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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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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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rrhos I, BC 319~BC 272

그리스 북서부 에페이로스의 왕(재위 BC 307∼BC 303, BC 297∼BC 272).

한니발도 역대급 명장중 한명으로서 손꼽았던, 고대 그리스의 네임드 명장.
피로스의 승리라는 용어로도 유명하다.

아이아키데스의 아들로 마케도니아 왕국로부터 에페이로스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진력했으며, 마케도니아 왕 데메트리오스 1세와 전쟁을 벌여 마케도니아와 테살리아의 태반을 빼앗았으나 리시마코스에게 격퇴당했고 여러 차례 로마군을 격파했다.

어려서 일리리아의 타우란티에서 부족장 글라우키아스의 손에 자랐으며, 13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얼마 뒤 추방되어 아테네로 피신했고 데메트리오스 1세를 따라 입소스 전투에 참여했지만 데메트리오스 1세가 패하면서 몰락하자 알렉산드리아에 볼모로 잡혀갔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와 인척관계를 맺어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지원을 받아 네오프톨레모스 2세를 쫓아내고 복위했다.

이후 에페이로스를 헬레니즘적 군주국으로 경영하며 마케도니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기원전 295년에 라나싸와 결혼해 시리아와 인척 관계를 맺고 코르키라 섬을 얻고 마케도니아 왕가의 내분을 틈타 서부 그리스에서의 영토 확장을 기도해 암브라키아, 아카마니아, 암필로키아 등을 얻었다. 기원전 291년에는 라나싸와 이혼하고 라나싸가 마케도니아의 왕 데메트리오스 1세가 라나싸와 결혼하면서 코르키라 섬이 데메트리오스 1세에게 넘어가자 전쟁을 벌여 승리해 마케도니아와 테살리아의 태반을 빼앗고 아이톨리아, 아테네와 동맹을 맺었지만 기원전 284년에 리시마코스에게 격퇴당했다.

기원전 280년에는 시칠리아의 타렌툼을 구원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나 헤라클레아에서 로마군을 격파했다. 기원전 279년에 아스쿨룸에서 로마군을 격파하고 시칠리아를 다니면서 카르타고군을 추격했으며, 기원전 276년에 이탈리아로 돌아와 다음해 베네벤툼에서 고전하다 에페이로스로 귀환했다.

기원전 273년에 마케도니아의 새로운 움직임에 대항하기 위해 펠로포네소스로 원정을 갔다가 클레오니모스의 요청에 따라 스파르타를 공격했다가 실패한 뒤 아르고스에서 아리스테아스, 아리스티푸스간의 다툼에 아리스테아스 측으로 참전했다. 이때 아리스티푸스 측으로 참전한 마케도니아의 왕 안티고노스 고나타스와 맞섰는데, 아르고스에서는 자신들의 땅이 폐허가 될 것을 우려해 다른 곳에서 전투하라고 요구했고, 이에 고나타스가 다른 곳으로 물러나자 피로스 1세는 그 틈을 타서 아르고스를 공격했다. 그러나 성문이 작아 전투용 코끼리들이 제대로 들어가지 못했고 아르고스 사람들이 저항하면서 고나타스에게 도움을 요청해 고나타스, 스파르타의 왕 아레오스의 공격을 받았다.

이들의 군사가 많은 것을 본 피로스는 성벽을 부수고 퇴각하려 했지만 전령이 아들 헬레노스에게 말을 잘못 전달해서 헬레노스의 군대는 성 안으로 진격하고 피로스 1세의 군대는 성 밖으로 나가려다 뒤엉켜 부대에 혼란이 일어났다. 피로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따르면 스파르타군을 치던 도중 피로스에게 아들이 죽을 위기에 처한(상대편 병사로 참전했다) 어머니가 지붕위에서 던진 기왓장에 헤드샷을 당해 부상을 입어 역시 아줌마는 강하다 말에서 낙마 했으며, 안티고나스의 병사인 조피로스에게 목이 잘렸다고 한다. 암살당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알렉산드로스 3세 이후로 가장 뛰어난 군사 전략가이자 지휘관이라는 칭호를 얻을 만큼 전략 전술에 뛰어났다. 한니발 바르카는 그를 알렉산드로스 3세 다음으로 뛰어난 명장이라고 평했으며 한니발 본인을 3위로 올렸다. 그러나 정치적 능력이나 전략적 식견은 좀 모자라서 적수[1]를 너무 많이 만들었고,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원정에서는 그나마 있던 동맹들도 배반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여러 전투에서는 승리하였으나, 목표였던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지배는 이루지 못하였다.

