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垓下之战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수 있지만, 시운을 못 만나니, 오추마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구나.아, 오추마가 앞으로 나가지 않으니,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우미인이여, 우미인이여! 그대 또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ㅡ항우, 해하가(垓下歌)
해하전투 | ||
날짜 | ||
BC 202년 10월[1] | ||
장소 | ||
중국 안후이 성 쑤저우 시 링비 현 | ||
교전국 | 교전국1 | 교전국2 |
초(楚) | 한(漢) | |
지휘관 | 항우 | 유방 한신 공취 진하 시무 주발 관영 |
병력 | 10여만 | 30만 이상 |
피해 규모 | 8만여 명 | 불명 |
결과 | ||
초나라군의 패배, 항우의 포위망 탈출 후 자결 | ||
기타 | ||
초한쟁패의 종말, 통일 왕조 전한의 시작 |
1 개요
중국 초한쟁패기 시대, 한(漢)의 군대와 초(楚)나라가 치룬 초한대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회전.[2]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치룬 마지막의 대결이자, 항우가 스스로 군을 이끌고 패배한 유일한 전투이며, 항우를 몰락시킨 전투이다. 항우는 이 전투의 패배 후 자결하고 말았다.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전중국을 휘몰아쳤던 대전란이 끝났다. 유방은 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한신(韓信) 등의 내부 위협 세력을 정리하고, 영포 같은 반란군도 진압하게 된 유방은 제국의 초석을 깔았다. 이후 문경지치 등의 성세를 지난 한나라는 향후 수백년간 중국 문명의 초석을 쌓아 올리게 된다.
2 발단
2.1 서초패왕
춘추시대와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분열기를 통일시킨 진(秦) 제국은 지나치게 혹독한 다스림으로 인해 스스로 무너지게 되었고, 각지에서 봉기한 세력들은 저마다 기치를 내세우며 진나라와 싸우게 되었다. 진나라는 최후의 명장 장한(章邯)의 활약으로 목숨줄을 연명했으나, 봉기군 중 최강의 세력이었던 항우는 거록대전의 승리를 바탕으로 진나라의 남은 주력군을 모조리 패배, 항복시켰다.
이후 신안대학살를 자행한 항우는 서진하여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점령했고 자신의 권위를 바탕으로 제후들을 분봉했다. 이때 항우보다 앞서 함양에 입성한 인물이자, 범증(范增)이 가장 경계했던 유방은 당초 항우에게 제거 당할 위기에서 항백의 도움을 얻고, 홍문연에서 범증이 짜놓은 흉계를 정면돌파하여 간신히 그 세력을 보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항우와 범증의 견제로 중국의 벽지인 파촉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2.2 초한전쟁
그러나 소하(蕭何)의 노력으로 재기의 힘을 얻은 유방은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고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때마침 제나라의 전영(田榮)을 상대하고 있던 항우는 이에 대응하기 힘들었고, 결국 유방은 초군의 본거지인 팽성까지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항우는 전영을 없애는 일까지는 성공했지만, 본인의 지나친 잔혹스러움 때문에 제나라에서의 싸움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고 있었다. 결국 항우는 우선 성양에서 저항하는 전횡(田橫)을 내버려두고 주력 3만을 이끈채 남하를 시작, 방심하고 있던 유방의 56만 대군을 팽성대전에서 완벽하게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다.
위기에 봉착한 유방은 소하의 지원을 바탕으로 세력을 추스려 형양(滎陽)을 기점으로 항우와 대치 상태를 만들었다. 항우는 형양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했지만 기신(紀信)의 계략을 바탕으로 도주에 성공했고, 이후 팽월(彭越)이 후방에서 초나라군을 공격하기 시작하며 전황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무렵 한신은 조(趙) 공략전인 정형전투를 시작으로 하북을 평정하고 있었기에 항우로서는 초조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형양 · 성고 전역 이후 양군은 광무 대치에서 팽행하게 대립했지만 항우는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고, 이후 용저(龍且)의 대군이 한신에게 격파되었다. 여기에 여전히 팽월은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데다 경포(黥布) 마저 유방에게 회유되자 항우는 일시에 불리해진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유방, 한신, 팽월, 경포 등 사방이 적으로 가득찬 항우는 별다른 패전조차 없이 고립된 형국이 되었다. 게다가 오창(敖倉)의 양식을 장악한 유방은 보급도 수월한 형국이었기에, 장기전으로 끌고 간다고 해도 별다른 수는 보이지 않았다.
