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단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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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쟁"

義和團運動
Boxer Rebellion[1]

신(神)이 의화단을 돕는 이유는 도깨비 같은 놈들이 중국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그놈들은 기독교를 선전하고 다니면서 하늘을 모독하고 부처를 경배하지 않으며 조상을 돌보지 않는다. 철도를 부수고, 전선을 끊고, 커다란 기선을 파괴하자. 그렇게 하면 블란서(프랑스)는 간담이 서늘해질 것이고, 영국과 노서아(러시아)는 조용해질 것이다. 도깨비같은 놈들을 모두 죽여서 청나라의 평화를 축하하자.

의화단 선전물

1 개요

1899년 ~ 1901년 약 3년에 걸쳐 청나라의화단이 서구 열강 8개국 연합군과 벌인 국제전쟁. 외국에서는 '의화단의 난'이라며 부정적으로 보지만, 국내 학계에서는 "의화단 운동"이라고 칭하며, 높이 보는 편이다.[2]

2 배경

중국(청나라)은 아편전쟁의 패배와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와의 연이은 불평등조약 체결에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양무운동의 전개로 이러한 내리막길은 일시적으로 저지되었으나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하면서 막대한 배상금을 갚으면서 다시 몰락을 시작한다. 이런 혼란한 사회상황에서 유럽에서 들어온 새로운 종교인 그리스도교유교 등의 동양사상에 익숙한 중국인들에게 마음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중국을 침략하는 앞잡이로 받아들여졌고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반외세, 반서양 감정이 계속해서 번져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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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세력을 몰아내자는 의화단의 격문에 그려진 사저참양도 (射猪斬羊圖)[3]. 컬러 그림 & 출처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세력이 바로 의화단이었다. 소규모 지반이던 이들은 무술을 기반으로 하면서 종교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고 남아있던 백련교 세력과 결합하면서 큰 무리가 된다. 위안스카이가 강경한 진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의화단의 세력은 계속해서 번져나갔고 이들은 청의 사주를 받아 '청을 돕고 함께 양이들을 물리치자!'는 부청멸양(扶淸滅洋)을 구호로 내세웠고 외국인들이나 공사관에 공격을 가했다. 결국 188명의 서구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무참히 희생되었고 4만 5000명에 달하는 중국인 기독교인들마저 살해되었다.

이렇게 의화단의 계속되는 외국인 공격에 분개한 서구는 의화단의 진압을 요청했지만, 청나라 정부는 진압을 할 여력조차 없었으며 오히려 이들을 달래주면서 장기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려했다.

3 의화단의 만행

당시 의화단은 서양 여성과 기독교를 믿는 자국민 여성을 붙잡으면 곧바로 옷을 벗기고 돌아가면서 윤간을 한 뒤 산 채로 땅에 묻어 죽였다. 특히 서양인에 대한 증오가 강했던 의화단은 서양 여성의 경우 좌용(锉舂)이라고 하여 윤간 이후 성기를 짓뭉개는 등 각종 끔찍한 처벌을 한 후 죽였다. 이후 외국 공관이 의화단에 포위당했을 때 피신해있던 서양 여성들은 이미 의화단의 만행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자살을 준비할 정도였다.더구나 양인 여자 1명을 죽이면 은 50냥을, 양인 아이 1명을 죽이면 30냥을 상금으로 주었는데 이런 상금을 받기 위해 기존 의화단 단원만이 아니라 중국인들까지 도처에서 살인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서양제 성냥이나 연필을 쓴다는 이유로 일가족을 몰살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4 청나라의 선전포고

청의 소극적인 태도에 영국 등 열강들은 자체적으로라도 병력을 동원해 의화단을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시모어를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병력을 베이징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그러나 청은 군을 동원해 이들이 베이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고, 청의 조정에서는 회의 끝에 서양과 강화하자는 광서제의 의견을 묵살하고 서태후가 의화단과 손을 잡기로 결정한다.

청 조정은 1900년 6월 21일에 서양과 전쟁상태에 들어갔음을 포고하고[4] 베이징에 있는 외국인 지역을 포위한 후 이미 의화단의 대규모 무장폭동이 일어난 텐진에서 안전을 위해 24시간 이내에 떠나라고 권고한다. 독일 공사 클레멘스 폰 케텔러는 이에 항의하러 가다 만주인 엔 하이가 지휘하는 의화단 무리의 공격을 받고 살해당했다.[5] 이에 독일 공사관을 경비하던 독일 해군 육전대원들이 보복이랍시고 청나라 외무아문(외교부)에 쳐들어가 기물을 파손하고 공무원들을 잡아 팼다고 한다(...). 또한 일본 공사관의 스기야마 아키라 서기도 의화단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한편 베이징에도 의화단이 일어나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외국인들이 살해당하고 있었고 이들은 안전을 위해 외국인 지구로 도망쳐 약 4,000여명이 외국인 지구에 갇히게 된다. 중국 정부는 자신들의 군대로 호위해서 텐진으로 보내주겠다고 했으나 안전을 우려한 외국인 지구 측에서 이를 거부했고 중국 정부는 이들에게 음식 등을 제공해 주었고 공격도 중단하였다.