유명한 일화로는 부하와의 아래와 같은 대담이 있다.

오랜 원정에 지친 부하가 피로스에게 다음은 어디로 원정을 가느냐고 물었다. 부하의 질문에 피로스는 차례차례 대답을 했고, 그 대답의 끝은 세계를 정복하는 것으로 끝났다.

부하가 "세계를 정복한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라고 물어 보자, 피로스는 "보물을 잔뜩 전시한 궁전에서 미녀들과 진수성찬을 즐기면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는 거지."라고 답했다.

그러자 부하가 말했다."위대하신 피로스여, 지금 그렇게 하면 안되겠습니까?"[2]

그러나 피로스는 결국 부하의 충고를 듣지 않았고, 거듭된 전쟁으로 소모된 국력으로 인해 에페이로스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2 여담

당대 명사들의 영웅담을 기록한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전술의 귀재이긴 하나 실제로 이러한 활약상이 세세한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고 다만 당대에는 흔치않은 용맹과 과감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실제 그의 행보는 당대에 함께 인정되던 한니발과 알렉산드로스 같은 지장보단 몸소 앞에 나가 적의 사기를 꺾는 강력한 무장의 이미지가 강했다. 이 분?때문에 그가 어떤면에서 전술적으로 뛰어났는지는 명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다.

한니발은 그가 최초로 숙영지의 중요성을 자각한 장수였다고 언급한다.

흥미롭게도 피로스는 알렉산드로스 3세6촌 동생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에페이로스 왕족 출신. 알렉산더가 죽은 뒤에 태어났긴 했지만

로마와 전쟁을 할 당시 에피소드로 다음의 내용이 있다. 당시 피로스의 주치의는 불만을 품고 피로스를 배반해서, 로마 원로원을 찾아가 '내가 피로스를 독살하겠소. 대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 주시길 바라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로마 측은 피로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에 피로스는 감사를 표하며 로마군 포로 600여명을 석방해 주었다. 물론 피로스가 그 주치의를 그냥 내버려뒀을 리 없다.

이 로마군 포로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는데, 위의 독살 기도 사건이 벌어지기 전 피로스와 로마군은 전쟁을 중단하는 협상을 시도했다. 이 때 상호 협의에 따라 잠시 로마군 포로를 로마 측에 귀환시켰다. 만약 협상이 결렬될 경우 로마 측에서는 이 포로들을 다시 피로스에게 넘겨줘야 했다. 이 포로들은 로마 진영에 돌아와 가족과 친지들을 만났고, 결국 협상이 결렬[3]되자 한명도 빠짐없이 자발적으로 피로스 진영으로 돌아갔다.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따르면, 피로스의 오른쪽 엄지발가락에는 신기한 힘이 깃들어 있어 여러가지 기적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몇가지 예를 들면, 그가 엄지발가락으로 우울증 환자를 쓰다듬으면 즉시 환자가 완쾌했으며(!), 피로스가 죽었을 때, 그 시신을 화장했는데 오른쪽 엄지발가락만은 무슨 수를 써서도 태울 수 없어 작은 함에 담겨 한 신전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1. 로마, 카르타고,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국 기왓장 등.
  2. 이와 비슷한 줄거리를 가진 일화는 피로스 대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현대의 이름없는 유럽인 등을 주인공으로 해서 많이 알려져 있다.
  3. 처음부터 피로스가 제안했던 협상 내용이 로마에게 비교적 가혹한 편이었다.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에 대한 불가침을 준수하고, 그 중간지대에 잇는 삼니움족과 루카니아족을 독립시킬 것이 주 내용이었다. 이는 로마에게 이탈리아 남부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포기하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