이때 유방은 후공(侯公)을 보내 천하를 양분하여 홍구(鴻溝) 서쪽은 한나라의 영토로 하고 동쪽은 초나라의 영토로 하자는 협약을 맺자고 했다. 형양 포위때는 이러한 제안을 거절했던 항우지만 이 시점에 이르러선 결국 어쩔 수 없이 제안을 승낙했고, 사로 잡았던 태공과 여후를 보내주었다. 협악을 맺은 후 항우는 자신에게 아직까지 협력을 했던 제후들의 군사를 해산하고 팽성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유방 역시 장안으로 돌아가려고 할 무렵, 장량과 진평은 그런 유방을 만류했다. 지금이야말로 항우를 끝장 낼 수 있는 최후의 기회라는것. 이 말을 들은 유방은 다시 군사를 모아 돌아가는 항우를 기습하는데 이른다. 하지만 항우는 고릉(固陵)[3]에서 그런 유방의 군대를 무찔렀다.
유방은 장량의 제안에 따라 팽월과 한신의 봉지를 넒혀주기로 약속했다. 또한 항우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회유하였고, 수춘을 공격하던 경포(黥布)와 유가(劉賈)까지 합류시켰다. 한신과 팽월이 결국 유방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옴으로서, 영웅들은 마침내 해하(垓下)에서 모두 집결하였다. BC 202년, 해하에서 집결한 연합군은 항우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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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하 전투 국면 |
3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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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지(武備誌)[4]의 한신해하오군진도(韩信垓下五军阵图) |
이 전투에 들어서기 전, 양군이 취한 포진에 대해서는 한군의 정보만 알 수 있고, 항우의 포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이후 전개를 보면 항우의 부대는 따로 양익포위를 위한 부대를 배치하지는 않은 듯 하다. 항우의 병력은 대략 십 만여 명이었다.
한군의 포진에 대한 정보는 고조본기(高祖本記)에서 그 언급을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한군은 제왕 한신이 30만의 병력을 앞세우고 선두에 주둔했다. 과장을 고려한다고 쳐도 당시 한신의 세력을 생각하면 상당한 전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한신의 군대 양익에 또다른 부대가 주둔했다. 좌익의 군을 이끈 인물은 요후(蓼侯) 공취(孔藂)[5]였고, 우익의 군대를 이끈 인물은 비후(費侯) 진하(陳賀) 였다.
이렇게 한신의 군대를 필두로 한 군대가 앞선에 나섰을때, 유방은 그 후방에 군대를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다. 또한 그 유방의 뒤로 주발(周勃)과 시무(柴武)가 주둔하여 대비를 해 한신과 유방에 이은 삼중의 벽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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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하 전투의 진행 |
전투는 한신과 항우의 대결로 시작되었다. 한신이 이끄는 앞선의 부대는 항우의 본대와 맞붙었는데, 이때의 회전에서는 항우가 한신을 압도하여 한신의 군대는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6]
이렇게 되자 자연히 한신의 부대가 뒤로 물러난 만큼 초나라 부대는 깊숙이 들어온 형세가 될 텐데, 바로 이때에 좌익과 우익에 있던 공취, 진하의 부대가 초군의 양 측면을 후려쳤다. 앞선의 부대만을 보고 너무 들어왔던 항우의 부대는 양쪽에서 공격을 받자 당황하여 전세가 불리해졌는데, 이 틈에 뒤로 물러났던 한신의 부대가 다시 돌아와 혼란 상태에 빠졌던 초군을 공격했다.
결국 삼면에서 받는 포위 공격에 초나라군은 처참하게 무너졌고, 10만 명의 병사 중에 8만여명이 목이 베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남은 초나라 군 역시 포위가 되어버려 빠져나올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초나라 군을 포위한 한나라 군대는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를 불렀고, 노랫 소리를 들은 항우는 크게 당혹스러워 했다.
"한군이 이미 초나라의 모든 땅을 점령했단 말인가? 어찌하여 초나라 사람들이 이렇듯 그 수효가 많단 말인가?"
마음이 복잡해진 항우는 밤 중에 술을 마시면서 슬픔에 젖어 노래를 불렀다.
力拔山兮氣蓋世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지만 역발산혜기개세 時不利兮骓不逝 시세가 불리하니 추[7]도 나아가지 않는구나. 시불리혜추불서 骓不逝兮可奈何 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추불서혜가나하 虞兮虞兮奈若何 우희여, 우희여! 너를 어찌해야 하는가. 우혜우혜내약하 |
이 노래를 듣고, 항우가 사랑하여 항상 데리고 다니던 우미인도 답가를 불렀다.