5 8개국 연합군 결성과 베이징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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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국 연합군과 교전하는 의화단)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분노한 열강은 연합군을 조직해 청과 맞설 것을 결의한다. 자그만치 지상병력만 4만 8천으로, 대영제국(+영국령 인도 제국)-독일제국-프랑스-러시아 제국-미합중국-일본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탈리아 왕국 8개국이 연합군을 결성해 청을 손봐주기로 결정하였다! 중국 때려잡는 열강 어벤져스(...)

당시 서구 열강들끼리도 경쟁 대립 구도, 혹은 적대 구도가 있어서 "그레이트 게임"(영국 ↔ 러시아)이라든지 "비스마르크 체제"(프랑스 ↔ 독일 + 오-헝 + 이탈리아), 영국 ↔ 프랑스(파쇼다 사건), 러시아 ↔ 오스트리아-헝가리 등의 분쟁이 빈번했는데[6] 이 모든 나라가 참가했다! 흠좀무. 이걸 어디서많이 봤는데....

이중 주력은 일본군(해군육전대 포함 21,000명)과 러시아군(수병연대 포함 13,000명), 그리고 영국군(해병대 포함 12,000명)이었으며, 여기에 프랑스군미군이 각각 3,000명, 독일군이 해군 보병과 육군을 포함 900명, 이탈리아군해군 함정과 육군의 베르살리에리 연대[7]를, 오스트리아는 해군 함정만 파견하고 각 함정의 육전대원을 모아 중대 이하 규모로 명목상의 지상군을 편성해서 독일군 또는 영국군 지휘 하에 들어갔다.

한가지 좀 우스운 일화로 나중에 8개국 연합군이 북경에 입성했을 때 베르살리에리 연대는 언제나 걷지 않고 뛴다는 관습에 따라 구보로 입성했다고 한다. 따라서 베르살리에리 나팔수들은 뛰면서 나팔을 불었다.(…) 얘네는 요즘도 뛰면서 나팔을 분다. 이건 북경의 55일에도 구현되어있다.

원정군 사령관은 병력의 규모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국 외교관이 피살된 독일에서 맡아, 총사령관으로는 독일군 참모본부 참모총장을 지낸 독일육군 제3군 사령관 알프레트 폰 발데르제 육군 원수가 임명되었다.[8]


텐진을 함락하고 있는 연합군

한편 동남지방의 청나라 원로 관료들은 동남자보선언으로 의화단의 세력 확대를 저지하였다고 이에 군사력을 집중할수 있게된 열강은 텐진을 공격해 함락했다. 애초에 이홍장, 위안스카이 등의 청의 군벌들이나 지도층 대부분은 의화단을 진압해야 할 토적으로 보았지 손을 잡을 상대로 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의화단과 손을 잡으라는 서태후의 명령을 소식을 못 들은 것처럼 행동하거나 태후마마가 내린 명령은 의화단이나 그들과 손잡은 간신배들의 수작이니 조작된 것이거나 감언이설에 넘어가 상황을 오판하고 내린 명령임이 분명하므로 따를 이유가 없다는 이유를 대며 의화단을 저지하는 판이었다.

이후 연합군 내에서 서로간의 이해득실을 계산하느라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9] 다시 베이징으로 진격했다. 연합군을 상대로 청, 의화단 군대는 계속해서 패배했다. 연합군의 진격을 막기에는 청군과 의화단의 무장이나 조직력은 형편이 없었다. 역시 무술이고 뭐고 총 앞에는 장사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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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자금성에 입성하는 연합군

결국 선전포고한지 두 달도 채 넘기기 전인 8월 13일에 베이징은 연합군에게 함락당한다(제2차 아편전쟁 이후 두번째). 서태후와 광서제는 간신히 도망치는데[10], 서태후는 수도에 남아 강화하려는 광서제를 반강제로 대동하고 15일에 베이징을 빠져나와 서안(장안=시안)으로 도망쳤다. 임자 없는 베이징은 혼돈상태가 되었고 연합군은 의화단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을 감행하였다.[11] 수많은 중국인들이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고 베이징의 이화원 등 많은 건물들이 약탈당하거나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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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8개 연합국의 병사/수병들을 대표로 차출해 사진을 찍은 것. 왼쪽부터 영국 육군, 미 육군, 러시아 해군, 영국령 인도 육군, 독일 육군, 프랑스 육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이탈리아 육군, 일본 육군. 도 도 시 라 라 솔 솔 솔 파키가 왜이래

