분명히 하지 않았지만 후성의 지지를 얻은 조지는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계획에 따라서 분전이라는 방법[2]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번에는 조조가 그 말을 직접 듣고 그 말에 찬동해 조지를 둔전교위로 삼고 밭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긴다.

과연 이번에는 효과가 있어 시행을 한 그 해부터 수확량이 대폭 늘어나 나중에는 더 넓은 토지에서 시행해 군용으로 풍족하리만큼 수확량이 증대되었으며, 이렇듯 그 덕분에 여러 반란군을 물리치고 천하를 안정시켜 왕실을 일으키게 되는 등 조지의 공으로 가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으나 조지가 요절하면서 조조는 그를 기리며 군을 내려준다.

조조가 후에 그것을 생각하니 그 일은 봉작을 받아야 했을 정도의 일이기에 아직까지도 제대로 보답을 하지 못한 것을 자신의 자신의 불찰로 돌리면서 조지의 아들 조처중에게 조서를 내려 조지에게 봉토와 작위를 더하여 제사를 지내게 한다.[3]

삼국전투기에서는 사우스 파크케니 맥코믹으로 나오는데, 그의 둔전제에 관한 일은 다 사라지고 동아현을 지킨 일도 정욱 덕분에 마음 먹고 행동한 것으로 바뀌었다.[4]

참고로 만총전에 상서 조지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사실 이놈은 손권을 쪽쪽 빨아주던 조자다! 자세한 원문은 조자 항목 참고.

2 趙至

생몰년도 미상

서진의 인물. 자는 경진(景眞) → 양화(陽和).

대군 사람으로 그의 선조는 한나라 말에 구지현에서 방랑했고 12살 때 현령이 새로 부임해 어머니와 함께 그 현령을 보았는데, 어머니가 너의 선조는 미천한 집안이 아니라면서 나중에 이 사람처럼 될 수 있겠냐고 묻자 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 이후 스승을 찾아가 공부했고 아버지가 밭을 갈면서 소에게 소리치는 소리를 듣자 책을 놓고 울었는데, 아버지가 물으니 아버지를 고생시켜서 마음 아프다고 했다. 14살에 태학관에 입학했고 혜강이 석경의 고문을 쓴 후에 떠나려 하자 풍격이 비상하다고 여겨 혜강에게 이름을 물었으며, 15살 때에는 병든 척 해 자주 미친 듯이 달리곤 해서 집안 사람들이 쫓아가 그를 데려왔다.

16세에 집을 떠나 낙양으로 가서 혜강을 찾으려 했지만 그를 찾지 못하고 업에 이르렀는데, 사중화에게 의탁했고 이름을 날리자 이름을 익(翼), 자를 양화로 바꿨다. 혜강이 업에 오자 태학관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혜강을 따라 산양으로 돌아가 몇 년을 보냈다.

키가 7척 3촌으로 흰 얼굴, 검은 머리, 붉은 입술, 맑은 눈을 가졌고 수염은 많지 않았으며, 침착하고 세심하면서 몸가짐이 공경스럽고 겸손했으며, 논변이 유창해 훌륭한 재주가 있었지만 스스로는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맹원기가 그를 요동종사로 삼자 군에 있으면서 많은 송사를 판결해 청렴하고 공정하다는 칭송을 받았으며, 양친을 버려두고 멀리 떠돌다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도 찾아가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면서 피를 토하고 병이 들어 상의 기간이 끝나기 전에 사망했다.

세설신어에서 혜강이 백기의 풍모가 있지만 그릇이 협소한 것이 애석하다고 하자 조지가 이에 대해 한 자의 해시계로도 천체의 운행의 표준을 잴 수 있고 한 촌의 피리로도 사시의 오가는 기운을 헤아릴 수 있으니 어찌 반드시 커야 하냐면서 식견이 어떠한가를 물을 따름이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3 曹志

(? ~ 283)

삼국시대 위나라, 서진의 인물. 자는 윤공(允恭). 조식의 아들.

초국 초현 사람으로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고 재능과 행동을 칭송받았으며, 느긋하고 도량이 있었고 말타기, 활쏘기 등을 잘했다. 조식은 조지에 대해 우리 혈통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면서 후사로 세웠으며, 나중에는 제북왕으로 고쳐 봉했고 사마염이 무군장군이 되자 조환을 업으로 마중나갔다.

이 때 조지는 사마염을 만나게 되고 아침까지 이야기했으며, 사마염은 조지에 대해 기특한 인물이라고 감탄했다. 265년에 진나라가 건국되자 업성현공으로 격하되었으며, 조지는 악평태수로 임명되었다. 조지는 군에서 유학을 숭상하는 도리를 중히 여겨야 한다면서 박사와 같은 관리 학부를 설치하라고 상소했으며, 장무태수, 조군태수 등으로 옮겼고 조지는 태수의 직위를 여러 차례 하면서 사냥만 다니다가 밤에는 시, 서 등을 읽었다.

275년에 산기상시에 임명되고 과거에 사마염이 육대론을 읽고 조지에게 조식이 썼냐고 물었는데, 조지는 자신의 아버지거 쓴 목록을 만들고 있다면서 돌아가 확인하겠다고 했다. 조지는 육대론은 실리지 않았다면서 무제가 누가 썼는지 묻자 자신이 듣기로는 족부[5] 조경이 썼다고 했으며, 아버지의 글이 높게 평가되는 점을 이용해 자신이 쓴 것을 후세에 전하고 싶어서 아버지가 쓴 것처럼 가장한 것이라고 했다.

조지는 제주로 옮겼고 제왕 사마유가 임지로 갈 때 어떠한 물건을 가져가야 하는지 논의시켰는데, 조지는 아버지가 위나라에서 뜻을 얻지 못한 것을 원망해 몹시 슬퍼하고 탄식했다. 그래서 조지는 사마유처럼 재능있는 황족을 중앙에서 정치하지 않고 지방으로 보내는 것은 진의 번영이 위태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주공단의 이야기를 들어 사마유를 중앙에 남겨두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를 올리기 전에 사촌동생 조가로부터 종형의 논의는 간절하고 100년 후에는 진나라의 역사에 기록되지만 현재는 견책을 받는다는 말을 들었으며, 무제는 이 의견을 듣고 크게 화를 냈다. 무제가 태상 정묵을 파면했고 유사에서 조지 등에게 죄를 묻자고 했는데, 무제는 조지를 집에만 돌려보냈고 조지, 정묵 이외에 논의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모두 정위에게 인도되었다.

조지는 산기상시에 임명되고 조지의 어머니가 죽자 상으로 크게 슬퍼해 병에 걸렸다가 283년에 사망했다. 태상이 조지에 대해 시호로 악시를 보내려고 하자 최포가 탄식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의견을 말했으며, 조지는 정(定)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 극이나 조나 둘 다 대추나무를 의미한다.
  2. 토지를 각 개인에게 나누어주고 수확량의 과다에 따라서 조세를 징수하자는 시책.
  3. 이 조서의 내용은 딱히 쓸 필요가 없는데, 이 항목의 내용은 거의 대부분은 그 조서로부터 나온 것으로 위무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4. 이에 대해 최훈에게 참작될 여지가 있다면 정사 임준전의 조지를 다룬 위무고사의 내용을 정사 삼국지를 번역한 김원중이 번역을 안했으며, 파성의 초기 자료에도 이 사실이 없었기 때문에 둔전제 관련 자료와 네티즌이 일본어를 중역한 자료를 통해서만 찾아볼 수밖에 없다는 점이 있다.
  5. 아버지 세대의 친족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