漢兵己略地 한나라의 병사가 이미 (초나라의)땅을 차지하였고 한병기략지 四面楚歌聲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은 초나라의 노랫소리 사면초가성 大王義氣盡 대왕의 의기가 다 하였으니 대왕의기진 賤妾何聊生 천첩이 살아 무엇하리오 천첩하료생 |
결국 그 패왕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차마 항우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고 한다.
4 결말
항우는 그 날 밤으로 말을 타고 자신을 따를 수 있는 병사 800여명을 이끌고 한군의 포위망을 뚫었고, 날이 밝은 뒤에 항우가 달아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군은 관영(灌嬰)을 시켜 5천여 기병으로 항우를 추격했다. 회수를 건넜을 때는 100명 가량 남았고, 어떻게던 달아나던 항우는 음릉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에게 길을 물었지만 항우에게 원한이 있던 걸로 보이는 노인[8]이 길을 잘못 알려주면서 늪지대에 걸려들어 추격군에 다시 따라잡혔다.
간신히 빠져나와 동성에 이르렀을 때는 28명만 남았다. 여기서 항우는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에게 '내가 못나서 이렇게 패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자기가 이기지 못하게 망하도록 만들어서 패하는 것이다.'라고 징징거리면서도 홀로 괴물 같은 용맹을 발휘하여 한군 도위와 병사 수백을 썰어버리지만 오강에서 만난 정장이 어서 강동으로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자고 권유하는 걸 거절하면서[9] 자살해 해하 전투와 초한전쟁, 항우의 일생 모두가 종결됐다.
5 왜 항우는 패배했는가?
해하 전투의 패배로 항우는 몰락했지만, 사실 이 전투의 상황을 보면 항우는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패배 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판이 깔아진 상황에서 항우는 이미 지고 들어간 셈이었다.
일단 전투의 상황을 보면, 설사 항우가 역사에 길이남을 초월적인 지휘력을 보이며 한차례 회전에서 승리, 좌우익의 병력을 모두 차단하고 한신을 사지로 몰아넣는다고 해도 항우가 승리한것은 아니다. 그 후방에는 유방의 부대가 버티고 있으며, 유방으로서는 앞선의 부대가 위기 상황이라고 하면 지원군을 적절한 시기에 파견하여 약해진 곳을 보완하면 그만이었다.
설사 도장 깨기처럼 항우가 앞선의 병력을 모두 격파하고 후방의 유방에 다다른다고 해도, 그 유방의 후방에는 또다른 병력이 있었다. 배후에 주둔된 주발과 시무의 병력을 생각한다면 항우는 적을 완전히 패배시키려면 세번 이상의 회전을 치루어야 하는데, 서로간의 군사 기술이 비슷한 차원에서 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현실은 항우는 제 앞선을 돌파하지도 못했다. 물론 팽성대전에서 항우는 56만의 제후연합군을 상대로 지옥을 보여주었지만, 당시는 방심한데다 지휘계통도 엉망인 상대를 벼락같이 기습한 전투였으니, 상대가 완전히 판을 깔아놓은 이 전투와는 경우가 다르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이 전투에서 항우가 패배한 사실보다는, 이런 지경에 처해질 수 밖에 없었던 그간의 상황이었다. 항우는 한때 전중국의 지배자였고 가공할 병력과 수많은 제후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최후에 접어들어서는 자신보다 수배는 더 많은 압도적인 군사 숫자를 바탕으로 질 수 없는 전장을 만든 상대를 향해 돌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별다른 패전조차 한번 없었는데 말이다.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요소가 그저 전투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
사실 가장 무서운 부분은 설사 이 전투에서 모든 난관을 돌파하고 항우가 승리한다고 한들, 총지휘부가 몰살 당하거나 하지 않는 한 항우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관중에는 소하가 한나라의 기반을 만들어 놓았고, 당시 제나라에서는 조참(曹參)이 해하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주둔하고 있었다. 여타 제후들이 편을 바꿀 수는 있겠지만, 팽월 등은 항우의 세력이 절정에 달하던 시점에서도 항우에 적대하고 있었으니 이런 경우를 생각하면 모든 제후들이 항우의 편에 붙을 것이라고 여기기도 무리다.
어쩌면 해하 전투에서 승리한 뒤라도, 나중에는 그보다 더 많은 병력의 한군이 또 한번의 해하 전투를 보여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코스믹 호러
다만, 당시는 한군 역시 한계에 부딪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초나라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한나라 역시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극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초한전쟁의 영향은 통일 이후에도 백여년 가까이 후유증이 있어 북방의 흉노에게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타격이 심각했다. 한군을 지탱해주었던 풍요로운 관중 지역 역시 결코 화수분은 아니어서 이 시기에 소하가 보낸 병사는 본래라면 병역 대상이 아닌 노약자와 청소년이었다.