6 전쟁의 종결과 결과

결국 청 정부는 화친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열강들은 의화단에 의해 희생된 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배상할 것과 의화단과 의화단과 관련된 관리들의 처벌 및 진압 등을 요구했고 청 정부는 그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특히 독일은 외교관이 사망한 것 때문에 선통제의 생부인 순친왕이 독일에 가서 카이저 빌헬름 2세에게 사죄해야 했다.[12]

이후 열강은 신축조약을 체결해 중국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키고 철도를 장악했으며 많은 영토와 이권을 떼어갔다. 그리고 서태후는 자기가 일 다 저질러놓고도 의화단에게 패배의 책임을 다 뒤집어씌워 숙청하였다.

연합군은 대승을 거뒀지만 내부에서는 계속되는 잡음이 있었다. 러시아의 계속된 세력확장은 영국 등 다른 나라에게 위협으로 다가왔고 전쟁 내내 이러한 문제로 잡음이 계속되었다. 특히 러시아군은 이 시기 만주에 출격하여 만주 일대를 점령하고 극동총독부를 설치하여 10만이 넘는 병력을 배치해 일본에게 불안감을 심어줬고 더 나아가서 연해주처럼 흑룡강성 및 하얼빈의 북만주, 위구르, 내외몽골을 전부 병탄하여 송화강-고비사막을 러시아-청의 경계[13]로 삼으려고 하였으며 이는 러일전쟁의 불씨가 된다.

일본은 의화단 운동을 빌미로 복건성을 식민지화하려고 하문 침공 사태를 일으켰지만 서양 열강의 강력한 철수 요구로 인해서 중국에 교두보를 마련하는데는 실패했고 서양 열강의 주구, 극동의 헌병이란 제2의 식민제국이라는 명칭들을 얻었다. 이에 분개한 일본은 상당히 만만한 조선을 병합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는다.[14]

7 의의

청은 이 전쟁의 패전으로 사실상 반 식민지 상태가 된다. 게다가 '주술로 총을 막으려는 의화단'의 이미지는 중국의 후진성을 상징하며 서양의 조롱을 받았고 중국을 열등하고 미개한 나라로 업신여기던 풍조를 완전히 고착화해버린다. 그러나 열강은 의화단 전쟁에서 중국의 대륙의 기상 광대함에 경악했고[15][16] 대부분의 열강은 중국을 다른 나라처럼 힘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식민지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의 세력확장을 멈추고 청에게서 이권만 뜯어내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게 된다. 이 덕분에 중국은 다른 식민지들과 달리 영토가 사분오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한편 일본은 기어이 그 욕심을 못버리고 중일전쟁을(...)

그러나 의화단 전쟁의 패배로 지식층은 물론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도 이대로는 안된다는 절박한 의식이 자리잡게 된다. 지식층들은 서구 문물을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한편 사실상 서구의 바지사장으로 전락해버린 청 정부에 대한 회의와 실망감이 늘면서 한족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가 대두되었고 결국 이는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는 밑바탕이 된다.

