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오위안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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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위안런(趙元任, Yuen Ren Chao / Zhào Yuánrèn, 1892년 ~ 1982년)

1 소개

중국어의 표음화에 노력한, 현대 중국어의 변천사에 큰 업적을 세운 천재 언어학자

첸쉐썬과 함께 중국이 낳은 희대의 천재

중국언어학자이자, 수학자중국어 표음화의 기틀을 닦은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비록 현재도 중국어는 그대로 한자로 표기하고 있으므로[1] 그의 꿈은 사실상 실패한 셈이었지만, 그래도 후술할 그의 업적인 국어라마자를 반면교사삼아 한어 병음 표기와 주음부호가 등장하여 현재까지 한자의 음성 기호로나마 쓰이고는 있으므로 어느 정도의 성공은 거둔 셈이었다.

2 생애

청나라 말기인 1892년톈진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장쑤 성 출신이었다가 톈진에 정착한 사람이었다.

자오위안런은 1910년강자북관장학금[2]의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미국코넬 대학교로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물리학수학을 전공하였다. 이 무렵에 그는 철학에 심취하기도 하여 하버드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그 이후, 언어학음악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때 그는 모국어인 중국어 이외에도 영어프랑스어, 독일어와 약간의 일본어는 물론, 고대 그리스어까지 능숙한 그야말로 당대의 먼치킨이었다.

1920년에는 중국으로 돌아가서 칭화대학에서 수학을 강의하다가 1년만에 돌아갔는데, 1925년에 다시 중국에 되돌아왔고 이때 생활의 발견의 저자로 유명한 린위탕과 함께 국어라마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언어유희 시인 시씨식사사도 이때 처음 발표했다(...). 당시에 중국어의 구어와 문어를 일치시키자는 운동인 백화문운동이 일어났는데 중국어 백화문은 로마자로 표기해도 괜찮지만, 전통 한문은 로마자로 표기하기에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일부러 성조만 다른 '스'(Shi) 음만으로 된 시를 지은 것이다. 덕분에 현대의 표준 중국어는 이 백화문을 중심으로 문어를 정리했다.

1920년에 물리학자인 양부웨이와 결혼하였고, 그 이후 중국에 정착해 살면서 이른바 신문화운동[3]에 열을 올렸다.

1938년에는 다시 미국으로 갔는데, 이때 하필이면 중일전쟁이 발발한 바람에 1945년까지 미국에서 돌아오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사이 자오위안런은 미국 언어학회의 학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이후로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1949년참새학살자마오쩌둥에 의해 중국이 공산화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자, 중화민국의 지지자였던 자오위안런은 귀국을 단념하고 미국에 정착했고, 1954년에 정식으로 미국에 귀화했다[4].

1966년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의 교수로 임용되자 이곳에서 언어학 연구에 매진하였고, 모국인 중국은 잠깐동안 몇번 방문하기만 했을 뿐, 끝내 중국으로 되돌아가지 않다가 1982년매사추세츠 주의 케임브리지에서 사망하였다.

3 기타

자오위안런은 언어학자로 유명하지만, 다른 분야에서도 비상한 재능을 보였다. 예를 들면, 철학수학에 관심이 많아 버트런드 러셀의 저서들을 중국어로 번역하기도 했고, 칭화대학의 강사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물리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몇몇 곡을 스스로 작곡하기도 했고, 예일 대학교하버드 대학교, 하와이 대학교 등을 돌면서 음악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문과, 이과, 예체능을 모두 섭렵한 후덜덜한 천재였다.
  1. 대륙 한정으로 정체자에서 간체자로 바뀌기는 했다.
  2. 의화단 운동을 계기로 창설된 장학금이었다.
  3.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구습들을 타파하려는 계몽운동이었다. 브나로드 운동의 중국 버전인 셈이었다.
  4. 다만, 죽을 때까지 중화민국 국적은 유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