실제로 한군은 이미 단독으로 군대를 해체한 초군을 제압할 능력은 상실했고, 방관하면서 뭉기적 거리려는 움직임까지 보이던 한신, 영포, 팽월 등에게 왕위와 영토를 확실히 인정하는 약속을 하면서 아군으로 끌어들이고, 장량과 진평이 평화협정을 갑자기 파기하고 기습 공격을 가하는 비겁한 수단까지 서슴치 않고 사용하면서 항우가 병력을 해체하여 약화된 틈을 타서 제거했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 해하 전투는 역시 한계에 도달한 시점이며, 국력도, 군사력도 단결력도 이미 아슬아슬한 상태였던 것이다. 이 정도의 소모를 고작 몇 년 사이에 보충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한의 국력을 너무 신화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초군이 역전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해하 전투 당시 초군의 역량은 정말로 끝장이라는 점에서 너무나 상황이 아득하다. 항우가 설사 승리한들 항우의 정치력이나 전략적 식견 등이 너무 절망적이라 또 장기전으로 흘러갈 경우 해하 시즌 2를 예측하는 게 사리에 들어맞기 때문이다. 초군의 역량은 말 그대로 바닥이 났는데 한과 초의 덩치 차이 등을 생각하면 유방과 항우의 전략적 능력이나 정치적 식견 등을 뒤바꿔야 가능성이 보일 수준이다. 승리한 후 여세를 몰아 단기적으로 한을 끝내버리는 경우는 정말 팽성전투처럼 한군을 갈아마시고, 피폐한 초군의 역량을 위해 한군 세력의 이반까지 기대해야 되는데 여기까지 가면 가정도 너무 언어도단적으로 흘러간다.
특히 한군 세력 이반의 경우 한군의 주요 세력 및 인물들이 이미 여러가지 이유, 즉 유방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거나, 이미 초에서 한으로 갈아탔다거나, 항우가 일가족을 몰살시켰다거나, 항우에게 그 외 개인적 원한을 갖고 있다거나, 항우를 정말 엄청 괴롭혀서 찢어죽일 듯한 원한을 샀다던지 이미 너무 심하게 갈라선 상황인데 항우의 속좁고 흉포함은 만인이 아는 상황이라 절망적이다. 오히려 항우가 어떻게 이겨도 피폐하기 그지없는 초군에서 다시 경포 같은 이반자가 나올 가능성을 생각하는 게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다만 전반적으로 유방 지지 세력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어서 그렇지, 항우 역시 한 때 중국을 지배했던 패왕이다. 당시만 해도 아직도 항우를 지지하는 세력도 적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심지어 해하 전투 이후에도 항우의 잔당은 적지 않게 기록에 보인다. 다른 군웅들 역시 유방이 과감한 양보를 하기 전 까지는 상당히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고, '지금' 항우를 끝장내지 못한다면 군웅들은 항우에게 아무리 원한이 있다고 해도 초-한 세력구도가 이어지는 것이 자신들의 할거에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될 것이다. 게다가 궁지에 몰린 항우는 이전과는 달리 주변 세력이나 부하들에게 상당히 유화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으므로 시간을 준다면 어느 정도 재기하지 못한다는 법도 없다.
따라서 양측이 모두 피폐해진 상황에서 해하 전투에서 끝을 보지 못했다면 한나라 역시 국력의 한계로 더 이상은 전쟁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하다. 결국 초한 양측 모두 승자가 되지 못한 제2의 전국시대, 승자없는 싸움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여담으로 이때 한신을 비롯한 한군의 움직임을 보면, 마치 한니발 바르카가 칸나이 전투에서 양익포위전술의 전형을 보여준 사례와 거의 유사한 측면이 있다. 칸나에 전투와 다른 부분이라고 하면 기병의 비중이 그리 높지 않고 이후의 추격전에서나 이름이 보인다는 정도.[10] 물론 한군이야 압도적인 전력 우위를 이용해서 예비대와 양익 포위 전술을 활용한거고 한니발은 적의 절반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양익 포위를 달성하는 미친짓(...)을 했다는 차이도 있지만.
한니발 이후 양익포위전술이 군사전술의 한 원형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한 전술에 대한 심사숙고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하고 발전하고 있다고 봐야 할지도?
그리고 한니발과 한신 둘 다 이 시기 이후로 망했어요가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더불어 둘다 한씨다(...) 믿으면 곤란하다
6 해하의 위치는 어디?