8 기타

  • 의화단의 난을 다룬 영화로 미국에서 제작한 《북경의 55일》(55 Days At Peking, 1963)과 장철 감독이 대만군의 지원을 받아 제작한 《팔국련군》이란 영화가 있다. 《북경의 55일》은 서양 쪽 시각으로 다룬 영화로, 찰턴 헤스턴, 데이비드 니븐 같은 당대의 명배우들이 출연하는데, 의화단의 난에 대해 매우 오리엔탈리즘 시각으로 그려져있다. 반대로 대만[17]에서 제작한 《팔국련군》은 서양 열강들의 만행을 생생히 그리고 있으며 의화단 전쟁에 대해 시각적인 고증오류만 어떻게 감당한다면 개략적이나마 알 수 있다. 또한 서태후의 악행과 청조의 무능함도 적나라하게 표현 되었는데, 이점이 대만 국민당 정부의 심기를 거슬려 검열에서 난도질을 당했으며 제목도 <팔국련군>에서 <신권3장사> 라는 제목으로 바뀌어서 개봉 되었다. 당연히 영화는 흥행에서도 실패하였는데, 장철은 자신이 아끼던, 심혈을 기울였던 영화의 이러한 비극에 대해 안타까운 심경을 자신의 회고록에 고백하기도 하였다. 아이러니 한건 장철은 젊은 시절에, 국민당이 대만으로 쫓겨가기 이전에 국민당 정부에서 문화, 선전, 영화 분야에서 일했었기 때문에.[18] 국민당 인사들과 친분이 있었다는 것이다.[19] 다행히 천영오락에서 쇼브라더스 영화들을 DVD로 출시할때는 검열에 영향을 받지 않은 원본으로 출시가 되었다.
  •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는 중 러시아 제국고종에게 참전할 것을 제의했으나 고종은 거절했다. 설사 참전했더라도 당시 대한제국은 국경을 넘어오는 의화단을 막는 것도 버거워했기 때문에 큰 활약을 펼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욱이 차후엔 시간이 흘러 연합군의 승전이 확실시 되자 고종이 직접 뒤늦게 일본 공사를 통해 참전 의사를 피력했으나, 일본 공사는 대한제국군의 비리비리한 전력을 들어 단칼에 거절해버렸다.
  • 게임 바이오쇼크 인피니트에서는 등장인물 코르넬리우스 슬레이트가 참전했다. 그리고 공중도시 컬럼비아가 마구 포격을 퍼부어 많은 사상자를 냈다는 설정이다. 이후 컬럼비아는 미국의 제재를 피해 독립하게 된다.
  • 미국의 대통령을 역임하는 허버트 후버가 포위된 거류민들 사이에 있었다.
  •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인공인 폰 트랍 해군 중령이 이때 오스트리아 해군 육전대로 참전한 경력이 있다. 당시에는 사관후보생.
  •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에서 재평가를 받아서 관련 연극이 만들어졌다.
  • 호소자 5편이란 제목으로 한국에 개봉[20]하던 대만 코믹 영화 '만능 운동원 (萬能運動員 1988년작)'에서는 20세기 초 혼란스러웠던 중국을 배경으로 한 코믹한 국제 운동회 올림픽을 배경으로 하는데, 인트로에서 짧게 의화단의 난이 언급된다. 물론 코믹영화이기때문에 많이 희화화되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의화단원들은 웃통을 벗고 중국의 슈퍼맨이라는 팻말을 들면서 연합국 군인을 도발하다가, 오히려 공포탄 쏘는 소리만 듣고 도망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 황비홍 2에서 다뤄지는 사건이 바로 의화단 사건이다. 만, 홍콩영화인데 주적으로 나오는게 미묘하다. 당시 홍콩이 영국 식민지긴 했지만 영국 역시 중국을 침공한 터라 결코 좋게 봐줄 게 없으니.
  • 중국계 미국인인 진루엔 양이 만화로 그린 적이 있다. 의화단 소녀의 전쟁(1부)과 소년의 전쟁(2부) 특이하게도 진짜 사건과 판타지(주인공들이 신의 힘을 빌려 서양인들과 싸운다)가 섞여있다. 주인공이 기도하고 부적을 태워 재를먹어 신의 힘을 빌리지만 결국 마지막엔 몰살당한다. 신의 힘을 빌린다 해도 총칼에 맞으면 바로 사망하는걸 보니 아마 망상인지 진짜인지는 불명
  1. 의화단원들이 권법을 중시하는 것을 보고 외국인 선교사들이 권투선수(boxer) 같다고 한 데서 온 것. 바이오쇼크 인피니트의 스팀판 공식 한국어 번역에서는 '중국인 권투선수 반란'으로 번역되어 유저들을 데꿀멍시켰다.
  2. 현행 교과서, 모의고사, 수특 등에서도 죄다 운동이라고 나온다.
  3. 그림에 있는 십자가에 매달린 채 화살을 잔뜩 맞은 돼지는 예수를, 목이 베이는 은 서양 세력을 뜻한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신을 가리키는 '주(主)'와 '돼지 저(猪)' 자, 서양을 가리키는 '양(洋)'과 '양 (羊)' 자가 중국어 발음 상 같기 때문이다. 어린 양 다 죽네
  4. 선전포고라고 착각하는 이때의 선전상유는 국내용이었다.
  5. 엔 하이는 케틀러의 가죽을 벗기고 그의 심장을 먹었다고 한다. 의화단이 진압된 이후 그는 독일군에게 잡혀 참수형에 처해졌다.
  6. 심지어는 이 같은 구도에 섰던 국가도 100% 같은 편은 아니었고 경쟁과 이해득실을 가리고 있었다.
  7. 제2차 세계대전 때 닭털 꽂고 다니기로 유명했던 바로 그 정예 부대다.
  8. 그가 부임도 하기 전에 일단 청 정부는 연합군에 굴복했으나, 이후 1년간 중국에 주둔하면서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단, 그가 사실상의 전제군주인 독일 황제(카이저)의 신하이며 백작 작위를 소유한 귀족이라는 이유로 프랑스군과 미군은 그의 지휘를 받는 것을 거부했다.
  9. 러시아는 이때 만주를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동원하는 등 세력확장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에 영국 등 다른 열강들의 집중 견제를 받았다.
  10. 이 과정에서 광서제가 총애한 후궁인 진비가 죽었다. 전후 조정의 공식입장은 '후궁까지 챙기기 어려운 다급한 상황에서 정절을 위협받은 진비가 스스로 우물에 몸을 던진 것'이었다. 그러나 현장에 있었던 태감과 궁녀들의 증언에 따르면 무술정변 이후 유폐되었던 진비가 서태후 앞으로 끌려왔을 때 황제는 피난하지 말고 연합군과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에 격노한 서태후가 태감 최옥귀에게 명령해 진비를 우물에 밀어넣었다. 상황이 다급해 후궁까지 챙기기 어려웠다는 조정의 입장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서안 피난길에 대동한 여성 중 진비의 자매이자 광서제의 후궁인 근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11. 독일 대사를 죽인 것으로 알려진 만주인 황족(?)은 독일군에 잡혀 그들의 손에 참수되었다고 한다. 또한 영화 팔국연군을 보면 의화단 포로들이 일본군의 손에 일제히 참수되는 것(19세 장면은 없음..)을 볼수있다.
  12. 본래 독일은 청나라가 역사적으로 피정복국에 강요했던 예절이었던 그 삼베구고두로 독일 황제에게 예를 표하라고 했지만 청측의 로비로 다른 사죄 표현으로 면할 수 있었다.
  13. 러시아의 야심이 실행되었더라면 중국의 국경은 명나라 초기 떄로 축소되었을 것이다.
  14. 흔히 일본이 조선을 먹으려고 환장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일본은 조선을 어떻게 처리할까를 놓고 왈가왈부가 많았다. 조선의 전략적 이점상 조선에 일본의 이권이 관철되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일본에서 이견이 없었으니 식민지화를 할지 보호국화를 할지 친일정부를 수립할지를 두고는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병합만 해도 조선에 자체적 의회와 왕실을 두고 독일제국-여러 영방국가들의 모델을 따르는 방식등이 논의되기도 했고 야마가타 아리토모처럼 조선왕실을 페지하고 단순한 식민지로 만들자는 주장까지 여러 주장이 병립했다. 결론적으론 조선왕실을 우대하지만 조선은 단순한 식민지 취급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15. 앞서 말했듯 의화단의 세력 확산은 저지된 상황에서도 중국의 넓은 땅과 인구로 인해 여기저기서 봉기가 일어났고 얼마 되지 않는 열강의 군대로는 그 넓고 인구가 많은 지역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16. 비슷한 크기를 가진 인도를 생각해서 의아하게 여길수도 있지만 인도는 지방분권적 성향이 강해서 각지의 라자를 회유하고 지역종교감정만 조절하면 지배의 어려움이 없었지만 중국은 통일된 국가로 유지된 기간이 길고 넓은 지역을 유지시켜줄 정체성이 있었다는 상황이 달랐다. 그리고 지방분권적 인도마저도 하나의 인도라는 정체성이 생긴이후 식민지배가 힘들어지고 결국 독립하게 되었다.
  17. 장철 감독이 대만에서 '장궁전영공사'라는 자신의 영화사를 세웠으나 사실상 홍콩의 쇼브라더스의 자회사 였으며 당연히 영화의 제작비도 쇼브라더스에서 댔다.
  18. 이 때 영화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고, 이를 계기로 장철은 영화감독이 된다.
  19. 장경국의 심복이었던 장도번의 막하에서 일을 하며 장경국과 장도번에게 인정을 받았었지만, 한편으로는 장철을 질시하는 세력들도 있었는데, 우선 당시 장철의 나이가 20대 중후반으로 어렸었고, 또 당시에는 모든 공무원들은 중국 국민당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는 막장스러운 법이 있었는데, 장철은 국민당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뒷말이 많았었다고 한다.
  20. 호소자에 나온 세 아역배우가 나왔기에 이런 제목으로 개봉했지만 문제는 호소자 1편 오프닝을 무단으로 삽입하여 억지 호소자 시리즈로 만들어버렸다...