이 전투가 벌어진 해하의 위치에 대해서는 몇가지 논란이 있다. 영벽(靈璧)설, 녹읍(鹿邑)설, 그리고 진하설등이 있다.[11] 해하라는 지명이 좀 모호한 측면이 있고, 몇몇 장수들의 기록에서는 진(陳), 혹은 진하(陳下)에서 항우를 격파했다는 식의 언급이 있어 논란의 여지가 되는 것이다.
가장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견해는 곽말약(郭沫若) 등이 주장한 영벽설이다. 녹읍설의 경우는 판원란(范文瀾)[12]이 주장했는데, 사기정의(史記正義)를 기반으로 한 견해다.[13] 판원란은 중국 고전학의 여러 방면에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받지만, 이 견해를 내놓을 당시에는 중국근대사로 연구의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었던 참이고 또 이 견해 자체가 그가 쓴 중국통사에 관한 저서 속에서 발표된 것이라 학계의 흥미를 그리 끌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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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진가외(陳可畏) 등은 몇가지 이유를 들어 이 가설들에 대해 반박하고, 현재의 하남성 회양현이 문제의 해하 전투가 벌어진 곳이라고 주장했다. 사타케 야스히코(佐竹靖彦) 등도 저서인 '유방' 에서 그런 견해를 소개했다.[14]
첫번째 이유는 우선 앞서 말한 장수들의 기록[15]에서 진(陳), 혹은 진하(陳下)에서 항우를 격파 했다는 언급이 있다는 점이다.
두번째 이유로 진현은 해하 전투에 앞서 전투가 벌어진 고릉의 남쪽으로 맞붙어 있는 위치라 전개가 자연스러우며, 초군이 한군의 동진 혹은 남진을 저지하는 군사형세와 맞아떨어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논지를 기반으로 해하 전투의 국면을 다시 보자면 위와 같은 위치가 된다. 위에 있는 해하 전투의 국면과 비교해보면 전투한 위치가 훨씬 서쪽으로 이동해있는것을 볼 수 있다.
다만 이 위치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경우 항우는 적의 포위망에 걸려들어 거의 대부분의 병사를 잃었는데도 불구, 전투가 벌어진 곳에서 동남쪽으로 약 280Km를 넘게 관영의 추격을 받으면서도 도주해서 동성(東城)에 이르고 자결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게다가 이때의 도주에서 길을 잘못 아는 바람에 더 헤매고, 늪지대에 빠지기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도주하는 사람들은 정말 지옥길을 걷는 느낌이었을듯……- ↑ 바로 그 202년 10월 19일,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 바르카가 몰락했다. 후일 동서양 고대 제국의 모범이 된 로마제국과 한나라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게 만들어 준 전투들이 같은 시기에 벌어졌다는건 우연이지만 꽤나 흥미롭다.
- ↑ 엄밀히 말하면 이후에도 아직 항복하지 않은 초나라의 세력이 있기는 했다.
- ↑ 하남성 태강현(太康縣) 남쪽
- ↑ 1621년 명나라 모원의(茅元儀)가 15년 동안 고금의 병서(兵書) 2천여권을 연구, 검토하여 만든 병법서
- ↑ 공자의 후손이라 한다.
- ↑ 혹은 의도적으로 한신이 부대를 뒤로 물렸을 수도 있지만. 일단 고조본기에서는 그저 전세가 불리하여 물러났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 ↑ 항우의 애마인 오추마를 말한다.
- ↑ 이는 민심이 항우를 오래전에 떠났다는 증거 라는 말도 있다.
- ↑ 초한지에서는 마지막 28명을 배에 타 달아나도록 명령하였고, 정장에겐 자신의 오추마를 상으로 내렸다. 오추마는 배에서 울다가 강물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 ↑ 한군 기병장 관영이 이끄는 기병대로 마지막에 추격끝에 항우의 목을 거둬간다
- ↑ 진하의 위치는 앞서 있는 해하 전투 국면 지도의 '진' 이라는 지역을 참조하면 된다.
- ↑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 ↑ 사기정의는 당나라때 쓰여졌다.
- ↑ 다만 이 책은 역사 기록의 왜곡을 이유로 유방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부분에 대해서는 까는 태도를 유지하는데, 한신에 대해서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아무 근거 없이 긍정적으로 묘사하는등 편향된 모습이 있다. 제나라로 출병하는 한신이 '어려운 전투에 나서는 기쁨' 으로 군말없이 움직였고, 역이기와 한신 사이에는 밑도 끝도 없이 우정이 있었다고 하는등……
- ↑ 열전이나 사기 '표' 등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